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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양오행을 과학이랄 수 있는가?
(과학사상 1993. 봄여름호) 

* 이 글은 도올 김용옥선생이 과학사상 1993년 봄여름호에 권두논문으로 쓴 글이다

지난 3월 6일 밤 나는 여의도로 가는 자동차간에서 필립 코노와 재미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나는 이날 코너와 예술의 전당에서 플룩수스 공연을 했다. 럿커스대학의 교수로 은퇴한 코너(Philip Corner, 1933 ∼)는 백남준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진 플룩수스 운동의 대표주자 중의 한 사람이며 현대음악의 특이한 영역을 개척하여 구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플룩수스(Fluxus)란 헤라클레이토스의 플럭스(Flux)를 연상해 보면 그 어원적 의미를 확연히 알 수 있듯이, 어떤 고정적 룰을 거부하며 가능한 소리(noise)를 모두 음악의 대상으로 삼으며 또 때로는 디컨스트럭션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예술운동이다. 이 날 딕 히긴스(Dick Higgins)와 제프리 헨드릭스(Geoffrey Hendricks)의 공연이 있었고 코너와 나는 플룩수스와 오랜 교분은 없지만 내가 최근에 펴낸 책《石濤畵論》속에서 백남준의 예술과 그가 속한 플룩수스의 역사적ㆍ철학적 성격을 논구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들과 인연이 생겼다. 그들이 추구하는 임의성(randomness)은 《周易》에 뿌리를 둔 것이고, 그들의 아나키즘은 老子의 ‘無爲’에서 그 근거를 찾은 것이다.

코너는 나에게 요즈음 자기 유럽친구들이 14음계음악이나 25음계음악이니 하고 컴퓨터로 작곡하고 또 세밀한 음을 합성해 내곤 하는데 다 개지랄 같은 것이라고 했다. 자기는 한국사람들의 5음계음악이 훨씬 더 심플하고 듣기 좋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컨템퍼러리 전위음악에 달통한 그로서는 서양의 전위적 시도를 좋아할 것 같은데 한국의 전통 5음계를 좋다고 말하는 그의 태도는 나에겐 약간 의외였다.

아무 줄이나 팽팽하게 해놓고 두 점을 고정시키고 튕기는 소리에 대하여, 그 반을 잡고 튕기면 항상 정확하게 한 옥타브가 올라간다. 다시 말해서 한 옥타브의 음가란 인간이 인위적으로 정한 것이 아니라 자연의 질서(the Order of Nature)이며, 이 자연의 질서란 제일성(Uniformity)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東이나 西, 古와 今을 가리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아프리카에서나 잉글랜드에서나 제주도에서나 모두 이 옥타브라는 음가는 不變의 절대치다.

그런데 음계란 이 옥타브라는 음가를 나누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이 음가를 다섯으로 나누면 5음계요, 일곱으로 나누면 7음계요, 스물다섯개로 나누면 25음계다. 그러나 음악이란 명백한 또 하나의 전제를 가지고 있으니 그것은 사람의 ‘귀(Ear)’라는 것이다. 귀란 고막(tympanium)과 중이, 내이 등으로 구성된 진동과 증폭과 신경전달장치인데, 이 귀(auditory system)에 의하여 분별가능한 비율의 소리를 인류는 음계로 채택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 제한된 음가를 많이 나누면 나룰수록 정교한 음악이 될 것이 같지만, 사실 5음계음악이라 해서 그 다섯 배가 세밀한 25음계 음악보다 덜 복잡하고 따라서 유치한 음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인간의 가칭성(audibility)은 분명 생리적 한계가 있는 것이며 5음계로 이루어진 음악이라 할 지라도 무궁하게 복잡한 멜로디나 리듬이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우리의 논의를 쉽게 해본다면, 베토밴의 바이올린 콘체르토나 김소희의 창이나, 그것이 7음계에 기초했건 5음계에 기초했건, 하여튼 음악은 다 같은 음악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동굴 속에서 타악기를 두드렸던 원시인이나, 바로크 궁전에서 정교한 바이올린을 켜는 근세유럽의 악사나, 컴퓨터로 둘러싸인 스튜디오에서 정교한 음악을 만들어 내고 있는 현대음악 작곡가나, 인간의 청각이라는 절대적 한계를 전제로 하고 있고, 또 청각 그 자체의 가청성은 음의 진화를 따라가지 않는 무진화적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나는 과학이라는 것을 제대로 공부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과학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 더구나 중ㆍ고시절에 수학을 모조리 빵점만 받은 경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지금 아무리 과학공부를 하고 싶어도 과학을 이해할 수 있는 기초가 없다. 그래서 사실 나는 음양오행이 과학이냐 아니냐를 따질 자격이 없다. 과학이 뭔지를 정확히 알아야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기준이 설 수 있을텐데, 나에겐 그 정확한 기준, 즉 ‘과학관’이 부재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글을 쓸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런데 나의 장형 김용준이 과학사상이라는 잡지의 편집인이라서 나에게 쓸 수 없는 글을 강요한 것이다. 조르고 졸라 거의 강압적으로 쓰라고 했다. 그래서 쓰고 싶지 않은 글을 억지로 쓴다. 나는 여태까지 쓰고 싶지 않은 글, 남에게 부탁받아 쓰는 글, 써서는 안 되는 글을 써 본 적이 없다. 이 글은 아마 내 인생에서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쓰는 강요된 글, 쓰고 싶지 않은 글이 될 것이다. 하룻밤을 지새우며, 노모가 눈물겨웁게 부탁하시는 조상비문 쓰는 일도 미뤄놓고 억지로 붓을 옮긴다. 독자들에게 미안할 뿐이다.

