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

六十七. 天下皆謂我道大, 似不肖, 夫唯大, 故似不肖, 若肖久矣, 其細也夫, 我

 有三寶, 持而保之, 一曰慈, 二曰, 三曰不敢爲天下先, 慈故能勇, 儉故能

 廣, 不敢爲天下先, 故能成器長, 今舍慈且勇, 舍儉且廣, 舍後且先, 死矣, 夫

 慈以戰則勝, 以守則固, 天將救之, 以慈衛之.

   

   67. 천하가 모두 이르기를 나의 도는 크기는 하지만 불초한 것 같다고 한다. 대저 오직 크기 때문에 불초한 것 같다. 만일 현명하다면 그 작은 것이 오래였으리라.

   나에게 세 가지 보배가 있다. 잘 간직하여 이를 보배로 삼는다. 그 첫째는 자비요, 둘째는 검소함이요, 셋째는 감히 천하의 앞장이 되지 않는 것이다. 자비하므로 능히 용기가 잇으며, 검소하므로 능히 널리 베풀 수 있고, 감히 천하의 앞장이 되지 않으므로 능히 기량있는 자의 우두머리가 된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자비를 버리고도 또한 용감하려 하고, 검소를 버리고도 널리 베풀려고 하고, 뒤에서 따르지 않으면서 또한 앞장서려고 하는데, 그러면 죽을 것이다.

   대저 자비는 이것으로 싸우면 곧 이기고, 이것으로 지키면 견고하다. 하늘이 장차 이를 구하고자 자비로써 이를 지킨다.



박정희나 정주영을 찬양하는 덜 떨어진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씨부랑거리는 얘기가 있다. 바로 '검소함'이다. 박정희가 얼마나 검소한 삶을 살았는지, 정주영같은 갑부가 얼마나 근검절약을 했는지에 대해서다. 만약 '검소함'이 한 개인의 인품과 훌륭함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면, 세상엔 벌써 '성인군자'가 넘쳐났을 것이다. 우선 나부터가 그렇다.

나? 나, 근검절약 바로 그 자체다. 나는 우선 모든 것이 아깝다. 인색하다고? 그렇다. 인색하다. 나는 모든 것에 인색해서,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기때문에 나는 모든 것에 대한 지출을 줄인다. 뿐만이 아니다. 나는 미래에 대해서도 인색하다.

여기 50개들이 사과 한 상자가 있다고 하자. 50개의 사과중에서 매번 제일 싱싱하고 맛있어 보이는 것만을 골라먹는 사람이 있고, 또 나처럼 50개의 사과중에서 매번 제일 상태가 나쁜 사과만을 골라먹는 사람이 있다. 먼저의 사람은 언제나 맛있고 제일 좋은 사과를 먹게 된다. 하지만, 나중에 5개, 또는 10개의 사과가 썩어서 아예 못먹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매번 제일 상하기쉬울 것 같은 사과를 골라먹기때문에, 언제나 제일 맛없는 사과를 먹지만, 상해서 버리는 사과는 없다.

나는 음식도 버리는게 없을 뿐더러, 옷도 집도 차도 모든 것을 아낀다. 설령 그것이 내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나는 아까워서 아낀다. 인색한 사람들중의 한편은 아껴서 모은 것을 보다 더 큰 소비와 지출, 즉 더 큰 만족과 효용을 위한 기회비용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도 아니다. 나는 무엇을 아껴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게 아니다. 정주영이 돈이 없어서 양말을 기워신고 구두를 고쳐가며 신었겠는가? 그냥 아까우니까 아낄 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검소'와 '근검절약'이 몸에 밴 사람은 과연 칭송받을만한 사람인가? 검소와 근검절

약은 분명 그렇지 않은 것에 비해 수준높은 인식이자 행위임에는 틀림없다. 도덕경에서 말하는 '검소함'의 힘이 바로 그렇다. 그렇다해도 그 '검소'와 '근검절약'이 다른 부분까지도 평가할 만한 기준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더군다나, 이미 '검소'와 '근검절약'이 몸에 밴 사람은 이미 그것이 '무위'의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일이므로 어떠한 노력의 댓가도 아니고, 따라서 그런 사람들에게 그런 자연스러운 모습을 칭찬한다고 칭찬으로 여겨지는 것도 아니다. 밥먹고 물마시는 것과 같이 자연스러운 것을 '훌륭한 인격'으로 추켜세우는 것은 아부거나 아니면 무식 둘중의 하나이다.

덧붙여 ''봉사'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타인에 대한 '봉사'를 자기일인양 하는 사람도 있다. 사회복지기관 봉사, 입양 등등. 그중에는 '봉사'가 자기자신이나 가족보다 우선해서, 남을 위한 삶자체를 사는 그런 사람도 있다. 과연 그렇다면 그것이 칭송받을만 한가? 물론, 칭송받을 만한 일이나, 그 사람과는 별개 문제다.

국외자의 입장에서 보면 '검소, 근검절약, 봉사'와 같은 삶이, 해야하고 따르고 본받아야만 하는 그 무엇이 되겠고, 또 그런 이유로 그런 사람들을 '칭송의 대상'으로 본보기삼는 것이겠지만, 사실 그 대상이 되는 사람들과는 별 상관없는 일이다. 밥먹고 똥싸고 하는 걸 칭찬하는 것과 마찬자지일뿐이다. 그러니, 근검절약한다고 해서 그들을 칭찬하지 말일이다. 그들이 봉사한다고 해서 그들을 칭찬하지 말일이다. 박정희나 정주영이 여자까지 멀리하고 모든 '욕망'에서 벗어난 인간들이라면 마땅히 우러러 따를 일이나, 그들은 그냥 아까우니까 근검절약하고 그게 몸에 배서 '검소'했을 뿐이다.

사실, 2008년, 소비만이 존재의 이유이자 목적인것만 같은 시대에, 그런 검소와 근검절약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누가 검소하게 살자라고 했다간,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그러니, 그런 삶의 모습이 '존경'스럽게 될 수도 있다 싶지만, 그래도 아닌건 아닌게 아닌가? '검소함'과 사람은 구별해야 한다. 오랜만에 도덕경을 보다가 '검소함'이라는 말이 있어 떠올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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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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