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샘이 깊은 물 표지(2001년 10월호).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2001년 11월호가 마지막이다.


대학교다닐때 도서관에서 놀았다. 난 돈이 없었고 학교도서관은 무료였다. 도서관에서 나는 이것 저것 읽으면서 놀았는데, 책도 읽었고 신문도 읽었고 시집도 읽었고 그리고 잡지도 읽었다. 학교도서관 정기간행물열람실에는 '월간 사진'같은 잡지도 있었고 - 예술적인 누드 사진은 항상 누군가에 의해 찢겨져 있었다 - '건축'같은 잡지도 있었고, 그리고 '샘이 깊은 물'도 있었다.

샘이 깊은 물의 표지사진은 언제나 흑백의 젊은 여성사진이었다. 표지 안쪽에는 '어디에 사는 누구씨'라고 표지사진의 인물에 대한 설명이 있었는데, 언제나 일반인이 그 모델이었다. 그 몇 페이지 뒤에는 의례히 '강운구'의 사진이 있었는데, 나는 그의 사진이 좋았다. 일테면 강원도 산골의 '너와집' 사진. 고추를 말리는 사진. 시골 할머니의 사진. 그 모두가 좋았다. 강운구의 사진은 별 얘기가 없는 듯하면서도 은근히 얘기가 많은 그런 사진이었다. 부담스럽지 않으면서 묵직한, 그리고 조금 떨어져있으면서도 친근한 그런 사진이었다.

나는 샘이 깊은 물의 기사도 좋았다. 그때 그러니까, 90년대 초반이었는데 '이주향교수'의 칼럼도 종종 실렸다. 나는 한번은 이주향교수에게 반론비슷한 편지를 보낸 적도 있다. 나중에 이주향교수는 샘이 깊은 물에 실린 자신의 글을 책으로 펴냈는데, 잡지의 글과 달랐던 기억이 있다. 내심 나의 편지가 효과가 있었나 보다는 추측을 해보았다.

이제 오래전 일이라 어떤 기사들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뒷 편에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의 구술을 그대로 활자화한 '못다한 이야기'인지 '가슴에 담은 이야기'인지 그런 기사가 있었다. 사투리를 그대로 활자화한 탓에 읽는데 시간이 꽤나 걸리는 그런 글이었다. 그리고, 잡지 맨 뒤에는 내가 제일 좋아했던 '논평'이 있었다. 어디에서도 그 어느곳에서도 들을 수 없는 반가운 소리를 접할 수 있던 곳이었다. 예를 들자면 그때 그 시절에 벌써 샘이 깊은 물은 '붉은 악마의 전체주의 파쇼적 위험성'에 대한 얘기를 하곤 했던 것이다.

샘이 깊은 물 잡지의 제호는 '샘물체'라는 폰트의 효시이기도 하다. 내 동생이 샘이 깊은 물에 그 폰트에 대한 문의를 했던 것 같은 기억도 있다. 아래아한글의 가는 안상수체를 보고서는 '샘물체'의 모방이라고 느끼기도 했다. 종성받침이 아래로 내려와서 붙는 샘물체는 단아한 느낌으로 그 잡지의 이미지와도 정확히 일치했다.

샘이 깊은 물은 '한창기'라는 사람이 만든 잡지였다. 그 한창기라는 사람은 고향이 벌교 도읍이라고 한다. 그 잡지는 97년에 폐간되었다. 한창기라는 사람이 이 세상을 뜬 것도 97년도다. 그 잡지를 펼치면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그 잡지는 차분히 담담하게 화려하지는 않지만 세련되게 내게 세상을 구경시켜주었다. 내 20대의 한 시절, 샘이 깊은 물이 있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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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을 기리는 형식이 잡지라는 건 참 드문 일이다. 잡지같이 만든 책 『특집! 한창기』(강운구와 쉰여덟 사람 지음, 창비 펴냄)를 펼쳐 읽어 가노라면 “아하!” 느낌표가 절로 찍힌다. 언론-출판인이란 한마디로는 도저히 짚어낼 수 없는 한창기(1937~97)를 표현하는 데 잡지야말로 맞춤한 매체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복잡 미묘한 고인의 삶, ‘한국적 잡지의 한 완성’을 이룬 망자를 추모하는 데 잡지는 제구실을 톡톡히 한다. ‘뿌리 깊고’ ‘샘이 깊은’ 한국 잡지의 원조(본지 2007년 3월 18일자) 한창기 10주기를 맞아 나온 『특집! 한창기』는 그를 잊지 못하는 59명이 완성시킨 한창기의 전기라 할 수 있다. 좌담과 그림엽서, 사진과 회고 등 다양한 글을 묶은 472쪽 두툼한 책은 제법 잡지 냄새를 피운다.