한의과 대학을 다녀보니, 학교 커리큘럼에서 무분별하게 던져지는 강의 내용이 그것을 수강하는 동일한 실체인 나에게 과연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 지를 형량할 수조차 없는 사이에 넘어가 버린다. 화학개론시간이나 생화학시간에는 아톰에 대해서 배우고 주기율표에 대해서 배우고 또 단백질의 3차구조에 대해서 배운다. 그리고 한의학원전시간엔 오행에 대해서 배우고 한방생리나 병리시간엔 오행에 의한 장상(臟象)이론에 관해 배운다. 이 양자를 배우는 시점은 모두 20세기 최종 데케이드며, 또 가장 최신의 후마니타스 교육체제 내에서 현시과학이론으로서 양자를 같이 배우고 있는 것이다. 고등학교만 나온 한의대생들이 비록 커트라인을 300이 넘어다고 하지만 수소니 우라늄 운운하는 100여 개의 원자와 금ㆍ목ㆍ수ㆍ화ㆍ토라 하는 다섯 개의 오행의 문제를 도대체 어떻게 동일한 의과학(Medical Science)이라는 장(field)속에서 받아들이고 해석하고 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아마 그들은 나보다는 갈등을 느끼지 않는 진화된 천재들일 것이다. 호모사피엔스는 네안데르탈인 이후로도 꾸준히 진화하고 있으니깐-.

인류가 우발적인 계기로 언어를 갖게 되었고 , 언어를 갖게 된 이후로는 즉 대뇌피질의 언어중추가 발달된 이후로는 어떠한 개념을 통하여 자기가 살고있는 세계 (Environment=World=Welt)를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을 지니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나타난 우주는 무지하게 복잡한 것이었다. 복잡(complexity)의 극치는 혼돈(choas)이다. 혼돈이란 ‘언어 이전(pre logicality)’이다. 혼돈 속엔 논리가 있을 수 없고 느낌(Feeling)만 있다.

그런데 이 혼돈을 깨고 나온 것이 언어요.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언어의 발생 이후에도 역시 우주는 매우 복잡하게 나타났다. 나무를 나무라 했어도 나무라는 개념으로 다 규정해 버릴 수 었는 나무의 실상(實相)이 있다. 현상(apperance)은 개념으로 다 정리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이 복잡한 것을 단순한 것으로 환원시켜 설명하려는 노력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선 유일한 방법이었다. 즉 복잡한 것을 단순한 것으로 환원시키는 방법 이외의 딴 방법으로는 자기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설명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이러한 모든 생각의 방향을 통틀어서 환원주의(Reductionism)라고 부른다.

그러니깐 화학개론시간에 화학선생님이 가르쳐주시는 주기율표 속의 103개의 원자나 한의학 원전시간에 한방선생님이 가르쳐주시는 5개의 행(行)이나 나는 모두 내가 말하는 환원주의의 소산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한의대 수업 받는 책상머리에 앉아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이런 생각은 내가 워낙 무지하기 때문에 해 본 생각일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103개로 환원시켜 설명하는 발상에 과학(science)이라는 말을 서슴치 않고 붙일 수 있다고 한다면, 그와 같은 동일한 논리에 의하여 이 세계를 5개로 환원시켜 설명하는 발상도 서슴치 않고 과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5음계로 짓든 25음계로 짓든 다 음악은 음악이지 않는가? 그러나 실상 이런 말을 정당화(justification)하는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최소한 이 세계를 103개로 환원시켜 설명하는 발상을 뒷받침하고 있는 인식의 구조를 재배하는 논리에 상응되는 논리가 5행에 있어서도 마련되어 있지 않으면 그것은 금방 비과학(pseudo-science)으로 간주되어 버리고 만다. 현대인들은, 그리고 최소한 이 글을 읽는 고명하신 지식인들은 그렇게 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5행을 말하는 자들은 매우 설득하기에 이미 불리한 대상을 갖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앞의 문장에서 ‘논리에 상응되는 논리’라 한 구절의 ‘상응성’의 실내용이 과연 무엇인지, 그 정도를 가늠질하기가 매우 어렵다. 한 논리를 구성하는 요소는 신택스나 시맨틱스, 모폴로지, 포놀로지, 그리고 세미오틱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측면이 있을텐데, 단순히 신택스(통사론)만을 가지고 얘기한다면 몰라도 그 이상을 넘어 시맨틱스(의미론) 등등까지 운운케된다면, 즉 그 상응성의 구조가 한 문장을 구성하는 어휘의 의미에까지 미치게 된다면, 사실 이 양자의 과학을 상응시키는 작업은 실제로 블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더 싑게 말하면 103개 아톰의 논리를 구성하는 어휘와 같은 어휘로써 5행을 말해야 과학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상응성(correspondence)이라고 말한다면, 사실 나는 이 글을 써야 할 하등의 이유를 발견치 않는다. 그 이상으로 넘어가 버리면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언어의 권력의 문제가 되어 버릴 것이며, 과학 자체의 정치성의 영역이 되어 버릴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치란 쎈놈이 왕땅이다. 과학적 진리도 쎈놈이 말 많이 하면 진리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과학’이라고 부르는 인식체계에 적응되어 있는 인식구조를 지닌 다수가 존재하는 세계에선 그 이외의 인식은 비과학으로 되어버릴 수 밖에 없는 것이며, 이 비과학이 어떤 어휘를 구사하든지간에 그것은 과학에 상응하는 어떤 논리로 받아들여질 수가 없을 것이다. 최소한 나는 이 《과학사상》잡지의 독자들은 그런 무지막지한 사람들은 아닐 것이라는 희망 때문에 이 글을 쓴다.


