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로 된 읽을거리가 귀한 이곳, 오랜만에 책 한권이 손안에 들어왔다. 노무현의 자서전으로 나온 운명이다’.  많은 부분은 예전에 접한 텍스트라 새로운 부분은 많지 않았다. 퇴임 후 서거에 이르는 부분은 가슴이 아파 읽기가 힘들었다. 그가 스스로 말한 참여정부의 는 주목할만 했다. 한미FTA나 대연정제안, 이라크파병과 양극화, 비정규직문제에 관한 그의 소회는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2000년들어 2010년까지 10년동안 한국사회의 가장 큰 뉴스는 무엇일까? 나는 주저없이 노무현의 대통령당선과 그의 죽음을 들고 싶다. 노무현은 그가 대통령으로 있었던, 정확히 말해 대통령후보가 된 2002년부터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린 2009년까지 한국사회를 비추는 거울역할을 했다. 그것도 거의 모든 것을 비춰내는 거울이었다.

 

그를 통해서 한국사회의 많은 모습들이 비춰졌다. 익숙하다고 넘겨버리고 세상은 그런 거라고 지나쳐버린 것들이 노무현에 의해 질문되어졌다. 그의 존재 자체가 질문이었다. 노무현도 그냥 그렇게 살면 좋으련만 이 노무현이라는 사람은 세상사람들이 사는 방식대로 살지 않았다.

 

이런 질문은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그냥 대통령이 알아서 하면 좋을텐데, 대통령은 국민이 대통령이라며 묻고 묻고 또 물었다. 사람들은 피곤했다. 지쳐갔다. 당신에게 표를 줬으니 이제 당신이 알아서 하면 될 일인데, 노무현은 그렇지 않았다.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된 날 밤이 기억난다. TV속의 노무현은 환호하는 지지자들에게 물었다. ‘이제 제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사람들은 잠시 주춤하더니, 곧이어 감시. 감시라는 단어를 연호했다. 나중에 노무현은 이때의 반응을 굉장히 섭섭하게 생각했다고 밝힌 바 있다. 단지 자기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대통령이 되었으니 이제는 당신 혼자 알아서 하라는 것이 서운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질문을 받는 것만도 피곤한데, 그 질문은 사람들이 보고 싶지 않은 것까지도 보여주는 거울이었다. 노무현의 질문은 생각을 해야 했고, 그의 말은 사람들의 욕심과도 충돌했다. 더군다나 하이에나언론들은 노무현을 물어뜯기 바빴다. 사람들은 세상이 시끄럽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이에나언론과 그 뒤에 한국을 쥐고 흔드는 무리들 때문이 아니라, 이 모든 시끄러움의 원인이 계속 질문을 던지는 노무현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원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10%정도되는 노무현 최후의 지지자를 제외하고는 너나 할 것 없이 노무현탓을 했다.

 

노무현과 참여정부의 가 있다면, 그것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한미에프티에이를 추진해서? 대연정을 제안해서? 미국의 용병으로 이라크에 파병해서? 부동산값이 올라서?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피곤했던 것이다. 존재자체가 질문인 노무현이 피곤했고, 참여를 요구하는 참여정부가 피곤했다.

 

사람들은 말로는 자유을 요구하면서, 자유의 필수요건인 판단과 책임은 지기싫어한다. 사실은 자유로운 삶을 살기가 싫은 것이다. 입으로는 자유를 떠들지만 사실은 다른 이들이 시키는대로 다른 이들로부터 주어진 틀안에서 사는 것이 편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자유인줄 안다.

 

이런 사람들에게 노무현과 그의 정부는 자율을 얘기하고 분권을 얘기했다. 노무현과 참여정부의 과는 여기에 있다. 자유롭게 살기 싫은 사람들은 그래서 노무현을 죽여버렸다.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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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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