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는 대학을 4년다니고, 여기서는 대학교를 4년째 다니고 있습니다. 마지막 학기인데, 지난 시간보다 더 힘들게 느껴집니다. 이제 거의 끝났다는 생각이 들다보니, 전부다 꼴도 보기 싫고 지긋지긋하다는 생각만 듭니다. 이러다가 정말 마지막 학기에서 낙제를 하지나 않을까 싶습니다.

 얼마전부터 여기서 경험한 대학교육을 한번 정리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호주의 대학교를 서구사회의 대학교의 전형으로 간주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서구문화에 속하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1. 실용주의적인 학풍
미국의 대학교 학제와 다르다고 들었습니다. 영국의 학제와 같다고 하는데요. 처음 1학년 1학기를 시작할때, Lecture 와 Tutorial로 나뉘어 있는 것이 아주 특이하게 느껴졌습니다. 교과과정은 실습을 중시합니다. 현장 경험을 중시하는 분위기는 실용적인 학풍이 반영된 듯 합니다. 실습을 중시하는 건 확실히 유용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머리속으로 달달 외우고 있어도 직접 손으로 한번 해 보는 것과는 차이가 크니까요.

하지만, 이것도 단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토론이 권장되는 분위기이기는 한데, 학생들이 뭘 알아야 토론을 하지요. 예습 복습을 하던 아니면 기초지식이 있던, 일단 뭘 조금은 알고 나서 말을 해도 해야 하는데, 아는 것도 든게 없는 학생들을 놓고 토론식으로 수업을 하니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2. 자율적인 학풍
좋게 말하면, 창의적이고 자율적인 학풍이지만, 실재로는 알아서 하라는 겁니다. 가르쳐주는 건 별로 없는데, 알아서 해야하는 건 많습니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교수가 알려주는 건 참고도서목록뿐입니다. 학생들이 알아서 에세이도 써야하고 발표도 준비해야하고 시험도 보고 해야합니다. 근데, 뭘 알아야 하지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 들때가 많습니다.

3. 다면적인 평가
시험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작고, 여러가지 과제나 발표등의 평가항목도 큽니다. 나쁘다고는 할 수 없는데, 저같이 시험에 익숙한 사람은 그냥 벼락치기해서 시험보는게 더 편하니 이것도 꽤나 힘들었습니다. 저같이 끄적거리는 거 좋아하는 사람도 짜증나는데, 다른 학생들도 꽤나 스트레스받는 것 같습니다.

4. 과학과 기독교 기반의 교육
제가 공부하는 분야가 Faculty of Science에 속합니다만, 이건 호주로 보자면 외래학문이라, 사실은 과학에 들어가는 학문이 아닙니다. 한국에서도 제가 공부하는 분야를 '미신'으로 보는 사람이 아주 아주 많지요. 그런데, 제가 놀랐던 건, 호주에서 이 분야를 공부하고 연구하고 가르치고 하는 것이 많은 부분 Science화 시켜서 접근을 하더군요.  그러니까, 서구문화에서는 이 분야의 학문을 들여올때 나름대로 자신들의 인식틀에서 재해석하는 과정을 거친다는 겁니다. 서로 다른 두 문화의 접촉과 변화라는 과정에서 이해할 수도 있고요. 꼭 문화적인 접근이 아니더라도, 사람이 한번 인식의 틀이 형성된 다음에는 새로운 대상을 해석할때 기존의 해석틀을 작동시킬 수 밖에 없다 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스스로 저를 생각할때, 매우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런 문화적인 차이를 접할때면 아주 짜증이 많이 났습니다. 지금도 더하면 더하지 결코 덜하지 않고요.

예를 들어, '건조하다'라는 진술을 놓고 보자면, 동양쪽의 어떤 텍스트를 보아도, 이것에 대한 정의가 없습니다. 건조한 건 건조한 것이니까요. 그런데, 이쪽에서는 이에 대한 오퍼레이셔널 데퍼니션 Operational definition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 개념에 대한 소위 객관적인 합의가  없으면 그 다음얘기를 할 수 없는 것이거든요.

하지만, 동양에서는 이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건조하다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인식하에서 논지의 전개가 이어집니다. 이것이 건조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합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건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건조하다'에 이어서 전개되는 논지는 매우 매우 합리적이고 논리적입니다. 동양에서는 단지 '건조하다'에 대한 소위 객관적인 정의가 부재할 뿐입니다.

'묽다'라는 것도, 실험실의 데이터분석결과를 놓고, 정해진 수치를 넘느냐 안 넘느냐로 결정합니다. 동양에서는 그렇지가 않지요. 흐리고 묽으면 묽은 거고, 두껍고 진하면 진한거고요. 제가 보기에는 하등 쓸데없는 '건조하다'에 대한 operational definition에 목매달고 있는 걸 보면 정말 짜증이 안날래야 안 날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바탕에 깔려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강의에 들어오는 Lecturer들은 나름대로 박사학위도 받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 인간들인데, 그들 말에 깔려있는 일직선의 역사관, 유일신관, 성취지향적인 세계관들을 보면 정말 기독교가 모든 문화의 기저에 자리잡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낍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호주의 대학교에서 학교를 다니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합니다만, 정말 누구말대로 성질뼏쳐서 못 다니겠다는 생각이 한 두번이 아닙니다.

5. 참고- 동양의 재래식 교육
한림대학교 부설 태동고전연구소라는 곳이 있습니다. 별칭으로 지곡서당이라고 불립니다. 청명 임창순선생이 만든 것이지요. 이곳에 들어가면 1학년때 사서를 그냥 외웁니다. 말하기를 논어를 강한다고 합니다. 그냥 무식하게 외우는 것이지요. 무슨 봉건적인 교육방식이냐 하겠지만, 알고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박노자도 말한 바와 같이, 인문학이나 언어는 무작정 외우는 것도 좋은 교육방법입니다.

영어를 잘 하고 싶은 사람들은 소설 책 한권 무작정 외워보세요. 사실은 영어가 어려운게 아니라, 영어소설책 한권 외우는게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외우는 것은 외우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자양분이 되어서 줄기가 되고 꽃을 피우지요. 청출어람청어람이 됩니다. 민족주의자들이 전통을 고수하는 것도 우습기 짝이 없습니다만, 근대주의자들이 전통을 무시하는 것도 결코 덜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학교다니기가 싫어서 더욱 더 안 좋게만 생각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호주의 대학교 짜증 이빠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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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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