그런데 내가 이런 으름짱을 놓기 전에 이미 사계에 정통하고 있는 과학자들이나 과학사가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현대 생화학이나 분자생물학이 말하는 핵산이나 단백의 원자ㆍ분자를 어떻게 한의학이 말하는 5행과 동일한 과학의 디멘젼에 가져다 놓을 수 있는가? 서양에서도 이미 존 달톤(John Dalton, 1766∼1844)이 근대적 원자론(morden atomism)을 확립하기이전에 로마의 루크레티우스(Lucretius)라든가 희랍의 레우키푸스(Leucippus)나 데모크리투스(Democritus)가 철학적으로 원자론을 다 정립해놓았고, 5행이란 기껐해야 그 원자론 이전의 엠페도클레스의 4원소설 단계의 것일 뿐이며, 엠페도클레스의 4행설 이전에는 탈레스의 水1행설까지 올라갈 판이다.
그렇다면 5행이론과 단백의 분자구조를 동일과학의 차원에서 얘기한다는 것은, 동ㆍ서로 얘기할 필요가 없이, 서ㆍ서로 얘기해도 왓슨과 트릭의 혤릭스구조를 엠페도클렉스의 네뿌리(Four Roots)설과 같은 차원의 과학으로 얘기하라는 꼴이 될 것이니 어디 말이나 될 얘긴가? 철학도들의 형이상학적 달변으로는 적당히 구라가 통할지 모르겠으나 우리 과학도들의 입장에선 엠페도클레스의 프레그먼트를 크릭의 연구논문과 같이 취급하라는 것이니 도무지 얘기가 되지 않는다. 이러한 논박은 사실 매우 정당한 것이며 또 매우 상식적인 것이며, 누구든지 이러한 논의에 대하여 정확한 답변을 하지 못한다면 오행의 과학성은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입증될 길이 없을 것이다. 즉 음양오행 운운하는 것은 별종의 과학(a different Kind of science)이 아니라, 전근대적 과학 즉 과학 이전의 지식체계에(pre-scientific knowledge)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반론에 적극 찬동한다. 허나 이러한 반론의 주창자들이 얼마나 무식한 자들인가 하는 것을 나는 동시에 알고 있기 때문에 항상 가슴이 갑갑한 것이다.


불란서의 현대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는 불의 정신분석 등의 저술을 통해, 그 자신이 화학 물리에 정통한 현대과학의 소양을 지녔으면서도 엠페도클레스의 4원소설적 세계관을 회복하는 길만이 인류를 현대과학의 폭력으로부터 구원하는 길이라고 외쳤다. 허나 나는 지금 치사하게 바슐라르의 엠페도클레스적의 세계관의 정당성 주장을 빌어 간접적으로 오행적 세계관의 정당성을 입증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5행관이 엠페도클레스의 4원소설과는 얼마나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며, 다른 인식론적 기반 위에서 있느냐 하는 것에 관한 것일 따름이다. 엠페도클레스의 4원소설은 바슐라르가 회복되어야 할 것으로 외치고 있는 골동품일 뿐인데, 어떻게 5행은 아직도 당당히 20세기 길거리에서 하나의 과학으로서 외쳐지고 있는가?

