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도서관에 갔다. 혹시 못본 한국영화가 들어왔나 싶어 봤더니, ‘토요상설국악공연이라는 동영상CD가 있었다. 그렇다. 국립국악원의 그 공연이었다.


1994
년에 나는 말년병장이었다. 감옥과 같은 군대생활이니, 읽을 거리도 없었다. 샘터지, 국방일보, 육군지 아니면 전투교범같은 것들. 그것들이라도 아쉬운 마음에 꼼꼼히 봤는데, 육군지에 장병들의 교양을 증진시킬 목적으로 국악에 대한 기사가 났다. 국립국악원의 학예사가 기고한 글이었다. 그 기사로 최소한 한 사병의 교양과 상식은 증진이 되었다. 나는 그 연재가 끝나기 전에 제대를 했고, 민간인이 된 나는 국립국악원으로 편지를 보냈다. 마저 교양과 상식이 증대되고 싶다고.

 

친절한 학예사는 답장과 함께, ‘토요상설공연에 대한 안내까지 보내줬다. 제대후 어디 갈데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던 나는 사당역에서 버스를 내려서 국립국악원까지 걸어갔다. 남부순환도로는 차들의 도로였다. 늦가을 토요일 저녁. 인적없는, 차만이 가득한 길을 걸어가 나는 공연을 봤다. 청중은 대부분, 중고생들. 숙제인지 그들은 학교에 낼 티켓이 필요했다. 나는 티켓을 제출해야할 의무가 없었으므로 그들에게 선선히 내어주었다.

 

공연은 때로 지루했지만, -국악이 대개, 정악은 더 그렇지만- 아주 만족스러웠다. 특히나 대금과 해금의 소리는 가슴깊이 저며왔다. 가난하고 쓸쓸한 청춘에게 훌륭한 친구가 되어주었다. 어느새 10년도 훨씬 전의 일이나, 지금도 선명한 기억은 사물놀이 앉은반의 공연이었다. 서서하는 건 선반이고 앉아서 하는 건 앉은 반이다. 학교운동장에서 학생들이 어설프게 두들기던 꽹과리 장구 북이 아니었다. 10여분 남짓한 시간은 폭풍과도 같았다. 원시적인 타악기로 사람을 몰아가더니, 나중에는 온 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듯 하고, 심장이 쿵쾅쿵쾅 밖으로 튀어 나올 것만 같았다. 끝나고 나오는데 관중석에는 배낭여행객으로 보이는 금발머리의 푸른 눈들이 많았다.

 

한동안 다닌 기억은 나는데, 어쩌다 멀어지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입장료가 올라서였는지, 아니면 학교다니느라, 아니면 그 차들 가득한 남부순환도로를 걷기 싫었는지, 아니면 혼자 가서 혼자 앉아서 혼자 구경하고 혼자 돌아오는 것이 싫었는지. 만나면 헤어지는 법이니까.

 

그러다가, ‘토요상설국악공연을 오늘 도서관에서 만난 것이다. 씨디롬은 모두 4종류였다. 민요와 사물놀이, 그리고 해금 연주가 들어있는 것을 골랐다.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않다. 국악은 어떤 녹음과 재생장치로도 현장을 되살려주지 않는다. 그것은 국악자체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국악은 그 곳에 모인 사람들끼리 연주자와 청중이 같이 연주하고 같이 듣는 음악이다. 악기가 그러하며 노래 또한 그러하다. 그러니, 아무리 기술이 발전한다고 해도 그 녹음과 재생이 완벽할 수는 없다. 아쉽게도 사물놀이는 더욱 실망스러웠다. 반가움 컸기에 더 실망스러웠던 것일까? 하지만, 오랜만에 동창을 만난 것처럼, ‘토요상설공연은 나를 그때의 그곳으로 보내주었다. 공연이 끝나고 보니, 이곳은 그때의 거기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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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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