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얼티메이텀을 봤다. 아주 잘 만든 영화다. 네이버에서 검색해보면, 이 영화에 뿅간 애들이 한 두마디 해 놓았다. 이렇게 멋있는 영화는 다시 없다는 건데, 이런 평가야 어린 애들의 눈높이이긴 하지만, 어쨌건 잘 계산해서 만든 영화이긴 하다.

허문영- 이 사람은 동아일보기자가 아닌가 싶은데 - 이라는 사람이 씨네21에 글을 썼다. 내가 이 영화에 매력을 느낀 부분을 제대로 짚어줬는데, 영화속 주인공은 무엇보다 '단독자'로서의 모습이 두드러졌다. 주인공이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하는 초인적인 모습을 보면서 어린아이들은 수퍼맨을 만난 듯 환호하는 것이겠지만, 나는 주인공이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스스로가 스스로의 주인이 되어, 잃어버린 나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그러니, 결국 이 영화도 또한 '구도자'의 얘기가 아닌가. 살인을 일삼던 그도 나중엔 더 이상 살생을 하지 않는다. 잃어버린 나를 찾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다시 나무 아미타불을 할 수 밖에. 나무 아미타불.



http://movie.naver.com/movie/mzine/read.nhn?section=rev&office_id=140&article_id=0000009288&mb=c


[전영객잔] 본 시리즈에 대한 뒤늦은 생각들
[씨네21 2007-11-08 09:12]

- 시민사회의 부재와 국가로부터의 탈주 의지 가진 포스트 영웅 제이슨 본 -


기억을 잃었으나 능력을 잃지 않은 사내의 힘겨운 모험담(<본 아이덴티티> <본 슈프리머시> <본 얼티메이텀>)에 늦었지만 몇 가지 단상을 보태고 싶다. 그럴 만한 가치가 본 시리즈에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시리즈를 007 시리즈나 <미션 임파서블>과 같은 첩보영화와 비교하기보다 할리우드 영웅담의 변모라는 시야에서 보고 싶다. 이 시리즈가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나 <스파이게임> 같은 수정주의 첩보 장르 혹은 포스트 첩보 장르에 속한다는 건 분명하지만, 무엇보다 영웅상을 민첩하게 갱신하는 할리우드의 능력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할리우드의 변치 않은 능력 가운데 하나는 당대 미국인의 자기 이미지 혹은 자아이상형을 동시대의 공기 안에서 표현하는 능력이다. 존 포드와 프랭크 카프라에서부터 스티븐 스필버그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자아이상형으로서의 인민주의자/영웅을 포기한 적이 없고, 그 면모는 시대의 조건과 환경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해왔다. 그리고 오늘, 제이슨 본이라는 새로운 영웅이 도착했다. 당대의 대중들은 그를 열렬히 환대했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알고 있기나 한가. 이 질문은 중요한데 그것이 영화 안에서 본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본 시리즈는 21세기의 최상급 대중영화 가운데 하나다. 세편 모두 넋을 잃을 만큼 재미있는데 물론 그건 심오한 주제 때문이 아니라 탁월한 영화적 테크닉 덕일 것이다. 워털루역 광장에서 쫓고 쫓기는 <본 얼티메이텀>의 한 장면은 김혜리의 훌륭한 표현대로 사람들의 추격신을 자동차 추격신처럼 찍은, 이 방면의 대가들이 만들어낸 빛나는 세공품이다. 그렇다 해도, 그 테크닉들은 단순한 유혹의 기술에 그치지 않고 무언가 절박하게 동시대의 불안과 욕망을 불러들인다. 그 점이 이 시리즈를 더욱 흥미롭게 만든다.

공동체에 무관심한 영웅, 제이슨 본



정체성의 혼란, 혹은 이중적 정체성은 그 자체로는 새롭지 않은 소재다. 우리는 두 가지 정체성을 지닌 영웅들을 꽤 오래 만나왔다. 예컨대 최근 수년간 스크린을 점령해온 만화 출신의 슈퍼히어로들인 슈퍼맨, 스파이더 맨, 배트맨, 혹은 경계에 선 엑스맨. 그들은 지상에서 두 가지 신분으로 살아가든가, 아니면 그 양자 사이에서 갈등한다. (소)시민과 고립된 영웅이라는 이들의 두 가지 정체성은 때로 충돌하지만 자아의 연속성을 훼손할 정도는 아니다. 두 정체성의 분리에 반영된 사적 행복과 공동체적 소명의 분리는 양자가 조화를 이뤘던 고전기 이후의 오랜 소재이지만, 할리우드는 양자가 끈질기게 교섭하고 협상케 했다.

