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의사 박경철의 ‘아름다운 동행’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저자는 외과의사입니다. 한겨레에 들어가보면, 가끔 이 의사의 얘기를 볼 수 있습니다. 재테크전문가라는 타이틀이 있어 내심 무시했는데, 그의 이야기는 심금을 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죽음을 직접 맞닥뜨리는 현장에 있어서인지,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 실감나게 다가왔습니다. 그의 인상은 둥글둥글하지만 그의 눈은 아주 매서워 보입니다. 죽음과 삶이 맞닿아있다는 것을 그 눈으로 잘 파악하고 있는 듯 합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두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한명은 돌아가신 아버지이고 또 한명은 이제 아장아장 걷고 있는 아들녀석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몸이 마르고 숨이 가쁘게 될 때쯤 칼로 손바닥을 찢기도 했습니다. 생명선의 끝부분이었습니다.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에는 식도에 출혈이 있어서 시술을 받았는데, 그것이 간이 막혀서 피가 식도로 역류된 것이었다는 걸 이 책을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간암이었습니다.

아들은 지금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제일 예쁩니다. 지금까지 봤던 어떤 여자보다도 더 예쁩니다. 지금까지 봤던 어떤 그림, 풍경, 사진 그 무엇보다도 예쁩니다. 아들이 먼저 죽느니, 내가 먼저 죽는게 낫겠다 싶습니다. 이 책에 자식을 먼저 떠나 보낸 사람들의 얘기를 보면서 든 생각입니다. 자식보다 더 한 집착도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부처님이 출가 직전 아들의 출생소식에 ‘라훌라’(장애물)라고 하신 것도 어렴풋이나마 짐작이 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한달 전에 같이 산에서 일주일을 지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집에서 눈에 띄던 책을 가지고 갔었는데, 거기서 옮겨놓은 것입니다. 오늘 오랜만에 다시 찾아봤습니다. 의지할 곳은 붓다의 가르침이라는 생각입니다. 나무 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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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간이야기.22

어느 신도님 부음을 받고 문상을 가니 때마침 늙은 염장이가 염습(殮襲)을 하고 있었는데 그 염습하는 모양이 얼마나 지극한지 마치 어진 의원이 환자를 진맥하듯 시신(屍身) 어느 한 부분도 소홀함이 없었고, 염을 다 마치고는 마지막 포옹이라도 하고 싶다는 눈길을 주고도 모자라 시취(屍臭)까지 맡아보고서야 관뚜껑을 닫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오늘 아침 한솥밥을 먹은 가족이라도 죽으면 시체라 하고 시체라는 말만 들어도 섬찍지근 소름이 끼쳐 곁에 가기를 싫어하는데 생전에 일면식도 없는 생면부지의 타인, 그것도 다 늙고 병들어 죽어 시충(屍蟲)까지 나오는 시신을 그렇게 정성을 다하는 염장이는 처음 보았기에 이제 상제와 복인들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가는 염장이에게 한마디 말을 건네 보았습니다.
 
"처사님은 염을 하신지 몇 해나 되셨는지요?"
"그러시면 많은 사람의 염을 하신 것 같으신테 다른 사람의 염도 오늘처럼 정성을 다 하십니까?"
"별 말씀을 다 하시니... 산사람을 구별이 있지만서도 시신은 남녀노소 쇠붙이같을 것이 없니더. 내 소시에는 돈 땜에 이 짓을 했지만서도 이 짓도 한 해에 몇백 명 하다보니 남모를 정이 들었다 할까유. 정이....... 사람들은 시신을 무섭다고 하지만 나는 외려 산사람이 무섭지 시신을 대하면 내 가족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내 자신의 시신을 보는 듯해서......"
 
