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에 옮겨놓은 글(사과나무 이야기)에 대한 어느 과학신봉자의 반응을 보고 항생제에 대한 글을 썼다. 이 과학신봉자의 댓글은 이것(파란 글씨).

사과나무의 병이라면 박테리아나 바이러스에 의해서 생기겠지요. 충이라면 사과를 먹고 사는 벌레일테구요. 사과의 입장에서는 박테리아, 바이러스, 벌레가 모두 비슷할겁니다. 박테리아, 바이러스, 벌레가 모두 자연의 일부로 사과에 의존해서 사는 점에서 말입니다. 농약을 안쓰면 박테리아, 바이러스, 벌레도 함께 튼튼해지지 않을까요? 적어도 사과를 맛있게 먹을 정도로는 튼튼해지지 않을까 싶은데..

여기에 대한 나의 댓글은,

이 글의 논리대로라면,
농약을 안 써야 박테리아, 바이러스, 벌레가 약해지지요.
농약을 쓰면 박테리아, 바이러스, 벌레가 강해지고요.


그리고, 답답한 마음에 항생제에 대한 글을 썼다.

밑의 글은 그 다음 이야기.



1.
펌글의 제목이 '수행없이 깨달음은 자랄 수 없다'입니다. 저 역시 이런 생각으로 30대를 보냈습니다. 제게는 '수행없이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가 보다 더 정확하겠습니다만.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수행자라는 아이덴티티를 굉장히 자랑스러워했고 뿌듯해했습니다. 한마디로 제가 잘났다고 살았지요. 

지금은, '수행의 목적은 수행이 필요없다는 것을 알기 위함에 있다' 라고 생각합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더 이상 수행이 필요없는 단계 내지는 그런 상태인데, 그렇다면 수행의 목적은 수행이 불필요한 상태가 되기 위한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수행의 존재의의가 사라집니다. 수행이 불필요한 상태가 되기 위해서 수행을 해야한다니, 그렇다면 수행할 필요가 없는 상태가 되기 위해서 꼭 수행을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제가 수행자라는 아이덴티티를 벗어던진 이유입니다. 사실, 저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고요, 여러 사람들, 소위, 깨달았다는 사람들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2.
깨달음과 수행이라는 말은 사람들마다 다 다른 관념을 가지고 있을 터이니, 저의 해석은 그냥 저의 해석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일본의 사과나무 얘기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 봤지? 뭐든지 자연스러운게 좋은거야, 쓸데없이 인간이 개입해봤자 좋을 게 없다고
- 환경주의자, 자연보호론자, 게으름뱅이들 

# 봤지? 강해져야 살아남는 거야, 힘든 환경속에서 사과나무가 더 튼튼해지는 걸 보라고
 - 경쟁주의자들. 적자생존론자, 싸움꾼

# 농약없이 키운 사과 봤어? 남들과는 뭐가 달라도 달라야 해. 그래야 돈이 되지.
 -  시장주의자, 욕심꾸러기들

# 태풍을 이겨낸 사과나무 봤어? 고난과 역경, 시련이야말로 사람을 더 키우는 자양분이야.
 - 심각한 사람들, 매조키스트

# 지금이야 괜찮다 해도, 지난 10년간 왜 그 고생을 사서 하나? 그냥 남들하는만큼만 하면 됐지.
 - 대세추종자들, 겁장이들.

 # 저런다고 안 될걸. 병충해가 한번 돌면 순식간에 망할텐데.
- 과학신봉자, 소심한 사람들 

# 무농약이라니 몸에 좋겠네. 이거 먹고 오래살아야겠다.
- 정력추종자, 건강허약자, 단세포, 무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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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씨는 기름진 땅에 떨어져야 한다. 기름진 땅에 떨어져야 씨는 잘 자라날 수가 있다. 얼마 전 TV에서 '농약 한 방울, 비료 한 주먹' 없이 사과를 키우는 일본의 기무라 아키노리라는 농부에 대해 방영을 했다. 그는 농약 알레르기 때문에 고생하는 아내를 위해 농약을 쓰지 않고 사과를 재배해 보자는 결심을 했다. 그의 결심을 듣고 주변 이웃들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그를 '아오모리의 돈키호테'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10년이나 노력했지만 사과는 한 개도 열리지 않았다. 농약과 비료에 길든 사과나무의 야성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수입이 없어서 밑바닥 생활을 했고 생계를 위해 나이트클럽 호객꾼으로 나서기도 했다. 폭력배에게 맞아 치아가 두세 개만 남고 모두 빠졌다. 목숨을 끊을 생각으로 산에 올랐다.

산에서 우연히 탐스러운 열매를 맺는 도토리를 보았고 섬광 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비밀은 흙에 있었다. 그 이후 그는 과수원에 잡초도 뽑지 않고 관리도 하지 않으며 방치해 두었다. 흙이 본래의 생명력을 회복할 때까지 기다렸다. 비료나 농약을 수십 년간 뿌려 왔던 땅은 딱딱해져서 잡초조차 뿌리를 내릴 수 없다.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면 흙도 기름지게 된다. 

무농약 자연 농법을 시작한 지 10년만에 결국 탁구공만한 사과 두 개를 얻게 되었고 다시 4년 후에 많은 사과들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의 농법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아오모리현에 상륙한 태풍 때문이었다. 주변 과수원의 90%의 사과가 떨어졌지만 기무라의 사과는 80%가 멀쩡했다. 아무도 모르는 새에 사과나무가 땅속 20m까지 뿌리를 내렸고 가지와 나무가 굵고 단단했기 때문이다. 그의 사과는 병충해에 강해졌고 스스로 치유하는 자연 치유력도 생기게 되었으며 썩지도 않았다. 단지 수분이 증발하며 자연스럽게 자연으로 돌아갔다. 사과의 맛과 질이 화학 농법을 하는 사과들보다 훨씬 좋아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문제는 토양이다. 깨달음의 씨가 자라기 위해서는 토양의 질이 좋고 풍성해야 한다. 그대에게 깨달음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 깨달음이 무럭무럭 자라나기 위해서는 '그대'라는 토양이 깨달음이 자랄 수 있을 만큼 풍성해야 한다. 그대의 내면의 밭은 화약 비료나 농약 같은 유해 성분에 길들어져 있다. 그대 자신을 돌아보라. 그대는 무엇에 의존하여 살아 왔는가? 그대가 의존해서 살아왔던 모든 것들이 바로 그대 자신을 말해 준다. 그대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수많은 것들에 의존하고 집착해서 살아간다.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그대에게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준다는 마약을 팔고 있다. 아니면 화폐 가치를 보장해 줄 수 있는 다른 사회적인 능력이나 명예, 성적인 매력도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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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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