여기엔 시민사회에 대한 견고한 신뢰가 있다. 국가기관과 제도(establishment)는 어김없이 무능하거나 음험하고 그로 인해 홀로 악과 맞서야 하는 영웅은 늘 고립되지만 그는 시민사회로 표상되는 공동체를 끝내 포기하지 않는다. 이때 ‘소중한’ 가족과 ‘선한’(적어도 무고한) 이웃은 영웅이 회의와 좌절에 빠질 때 그의 영웅성을 복원하는 윤리적 결단의 근거지이며, 시민사회 안에서의 영웅의 심리적 거처다.

전철에 탄 익명의 시민들은 악귀와도 같은 닥터 옥토퍼스와 맞서느라 만신창이가 된 스파이더 맨을 보호하기 위해 옥토퍼스의 앞을 정의롭고 무모하게 가로막는다. 무엇보다 평범한 학생 피터 파커를 영웅의 길로 이끈 것은 삼촌의 죽음이며 숙모의 격려다. 고전적 영웅담은 아니지만 <디파티드>에도 이와 연관된 대목이 있다. 경찰 신분뿐만 아니라 시민의 신분도 삭제된 코스티건(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이 “내가 원하는 건 경찰 복직이 아니라 오직 신분(아이덴티티) 회복”이라고 말할 때, 그는 (나쁜) 제도의 대립항으로서의 (선한) 시민사회를 상정하고 있다.

본 시리즈에서 가장 이상한 점은 제이슨 본이 결코 가족을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가족이라는 관념 자체가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물론 친구도 이웃의 자리도 없다. 그가 죽음을 무릅쓰고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알아내려 할 때, 그의 관심은 정말 정체성 회복일까. 이렇게 물어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에게 회복할 무엇이 있기나 한 것일까. 불행하게도 그는 돌아갈 곳이 없다. 본을 낳았으며 그가 돌아갈 시민사회가 여기엔 보이지 않는다.

영화를 보고 나면 그의 목표는 애초에 명백했다. 국가기관에 기록된 자신의 신분을 확인하고 그것을 영원히 없애는 것, 즉 아이덴티티의 회복이 아니라 삭제이며 기억이 아니라 망각이다. 이것은 그의 과거가, CIA라는 국가기관 소속이라 해도 암살 전문 요원이었으니, 얼핏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본이 묻지 않은 것이 또 있다. ‘내가 왜 그 일을 자원했을까.’ 그의 뇌리를 찔러오는 단편적 기억에 따르면 그는 분명히 암살요원을 자원했으나, 그 경위는 어디에도 드러나지 않는다. 가까스로 마주한 그의 옛 상사는 이렇게 말한다. “네 운명은 킬러야. 그걸 바꿀 순 없어.” 그런데 그 킬러의 본성은 국가기관의 세뇌와 훈련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아니면 어떤 분노나 각성의 계기가 있었던 것일까. 본은 그것을 묻지 않고, 영화는 우리의 물음에 답하지 않는다.

서사의 허점처럼 보이는 이 공백은 어떤 영웅담에서도 찾기 힘든 단절을 만들어낸다. 암살요원으로서의 과거의 본과 단독자로서의 오늘의 본 사이에는 연속성이 거의 결여돼 있다. 물론 암살 대상의 딸을 보고 머뭇거렸던, 본이 기억을 잃어버린 계기가 된 사건(<본 아이덴티티>),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상부의 어떤 명령에 거역하다 고문을 당하는 사건(<본 얼티메이텀>)이 오늘의 본의 태도와 희미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그것이 어제 러시아 의원 부부를 교묘하고도 무참하게 암살하고(<본 슈프리머시>) 오늘 그 딸에게 사과하는(<본 얼티메이텀>) 태도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오늘의 본은 죄의식에 시달리지만 과거의 자신을 제거하고 싶을 뿐 해명할 의지는 전무하다. 이 의지의 부재는 망각에의 욕망을 반영하며 정확히 시민사회의 부재와 조응한다. 그는 과거에도 국가와 홀로 마주했고, 오늘도 그러하다. 선택은 두 가지밖에 없다. 투신 혹은 탈주. 그는 어제 투신을 택했고 오늘 탈주를 택한다. 그가 귀신처럼 감시망을 피해 CIA 본부로 접근해올 때 본의 옛 상관은 국장에게 말한다. “본은 어떤 행동도 목적의식 없이 하지 않아요. 명령에 따라서만 움직이죠.” 국장이 묻는다. “상관도 없는데 누가 명령한다는 거지?” 옛 상관의 대답, “그 자신이죠”.