 이쯤에서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갈 길을 그만 가야겠다는 표정이더니, "내 기왕 말씀이 나온 길이니 시님에게 한 말씀 물어봅시더. 이 짓도 하다보니 시님들도 많이 만나게 되는데, 어떤 시님은 사람 육신을 피고름에 담은 가죽 푸대니, 가죽 주머니니, 욕망 덩어리라 이것을 버렸으니 물에 잠긴 달그림자처럼 영가(靈駕)는 걸림이 없어 좋겠다고 하시기도 하고, 어떤 시님은 허깨비같은 빈 몸이 곧 법신(法身)이라 했던가유? 그렇게 하고, 또 어떤 시님은 왕생극락을 기원하며 염불만 하시는 시님도 있고.... 아무튼 시님들 법문도 각각인데 그것은 그만 두시고요. 참말로 사람이 죽으면 극락지옥이 있니꺼?"
 
흔히 듣는 질문이요 신도들 앞에서도 곧잘 해왔던 질문을 받았지만 이 무구한 염장이 물음 앞에는 그만 은산철벽을 만난듯 동서불명(東西不明)이 되고 말았는데, 염장이는 오히려 공연한 말을 했다는 듯
 
"염을 하다보면 말씀인데유. 이 시신의 혼백은 극락을 갔겠다 저 혼백은 지옥에 갔겠다 이런 느낌이 들 때도 더러 있어 그냥 해본 소리니더. 이것도 넋빠진 소리입니더만 분명한 것은 처음 보는 시신이지만 그 시신을 대하면 이 사람은 청검하게 살다가 마 살았겠다 이 노인은 후덕하게 또는 남 못할 짓만 골라서 하다가 이 시신은 고생만 하다가 또는 누명같은 것을 못 벗고.... 그 뭐라하지유? 느낌이랄까유? 그, 그 사람이 살아온 흔적같은 것이 시신에 남아 있거든요?"
 
하고는 더 말을 하지 않을 듯 딸막딸막하더니, 당신의 그 노기(老氣)로 상대가 더 듣고 싶어하는 마음을 읽었음인지.
 
"극락을 갔겠다는 느낌이 드는 시신은 대강대강해도 맘에 걸리지 않지만 그렇지 않은 죄가 많아 보이는 시신을 대하면 자신이 죄를 지은 것처럼 눈시울이 뜨뜻해지니더. 정이니더, 옛사람 말씀에 사람은 죽을때에는 그 말이 선해지고 새도 죽을 때는 그 울음이 애처롭다 했다니더. 죽을 때는 누구나 다 선해지니더.  ...........  이렇게 갈 것을 그렇게 살았나? 하고 한번 물어보면 영감님 억천년이나 살 것 같아서, 가족들 기쁘게 해주고 싶어서 한번 잘살아 보고 싶어서 그랬니더. 너무 사람울리시면 내 화를 내고 울화통 터져 눈 못 감고 갑니더. 이런 대답을 들으니 아무리 인정머리없는 염쟁이지만 정이 안 들겠니까? 그 돌쟁이도 먹 놓고 징 먹일때는 자기의 혼을 넣고... 땜장이도 그렇다 하는데 오늘 아침 숨을 같이 쉬고 했던 사람이 마지막 가는데유........... 아무런들 이 짓도 정이 없으면 못해 먹을 것인데 그렇듯 시신과 정을 나누다가 보면 어느 사이 그 시신 언저리에 남아 있던 삶의 때라 할까유? 뭐 그런 것이 걷히고 비로소 내 마음도 편안해지거든요. 결국은 내 마음 편안할려고 하는 짓이면서도 남 눈에는 시신을 위하는 것이 풍기니 나도 아직........"
 
하고는, 잠시 나를 이윽히 바라보더니
"시님도 다 아시는 일을 말했니더. 나도 어릴 때 뒷절 노시님이 중될 팔자라했는데 시님들 말씀과 같이 업(業)이라는 것이 남아 있어서...... 이제 나도 갈 일만 남은 시신입니더."
 
이렇게 말끝을 흐리는 것이었습니다.
 
조오현 스님의 연작시 [절간이야기.22]
 출처 : 화두와 실천. 1996 봄 제2호 P 172~173



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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