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선재에서'에 해당되는 글 169건

  1. 2011.05.11 첫 출근
  2. 2011.05.09 남을 가르친다는 것
  3. 2011.04.21 깨달음을 버리다
  4. 2011.03.26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
  5. 2011.03.17 2011년 3월 시드니의 단상
  6. 2011.03.14 천지불인
  7. 2011.03.02 생긴대로 산다는 것
  8. 2011.03.02 아이들은 명경지수
  9. 2011.02.28 내 안의 기독교
  10. 2011.02.28 주말에는 주일이

첫 출근

소선재에서 2011. 5. 11. 21:05


월요일.
첫 출근 오전 11시 반. 퇴근 오후 네시반. 환자 딱 한명, 클리닉 주인인 카일리의 일곱살짜리 아들 엘리엇. 침을 놓으려고 했는데 엘리엇이 울고 불고 지랄발광을 하는 바람에 왼팔 척택혈에 하나 놓고 더 못 놓았다.
카일리가 칠개월짜리 딸 린지가 코가 막혔다면서 침을 놓아달라고 하길래, 공손에다 놓고나서, 비익을 놓으려고 침을 찌르니 이 칠개월짜리 애기가 응애~ 하고 비명을 지른다.
카일리가 수요일날 돈을 주겠다고 말은 하는데, 말은 하면서도 돈을 낼 것 같은 분위기가 아니다.
지가 침값을 70불 내면 어차피 그 절반은 자기가 먹는 건데 말이지.
돈 낼 필요없다고 했다.
이래저래 짐정리하고 책상정리.
 
 
수요일.
출근 12시. 퇴근 다섯시. 오늘은 환자 한명도 없음. 벽에다가 트리커 포인트 차트를 스카치테이프로 붙였다. 그리고는 별로 할 일이 없어서 서류정리를 했다. 피자 두조각 데워먹고 컵라면도 먹었다. 카일리가 와서 클리닉 입구에 붙이는 싸인에 대해 얘기했다. 지역신문에 내 광고도 내 준다고. 그래봤자, 지 클리닉광고겠지만.
리셥셔니스트 바바라는 영국사람이다. 동양문화에 대한 호기심 내지는 호감. 스스로 인털리전트하다고 생각하는 백인들중에 이런사람들이 있지. 지적인 선망이랄까? 알고보면, 이것도 결국에는 지 욕심이지만.
그래도 어찌보면 내 사무실이 생긴 느낌이다. 책상 하나 베드 하나뿐이지만, 별 방해받는 것 없이 나 혼자 사무실에 고요히 앉아있는것. 어찌보면 내가 대학교때 꿈꿨던 모습이 아닌가?
산다는 건 감사하고 행복할 일 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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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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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말한다. 열가구 정도의 작은 마을에도 반드시 나처럼 충직하고 신의를 중시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만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십실지읍 필유충신 여구자언 불여구지호학야 (十室之邑 必有忠信 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

 

논어 공야장편에 나오는 말이다.  나만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어찌 보면 아주 단순한 말이다. 나만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니. 이 말은 공자는 공부하기를 좋아했다는 말로 이해될 뿐이고, 공자가 얼마나호학하는 사람이었는지에 대한 근거로 인용될 뿐이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을 조금 달리 생각해본다. 나는 이 말을 배우기를 좋....로 해석하기 보다는배우기에 보다 더 초점을 둬서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나의 얘기는 이렇다.

 

'배운다'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일단가르친다로 상정해보자. 물론, 남을 가르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배우는 것이기도 하다. 가르침이라는 행위를 통해 나의무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르친다는 것은 배운다의 다른 말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좁은 의미의 가르친다, , 나의 앎을 다른 이에게 전수하는 행위에만 초점을 맞춰 보기로 하자.

 

배운다의 반대말로가르친다를 상정하고, 여기에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라는 공식을 대입해보면, ‘배운다 '가르치지 않는다' 내지는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가 된다.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라는 것이 곧바로배운다가 되지는 않지만, ‘배운다에는가르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포함이 된다. 배우는 것은 모르는 사람의 행위이고, 모르는 사람은 가르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위에 인용한 공자의 말에 대입해 보자.

