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시

소선재에서 2009. 2. 28. 21:35
까린바바님은 이미 돌아가신듯 하군요.
 
저도 한때는 스승님이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스승님이나 구도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데,
 
까린바바님의 글(물론 이곳 명상나라에 있는)은 제게 많은 것을 주었습니다.
 

'멈추고 나를 바라볼때, 나를 바라보는 그것은 그럼 마음이 아닌가요?' 하는 질문이 생겼습니다. 
 
문답게시판이 없어서요. 어쩌면 문답게시판이 있는게 더 이상하겠습니다만.  

이곳 상담게시판에 오면 작년 10월쯤 자살도 운명인가요? 라는 글에 달린 첫번째 답변이 떠오릅니다.
 
운명과 자유의지에 대한 아주 명쾌한 설명이었다고 기억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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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반 R1147 2009.02.25 00:07     
마음이 멈춘 그것이 "나"일 뿐입니다.
멈추고 나를 바라본다는 것은 고로 동어반복입니다.

마음이 그 자유를 잃고 멈추게되면 나는 자연스럽게 행복과 함께 드러나게됩니다.
그것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멈추기만 하면 됩니다.

마음을 멈춘다는 것은 물이 새들어오는 배에서 그 물을 쉬지않고 퍼내는 것같은 치열한 과정입니다.
순진한 마음으로 물 한바가지 퍼냈다고 마음을 멈췄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물이 들어오든 말든 내몰라라하고 멍~한 상태를 마음을 멈췄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면 물이 들어오자마자 퍼내버리는 어떤 시스템을 만들겠지요.
그것이 각종 명상이나 종교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은 어떤 시스템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멈추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마음을 멈춘 곳에 무엇이 있는지 상상하는 것 자체가 마음입니다.
한쪽에서 바가지로 열심히 물을 퍼내는데 다른 한쪽에서 펌푸로 물을 올리는 격입니다.
그러니 의심의 여지없이 마음을 멈추는 것에 모든 심혈을 기울일 일입니다.

얄굿게도 배에서 물이 거의 빠져나가 밑바닥이 보일때가 되어서야 
마음이 멈춘 곳에 답이 있다는 확신이 생깁니다만
멈추지 않고 물을 퍼내기위해서 처음부터 필요한 것이 확신입니다.
그래서 스승이 필요한 것입니다. 달리 스승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대신 물을 퍼주는 것이 스승이 아닙니다. 

수학이나 과학같은 것 잘하는 사람은 
답이 0으로 떨어지는 어떤 묘한 진리감각같은
스승없이 어떤 확신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과학이 스승이라 할 수도 있겠지요.

지금 현재의 마음이 비워진 마음인지 아닌지 판단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상쾌한데 이 마음이 비워진 마음이 아닐까?" - 아닙니다.
마음이 정말 비워지면 조금의 의문도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니 멈추고 나를 바라보는 그것이 마음인지 아닌지 궁금해하면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을 멈추는 것이지 마음을 쓰는 것이 아니기때문입니다.

♡질문자 2009.02.25 18:52     
질문올린 사람입니다. 첫번째 답변주신분께 먼저 감사인사부터 드리겠습니다.
전 초보자라 아직 '주시'한다는게 어떤건지 잘 몰라서 이곳 게시판에 질문을 올렸습니다.

첫번째, '주시'한다는 것이,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지금 말하고 밥먹고 움직이는 나를 '또 다른 내'가 지켜보는 그런 형태의 의식적인 노력인가요? 물론, 까린바바님은 어떤 노력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만, '주시'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몰라서요. 만약에 그렇다면, 위빠사나와 비슷하다고 얘기할 수 있는 건지요?

두번째, 화가 나서 막 화를 내고 있을때, 어떨때는 지금 내가 화를 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이런 것을 주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요?

세번째, 그리고 '주시한다'고 했을때, 과연 어떤 것을 주시하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어 주위의 계속적인 소음이 어떨때는 '인지'가 되고, 어떨때는 '인지'가 안 됩니다. 
그 소음이  '인지'가 될 때 '생각을 멈추고 그 소리를 그냥 받아들이는 것'을 주시한다고 하는 것인지(물론 생각을 잠시라도 멈춘다는것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만), '인식이 되는 소리'를 듣고 있는 나를 주시하는 것인지요?