다시 말해서 어떻게 해서 엠페도클레스는 후대의 이론에 의해서 부정당하고 무당짓거리 고대사상으로만 남아 있는데 반해, 5행은 20세기에도 동아시아 문명권에서만 아니라 구미 문명권 속에서조차 한의과대학이라고 하는 체제를 유지하는 정도의 지속력을 가질 수 있느냐? 하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허나 우리는 바슐라르를 읽을 때 다음과 같은 그의 착상에 주의를 요할 필요한 있다. 그가 말하려는 것은 현대과학을 버리고 엠페도클레스의 地ㆍ水ㆍ火ㆍ風에로 복귀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火를 일례로 들자면, 우리가 지금 보통 불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보자! ‘불’은 언어다, 즉 언어적 개념이다. 이 언어는 지칭하는 대상성을 갖는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는 사물의 지도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지도의 모습은 우리의 인식이나 관념의 변천에 따라 역사적으로(diachronically) 변한다는 것은 누구든지 아는 것이다.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1857∼1913)는 불행하게도 현대 언어학의 대상으로서 언어의 통시적 구조를 제외시키고 공시적 구조만을 문제삼았지만, 우리의 논의에 있어선 통시적 구조야말로 관심의 대상이 아니 될 수 없다.

사실 우리는 상식적으로 불(fire)이라 하면 밥해먹을 때 태우는 가스불이나 소방서차가 와서 끄는 활활 타는 불, 성냥으로 그어대어 일어나는 불, 그런 불만을 불이라고 외연적으로 지칭하고 있지만 이러한 불에 대한 인식은 이미 불이라는 우리의 언어를 규정하고 있는 세계관의 소산일 뿐이며, 이러한 불의 상식적 규정은 과학적 엄밀성이라는 근대 세계관적 그리고 광물학적 화학적 인식에 의하여 끊임없이 그 외연이 축소되어 온 결과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리의 언어를 살펴보면, ‘불같은 정열’이라고 할 때 정열로서의 불이라든가, ‘울화가 치민다’라고 할 때의 화라든가, ‘화가 났다’ ‘홧병이 났다’라고 할 때의 화, 그러한 불을 저기 활활 타는 불과 같은 실체로서 파악하는 능력을 어느 시절엔가 상실해 버림으로써 과학이라는 어떤 면허증을 땄을지도 모른다. 허나 고대인들의 언어의 지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같은 불이라는 말이라 할지라도 그 외연이나 내연이 모두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지도(topology)가 다르다는 것은 지도제작기술이 변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곧 인식의 방법(epistemology)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저기 벽난로에서 훨훨 타는 불을, 격렬한 산화(oxidation)작용의 표현이라고 한다면, 원자폭탄에 대해 원자로가 있듯이, 우리 몸 속에선 200개가 넘은 다양한 산화환원효소(oxidoreductase)에 의해 다수의 유기물이나 무기물이 산화환원되어 그것에 의하여 필요한 물질을 합성하고, 불필요한 유해한 물질을 대사하고, 또 생활에 필요한 에네르기를 획득하는 작용이 있을 것인데 이러한 작용을 총칭하여 불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ATP가 방출하는 에너지도 불이며, 무리 몸에서 따끈하게 느껴지는 체온도 불이다. 결렬한 자연의 과정을 효소를 이용하여 느리게 만든다고 그것이 불이 아닐 까닭이 없다. 고대인들이 저기 저 하늘에서 훨훨 타고 있는 저 불덩어리인 태양을 불이라 생각했고, 또 그 태양이야말로 神이라고 생각했다면, 하나님은 곧 불일 것이요, 불은 곧 빛이니 하나님은 곧 빛이 될 것이다. 그리고 천지에서 가장 무제약적 에너지를 일방적으로(피드백이 없이) 발출하는 저 태양이랴말로 불이라 한다면, 나의 인체라는 우주(宇宙)에서 에너지의 가장 직접적인 보고인 피를 계속 순환케 만드는, 일순간도 쉼이 없는(잠잘 때도 깨어 있을 때도,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가지 한순간의 쉼도 없는 것으로 촉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 심장을 저기 저 태양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고 불이라 생각한 것도 쉽게 이해가 갈 것이며, 따라서 내가 존재한다고 하는 生命力(Life Force) 그 자체를 불이라 생각할 것은 뻔한 이치다.

그렇기 때문에 몸에서 이 불을 어떻게 다스리느냐? 잘못하면 너무 심하게 활활 타버리고 잘못하면 피직피직 꺼져 버리고 마는 이 불을 어떻게 항상적으로 유지하느냐 하는 것을 의사의 임무로, 인간의 삶의 기본철학으로 생각한 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다. 이 불의 균형이 깨져 불이 활활 타는 현상을 감정과 관련시켜 울화가 치민다든가 성화가 났다라고 표현한 것도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내 몸에 불이 있고 그 불이 내 몸의 생명력이라고 한다면 저기 저 산천초목 속에도 생명이 있는 이상 불이 있을 것은 뻔한 이치다. 따라서 고추나 생강을 깨물 때 화끈하게 달아오는 매콤한 맛을 그 생명체의 불이라 생각한 것도 당연한 것이며, 이 불을 내 몸에 집어넣어 내 몸의 불을 어떻게 관리하느냐 하는 것을 생각한 본초학적 발상도 결코 이치가 없는 엉뚱한 짓만은 아니다.