 

나만큼 가르치려 하지 않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가 된다.

 

나는 여기서 우리의 삶을 본다. 우리는 평생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산다.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부모는 자식을, 자식은 부모를, 상사는 부하를, 부하는 상사를, 나는 남을, 남은 나를, 우리는 끊임없이 남을 가르치고 가르치려 하고 가르쳐주고 싶어하면서 산다. 우리는 왜 그렇게도 가르치려 하는 것일까?

 

나는, 공자는 가르치려 하지 않는 사람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공자는 당시 매우 유명한 스승이었다. 2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영향력이 막강한 선생이다. 그가 이렇게 힘있는 스승이 된 것은 그가 누구보다 ‘가르치려 하지 않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을 가르치려 하지 않았기때문에 뛰어난 스승이 되었고, 남을 가르치려 하기 보다 자기의 무지에 대해 배우려고만 했기 때문에 시간을 뛰어넘는 스승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나만큼 가르치려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라는 공자의 말에서, 나는, 남을 가르치려고 하는 자는 결코 남을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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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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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호 2010-11-08 (월) 09:27
그러니까, '나는 못깨달았다'는 말에도 역시,
'깨달음'이 여기 아닌 다른 곳, 다른 사람의 일이라는 생각이 있는 거군요.
다시말해, '깨달음'이라는 그 어떤 권위 내지는 기존의 관념에 종속,지배당해있는
거라는 거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인지 아닌지 쫌 머리가 복잡해지면서........

깨달았다 못깨달았다가 아니라, 깨닫지못했다라는 관념속에 들어있는 그러니까, 외부의 권위에 눌려서,아니, 외부의 권위에 종속되어서는, 아니, 거기에 세뇌되어서는, 뭐 그런건지.... 좀 더 생각을....

음.. 하여튼 요잔님 감사드립니다. 


막 울화가 치밉니다
글쓴이 : 요잔 (나눔지수:3040점) 날짜 : 2010-11-08 (월) 00:49 조회 : 47
글주소 :
오스카 멤버가 이제 열 명 남짓인데
그 중에 깨닫지 못한 분이 무려 세 명이나 계시는군요.
분위기를 보아하니 말을 안할 뿐이지 나머지 분들도....
 
이건 뭐,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믿는 것보다 더 확고한 믿음입니다. 
 
제가 명상계에서 만나는 거의 모든 분들께 하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분들로부터 완전히 무시당하는 말이기도 하지요.
 
"나는 깨닫지 못했다."는 이 믿음!
선언에 가까울만큼 확고한 이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요?
깨달음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은 의심과 회의를 갖고 있으면서
"나는 못 깨달았다"는 생각은 어찌 그리 확고하신지요?
도대체 근거가 무엇입니까?
 
P.S:
"그럼 너는 깨달았냐?"
이런 등신같은 질문을 하도 많이 들어서 이젠 막 울화가 치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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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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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로 된 읽을거리가 귀한 이곳, 오랜만에 책 한권이 손안에 들어왔다. 노무현의 자서전으로 나온 운명이다’.  많은 부분은 예전에 접한 텍스트라 새로운 부분은 많지 않았다. 퇴임 후 서거에 이르는 부분은 가슴이 아파 읽기가 힘들었다. 그가 스스로 말한 참여정부의 는 주목할만 했다. 한미FTA나 대연정제안, 이라크파병과 양극화, 비정규직문제에 관한 그의 소회는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2000년들어 2010년까지 10년동안 한국사회의 가장 큰 뉴스는 무엇일까? 나는 주저없이 노무현의 대통령당선과 그의 죽음을 들고 싶다. 노무현은 그가 대통령으로 있었던, 정확히 말해 대통령후보가 된 2002년부터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린 2009년까지 한국사회를 비추는 거울역할을 했다. 그것도 거의 모든 것을 비춰내는 거울이었다.