사실, 이런 것이 질문거리가 되는지 안 되는지, 해도 되는 질문인지 아니면 쓸데없는 질문인지도 잘 모릅니다. 제가 잘 몰라서 그러니, 어떤 답변이라도 감사하게 생각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마음을 멈춘다고 했을때, 그 '마음'은 불교에서 말하는 '번뇌'와 같은 걸로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도반 R1151 2009.02.26 13:16     
첫번째, 주시는 마음과 나를 분리해내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결국 마음은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한 공부입니다.
"주시해야지~"하는 노력자체도 마음이기때문에 
마음을 부정하려는 공부를 위해 다른 마음을 키워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모든 일을 함에 냉정함을 잃지 않고 자기 마음의 흐름을 감각하려는 무의식적 습관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두번째, 그것이 주시가 맞습니다. 하지만 한 층 더 깊이 내려가야합니다.
내가 화를 내고 있다는 생각에는 어떤 모순이 있습니다. 
그것을 지켜보는 나는 화를 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화를 내는 나는 원인과 결과에 묶여 어쩔 수 없이 나타난 현상에 불과하고
그것을 지켜보는 나는 그 모든 원인과 결과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존재임을 이해하십시오.
몸이 자기라는 뿌리깊은 착각때문에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세번째, 주시의 대상은 나입니다. 몸이 나라는 착각이 있을동안은 그 몸을 주시하면 됩니다.
하지만 결국 몸만 나는 아니므로 모든 것을 주시하게 됩니다.
몸을 주시할 동안은 "내가 했어!"같은 행위의 감각을 주시하면됩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주시함에도 "나를 느껴줘!"하는 감각을 주시하면 됩니다.

모든 자극은 그것이 감각되어지는 존재가 없으면 일어날 수 조차 없습니다.
텅 빈 존재가 주인이고 자극은 나타났다 사라지는 손님입니다.
자극이 "나를 느껴줘" 할때마다 그건 내가 아니라고 부정해야합니다.
손님이 주인자리를 빼앗으려고 온갖 화려한 쑈를 하지만 그것은 모두 가짜일 뿐입니다.
모든 가짜를 주시를 통해 일소하는 것이 결국은 "멈춤"입니다.

거기엔 주인밖에 없습니다. 
나만 존재할 뿐입니다.

모든 마음은 번뇌입니다. 행복한 마음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으로 이해할 수 없고 비움으로써 이해해야합니다.

  ♡질문자 2009.02.26 13:43     
답변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많은 선사나 스승들의 가르침이 어떨때는 너무 막연하다 싶은 느낌도 있었는데, 이곳 명상나라의 글들을 보고 어렴풋이나마 뜬구름같은 말은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시'에 대해서 좋은 가르침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질문자 2009.02.26 19:09     
염치없지만 하나 더 여쭤보고 싶습니다.

책을 읽을때나, 남의 말을 들을때도 '주시'가 가능한가요? 제가 주로 해야하는 일이 남의 말을 듣고, 책을 읽고, 또 글을 써야하는 일이라서요. 제가 읽는 행위를 좋아하는데, 텍스트에 빠져있을때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고 있습니다. 이걸 '집중'이라고 한다면, 주시와 집중은 양립가능한 건가요? 마찬가지로 누군가와 대화할때도 '주시'가 가능한지 궁금합니다. 
제 생각엔 주시를 한다고 하면, 단지 화났을 때같은 때만 아니라, 눈뜨고 있을때는 언제나 주시가 이어져야 하는게 아닌가 생각됩니다만.
주시가 끝없이 이어지면, 잠들어 있을때도 주시가 되나요?
자꾸 여쭤만 봐서 송구스럽습니다. 귀한 답변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제 이곳에서부터 시작해서 어찌어찌해서 다니다 보니, 대구에서 도덕경을 강의하시는 분의 이야기를 읽게 되었는데요, 그 분의 말씀이 키란 바바님의 말씀과 매우 흡사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분은 책도 내고 하시는 분이지만, 자신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분들중에서도 참 훌륭하신 분이 많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물론, 어느 분 말씀대로 '스스로 깨달았다면서 자기를 높이는' 그런 분들도 많겠지만요.

