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

소선재에서 2007. 11. 28. 18:53

탈무드의 얘기다.

두 사람이 굴뚝에 들어갔다 나왔다. 한 사람 얼굴에 검댕이 묻었다. 누가 얼굴을 씻을까?

답은 검댕이 안 묻은 사람이다.

상대방의 얼굴을 보고 나도 검댕이 묻었겠거니 하고 얼굴을 씻는 것이다.

시리즈에 계속 된다. 같은 질문의 두번째 답은 '당연히' 검댕이 얼굴에 묻은 사람이 씻는 것'이고, 세번째 답은 '둘이 들어갔다 나왔으니, 둘다 검댕이 묻어서 둘다 씻는다'이다.

첫번째 답에 주목한다.

다른 사람을 비추어 나를 돌아보아는 것, 이것을 반성 또는 성찰이라 한다.

사람들은 타인에 대해 재단을 하지만, 거기서 멈출 뿐 스스로를 돌아볼 줄 모른다.

과연 누가 다른 사람을 재단할 수 있으리요.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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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트럴가는 길

소선재에서 2007. 11. 28. 18:40


센트럴에서 학교가는 길은 지하보도가 길게 이어져있다. 느린 걸음으로는 한 5분, 종종 걸음으로도 한 3분은 걸리는 길이다. 매일 아침 학교가고 그리고 집에 오는 길에 다니는 이 길은, 매일 같으면서도 매일 다르다.

그 지하보도를 걸어가며, 마치 '스모크'에서 가게 주인(영화속 배우는 하비 키이텔이었다)이 매일 아침 같은 시각 가게앞 풍경을 사진으로 남겨놓는 것처럼, 나는 이 곳의 사진을 찍어놓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집에 있는 디지털카메라가 애기차지라 당분간 내 차례가 되긴 어렵겠지만, 나는 매일 아침 같으면서도 다른 센트럴 지하보도의 사진을 찍어 보고 싶다.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 출근하는 사람들, 학교에 가는 학생들, 카트를 밀고 가는 노숙자, 구걸하는 거지, 신문 또는 광고지를 나눠주는 사람들, 사람들의 동전을 바라며 기타를 둘러메고 노래하는 사람들(특히 그 중에 나는 수요일 아침의 흑인아저씨가 제일 좋다), 판토마임을 하는 사람도 단골이고, 장님으로 보이는 여자가 무반주로 노래를 부를 때도 있다. 아침에는 손금을 봐주는 할머니가 입구에 있고, 중간쯤에는 여호와의 증인을 전도하는 할머니가 있다. 꼬맹이로는 중국계, 한 여덟살쯤 되었나, 키보드를 놓고 피아노곡을 치기도 했고, 중국계로 보이는 할아버지는 해금같은 악기를 연주하기도 하고, 또 다른 중국계 할아버지는 어설픈 인형놀이를 하기도 한다.

한번은 저녁 시간에 젊은 백인 커플 둘이 남자는 기타로 반주를 하고, 여자는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는데, 귀에 익은 그 멜로디는 U2의 With or Without You였다. 현악기의 합주가 너무나 멋들어져, 걸음을 계속하면서도 내 귀는 그들의 연주를 쫓고 있었다. 내게 만약 50센트의 여유가 있었더라도, 그들의 음악을 더 듣고 왔을 것이다(아쉽게도 그들은 두번 다시 볼 수 없었다).

수요일 아침마다 바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만면에 웃음을 띠고 노래를 전해주는 흑인아저씨. 그가 바닥에 펼쳐놓은 기타케이스에는 동전이 가득하다. 매번 그냥 지나치기가 미안해, 눈웃음으로 대신해볼까도 싶었는데, 역시 50센트의 여유가 부담스러웠다.

센트럴 가는 길, 아직 내게는 50센트의 여유가 없는 길이기도 하다.


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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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콘의 추억

소선재에서 2007. 11. 28. 18:34



1.

89년이니 거의 20년이 다 되어간다. 같이 재수하던 녀석 둘이 사진으로 전공을 바꿨다. 이유는 단 하나. 공부해서 대학가기보다 사진으로 가기가 훨씬 쉬웠기 때문이다. 둘 다 삼수끝에 하나는 중앙대 사진학과를 가고 하나는 신구전문대 사진학과를 갔다. 나는, 돈이 없어서 전공을 바꾸지 못했다. 대신 그 둘을 따라 다녔다. 그리고 알아버렸다. '사진'이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사진은 돈이 많이 드는 놀이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디카'라는 것이 없었던 시절. 사진하는 사람들은 '매거진'에 필름을 담고, '확대기'를 갖다놓은 '암실'에서 '밀착'으로 사진을 뽑는 그런 때였다. 일반인들은 필름을 사서 찍고 현상인화를 맡겨야 했었다. 모두 돈이 드는 일이다. 나는 함부로 셔터를 누를 수가 없었다.