 

그를 통해서 한국사회의 많은 모습들이 비춰졌다. 익숙하다고 넘겨버리고 세상은 그런 거라고 지나쳐버린 것들이 노무현에 의해 질문되어졌다. 그의 존재 자체가 질문이었다. 노무현도 그냥 그렇게 살면 좋으련만 이 노무현이라는 사람은 세상사람들이 사는 방식대로 살지 않았다.

 

이런 질문은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그냥 대통령이 알아서 하면 좋을텐데, 대통령은 국민이 대통령이라며 묻고 묻고 또 물었다. 사람들은 피곤했다. 지쳐갔다. 당신에게 표를 줬으니 이제 당신이 알아서 하면 될 일인데, 노무현은 그렇지 않았다.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된 날 밤이 기억난다. TV속의 노무현은 환호하는 지지자들에게 물었다. ‘이제 제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사람들은 잠시 주춤하더니, 곧이어 감시. 감시라는 단어를 연호했다. 나중에 노무현은 이때의 반응을 굉장히 섭섭하게 생각했다고 밝힌 바 있다. 단지 자기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대통령이 되었으니 이제는 당신 혼자 알아서 하라는 것이 서운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질문을 받는 것만도 피곤한데, 그 질문은 사람들이 보고 싶지 않은 것까지도 보여주는 거울이었다. 노무현의 질문은 생각을 해야 했고, 그의 말은 사람들의 욕심과도 충돌했다. 더군다나 하이에나언론들은 노무현을 물어뜯기 바빴다. 사람들은 세상이 시끄럽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이에나언론과 그 뒤에 한국을 쥐고 흔드는 무리들 때문이 아니라, 이 모든 시끄러움의 원인이 계속 질문을 던지는 노무현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원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10%정도되는 노무현 최후의 지지자를 제외하고는 너나 할 것 없이 노무현탓을 했다.

 

노무현과 참여정부의 가 있다면, 그것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한미에프티에이를 추진해서? 대연정을 제안해서? 미국의 용병으로 이라크에 파병해서? 부동산값이 올라서?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피곤했던 것이다. 존재자체가 질문인 노무현이 피곤했고, 참여를 요구하는 참여정부가 피곤했다.

 

사람들은 말로는 자유을 요구하면서, 자유의 필수요건인 판단과 책임은 지기싫어한다. 사실은 자유로운 삶을 살기가 싫은 것이다. 입으로는 자유를 떠들지만 사실은 다른 이들이 시키는대로 다른 이들로부터 주어진 틀안에서 사는 것이 편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자유인줄 안다.

 

이런 사람들에게 노무현과 그의 정부는 자율을 얘기하고 분권을 얘기했다. 노무현과 참여정부의 과는 여기에 있다. 자유롭게 살기 싫은 사람들은 그래서 노무현을 죽여버렸다.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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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0년 11월은 잊을 수 없는 달이긴 하다. 웨스트 라이드 집 베란다에서 시끄러운 아들레이드스트리릿을 내려다보며, 나는 깨달음을 완전히 포기했다.

2.
굉장히 보수적인 사람들이 스스로를 대단한 진보로 아는 경우가 있다.

보고 있으면 웃기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하고 그렇다. 웃기는 이유는 그이들의 허황된 자기자랑이 우습고, 애처로운 이유는 그 겁장이들이 폼잡고 용감한 척하는게 불쌍하기때문이다.

하기사, 어디가서 자기를 알아달라고 하겠는가? 그 잘난 것 없고 겁많은 불쌍한 중생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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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불인

소선재에서 2011. 3. 14. 22:16

일본에 지진해일이 밀려들었다.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바닷물이 밀려드는 모습은 무시무시했다. 엄청난 자연재해에 가족과 친지를 잃은 사람의 슬픔은 그 무엇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삶의 터전이 산산조각난 상실감도 쉽사리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사람때문이라면 누군가의 잘못때문이라면 비난하고 책임지라고 할 수도 있겠건만, 무심한 바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 그냥 평소의 바다모습일 뿐이다.

천지불인.

