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를 읽었다는 자 누구인가

박민영의 <논어는 진보다>, 각양각색에 완전히 모순적이기까지 한 공자의 말씀

▣ 로쟈 인터넷 서평꾼 http://blog.aladdin.co.kr/mramor


“논어를 뒤집는다. 공자를 바로 본다, 다시 본다”라는 문구가 눈에 띄어 집어든 책은 박민영의 <논어는 진보다>(포럼 펴냄)이다. 일반인들이 공자에 대해 알고 있는 상식(혹은 편견)을 바로잡고자 하는 게 저자의 의도인데, 제목으로 미루어 그가 문제 삼는 건 공자와 논어를 ‘보수’로 보는 태도다. 비록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주장에 박수친 바 없으나, 크게 보아 나 또한 그런 태도에서 예외가 아니었으니 정확히 책이 목표로 하는 독자이겠다. ‘공자님 말씀’을 모아놓은 고전이니 기꺼이 여러 종의 번역본을 모셔두긴 하지만 진지하게 읽어볼 생각은 하지 못한 독자 말이다.

사실 유교 문화권에서 공자와 논어가 가진 영향력은 기독교 문화권에서 성경이 가진 영향력에 비견될 만큼 크고 방대한 것이다. <논어금독>을 펴낸 리쩌허우에 따르면, 서양문명과 다르게 중국에는 진정한 종교전쟁이 없었던 것도 유학의 포용성과 큰 관계가 있으니 그 영향은 ‘말씀’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유가와 법가가 혼용된 윤리적·정치적 규범 혹은 법칙이 중국 역사 2천 년을 지배해왔다고도 말해지는 것이니 자세를 바로 하고 좀 진지하게 ‘선생님’의 말씀에 귀기울여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예의를 갖춰서 논어를 대할 때, 두 가지 점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먼저, 리쩌허우의 지적대로 기원전 500여 년에 공자가 한 말을 기록한 내용(말하자면 어록)의 대부분을 오늘날에도 읽고 이해할 수 있다는 점. 물론 한문에 대한 기본 지식을 갖고 있는 독자의 경우지만 한국인이 중세 국어를 더듬더듬 읽을 수밖에 없는 것과 비교하면 분명 놀라운 일이다. 저자에 따르면 논어에 쓰인 한문은 “약간의 한문학적 지식만 있으면 누구나 해석할 수 있을 만큼 쉽다”.

하지만 그렇듯 평이하게 읽힘에도 논어에 대한 번역과 주석은 각양각색이며 놀랍게도 심지어는 모순적이기까지 하다. 역시나 리쩌허우에 따르면 “고대문자는 간단하면서도 포괄적이어서 오늘날의 언어로 정확하고 분명하게 바꾸어야만 잘 파악할 수 있다”. 문제는 ‘정확하고 분명하게’ 바꾸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는 데 있다. 논어의 이름난 주석자만 하더라도 2천 명이 넘는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예컨대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란 첫 구절만 하더라도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익힌다는 의미인지, ‘시’(時)의 의미가 ‘때에 따라’인지 ‘때때로’인지 아니면 ‘계속’인지 저마다 의견들이 다른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 구절은 “(仁을) 배워서 때에 따라 (禮를) 익히니”로 해석되어야 한다. ‘위정’편 16장에 대한 해석은 더 현격한 차이를 드러낸다. ‘공호이단, 사해야이’(攻乎異端, 斯害也已)란 구절을 “이단을 전공하는 것은 해로울 뿐이다”로 읽는 게 전통적인 해석이었지만 저자는 “이단을 공격하는 것은 그 자체가 해로운 것이다”로 새긴다. 이 모두가 가능하다고 친절하게 소개해주는 번역서도 있지만 전혀 상반되는 해석이 양립 가능하다면 공자가 한 입으로 두말한 것이 되는가?

저자는 “공자의 본래 문제의식이 무엇이었는지, 공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직접 원문을 읽어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동시에 “논어를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한문학적 지식보다는 오히려 광범위한 인문학적 지식과 철학적 사고능력”이라고 덧붙인다. 사실 논어에 대한 허다한 번역과 주석들이 모두 원문 읽기에서 나온 것이니 ‘원문 읽기’만으로 그간의 오해와 편견이 모두 불식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리쩌허우조차도 모호한 대목들은 그대로 놔두는 수밖에 없다고 한다).

송나라의 유학자 정이(程?)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논어를 읽는데, 논어를 읽기 전에도 이런 사람이고 논어를 읽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이런 사람이라면 읽지 않은 것과 같다.” 우리의 문제는 이렇다. “논어를 이렇게도 읽을 수 있고, 저렇게도 읽을 수 있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읽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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