편집자로서 책머리에 글을 쓴 설호정(전 ‘샘이깊은물’ 편집주간)씨는 “이 책은 한창기에 대한 쉰아홉 명의 낡은 기억의 편린으로 짜 맞추어진 퍼즐 같은 것”이라며 “완성된 퍼즐은 흥미로운 집체 창작물 같다. 한창기의 사진이 아니라 한창기의 그림을 본다고 생각하기 바란다”고 썼다.

설씨는 또 “원래 의도대로 10주기 기념 출간을 하지 않고 11주기에 책을 내게 되었다. 진부한 것을 못 견뎌 하기로는 세상에 둘도 없이 유난했던 한창기를 기리는 책인 만큼,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이 ‘참신한’ 결과에 우리도 만족한다”고 했다.

잡지가 그렇듯이 어느 쪽을 펼쳐 어디서부터 읽어 나가기 시작해도 괜찮다. 한창기에게 강한 인상을 받고 잊을 수 없는 연을 맺은 글쓴이 모두가 고인의 향기를 진하게 풍기는 덕이다. 이를테면 사진가 강운구(전 ‘샘이깊은물’ 사진편집위원)씨가 쓴 ‘한창기 사진’의 한 대목이 그렇다. 고인의 말년을 되짚는 한마디 한마디가 묵직한 울림을 준다.

“한 선생은 전체보다는 세부에 아주 민감했다. 말하자면 숲보다는 잎, 또 그보다는 잎의 맥과 숨구멍이나 솜털 같은 것까지 늘 주목하고 판단했다. 판단의 결론은 그것을 스스로가 좋아하느냐 아니냐인 수가 많았다. (…) 그런 한 선생은 말하자면 좀스러운 구석이 많은 좀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호연지기가 이 나라 다 망친다’고 개탄하던 위대한 좀팽이였다. (…) 그러나 건강검진은 회피했다. 장사 지내는 날, 지곡 마을 선산자락의 한 선생이 묻히는 밭은 자리와 주변, 먼 앞산의 높고 가파르며 날카로운 능선을 둘러보던 윤구병(‘뿌리깊은나무’ 초대 편집장)이 풍수공부도 했는지, 혼잣소리인 듯이 중얼거렸다. ‘한 사장 성질 그대로다, 성질 그대로다’라고. 그렇다면 그야말로 잘 어울리는 명당이겠다.”

박정희(1917~79) 전 대통령과 한창기(1936~97) 두 사람을 대비해 가며 글을 쓴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의 분석은 예리하다. ‘박정희식’에 맞선 ‘한창기식’ 혁명에 대한 강 교수의 논지는 이렇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인가? 박정희도 이런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는 걸 알았을까? 그는 그것마저 해결해 주겠다고 나섰다. 언제부턴가 ‘민족 주체성’을 역설하기 시작했다. 이순신과 세종대왕 찬양을 국책사업으로 추진하더니, 방송마저 ‘민족 주체성’으로 흘러 넘치게 하겠다고 결심했다. (…) 위에서부터 아래로 군사작전식으로 추진된 ‘우리 것 사랑하기’는 실은 ‘우리 것’에 대한 모독이었다.

시대정신은 ‘우리 것’ 다시 보기를 요구하고 있었지만, 박정희의 방식으로 그건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박정희식 히스테리만이 계속되었더라면 ‘우리 것’은 오히려 경멸의 대상이 되었으리라. 한창기의 ‘뿌리깊은나무’가 출현한 건 바로 이런 상황이었다. 그건 박정희식 ‘우리 것 모독’에 대한 소리 없는 저항이었다. (…)

‘뿌리깊은나무’는 딱 한 번 합병호를 낸 적이 있는데, 그건 1980년 6·7월호였다. 신군부의 광주 학살에 대한 항의 표시로 휴간한 결과다. 그리고 8월호가 나왔다. 그러나 그게 마지막이었다. 신군부에 의해 강제 폐간된 것이다.”

강운구씨가 ‘위대한 좀팽이’라 했던 고인의 괴팍한 일상을 엿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연상(이연상세무사무소 대표)씨가 회고하는 한창기씨는 콩트 캐릭터를 연상시킨다.