  ♡질문자 2009.02.27 09:46     
주시의 목적이 그럼, '번뇌의 제거'에 있는게 아니란 말씀으로 이해가 됩니다. 번뇌가 일어나는대로 주시하는 건가 봅니다. 말로는 가능한데, 번뇌가 일어나면(마음이 작용을 하면) 말씀하신대로 '주시해야지~'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명상이 무엇인지 굉장히 막연했는데, 말씀해주신대로라면 은 그냥 지켜보는 것인가 봅니다.

  ♡질문자 2009.02.27 09:49     
자극이 "나를 느껴줘" 할때마다 그건 내가 아니라고 부정해야합니다. 
=> 여기서 '나'는 자극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라고 생각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도반 R1156 2009.02.27 11:11     
책을 읽을때나 남의 말을 들을때도 주시는 가능합니다.
주시는 처음에는 행위로 시작하지만 엄밀히는 행위가 아니기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처음 아이를 가지면 처음에는 다른 일을 전혀 할 수 없지만
나중에는 아이가 어떤 상태인지 항상 감지하면서도 다른 일을 척척 해나갈 수 있는 것과 유사합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주시와 집중은 양립이 가능합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내가 아닌 다른 것처럼 의식한다면 아이를 보는동안 집중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이를 돌보는 어머니는 오히려 마음이 안정되고 더욱 집중할 수 있습니다.

주시는 자나깨나 무엇을 하던간에 지속됩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런 깊은 주시는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더욱 철저히 주시하려는 욕심만 거대해짐으로써 부작용만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마음을 흐르는 대로 흐르게 하면서 
그때 그때 관찰하는 것부터 차근차근 해나가시길 바랍니다.

번뇌가 일어날때마다 "주시해야지~"하는 마음이 일어났다면 그대로 놔두십시오.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은 마음입니다. 그것은 정상적인 현상입니다.
하지만 그 주시를 통해서 뭔가 더 좋은 결과를 이루고자 욕심을 부린다면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인위적인 주시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주시가 아니라 욕심일 뿐입니다.

"나를 느껴줘"라고 표현한 것은 마음의 근원을 감지하는 방법의 하나의 예를 든 것입니다.
모든 마음의 근원은 "나"에 대한 생각입니다. 그래서 자극에 대해서 "나를 느껴줘"라고 
감정이입을 함으로써 자기자신의 마음이 그 자극을 느끼고자하는 마음을 역지사지의 원리처럼
주시할 수 있게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방법적인 것은 자신의 주시의 단계가 깊어짐에 따라 
자신의 상태에 맞게끔 자연적으로 터득하게 됩니다.
자신이 이해하기 힘들고 받아들이기 힘든 방법은 과감히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모든 방법적인 것들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주시의 원리를 터득하기 전까지는 참고사항이 될 뿐입니다.
너무 이런 가르침아닌 가르침에 연연해하지 마시고
스스로 깨우친 부분을 직접 실천해봄으로써 그 진위여부를 확인해나가보시길 바랍니다.

도움은 항상있으니 서두르지 마십시오.

  ♡질문자 2009.02.28 09:15     
고맙습니다. 많은 도움이 되고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답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곳 게시판에 처음에 글을 올리고 삭제버튼을 찾았는데 없더군요. 삭제기능이 없는 것이 오히려 더 잘 된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귀한 답변 얻을 수 있었습니다.

자상하게 말씀해주신 점 또한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도반 R1158 2009.02.28 10:09     
삭제버튼이 없어 여러번 질문하신것을 서두른 것이라 착각했군요. 미안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멈춘 마음에 가까운 상태입니다.
사실은 상당히 내공이 높으신 분 아닌가요? ^^;
님의 정진을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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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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