그가 결과적으로 국가기관 일부를 정화하긴 하지만, 그건 탈주의 완성을 위한 것이며, 죽음을 무릅쓰고 모스크바에 잠입해 자신이 살해한 러시아 의원 부부의 딸을 만나려는 것도 단지 자신이 그들을 죽였으며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다. 오늘의 그에겐 실존적 윤리만 있을 뿐이며 본이라는 단독자와 국가를 매개할, 그러니까 영웅의 분노를 촉발하거나 정제하고 소명의식을 격려할 시민사회 내의 거처가 이 영화에 묘사된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징후적으로도 드러난다. 제이슨 본의 아이덴티티를 파헤치다 CIA의 비밀작전에 접근해오는 <가디언>의 기자를 CIA는 거리낌없이 암살한다(<본 얼티메이텀>). 첩보영화의 관습과 실제 세계 모두에서 시민사회를 지탱하는 중요한 존재인 언론인이 여기에선 소리없이 제거되는 것이다. 단독자인 오늘의 본에게 가장 소중한 인물이 거처가 불분명한 현대판 집시여인이라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전 지구적 시각을 가진 국가에 대한 공포



미국 시민사회가 부시의 재선도 그의 전쟁도 막지 못했다는 정치적 무력감이 여기에 은밀히 반영돼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본 시리즈를 특징짓는 시민사회의 부재와 필사적인 망각과 탈주의 의지는 어떤 공포감의 우회적 표현인 것 같다. 영화의 이야기 안에서 그 공포의 대상을 찾자면 국가기관, 구체적으로는 CIA의 극우파 중간간부가 창설한 비밀암살 조직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일까. 이미 30여년 전에 나온 <콘돌>을 비롯해 수많은 유사 첩보영화들과 포스트 첩보 장르 영화들에서 부도덕하거나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관료/정치인 그리고 그들이 움직이는 비밀조직의 무자비한 행각은 닳고 닳은 소재가 아닌가.

본 시리즈의 이야기를 성립시키고 이끌어가는 보이지 않는 힘은 결국 시각 테크놀로지에 대한 공포에 있는 게 아닐까. 걸프전과 이라크전에서 육안의 한계는 물론이고 어둠마저 뛰어넘어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대상의 형상을 재현하는 모니터로 그 대상을 정확히 파괴하는 전자 광학의 초월적 능력을 실시간으로 안방에서 목격한 오늘의 인류에, 첨단 전자 광학테크놀로지-최상의 전쟁 무기-미국(국가기관)의 능력이라는 등식은 체험된 지식이 되었다. “전쟁기계 옆에는 늘 정찰기계가 있었다”고 폴 비릴리오는 말했다. 본 시리즈에서 지구상의 모든 곳을 정찰하는 첨단의 광학시스템이 가동될 때, 전쟁이 언급되지 않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미 전쟁을 느낀다.

전쟁 무기로 즉각 전환될 수 있는 전 지구적 정찰 시스템에 의해 내가 보여지고 있다는 동시대인의 심원한 불안을 짊어지고 제이슨 본은 숨어서 세상을 떠돈다. <본 얼티메이텀>에서 워털루역 광장에서의 추격신이 명장면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정찰과 은폐라는 광학테크놀로지 전쟁의 양상을 고스란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본은 비슷한 설정의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의 두 주인공과 달리 어떤 기계장치도 없이 자신의 육체적 능력만으로 국가기관의 신의 경지에 이른 시야를 능수능란하게 피해다닌다. 정찰의 숏들과 은폐의 숏들의 폭포수 같은 교차편집 끝에 본이 두눈과 초인적인 지각만으로 빈 공간을 어김없이 찾아낼 때, 그는 진정으로 광학테크놀로지의 공포에 맞설 수 있는 우리의 영웅이 되는 것이다. 동시에 그는 국가를 증오하고 공동체에 무관심한, 더이상 영웅이 아닌 포스트 영웅이다.

(글) 허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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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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