도덕경 5장은 天地不仁(천지불인)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천지는 불인하여 만물을 풀강아지처럼 여긴다. 과연 천지는 사랑이 없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한 순간에 앗아가 버렸다. 사랑이 없지않고서는 도저히 할 수가 없는 행위이다.

여기서 이번 지진을 겪은 경험담을 옮겨본다. 일본에 거주하는 사람이다.

제가 있는 도시는 일본 사이타마현의 와코시로 이번 일본대지진의 직접적 피해를 입었던 센다이에서 3백킬로쯤 원전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후쿠시마쪽하고는 2백5십킬로 쯤 떨어진 곳입니다. 따라서 이번 일본대지진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지는 않았습니다.
-중략-
실제로는 더한 일도 있었습니다. 한 부모들은 맞벌이 부모로 방과후에는 학교에서 그아이를 봐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모가 모두 동경에서 귀가가 불가능해졌습니다. 사람들은 동경에서 피난소로가서 밤을 지새웠다고 하더군요. 학교는 그 아이를 학교에서 재우고 다음날 찾아온 부모에게 인계했다고 합니다. 선생님들도 다 자기개인 사정이 있었을텐데 학교같은 관공서가 당장 자기일을 잘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집은 지진이 나면 가스공급이 저절로 중단되고 엘리베이터도 대개 저절로 운영을 멈춥니다. 그래서 우리도 저녁은 휴대용가스버너로 조리를 해서 먹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중단된 가스공급을 다시 시작시키는 방법을 제가 몰랐다는 겁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묻지도 않았는데 안부를 물으며 찾아와서는 한 일본인 이웃이 와서 그걸 켜주고 갔습니다. 사람들이 여러통로를 통해 서로 안부를 묻고 있었습니다. 일본인 사회에도 오타쿠가 있고 하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대개 침착하게 대응하고 서로를 돕고 관공서나 가게도 정상을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카테리나 태풍때는 폭도로 변한 시민들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만 일본에서는 그런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고난은 물론 달가운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또한 견뎌내면 큰 기회가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물론 이런 자연재해가 반가울것일리는 없으며 그것을 잘 이겨내기는 힘든일이지만 잘 이겨내기만 한다면 그것은 일본사회에 큰 재산으로 남게되고 기회가 될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도 정쟁이 심하고 사회적 분열과 환멸이 깊어지고 있는 사회입니다. 전세계에서 정부재정적자가 가장 심각한 나라중의 하나이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젊은 세대의 수는 적고 불황과 미래에 대한 절망이 조금씩 더 깊게 나라를 침투해 들어옵니다. 그럴때 드는 회의는 바로 우리 일본인은 도대체 누구인가 하는 것이죠. 이런 고난의 시기에 남을 위해 헌신하는 일본인들을 보면서 일본인들은 분명 그래 우리가 그렇게 나쁜 사람들은 아니구나 우리 꽤 괜찮은 사람이구나 우리 희망이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거라고 생각합니다. 

지진이 일어나자 정치인들은 당장 정쟁중단을 선언하고 야당은 총리에게 전적인 협조를 약속했다고 합니다. 원자로 폭팔로 사람들이 두려움에 떠는데 그걸 고치겠다고 찾아가는 엔지니어는 내가 죽어도 원자로 붕괴는 막아내겠다는 메세지를 남겼다고 하더군요. 수백킬로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두려움에 떠는 현장에 찾아가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 과장은 아니지요. 문제가 일어나자 당장 음료수회사들은 자판기를 공짜로 개방하고 편의점에서 물을 나눠주는 가게주인도 많았으며 핸드폰회사는 요금을 무료로 했다고 합니다. 방송국도 당장 광고를 중단하고 재난방송에만 주력했습니다. 그 속력을 생각하면 나중에 이돈 어디서 받지, 얼마나 피해가 생길까 따위는 계산하지 않는 빠름입니다. 그런 하나하나가 다 일본의 저력입니다. 
-후략-
출처 : http://www.1-n.co.kr/bbs/board.php?bo_table=board1&wr_id=711

가족과 친지를 잃은 슬픔은 무엇으로도 위로하기 힘들다. 하지만, 살아남은 자에게는 다시  삶이 기다리고 있다. 이런 엄청난 대재앙을 겪고도 삶은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위의 글을 쓴 이는 글을 이렇게 맺었다.

