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용어로 얘기하자면, 발심을 했다고 하는데, 어쨌거나 수행또는 명상을 한다고 하는데, 그게 어떻게 해야하는지 참으로 쉽지 않은 문제다.

틱낫한스님이 유명하다니까, 그럼 나도 남방불교의 위빠사나를 해 봤다가, 누가 그렇게 걷는다고 뭐가 어떻게 되겠냐고 하면 그러게 안 그대로 그런 것 같았는데 그런 가 보다 하고, 여기 저기 백화점 진열장 구경하는 사람마냥 뭐가 뭔지 모르게 된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www.zen.co.kr 에서

질문 : 명상을 하여 실생활속에서 어떤 열매를 맺고 계시는지가 궁금합니다. 명상을 하는 시간이외에 생활속의 여러 경계와 직접 대면하여 일어나는 자기 내면의 온갖 움직임들을 어떻게 대면하시는지 솔직한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명상을 할때는 가라앉는데 조금 지나고 나면 도로 온갖 습관과 자기합리화, 이런 것들에 함몰되어 버리는 제모습을 확인하면서 명상을 꾸준히 하면 생활속에서 이런 경계가 일어나는 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날이 오는 것인지 의문이 들어 질문을 올립니다.
 
오지 않는 손님을 막연히 기다리는 것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본인이 직접 체험한 내용을 듣고 싶습니다. 마하리쉬니, 니사르가다타니  ...그런 이들이 해놓은 말 그런것들은 나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이야기 같고 어차피 말이란게 각자 의식으로 받아서 왜곡해 버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명상의 효과로 가라앉은 느낌속에서 꽤 여러날 지내본적도 있었는데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으니 도로 원위치 되어 버리더군요.  제가 지니고 있던 문제점들은 하나도 해결되지 않은채 저를 괴롭히는 것을 다시 대면해 보니..허망하기까지 했습니다...  좋은 말씀 기다립니다.




명상을 오래 해 오신 분들께 묻는다고 하셨는데 제가 끼어들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껏 제가 해온 것이 명상인지도 잘 모르고 있는 처지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수행이랍시고 30년 가까이 헤매왔으니 그동안 제가 겪은 체험으로 조금 위안을 드려도 되지 않을까 싶어 글을 남깁니다. 
말씀하신 내용에 너무나 공감합니다. 질문하신 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수행자들이 겪는 일이고, 저 역시 정확하게 똑같은 절망을 겪었습니다. 그 절망의 무게가 너무나 커서 스승님들께 대들고, 무엇인가에 완전히 속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아는 것이 적어서 제 입장에서 뭐라 말씀드리기는 그렇고, 대신에 제가 그런 문제를 겪고 있을 때 제 스승님께서 제게 해주셨던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수행(?) 20년 만에 절망에 몸부림치면서 스승님께 대들듯이 질문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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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게는 아무 문제도 없다. 다만 '내게 이러저러한 문제가 있다.'는 그 생각이 문제이다. 그 생각만 제외하면 너는 아무 문제도 없다." 

"깨달음을 얻으면 모든 문제가 일시에 제거된다는 기대감은 완전한 착각이다. 깨달은 사람도 문제를 안고 살아간다. 다만 그 문제가 이차적인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 다를 뿐이다. 가령, 분노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수행자들은 그 문제를 어떻게 다른 식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분노 자체를 문제시하는 것이다. 왜 그러는가? 분노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데 분노를 문제시함으로써 이차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분노가 일어날 때에는 딱 거기서 멈추어라. 분노가 일어남을 알고, 그 분노를 받아들여라. 그 분노에 대해 명상하거나 주시하려고 하지 마라. 그런 노력들 전부가 억압에 불과한 것이며, 여기서 이차,삼차의 불필요한 문제가 발생한다. 받아들여라.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라. 변화시키려고 하지 마라. 자신을 더 나은 인간으로 개량하려고 하지 마라. 그것이 모든 문제의 씨앗이다." 

