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 우파 그런 얘기가 아니고요, 진짜 빨간색이 안 나오는 텔레비젼얘기입니다.
 
1.
제가 이곳에 온게 만4년이 좀 넘었습니다. 결혼하자마자 이곳에 바로 왔습니다. 집을 얻고 난 다음에는 이것 저것 가전제품을 마련해야했지요. TV도 사고 냉장고 세탁기 청소기도 샀습니다. TV는 TEAC의 제품인데, 한국에서 직장일하면서 눈에 익은 브랜드였습니다. 냉장고 세탁기는 LG것이고요, 청소기는 VECTA인지 그렇습니다. 한국에서는 혼수용품으로 양문 냉장고다 LCD TV같은 것을 사나 본데, 수입없는 신혼부부는 당연히 제일 싼 물건으로만 사야했습니다.
 
얼마전 청소기가 고장이 났습니다. 호스이음새부분이 깨져서 테이프로 둘둘 말아 쓰다가 길거리에 누가 청소기를 내다버린게 눈에 띄어서 호스를 맞춰보니 같은 제품이었습니다. 부품을 갈아끼우니 횡재한 기분이 들더군요. 그런데 며칠있다가 청소기 파이프 부분이 부러졌습니다. 본드로 붙이고 테이프로 붙여서 계속 쓰고 있습니다.
 
얼마전에는 TV가 색깔이 이상해지더군요. 빨간색이 안 나오니 죄다 초록색 톤의 몬스터색깔로 나옵니다. 옆구리를 몇대 쳐주면 다시 원래대로 색깔이 돌아오긴 하는데, DVD를 볼때는 옆구리를 백대를 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 TEAC는 방송장비도 제작하는 곳인데도 기껏 4년썼다고 이렇게 고장이나니 새삼스럽게 국산제품의 품질이 두드러져 보입니다.
 
이곳에서 삼성제품은 고가품입니다. LG는 삼성제품보다는 약간 저렴한데 역시 품질이나 디자인이나 세계최고수준이고요. 자동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 동생은 독일차를 타는데 한국차보다 좋은 걸 모르겠더군요. 육중하고 단단한 느낌은 있지만 유지비도 많이 들고요. 미국처럼 여기서도 일본차들이 인기가 좋은데, 한국차도 나무랄데 없습니다. 좀 개성이 없어서 그렇지, 디자인이나 품질이나 어디 하나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한국차가 잘 팔리는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지요.
 
어떤 분들은 이런 삼성이나 LG, 현대 기아차를 보면서 한국사람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저는 글쎄요, 뭐 한국사람들 힘들게 일하고 연구해서 좋은 물건 만드니까 잘 팔리는 거겠지, 뭐 그런 생각밖에는 안 듭니다만. 그리고, 한국에 있는 분들은 이렇게 좋은 가전제품, 좋은 자동차 타면서도 이게 좋은 건지도 잘 모르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이 듭니다.
 
2.
어디서는 설겆이같은 걸 할때, '주시'하라고 하는데, 저는 설겆이 할때마다 참 짜증이 많이 납니다. 물론 짜증나는 것도 주시해야겠지만, 짜증나는 판에 주시고 뭐고 되질 않더군요.
 
저는 설겆이거리가 쌓여 있는 걸 두고 보지 못하는 편이어서, 밥 먹으면 바로 설겆이를 하는데 결혼하고 보니 혼자 자취할때와는 설겆이 분량이 비교가 안 되더군요. 자취할때는 밥솥채로 먹고 냄비채로 찌개먹고 하니까 설겆이가 부담이 안 됐는데, 이젠 밥 그릇 국 그릇 끝도 없고, 그래서 한국에 갔을때 식구들 수대로 식판을 사가지고 왔는데, 그렇다고 냄비 후라이팬 설겆이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애기들 것까지 끝도 없습니다. 저는 제 먹은 것만 겨우 하고 나머지는 아내 몫이 되지요.
 
설겆이를 할때마다 드는 생각은, 예전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겁니다. 옛날에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거나 아니면 마당에 펌프나 수돗대에서 물을 받아서, 그 물로 쌀도 씻고 밥도 하고 설겆이도 하고 그랬을텐데요. 어디선가 읽은 기억에 '뜨거운 물 나오는 집에서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을 어릴때 했었는데, 지금은 어릴 적 소원이 이루어져서 버튼만 누르면 온수가 쏟아지는 집에 살고 있지만 어쩐 일인지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얘기가 생각납니다.
 
부엌도 집안에 있고, 뜨거운 물도 틀기만 하면 바로 나오고, 따로 물 버릴 필요도 없는 싱크대가 있어도 이렇게 설겆이가 힘든데, 옛날 사람들은 밥해먹고 사는게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습니다.
 
3.
그래서 드는 생각이 그래봤자입니다. 좋은 거 가져봤자 좋은 것인줄도 모르면 좋은 것도 아니고, 또 안 좋다고 해도 나만 그런게 아니라면 안 좋은것도 아닌게 아닌가 뭐 그런 생각입니다. 돌이켜 보고 앞을 내다보면 더 좋아진다고 해도 좋을 것도 없지 않을까, 특히 갈수록 진화하는 핸드폰을 보면 참 쓸데없다 싶기도 하고요. 그래도 인터넷으로 편지주고받는 건 또 좋은 것 같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세계최고의 인터넷강국에 세계최고의 품질좋고 값싼 제품이 널려있는 곳.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만족이 안 되고 오히려 그런 모습을 위해 힘들게 살아가는 분들이 생각납니다. 저는 당분간 빨간색이 안 나오는 텔레비젼을 옆구리 때려가면서 볼 생각입니다. 어차피 잘 보지도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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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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