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제가 어렸을때 얘기입니다.

 

토목공학과를 다니는 사람에게는

"고속도로커브구간에서 안식각은 어떻게 적용이 되나요?"

 

공예과를 다니는 사람에게는

"그럼 항아리를 만들때는 전기요를 쓰나요? 개스요를 쓰나요?"

 

식품회사에 다니는 사람에게는

"안식향산나트륨은 뭐에 쓰나요?"

 

요렇게 물어보면, 대개 반응은

"아니, 그런걸 어떻게 알아요?"

 

소위 그쪽 업계용어를 어떻게 아냐는 놀라운 반응인데, 저로서는 그 반응이 오히려 놀라웠던 것이,

안식각은 고등학교 기술교과서에 나오는 말이고, 전기요나 개스요도 역시 교과서에,

안식향산나트륨은 모든 빙과류 겉포장지에 어김없이 적혀있는 말이니 그걸 모를 수 있다는 것이 제게는 이상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새우깡포장지에는 주요성분 원산지표기 공장이 어디있는지 소비자피해배상의 관련법규나 절차등등이 다 적혀있으니, 안식향산나트륨과 식용색소3호 식용색소5호는 그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제게는 숟가락 젓가락같이 자연스러운 단어였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아니, 그런걸 어떻게 알아요?' 라니요. 새우깡뿐만 아니라 양파링봉지에도, 농심뿐만 아니라 롯데 꼬깔콘봉투에도 다 있는 그런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걸 어떻게 아냐니요?

 

저는 그런 사람인 것이지요. 글자가 있으면 그걸 다 읽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문자는 다 읽습니다. 그건 그렇게 해야 하는게 아니고 그냥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한때 전자제품 사용설명서가 문고판 책보다 두꺼운 시절이 있었는데, 저는 그 매뉴얼을 다 읽어야 잠을 잤습니다. 글자가 있으면 읽고,  졸릴 때 책을 읽으면 잠이 달아납니다.

 

국민학교때 수업은 재미없고 책상서랍속에 책을 넣고 읽다가 선생한테 뺐기고, 그럼 또 다른 책이 나오고, 또 뺐기고 또 다른 책이 있고. 한 시간에 세번까지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씨디 플레이어가 두 개가 있습니다. 다음에 나갈 CD를 미리 넣어두어야합니다. 책을 읽다가 씨디를 넣어놓질 않아서 방송사고를 내기도 했습니다.

 

이런 제게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니 책을 읽자는 둥, 일본사람들은 다들 책 읽으면서 출퇴근한다는 둥, 한국사람들의 독서량은 일년에 몇 권에 불과하다는둥, 우리는 책을 읽어야 어쩐다는 둥 하는 얘기는 이해하기 힘든 캠페인이었습니다. 제 귀에는 밥을 먹어야 배가 안 고프다는 얘기와 다를게 없었으니까요. 돈이 없어서 책을 못 사는게 문제지 어떻게 책읽기가 캠페인의 대상이 되는가 말입니다.

 

그랬다가 서른 즈음에 어떤 계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이젠 책을 끊자. 책에서 얻을 수 있는 답은 다 얻었다고. 결심이야 결심일뿐이고 도서관엘 좀 덜 다녔다뿐이지 '읽으면서 사는 삶'은 여전했지요. 어쩌면 더 했는지도 모릅니다. 인터넷에는 읽을거리가 널려있으니까요.

 

그랬다가 사십이 된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책을 읽는게 바로 병통이구나 하는 것을요. 책을 읽는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지만, 책을 통해서는 결코 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책을 읽는다고 해서 답을 얻는 것도 아니고,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해서 답을 얻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책읽는 사람들은 더 큰 장애물에 가로막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제 아이들이 책읽기를 좋아할런지 싫어할런지 아직은 모릅니다. 싫어하면 싫어하는대로 놔둘 것이고 좋아하면 좋아하는대로 놔둘 것입니다. 책을 안 읽어도 행복한 삶을 사는데는 아무 지장이 없고,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더 바람직하기도 하지요. 책을 좋아한다면 역시 또 내버려둘 겁니다. 고전 몇 개면 평생 두고 읽을만하고, 그리고 책을 읽어봐야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테니까요.

 

그러니 책을 읽자는 캠페인도 또 읽지 말자는 캠페인도 필요없겠네요. 하려도 해도 되는게 아니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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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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