엠페도클레스가 말하는 地水火風의 火든 五行의 金木水火土의 火든지를 막론하고 이런 고대 철학적 어휘를 대할 때는, 암암리에 우리가 상식적으로 쓰고 있는 현대적 어휘의 의미론에 입각하여 그 고전을 해석해 버리고 마는 해석학적 상상력의 빈곤(the poverty of hermeneutical imagination)이야말로 바로 과학적 사유의 초보를 좌절시키는 현대 과학도들의 우매성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바슐라르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과학의 역사적 내용이 아니오, 과학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그가 말하는 과학이란 바로 아니오를 말할 수 있는 철학(philosophy of saying ‘no’)이다.

과학이란 인간과 우주를 포함한 완정(完整)한 진리(total truth)앞에 항상 개방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며, 이 완정한 진리는 이성과 감성의 이분을 허용하지 않는다. 과학은 항상 새로운 경험의 토대 위에서 재형성되고 재조직(reformulation)되는 사태를 두려워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과학은 이성의 엄밀성 뿐만 아니라 자유로운 상상과 환상의 느낌까지도 수용해야만 하는 것이다.

오늘날 현대과학이 오행적 인식으로 진입하는 데 최대의 난관의 되고 있는, 바로 이러한 개념적 엄밀성이라는 미명 아래 상상력의 빈곤 속으로 함몰되어 있다는 사실인 것이다. 그리고 부분적인 진리의 엄밀성은 확보했을지 몰라도 전체적 진리의 포괄성을 인식하는 데 너무도 인색한 꼴을 보이고 있다.

나는 과학의 궁극적 임무가 상식의 분석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종종 나에게 나타나는 과학의 모습은 너무도 명백한 상식의 거부다. 그리고 이러한 상식의 거부가 더 큰 상식을 창출하기 위한 과정적 단계(transitory steps)로서 이해된다면 관용될 수 있는 것이나, 특히 의과학(medical science)의 분야에 있어선 그러한 상식의 거부가 부지불식간에 수많은 사람을 살해하는 처참한 죄악까지도 저지를 수 있다면 그것이 아무리 과학적인 언어를 뒤집어쓰고 있다 해도 그것은 확실히 과학이 아니 것이다.

엠페도클레스의 4원소설, 地水火風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가 엠페도클레스야말로 4원소설을 주장한 최초의 사람이며 그의 4원소설은 알고 보면 4원소설이 아니라 火를 하나로 보고 그에 대립하는 地ㆍ風ㆍ水를 하나로 보는 2원소설이다라고 그의 유명한 ≪형이상학≫에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엠페도클레스의 독창성을 아무도 의심치 않았다. (Empedocles, then, incontrast with his predecessors, was the first to introduce the dividing of this cause, not positing one source of movement, but different and contrary sources. Again he was the first to speak of four material elements; yet he does not use four, but treats them as two only ; he treats fire by itself, and its opposites - earth, air, and water - as one kind of thing. we may learn this by study of his verses. ≪Metaphisics≫ 985a 31.)

하지만 이 4원소설의 발상은 이미 엠페도클레스이전의 피타고라스학파의 수리 형이상학에 내재하고 있었으며, 특히 피타고라스학파에 속한 의가였던 크로톤의 알크메론(Alcmeaeon of Croton)의 건강론, 즉 寒(cold)ㆍ熱(hot)ㆍ燥(dry)ㆍ濕(wet)이라는 대립적 힘 사이의 균형에 의하여 건강을 설명하는 방식의 문제가 지수화풍과 결합할 때 소위 체질이라는 것이 생겨나며, 이것이 나중에 플라톤과 동시대였던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c, 460 BC∼c. 377B.C. )의 체액체질론으로 발전되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사실 앞서 인용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구절에서 火 : 地風水 二元의 논리맥락은 엠페도클레스와 헤라클레이토스의 어떤 논리적 연결을 강력히 입증하는 것이지만 하여튼 이 地水火風의 이해방식의 다단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고대인들의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넓게 교류되어 있었다. 엠페도클레스의 地水火風에 대해 우리같은 동아시아 문명권의 대선배인 12세기 朱熹(1130∼1200)가 명료한 코멘트를 이미 남기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니다. 주자는 地水火風에서 地水를 땅적인 것으로 보아 인체에 있어서의 魄(P'o)의 문제와 결부시켰다. 魄이란 요즈음 말로 하면 인간의 몸에 있어서의 엔트로피의 증가현상이며, 魂이란 엔트로피의 감소현상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죽음이란 魂에 대한 魄의 완전한 승리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風火가 먼저 흩어져 버리고 나서 서서히 地水가 흩어지게 되면 평온하다. 허나 地水가 먼저 흩어지게 되면(불시의 사고로 몸이 먼저 상하여 죽는 케이스를 말함) 그것은 액을 불러일으키는 귀신(崇)이 되게 마련인 것이다. 이것은 엠페도클레스의 地水火風에 대한 朱子의 천지코스몰로지적 이해방식이다.

