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과 나

소선재에서 2008. 8. 19. 16:13


丹. 붉을 단 . 그러니까 님 향한 일편丹心의 단이기도 하고, 단전호흡의 단이기도 한 그 단이다. 이 글자가 책 제목을 달고 나온 적이 1980년대 후반이다. 김정택이라는 이로 기억하는데 소설형식으로 도가수련을 한 노인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축지법을 하고 경공술을 펼치는 얘기가 사실감있게 그려져 당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책이다. 당시 대한민국은 70년대를 지나 부의 축적의 시대에 접어들던 때였다. 굶주림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점점 더 행동반경을 넓히기 시작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민족주의의 발호였다. 먹고 살만하니 내가 - 아니, 우리가 -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 것이다.

이 책은 이런 흐름의 처음에 있던 책이었다. 백두산 동이족의 우수함. 그 부제가 말하는 한민족의 자긍심은 시대의 흐름이기도 하고, 또한 시대의 흐름에 따르는 결과물이기도 했다. 이 책 이후에 서점에는 한민족의 우수성에 대해 역설하는 책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김일부의 정역도 그렇고, 증산도의 책들도 한 몫했다. 이런 책들의 배경 - 학술적인 가치는 별로 없지만 - 은 동양의 사상인데, 공통점은 동양사상의 원류를 죄다 한민족의 것으로 갖다 붙이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천오백년전에는 한민족이 없었으므로, 그들이 찾은 건 동이족이라는 말이었다. 그때의 동이족이 지금의 한민족이라는 것이다. 결론 또한 천편일률적이어서, 앞으로의 시대는 후천시대가 됐건 용화세상이 됐건 간에, 한민족이 이 세계를 영도하는 민족이 되고 이 세상은 한민족의 지도아래 낙원이 된다는 것이다.

30년가까지 지난 지금까지도 이런 얘기들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역학쪽에서는 지축이 바로 서는 후천이 이미 도래했다고 하고, 단전호흡을 하는 기업에서는 한민족의 우수성을 근거로 그들의 상품을 팔고 있다. 한국에서 열린 월드컵때 우리는 얼마나 많이 치우천황의 얘기를 들어야만 했는가? 이런 얘기들이 사실이라면 그러면 언제 한민족은 세계의 제일민족이 되는 것인가?

나는 생각해본다. 예언들은 이미 성취됐을수도 있다고. 아시아에서 한국의 인기는 독보적이다. 한국은 일본과 같은 침략자의 이미지도 없다. 베이징올림픽에서 한국은 중국빼고 아시아를 제패했다. 그리고, 말끝마다 들이대는 경제규모 세계 10위의 경제대국. 그게 아니라도 사실 한국보다 더 잘 사는 나라는 없다. 다들 힘들게 살아서 그렇지, 먹고 자고 좋은 옷에 차에 한국만큼 잘 사는 나라 찾기가 쉽지 않다.

메이드 인 코리아보다 좋은 물건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 된 것이다. 정말 지축이 바로 서고 후천개벽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그 못살던 한국이 더이상 아시아는 놀 물이 안되고, 이제는 구미와 나란히 서니 말이다. 그런데, 나는 의아하다. 이렇게 한민족이 세계를 영도하는 민족이 되었는데, - 또는 거의 다 되고 있는데, 사람들은 여전히 불만이 가득해 보인다. 한민족이 세계 제일의 민족이 된다는 건, 아마 그 민족의 구성원들에게는 해당이 안 되는 얘기인가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세계에서 제일가는 민족이 사는 건 어느 누구보다도 더 힘들다고 하니 말이다.

그렇다면 말인데, 민족이 잘 나가는 것과 내가 잘 사는 것과는 별개 아닌가? 한민족의 우수성이 실현되는 지금, 우리는 새삼 배워야할지 모른다. 아~ 민족과 나는 별개구나. 금메달과 태극기를 보며, 세계를 놀라게 하는 한민족의 우월함을 보며, 우리는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국가나 민족이 잘났다고 내가 잘난게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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