제가 물었습니다. 
"분노라는 것이 네가티브한 감정인데,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스승님이 말했습니다. 

"아니다, 분노는 네가티브도 아니고 포지티브도 아니다. 바다에 일어나는 파도가 네가티브인가 포지티브인가? 파도는 그저 일어났다가 스러지고, 다시 일어났다가 스러질 뿐이다. 그것을 네가티브로 보는 것은 네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거부하고 고치려 하기 때문에 네가티브하게 보이는 것이다." 

"어떻게 라고 묻지 마라. '어떻게 받아들입니까?'하는 질문이 논리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것이 마음의 장난이고 말장난인 것이다. 내가 '받아들여라.'하고 말하는 그 순간에 그저 받아들여라. 멈추는데 무슨 방법이 필요한가? 잘 달리기 위해서는 방법이 필요하지만 멈추는데 에는 아무 방법이 필요 없다. 그냥 멈추면 된다. 너의 '어떻게?'라는 질문은 달리기의 연장이다. 나는 이 자리에서 요구한다. 멈추어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깨달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강력한 폭발이 일어나서 일시에 부정적인 것들이 초토화되고 평화가 찾아오는 게 아니다. 그런 깨달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깨달음이라는 말 대신 '이해'라는 말로 대신한다. 차근차근 이해하여 어느 날 문득 자신이 이해했음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소위 깨달음이라 불리는 것이다. 이것은 가랑비에 옷이 젖는 것과 같다. 자신이 젖어가는 줄도 모르다가 어느 날 문득, 자신이 흠뻑 젖어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너무 조급하게 서두른다. 앎은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계속 실수하고, 망각하고,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면서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차근차근 나아가다 보면 점점 더 실수가 줄어들고 망각하는 횟수가 줄어들 것이다.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세상의 거의 모든 명상법을 해보았고, 여러 스승들에게 헌신했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내가 전혀 변화하지 않았음을 깨닫고는 절망했다. 모든 것이 주워들은 이야기일 뿐 실제로는 아는 것이 없었다. 스승이 내게 그토록 '멈추어라!'하고 외쳤음에도 나는 계속 줄달음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절망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게 없었다. 그 후로 나는 정말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나는 서서히 '받아들임'의 기술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 전에 내가 한 수행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려는 몸부림이었다. 이제 나는 그런 노력을 포기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니, 그렇게 결심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절망한 나머지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10년이 흘러갔다. 나는 아무 변화도 바라지 않았음으로 나 자신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서서히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 전에 내가 한 모든 것들은 나 자신을 미워하고 뜯어 고치려는 무모한 짓이었다. 이제 나는 내 모습 전부, 심지어 나의 문제들까지 포함하여 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내가 받아들일 때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가 세상에 표현되는 방식일 뿐,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게 10년이 흘러가고 어느 날 문득 나는 내가 이해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을 깨달음이라는 단어로 부르건 뭐라고 부르건 상관없다. 하지만 내게 깨달음이란 순간의 체험이 아니라 '이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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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는 이 말씀이 많은 것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아직도 계속 실수하고 망각하면서 살지만 그것에 대해 허망함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처음부터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어떤 것을 문제시 해놓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면 끝도 없는 투쟁이 일어날 뿐입니다. 
(이것이 마음이 먹고 사는 방식이긴 하지만요)   
참으로 말장난 같습니다만, 이 외에 달리 말할 방도가 없군요.  
모든 것을 편하게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허망함을 느끼시면 그 허망함을 받아들이시고 편하게 대하시는 게 좋습니다. 
같은 문제가 반복되고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여도 그런 과정을 통하면서 
님은 서서히 나아가고 계시는 중입니다.  
제 경험으로 장담합니다.^^ 
받아들이는 것이 처음에는 대단히 어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만 
이것은 우리 마음이 그렇게 습관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받아들임도 반복해서 노력하다보면 자연스레 몸에 배게 되고, 
그러면 별다른 노력 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때가 올 겁니다. 
부디 편해지시기를 빕니다.  

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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