"일본은 월요일 그러니까 오늘부터 부분적인 단전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핵발전소가 문제가 생겨서 전력공급에 차질이 벌어졌기 때문이지요. 일본은 분명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그것을 잘이겨낼것으로 믿습니다."


천지는 불인하여 만물을 풀강아지처럼 여기나, 이 불인이 바로 천지의 사랑이 아닌지. 이번 재해로 고통을 겪는 분들에게 깊은 위로와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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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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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나의 문자중독증에 대하여 커밍아웃한 바 있다. 전에 살던 집은 한국식품점과 가까이 있었다. 금요일이나 주말에 가면 사실  거의 '광고지'에 불과한 교민매체가 쌓여있었다. 이 놈의 문자중독증은 그 중 읽을만한 몇개만 집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못한다. 모든 교민매체를 다 가져오고 그것을 일람하는데에만 몇 시간이 걸린다. 바쁠때는 몇 주치가 쌓이기도 한다. 아무리 광고지에 불과하더라도 꼭 시간을 내서 일별하고서야 버리곤 했다.

기억나는 것으로 주간호주의 '쌈돌이의 호주이야기'인지 하는 칼럼이 기억난다. 이 글을 쓴 분은 얼마전에 교민사회의 일간지 사장으로 취임하셨다는데, 이 연재칼럼으로 한국에서 책까지 내신 모양이다. 사실 이 분의 글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도 아니고, 또 내용또한 그다지 공감이 가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 분이 자기만의 스타일대로 자기만의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매우 존중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이 분의 글에서는 가식이 없다. 잘난 척 하는 것도 없고 아는 척 하는 것도 없고 오히려 그런 것을 경멸하는 대단한 자존감이 엿보인다. 한마디로 매우 솔직한 글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분의 글은, 나의 호불호와는 관계없이, 좋은 글이라는 생각이다. 초라한 자신을 어렵고 현란한 말로 감추는 것 보다는 저잣거리의 말로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훨씬 더 낫다. 최소한 썩은 냄새는 안 나기 때문이다.

이런 자존감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소위 '성공'에서 온 것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삶의 전 과정을 통해서 찾아오는 것이라고 봐야한다. 성공이건 실패건 자신의 삶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알게 되고 자기 자신을 만남으로써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게 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것에서, 이러한 자존감이 나온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 분의 글 중에 인상깊은 칼럼이 있다. (사실 요거 딱 하나다 ^^)

(밑의 링크는 전문보기)

http://weeklyhoju.jkent.com.au/bbs/bbsView.php?id=460252&page=1&code=old_board&bbs_id=2&keyword=%C0%E1%C0%BB&field=content&searchTerm=a

(전략)

“오마니 내 말 좀 들어보이소” 하고 방금 버스 정류장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더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며
“그래 니가 잘 참았다. 괜히 길거리에서 그런 시비를 거는 얘들은 그냥 참는게 잘한거야” 하고 대견스럽다는 눈길을 보내셨다.
그래서 나는 그게 잘 한건 줄 알았다.
그런데 그날 저녁 잠을 자려고 눈을 감았는데... 나에게 담배 한 개피 안준다고 쫀쫀하다고 욕을 하던 그놈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이었다.
내가 잘 참고 잘 한건데 왜 나는 이놈 때문에 잠을 못 자는거지? 하고 그날 밤을 설친 후 다시 학원을 가니 무척 피곤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아른거리는 그놈의 얼굴.. 얼굴... 얼굴들...
루루루루~ 루루루루~~
그래서 나는 깨달았다.
사람은 어느 정도 생긴대로 살아야 제명까지 산다는 사실을...

(후략)

이 분의 칼럼이 내 스타일도 아니고 내 공감도 얻지 못하는 것은 자명하다. 나는 누가 시비를 걸어오면 한대 맞을까 무서워 다리가 달달 떨리고 어떻게 하면 잘못했다고 빌까하는 생각부터 하는데, 이 분은 일단 주먹이 우는 그런 스타일이다. 당연히 나와 맞을리가 없다.