엠페도클레스의 4원소설은 인도의 상키야철학(Samkhya)과 공통된 세계관을 표방한 것이며(그 역사적 先後나 구체적 영향관계를 가리기는 어렵다). 이것은 불교의 四大說(maha-bhuta)을 통하여 중국에 수입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상키야철학이 인도문명에 있어서 아유르베다(Ayurveda)라는 거대한 의학체계를 성립시켰으며 현대사회에 있어서도 완벽한 연속성을 지니는 아유르베다 의과대학이 인도사회에는 의료문화의 중심으로서 자리잡고 있다.(아유르베다 의학도 매우 구체적인 체질론에 입각한 토탈 헬스케어 시스템인데 여기서는 주제가 너무 방만하여지므로 생략한다.)


희랍철학은, 특히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Pro-Socratic Philosophy)은 파르메니데스라는 무당을 하나의 분수령으로 해서 그 이전과 이후로 양분된다. 그 만큼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은 그 이후 철학자들에게 있어선 극복하지 않으면 아니 될 하나의 충격이었으며, 또 그들의 사유체계에 있어서 고려하지 않으면 아니 될 근원적 실재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파르메니데스는 희랍인들에게 현상과 실재의 차이를 처음으로 인식시켰으며, 감관에 나타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는 추상적 사유를 출발시켰다. 그에게 있어서 감각적 우주는 환상이었으며, 실재하는 것은 不變 不滅의 영원한 정태로서의 실체였다. 그리고 그의 사유체계 속에서는 허공(empty)조차 인정되지 않았다. 비존재가 존재일 수는 없었다. 우리는 희랍철학의 대세를 결정한, 아니 서양철학이 바로 그의 푸트노트에 불과하다고 화이트헤드가 말했던 플라톤이 바로 헤라이클레이토스의 제자가 아니라 파르메니데스의 제자라는 사실을 확연히 기억해야 한다.

파르메니데스의 핵심은 不變과 不滅이었고 이러한 영원의 철학은 바로 그가 거스리(W.K. Guthrie, A History of Greek Philisophy, Ⅱ/11 ff)나 엘리아데(Mircea Eliade, Zalmoxis. pp. 38∼42)가 파르메니데스의 정체가 바로 지중해 연안의 무당문화 속에서 료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백히 지적한 사실에서부터 이해해 들어가야 할 것이다. 남부 이태리에서 태어나 성장한 파르메니데스는 우리가 주변에서 보는 무당과 같이 땅의 세계를 벗어나 저곳에서 자유로운 영매적 여행을 아닐 수 있는 영혼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와 헤라이클레이토스는 동시대임이 분명하나 서로의 생몰연대를 정확히 규정하기는 어렵다. 허나 두 사람을 비교하여 여러 측면에서 고찰컨데 헤라클레이토스는 파르메니데스 이전 철학자로 간주됨이 분명하다. (Philosphically Heraclitus must be regarded as pre- Parmeenidean. Guthrie, ibid, Ⅱ/1.)

파르메니데스 저작 속에서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으나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 속에서는 파르메니데스의 그림자도 없다, 이 에베소의 철학자의 핵심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변화와 생성의 철학이며, 투쟁의 철학이다. 흔히 얘기되는 ‘판타레이’라든가 ‘불’의 상징성만으로도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은 충분히 대변될 수 있다. 그리고 탈레스의 水論으로부터 헤라이클레이토스의 火論에 이르기까지 여러 환원주의는 자연철학(natural philosophy)이라는 하나의 공통된 현상주의를 깔고 있었다.

나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관도 후대의 희랍철학적 발상에 윤색되어 그것을 변화에 대한 불변자로 간주하는 해석방법을 거부한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는 기껏해야 라오쯔(老子)가 말하는 ‘道’ 이상의 것은 아니며, 그것은 ‘불의 길’이지 불을 지배하는 초월적 불변자가 아니다. 파르메니데스철학의 불변주의는 결국 헤라이클레이토스의 변화철학에 대한 반동이며 그것은 다시 빼낼 수 없었던 불변의 쐐기였으며 이로써 인류사상사에 있어서 동과 서가 확연히 분립되는 결정적 계기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와 엠페도클레스 양자를 파르메니데스를 중심으로 그 이전과 이후를 대변하는 사상가로 본다면 엠페도클레스의 철학적 과제는 바로 파르메니데스의 불변의 쐐기를 계승하면서도 어떻게 헤라클레이토스가 표방한 상식적 생성의 시공계를 허상이 아닌 실상으로서 살려낼 수 있는가하는 문제의식으로 집약될 것이다. 따라서 엠페도클레스의 철학적 해결방식은 파르메니데스의 불멸성은 받아들이되 그의 존재론적 일원론을 버리고 다원론의 길을 택하는 방식이었다.