“그는 순경만 와도 긴장할 만큼 겁이 많았지만 목표한 바를 이루는 데에는 비상한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욕심도 많았다. 자신의 물건에 대한 애착이 커서, 앰배서더 호텔에서 자신의 손톱깎이가 변기에 빠지자, 오물 탱크를 뒤져서 그것을 찾아냈다는 말도 직접 들었다. 한국브리태니커회사를 창립하던 해에, 외제 책상을 샀는데 그것이 퍽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가 1985년에 퇴임을 한 뒤, 내가 그 책상을 이어서 썼고, 브리태니커를 나올 때 후임 여사장이 원하지 않기에 갖고 나와 지금도 쓰고 있는데, 어떤 자리에서 그 사실을 알고 나서는 나중에 한창기 박물관을 만들려고 하니 그 책상을 자신에게 줄 수 없겠느냐고 몇 번이나 말했다. 아마 그가 지금껏 살아 있다면, 여전히 그 책상을 탐냈을 것이다.”

시시콜콜한 일상에서 건져 올린 추억도 한창기를 두루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다. 자잘한 조각보를 맞춰 한 인간을 톺아보는 기쁨이 있다.
“앵보는 한창기 선생의 자작 호이다. 그는 아이 적에 늘 ‘앵앵’ 우는 아이로 동네에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잡지에 글을 쓸 적에는 ‘한앵보’라는 필명을 쓰곤 했다.”(이명현 서울대 명예교수)

“나는 일 년에 나흘, 네 분 스승의 기일에 단식한다. 그 네 분은 함석헌 선생과 공병우 박사, 라즈니시, 한창기 사장이다.”(송현 한글문화원장)

“‘절 짓는 일에는 왜 그렇게 마음을 쓰셨어요?’ 벌교에 다녀온 어느 날 나는 불쑥 물어보았다. 순천시 낙안에 폐사지로 있던 금둔사를 다시 세우는 일에 그가 애를 썼다는 말을 듣고 왔기 때문이다. 그는 무슨 생뚱맞은 소리냐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나 반 중이잖아’.”(소설가 윤후명)

“혹자는 평생을 독신으로 보낸 한창기에겐 일남 일녀가 있다는 말을 하는데, 일남은 ‘뿌리깊은나무’요 일녀가 바로 ‘샘이깊은물’이라는 것이다.”(강준만 전북대 교수)

이 잡지에는 한창기를 한 번도 만난 일이 없는 사람들의 글도 있다. ‘초등학교만 나온 사람이면 누구나 막힘 없이 읽을 수 있는 우리말과 글’을 내세운 그의 잡지 철학이 끌어당긴 인연이다. 칼럼니스트 김규항씨는 수원에서 청계천 헌책방 거리를 수십 번 오가며 창간호부터 폐간호까지 모두 모았던 사연을 돌아보며 말한다.

“‘뿌리깊은나무’를 넘어설 만한 잡지가 없다는 얘기는 곧 ‘뿌리깊은나무’의 ‘보편적 불온성’을 넘어서는 잡지가 없다는 뜻이다. 보편적이면 쓰레기이고 불온하면 보편적이지 않기 십상이다.”

잡지 표지 사진은 한창기가 60년대에 쓰던 수첩 묶음을 찍은 것이다. 막 나온 잡지를 훑어보다가 정상적인 위치에서 0.2~0.3㎜쯤 더 떨어져 있는 마침표를 발견하고는 노발대발한 적도 있다는 고인이다. 지독하게 꼼꼼했던 편집자답게 그는 기록의 대가였다. 저 세상에서도 그 버릇을 버리지 못했을 테니 벌써 손때 묻은 수첩 수십 권이 그의 머리맡에 놓여 있을 것이다.
사진 강운구(사진가)


다시 보는 한창기

한창기는 1936년 전남 보성군 벌교읍 고읍리에서 태어났다. 광주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한 뒤 명성 높은 사전인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한국 지사를 만들어 ‘세일즈 신화’를 만들며 수많은 ‘세일즈 영웅’을 훈련시켰다. 76년 3월 혁신적인 종합 월간잡지 ‘뿌리깊은나무’를 창간해 한글 전용과 가로쓰기, 전문 미술집단에 의한 지면 배열로 한국 잡지사에 새 장을 열었으나 80년 8월 신군부에 의해 강제 폐간당했다.

84년 11월에 여성 종합문화지 ‘샘이깊은물’을 내며 여성잡지 시장에 새 바람을 불어넣었다. 잡지 발간 한편으로 남한 땅 종합 인문지리지 『한국의 발견』 11권, 이름 없는 민중의 구술 역사책 『민중 자서전』 20권, 충실한 해설집을 단 한국 전통음악 음반 전집을 냈다. 일찌감치 한국 토박이 문화에 눈떠 방짜 유기·옹기·백자·한복·한옥·차·염색 등 전통 문물을 되살리는 일에 힘썼다. 97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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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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