하지만, 이 분도 역시 사람이니 깨달음의 경로는 달라도 깨달음은 같을 수 밖에 없다. 사람은 자기 생긴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자기 생긴대로 안 살려고 하는 것, 바로 그것이 불행의 시작이다. 그럼 여기서 들리는 당연한 반문. '그럼 나 하고 싶은데로 살라는 말이냐?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냐?'

이제 나의 칼럼을 마칠 때가 되었다. 사실 이 한용운 호주XX일보 사장님의 말씀은 틀렸다. '사람은 어느 정도 생긴대로 살아야 제명까지 사는 것'이 아니고, '사람은 자기 생긴대로 살다가 제 명에 죽게 되어 있다'. 사람은 자기 생긴대로 안 살려고 해도 자기 생긴대로 살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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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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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큰 아들의 이야기다. 만 네살이다.

1.

우리집에는 삼년된 피아노가 있다. 디지털피아노다.

 "아빠, 피아노 다 쳤어요"

"다 치다니? 너 피아노 칠 줄 모르잖아"

 맨 밑에부터 맨 위에까지 여든 여덟개의 건반을 차례로 다 눌렀다는 얘기였다.

 2.

아내에게 험담을 늘어놓던 중이었다.

"아니 짜장면이 짜장면이지. 자장면이 표준어라는데, 웃기지 않아? 아나운서들이 자장면이라고 할 때마다 웃겨죽겠어. 그게 경음이라 그런다는데, 그러면 짜증도 자증이라고 하지? 참 나~"

아이가 끼어들었다

"아빠, 짜장면이라고 하면 안되는거야? (목소리를 죽여서는) 그럼 조그많게 짜장면이라고 하면 되겠다."

하기사, 왜 안 되겠는가? 아이들 만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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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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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고등학교때부터였던 것 같다. 교회나가는 급우들을 난 놀려댔었다. 대학때도 그랬다. 같은 과 학우들이 기독교계통의 동아리에 나가는 것을 난 내심 조롱했었다.

사회에 나가서도 그랬다. 어딜가나 교회다니는 신자들은 있었고, 종교얘기가 나오면 빠지지 않고 몇시간씩 설전을 벌였다. 이상하게 난 기독교신자와 논쟁에 휘말리는 일이 잦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럴수록 기독교에 대한 미움은 커져만 갔다.

교회에 가보기도 했다. 양재동의 온누리교회였다. 밴드의 반주에 맞춰 이어지는 찬송과 기도, 찬양. 국민학교때 다녔던 침례교회의 예배와도 대학때 다녔던 성당의 미사와도 달랐다. 아주 달랐다. 사람들은 눈을 감고 손을 들고 씨씨엠을 불렀고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었다. 누가 먼저인지는 모르겠으나 시드니 힐송처치의 예배와 매우 흡사했다.

내가 한때 스승으로 모셨던 이는 이를 두고 '이성을 억누르고 감성을 고조시키는 것으로 무당의 접신행위와 다를게 없다'고 하였다. 그때의 나는 이 말을 듣고 반가웠다. 그 분의 전생은 수보리존자라고 믿을 때였다.

어디서 주워들은 것을 나는 내 말처럼 옮기기도 하였다. 신약은 진리이나, 구약은 아니라고. 양심상 막연히 옮길 수는 없으니 4복음서를 읽었다. 어디서 또 본 건 있어서 요한복음은 두어번 더 읽었다. 그래도 여전히 기독교는 싫었다.