엠페도클레스가 4원소라고 했을 때 원소라는 말은 희랍어로 ‘뿌리’라는 말이다. 이 뿌리라는 말은 곧 나타난 현상에 대해 그 뿌리로서의 불멸ㆍ불변의 궁극적 실재라는 뜻이다. 이 궁극적 실재는 다원적이기 때문에 이 다원적 실재의 이합집산의 다양한 방식에 의하여, 그리고 그 양적 비례관계에 의하여 다양한 현상이 실존하게 된다고 본 것이다. 피타고라스적인 水論이 첨가된 것이다. 뼈는 地둘, 水둘, 火넷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사유의 맥락속에선 실재로 변화를 상정할 필요가 없다. 변화는 불변의 실재의 이합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유일한 실재는 이 四根(four root-substances)이다.

이렇게 해서 현상자체의 관심보다는 현상을 이루는 영원한 요소에 관심이 옮겨간 것이다. 이러한 불변의 요소성은 결국 다원론의 불철저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일원론으로 심화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궁극적 실재의 질적 차이를 인정할 필요가 없는 동질적 요소성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이 동질적 불변의 요소성이 바로 레우키푸스나 데모크리투스의 원자론으로 표현될 것이라는 것은 사계의 관심있는 학인들은 다 아는 일이다.


자아! 내가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희랍철학사의 강론이 아니다. 단지 서양철학이나 과학의 뿌리로서의 희랍의 四根說이나 原子論이 모두 파르메니데스의 不變의 철학의 소산이라는 것이며, 바로 이 때문에 그것이 근대적 아토미즘으로 비약되면서 포기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서양의 4원소설은 어떠한 경우에도 동양의 오행설과 애초부터 같이 비교될 수 없는 것이며 근원적으로 인식론적 틀을 달리하고 있다. 따라서 그러한 원자론적 틀이 근세에 와서 어떠한 양태로 새로운 언어를 구축했다 할지라도 그러한 언어를 구축했다 할지라도 그러한 언어를 지배하는 인식의 틀은 파르메니데스나 엠페도클레스의 연속선상에 서 있는 것이며 이러한 인식론적 틀에서는 영원히 오행론의 정체는 드러날 길이 없다는 것을 명기해 두려 한다.

나는 지면의 제약으로라는 말을 매우 싫어하기 때문에 명백한 제약을 지니고 있는 이런 잡지글을 쓰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제부터 오행과 음양을 얘기해야 할텐데 이미 말할 수 있는 지면이 사라져 버렸다. 단지 축약된 암시와 묵시만으로 이 글을 마칠 수 밖엔 없다.


五行論이 오늘날까지도 서양의 식자와 우리 나라의 과학도들에게 곡해되거나 이해가 되지 않고 있는 이유는 바로 五行의 行이 희랍의 四根說에서 오늘날의 DNA 논의에 이르기까지 그 연구의 틀을 지배하고 있는 ‘불변의 요소성’을 의미하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사실이 일차적으로 정확하게 감지되고 있질 않기 때문이다.

金木水火土란 원소가 아니며, 요소도 아니다.
五行의 行이란 문자그대로 ‘감(going)’이다.

오행의 출발은 오늘의 高文子學이나 古文獻學, 그리고 考古學의 최신 연구성과에 비추어 이야기하자면 바람의 신앙에서 출발된 것으로 사료된다. 물론 희랍어 신약성서에도 바람을 성령이나 영적인 신성과 동일시하는 용례가 있다. 고대인들에게 있어선 바람이란 물리적 기류현상이 아닌 자연의 영적 힘을 의미했고 그것은 신적 존재의 현현(manifestatioa of divine Power)이었다. 그리고 古代중국의 河北 농경문화에 있어선 바람이라는 신적 존재의 성격이, 즉 바람의 溫ㆍ 署ㆍ凉ㆍ冷ㆍ乾ㆍ濕이 농작물(생명의 근원)의 發芽ㆍ生長ㆍ守護ㆍ貯藏과 유기적 관련을 맺고 있었다.

바람은 실상 존재(Being)가 아니다. 바람은 동적 상태며, 그것은 현현이며, 또 그 자체는 가시적인 것이 아니다. 바람에 있어서 가장 쉽게 감지되는 것은 방위였다. 東風ㆍ西風ㆍ南風ㆍ北風등, 이 바람의 방위는 생성의 단계를 규정했다. 東風이 불 때는 모든 생물이 발아하고 봄이 온다. 南風이 불 때는 무덥고, 西風이 불 떄는 선선하고 가을이 오고 北風이 불면 추위가 닥친다. 이러한 바람에 제사 지내는 社稷의 社壇을 中央土로 하여 東木, 南火, 西金, 北水의 五行이 성립해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바람의 성격에 따라 東=靑, 南=赤, 西=白, 北=黑, 中央=黃의 五色이 결정된 것이다. 이 五色이야말로 五方神의 상징이였으며 이것이 후대에 五行사상으로 발전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五行사상의 발전은, 그러니까 체계적 코스몰로지로서의 五行의 개념은 결코 全國末期를 상회하지 않는다.


