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한국시 왜 이렇게 되었는가

/ 임보(林步)


한국시단의 오늘을 시의 전성기로 보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다. 시인의 수효가 만 명을 헤아리는 데에 이르렀고, 수많은 시집과 시지(詩誌), 그리고 시동인지 들이 매일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으니 그렇게 평가할 만도 할지 모른다. 그러나 시인다운 시인이 얼마나 되고, 시다운 시들이 얼마나 생산되고 있는가를 살펴본다면 긍정적으로만 평가하기는 어렵다.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나는 요즈음 별로 시를 읽지 않는다. 게을러서라기보다는 시를 읽는 것이 즐겁지 않아서이다. 아니 즐겁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시를 읽는 일이 오히려 고통스럽고 짜증이 난다. 시가 설령 재미있다손 치더라도, 거의 매일 우송되어 온 적지 않은 시집이나 잡지들을 섭렵한다는 것은 여간한 인내와 노력이 요구되는 일이 아니다. 하물며 재미없는 경우라면 그 작품들을 위해서 소중한 시간을 할애할 마음이 선뜻 생기겠는가. 나는 처음 몇 줄 읽어서 재미가 없으면 읽지 않고 넘어간다. 난해하거나 답답한 것도 외면한다. 그러니 평소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소수의 시인들 위주로 작품을 골라 읽게 마련이다.
오늘의 시라는 글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난삽하고 골치 아픈 글이 되었는가? 무엇이 시를 이 지경으로 끌어왔는가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첫째, 자유시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 문제인 것 같다.

근대적 이념으로 흔히 내세운 것 중의 하나가 ‘자유’다. 근세에 이르면서 시의 세계에도 자유의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원래 시는 통제된 글이다. 특히 정형시는 형식적인 틀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율격과 압운 등의 규제를 받는다. 주지하다시피 정형시가 지닌 고정적인 틀로부터 벗어나고자 해서 생겨난 것이 자유시다. 얼핏 생각하면 자유시야말로 아무런 형식적 통제도 받지 않은 자유분방한 글처럼 생각될지 모른다. 그러나 자유시가 통제된 글이 아니라는 생각은 크게 잘못된 인식이다. 자유시는 정형시가 지닌 정해진 틀로부터 자유로울 뿐이지 형식의 통제로부터 벗어난 글은 아니다. 자유시는 그 내용에 가장 합당한 새로운 형식을 작품마다 창조해내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자유시가 쓰기 쉬운 시라고 생각하면 이는 큰 오산이다. 작품마다에 가장 이상적인 형식을 창안해 내는 일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만일 어떤 시인이 자유시를 멋대로 써도 좋은 글이라고 착각하고 썼다면 이는 이미 시가 아니라 방종의 글에 불과할 것이다. ‘자유’에 ‘책임’이 따르듯 시인은 자신이 생산한 시에 대하여 준엄한 책임을 져야 한다.
시가 통제된 글이라는 것은 자유시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시어의 선택, 행과 연의 배치 그리고 운율의 설정에 이르기까지 자유시도 최선의 형식에 담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작품 속에 쏟아 붓는 시인의 정성이 곧 독자들의 가슴속에 감동으로 되살아난다. 쉽게 쓰여진 시가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는 황소가 바늘귀를 뚫고 들어가는 일보다 흔치 않을 것이다.

둘째, 분별력 없는 아류들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우리 시단을 이렇게 만든 데 기여한 두 사람의 선배 시인을 지적하라면 김수영과 김춘수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공히 전통적인 시법에 반기를 든 분들이다.
김수영의 작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자면 우리시의 폭을 넓혔다고 할 수 있다. 시어와 시의 소재들을 개방하여 시의 영토를 확장했다. 속어와 비어(卑語), 외래어 할 것 없이 끌어다 썼고, 일상 속에서 그가 만난 사소한 체험들도 싯거리로 삼았다. 그는 대상과 표현에 구애받지 않고 제멋대로 썼다. 좋게 말하면 무애(無礙)한 자유인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건방진 안하무인(眼下無人)이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시의 위의(威儀)를 떨어뜨렸다고 할 수 있다. 원래 시는 귀족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시의 위상을 서민문학으로 끌어내린 것이다.
김춘수 시의 의의는 소위 ‘무의미의 시’라는 데에 있다. 무의미 시의 특징은 한마디로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비현실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구상(具象)의 세계를 거부한 비구상화가들의 발상과 궤를 같이 한 것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그는 의도적으로 현실적 정황을 파괴하여 낯설게 만든다. 거기에는 어떠한 지상적 논리와 질서도 배제된다. 말하자면 절대무비의 세계를 창조해내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은 세계를 만들어냈다는 데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김춘수 역시 ‘무의미의 시’로 한국시의 영역을 넓히는데 기여했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김수영과 김춘수의 작품들이 전통적인 시와는 달리 낯설었기 때문에 몇 비평가들과 잡지들의 주목의 대상이 되었던 것인데, 분별력이 흐린 시인들이 이들의 작품을 마치 시의 전범으로 받아들여 그들의 아류가 된 것이다. 그래서 시를 제멋대로 쓰는 것이 마치 멋인 줄 착각하고, 논리를 무시한 괴기스런 표현이 수준 높은 작품인 것처럼 잘못 인식하는 풍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이상한 악기를 하나 만들어냈다고 가정하자. 새로운 그 악기는 물론 음악을 다채롭게 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악기가 모든 음악을 연주하는데 최상의 악기라고 잘못 판단하고 이를 고집하는 무리들이 횡행한다면 이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시의 경우도 이와 같아서 하나의 새로운 유형의 출현은 그 가치가 인정되지만 그것을 마치 시의 전범인 것처럼 여기고 이를 모방하는 것은 개인이나 문단의 불행이 아닐 수 없다. 효빈(效顰)이라는 말이 있다. 월(越)나라의 미인 서시(西施)가 얼굴 찡그리는 것을 보고 한 추녀(醜女)가 이를 부러워한 나머지 흉내내다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고사인데 이와 다를 바 없다.

누가 뭐라고 해도 시는 정련된 언어예술이어야 하며, 정결한 시정신을 담고 있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 시를 하찮은 말장난쯤으로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색다른 시를 만들어 주목의 대상이 될 것인가 보다는, 어떻게 감동적인 시를 낳아 긴 생명을 갖게 할 것인가 하는 데로 시단의 관심이 되돌아왔으면 싶다.
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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