그러다 어느때부터 나는 기독교를 싫어하는 것을 멈추었다. 내가 별반 기독교신자들과 다를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로 말하자면 태어난 시간만 알면, 보지도 못한 사람의 사람됨을 안다는 사람이니, 저 쪽에서 보자면 무당의 접신행위보다 더 한 미신을 '믿는' 사람이다. 영혼이나 전생이나 대상이야 다르지만 믿는다는 것은 같다. 가슴을 벅차게하는 노래소리에 성령의 충만함을 느끼는 것이나, 조용한 자리에 가부좌를 하고 마음의 평화를 구하는 것이나 그다지 다를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내가 성경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이러쿵 저러쿵 말한 것은 더할 나위없는 나의 오만함이었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같은 책을 예전에 보았다면 이런 좋은 책이 있다니, 쌍수를 들어 환영했겠지만 지금보자면 내가 고등학교때 급우를 놀렸던 얘기 그 이상도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기독교신자가 됐다거나 된다는 얘기는 아니다. 내가 나를 보건데 난 죽을때까지 교회를 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내 딸이, 사주를 보면, 아무래도 셋째딸이 교회를 나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지금의 나로서는 흔쾌히는 아니어도 막지는 않을 것 같다. 아마 그 날 내가 좀 배가 부르다면 '좋아, 잘 다녀봐라' 할테고, 만약 배가 좀 고플때라면 '좋아, 하지만 절대로 나한테 전도하면 안 된다' 이럴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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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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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코스를 끝내고, 포스트 그래듀에잇 코스를 에이엔유에서 시작했습니다. 한국말로 하자면 호주 국립 대학. 학생증도 새로 받았지요. 강의를 들으러 가는데, 강의실은 작년까지 4년을 공부했던 유티에스. 켁! 학교를 졸업했는데 또 같은 학교로 강의를 들으러가니 기분이 복잡미묘하더군요. 같은 공간이라도 시간을 달리하니 영 생소하더군요. 토 일요일에 보는 학교 모습은 또 달랐습니다.

 

첫날 토요일.

강의를 듣는 학생들은 그야말로 전세계출신에 연령대도 다양합니다. 강의가 끝나고 하교길에 오십은 넘어보이는 인도출신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저한테 말을 걸어왔습니다. 백그라운드는 자칫하면 무례한 질문이기 쉬운데, 이 아저씨는  서슴없이 묻더군요. 코리안이라는 대답에 바로 코리안 커뮤니티와 교회를 말합니다. 그러려니했는데, 힐송처치 어쩌고 하면서 한번 오라지 뭡니까?

 

힘주어 말했습니다. I won't. I don't think I need to go to church.

 

새로 이사를 해서 중간에 기차를 갈아타야합니다. 한적한 토요일 늦은 오후. 기차안에 흰색 반팔 와이셔츠를 입고 짧은 머리를 하고 왼쪽 가슴엔 검은색 명찰을 패용한 젋은 백인남자가  세 줄 건너 앞에 앉았습니다. 출발전부터 저를 힐끔힐끔 보더군요. 예감이 왔습니다. 몇 정거장지나자 제 앞 자리에 와서 앉더군요.  Church of Latter Day Saints 명함을 주려고 하더군요. 건성건성 대답해주다가 내릴때 말했습니다. Sorry, that's not my way.

 

둘째날 일요일.

 

쉬는 시간에 강의실을 나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학교에서 이렇게 많은 한국사람을 보기는 처음입니다. 대부분 20대입니다. 게다가 여자분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강의실 안에서는 기타소리 드럼소리 키보드소리가 요란합니다. 저를 보고 곳곳에서 '안녕하세요?' 한국말로 인사를 합니다. 넥타이를 맨 중후한 신사분은 저보고 식사라도 하고 가라고 합니다. 젊은 남학생에게 물었습니다. "어디 교회인가요?"

 

바로 옆 강의실에는 인도네시아사람들이 가득했습니다. 테이블에는 바이블이 쌓여있었고요. 유티에슨츤 일요일에 교회로 탈바꿈한다는 것을 지난 4년간 전혀 몰랐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 한국사람들은 곳곳에 모여 앉아서 얘기를 나누고 있더군요. 저보고 식사하라면서 밥을 건네주었습니다. 그날 점심은 도시락에 얻은 밥에 배가 가득 불렀습니다. 콜라캔이라도 하나 주셨으면 훨씬 더 좋았을 것을. 할렐루야가 나올뻔하다가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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