그런데 엠페도클레스로부터 히포크라테스를 거쳐 갈레노스(Galenos,A.D,129∼c.199)에 이르러 완성된 희랍의 4원소설은 체액론(humor theory)에 기초한 인체론만을 잉태시켰으며, 장기론은 해부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베살리우스(Vesalius,1514∼1565)이후에나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五行사상은 이미 기원전 세기, 그러니까 前漢代에는 확고한 장상론을 확립하게 되며, 그것은 또 기의 흐름이라고 하는 五行的 장상론과 무관치 않은 經絡체계(Meridian System)를 잉태시키기에 이른다. 경락도 기의 오감이며 그것은 바로 行인 것이다. 그런데 이 行이 서양의 요소론과 전혀 성격을 달리하는 것은 우선 ‘불변적 존재성’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 존재에 앞서 相生ㆍ相克이라고 하는 어떤 관계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존재가 먼저 실체적으로 있고 나서 그 실체들 사이의 관계가 生ㆍ克으로 규정된다는 뜻이 아니라, 生ㆍ克이라는 관계에 의하여 그 실체성 그 자체가 규정되고 확인될 뿐이라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水生木이라는 관계가 중요한 것이며 이 관계를 도외시한 水와 木이라는 실체의 존재성은 전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水生木에 있어서의 水와 木은 水生木의 관계를 규정하는 기능적 허상일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도 五行論의 출발은 相生ㆍ相克의 관계로 나타났던 것이며, 불ㆍ쇠ㆍ나무ㆍ물ㆍ흙이라고 하는 환원주의적 요소적 실체성은 전혀 부각된 바가 없다. 다시 말해서 金木水火土는 기능적 언어적 개념일 뿐이며, 그것이 쇠ㆍ나무ㆍ물ㆍ불ㆍ흙이라고 하는 구체적 물질의 불변적 요소로서의 실체(elementary substances)가 아니라는 것이 인지되어야 한다.


이 金木水火土 五行論의 가장 기발한 착상은 金=肺, 木=肝, 水=腎, 火=心, 土=脾라고 하는 장상으로 그 과학성을 표출했다는 데 있다. 내가 여기서 계속 장기(organ)라는 말을 쓰지 않고 장상(organ symbol)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오행에 배속된 肺脾肝腎心의 장기가 우리가 생각하는 시스템상의 장기가 아니라, 金氣, 土氣, 木氣, 水氣, 火氣라고 하는 어떤 氣의 양태의 상징으로서의 전제일 뿐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장상은 장기로서의 단독기능을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라 相生相克의 관계로써 형성시키는 氣의 필드를 그 장기의 실체에 선행시킨다는 사실이다.

나는 여기까지 오행에 대해서는 조금 언질을 주었으나 불행히도 본 논문에서는 음양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음양과 오행은 근본적으로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며 역사적으로 성립된 단계도 다르고 계통도 다르다. 이 복잡한 전문적 문제를 (반드시 문헌학적 토대 위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여기 다 논술할 수가 없다. 단지 음양은 보다 인식의 원리에 관계된 것이고, 오행은 보다 대상의 원리에 관계된 것이라는 명제만을 암시적으로 남겨 두고자 한다.

외견상 엠페도클레스의 四根說과 중국고대의 五行說이 비슷해 보인다해서 兩者가 동차원에서 비교될 수는 없다. 따라서 오행설을 막연한 서양과학사의 잣대에 의하여 전근대니 전과학이니 하는 말을 함부로 뇌까릴 수도 없다. 중국고문명의 심도는 도저히 희랍인의 단순한 사유방식으로는 헤아리기 힘든 깊이가 있으며, 그것은 애초부터 뿌리나 요소가 아닌 行이었기 때문에 복잡한 관계양상을 띠었고 또 자신의 한계를 극복해 나갈 수 있는 무한한 상징성을 지녔기 때문에 어떠한 과학의 충격에도 살아 남을 수 있는 매크로-바이올로지컬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한의학을 매크로바이올로지로 규정한 것은 나의 발상을 효시로 하는 것이다. 1991년 2월 6일 대한미생물학회에서 발표.) 허나 바로 이러한 거시성과 융통성 때문에 상황성은 획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반복가능한 엄밀성과 보편성의 측면에서 매우 믿음이 부족한 하나의 통찰(insight)로만 남아 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자아! 이제 최초의 우리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음양오행은 아직은 과학이 아니다. 허나 인류의 축적된 지혜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음양오행의 과학성은 이제부터 엄밀한 논리에 의하여 차곡차곡 입증되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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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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