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자유와 관련하여
등록인 최인석 등록일 2009.04.13 | 조회: 111
첨 부

푸네에 살고있는 상카르입니다. 어제 불교관련 카페에 올린 제글을 이곳에도 올립니다. 여러 회원님께 신고식을 겸하는 의미에서.. 
 
아래에 어느분의 글에서 불교에서 대자유를 추구하는 것도 인간의 정신을 속박하는 것이 아니냐는 물음이 있어
여기에 대해서 의견을 말하고저 한다. 우리는 흔히 불교의 목표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곤한다.  
기독교의 목표가 구원이듯이...많은분들은 불교의 목표가 해탈이니 깨달음이니 라고들 대답을 할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는 목표가 없다. 만약에 불교에 목표를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사람은 불교를 오해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불교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불교는 어떠한 종류의 이상도 추구하는 종교가 아니다.    
특히 선불교에서는 모든 이상주의를 철저히 배격한다. 당연히 불교는 대자유도 추구하지 않는 종교다.
따라서 인간의 정신을 속박할 일도 없다.
 
우리는 사회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너 자신을 계발하라, 너자신을 바꾸어라, 보다 완벽하게 되도록 노력하라,
라고 끊임없이 세뇌되어 왔다. 일련의 이러한 과정 속에서 형성된 것이 흔히들 말하는 에고(ego,自我)다.
보다 "나아지려는 추구" 라는 환상이야말로 이 에고를 만족시키는 원동력이다.
 
오늘은 비록 이렇지마는 내일은 보다 나아 질 것이다 라는 목표가 에고가 생존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모든종교에서 그대로 받아들여져서 각자 그 종교의 목표와 이상주의가 되어왔다.
그러나 불교는 이러한 기존의 종교에서 말하는 목표와 이상주의를 철저히 배격하는 데에서
출발하는 혁명적인 종교다.
 
붇다는 기존의 종교에서 이러한 핵심을 간파했다. 즉 무엇을 "추구한다는 것"이 인간의 삶을 병들게 한다는
것을 알아 낸 것이다. 그 당시의 힌두교에서 해탈을 추구하는 것도 일종의 돈이나 권력을 추구하는 것과
"추구한다는"면에서는 다를바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추구한다는 것이 인간성의 광기라는 것을 밝혀
내었고 이것이 우리 삶에서의 모든 불행의 근원이라고 본 것이다.
 
제자들이 붇다에게 질문 하기를"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깨달음에 도달하면 우리는 어떤 상태에 있게 됩니까?
해탈(moksha,절대적인 대자유의 상태)하는 것입니까?"라고 물었을때 붇다는 대답하지 않았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질문인가? 대자유는 그것을 추구하지 않을때 그 상태에 도달하는 것인데 그것을 목표로 삼다니!!!
 
그래서 붇다는 기존의 해탈(대자유)이라는 개념을 버리고 nirvana(열반)라는 새로운 개념을 사용했다.
니르바나란 말 그대로 촛불을 훅 불어서 꺼뜨린다는 뜻으로서 "추구하지 않음" 이라는 뜻이다. 촛불을 꺼서
어두우니 어느것도 찾지 않는다는 뜻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광기는 그 "추구하지 않음"이라는 니르바나를 하나의 목표로 설정하고 다시 그 니르바나를 추구하기
시작했다.붇다가 고심해서 만들어낸 차별화된 용어를 왜곡해 버린 것이다. 그후 불교가 중국으로 전해지고 선불교가
일어나면서 선사들은 이 니르바나라는 용어도 이제 붇다 당시의 해탈이라는 용어와 같이 오염되었다고 판단해서
무심(無心)이라는 용어를 새로 만들어서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뜻이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는 텅빈마음 이라는 뜻인데 이제 선방에서는 그 무심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똑같은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좌선(坐禪)이라는 단어에 유의 해야한다. 그야말로 우리가 하여야할
전부는 그냥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일뿐이다. 그것으로 완벽하다. 에고는 자신을 둘로 나누어 게임을 벌인다.추구하는자도
나이고 추구하는 대상도 나이다. 추구하는 행위 자체가 나를  이미 분열시켜 버렸는데 어떻게 본래의 내 자신이 될수 있겠는가?
나를 추구한다는 노력 자체가 장애가 될것이다. 
 
왜 우리는 우리의 삶에 목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삶 자체가 목표라는 것을 왜 우리는 망각하는가?
왜 우리는 내일이라는 제단에 오늘을 희생해야하는가? 지금 이순간에 존재하는 것이야 말로 삶을 놓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모르는가?라는 것이 붇다의 깨달음이다. 불교(말그대로 붇다의 가르침)란 지금 이순간에
존재하는 삶의 방식이다. 모든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 지금 이순간의 삶을 살아가는데 가장 큰 장애물인 것이다.
나는 안다. 인간의 광기는 또다시 지금 이순간에 존재하기 위하여 목표를 설정하고 노력할 것이라는 것을....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호수가 낀 대저택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호수에 배를 띄우고 선실안에서 독서하는 것이
취미였는데 그날은 아름다운 보름달이 호수에 떠 있었고 호수가의 숲에서는 뻐꾸기가 우는 아름다운 밤이었다.
그가 독서하는 책은 미학(美學,아름다움)에 관한 책이었다. 순간 바람이 불어 선실안의 서재의 촛불이 꺼져 버렸다.
그순간 선실안으로 밀려드는 달빛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그때 타고르는 깨달았다. 내가 아름다움에 관해서 알려고
노력하고 있을때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러나 촛불이 꺼지고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추구하지 않을때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장애물은 바로 촛불이었다.
 
나라는, 에고라는 촛불만 꺼지면 무언가를 추구하는 행동만 멈춘다면 그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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