사실 내 카메라도 없었다. 집에 있던 펜탁스카메라, 아사히 펜탁스의 기술제휴로 만들어진 50미리 표준렌즈가 달린 그 카메라가 가끔 내 장난감이 되어주었다. 어쩌다 흑백필름 한통을 사서 친구들을 찍어주곤 했다. 하지만 역시 필름값, 현상인화료는 만만치 않았다.



2.

제대하고 우선 카메라가방을 샀다. 조만간 니콘 F-801을 넣으리라 다짐을 했지만, 결국 책가방으로만 쓰였다. 그때 가격으로 F-801은 50만원이 안 되었던 것 같다(확실치는 않다). 니콘의 F-801은 셔터속도가 8000분의 1초까지 구현이 된다. 4000분의 1초가 그때까지 최고의 셔터속도였다. 물을 뒤집어쓰고 있는 남자를 8000분의 1초로 찍은 모습이 Nikon F-801 의 광고사진이었다. 그 광고사진을 오랫동안 가지고 다녔었다.

민한이 졸업식날 민한이 누나가 F-801을 들고왔다. 나는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35-70렌즈가 달려있었다. 반셔터를 누르면 렌즈가 오토 포커싱을 위해 앞뒤로 왔다갔다한다. 경이로웠다. 만져보자고 하고 싶었지만, 끝내 참았다. 속쓰린 날이었다.



나의 속을 쓰리게 만들었던 F-801. 니콘은 그래서 갖고 싶기도, 또 안 갖고 싶기도 하다.




3.

어쩌다 보니 집에 Nikon-FM2가 있었다. 아버지의 작품이다. 직장의 비품으로 카메라를 사는데, 모든 직원들의 요구-즉, 자동카메라, 필름도 자동으로 감기는 자동카메라를 사자는 요구-를 물리치고, 손으로 렌즈를 돌려 초점을 맞추는 니콘의 FM2를 산 것이다. 그러니 다른 직원들은 그 카메라를 사용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전유물이 된 그 카메라는 잠도 우리집에서 자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내 눈에 띈 것이다.

그 이후로 FM2는 몇 년간 나의 카메라가 되었다. 사진을 찍을때는 FM2를 들고 나갔다. 나는 그 카메라가 싫었다. 몸통도 구식이다. F-801의 세련된 느낌도 없고, 좀 오래된 거라 그런지, 뷰파인더도 선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니콘렌즈가 그런지 몰라도, 색감이 선명하질 않았다. 무엇보다 50미리 표준렌즈는 확실히 제한적이었다. 그렇다고 없는 돈에 렌즈를 더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좋건 싫건, 선택의 여지 없이 내 카메라는 Nikon FM2였다.


완전 타의로 내 카메라가 되었던 Nikon FM2.  2년전 집에 도둑이 들어서 이 FM2 카메라를 가져갔다. 이 망할 도둑놈아, 벼룩의 간을 빼먹어라.




4.

카메라는 무기다. 생긴 것도 꼭 총같기도 하거니와, 그 자체가 하나의 '힘'이다. 대학때 수많은 시위현장에서 가장 쎄 보이는 사람들은 최루탄도 화염병도 아니고 '사다리'와 '카메라'였다(기자들은 작은 사다리를 들고 다닌다). 그들은 시위현장에 있으면서도 또한 시위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폼도 잡고 싶었다. 길다란 망원렌즈가 달린 카메라도 갖고 싶었다. 대학4학년때 도라산전망대에 갈 일이 있었다. 좀 폼을 잡고 싶었던 나는 꾀를 냈다. 현상소주인에게 말했다.

'이 카메라 하루만 빌리면 안 될까요?' 

그래서, 나는 책가방으로 쓰던 카메라가방에 FM2와 망원렌즈가 달린 카메라(아마 캐논이었던 것 같은데)를 넣고, 자랑스럽게 도라산전망대가는 버스에 올랐다. 그 날 나는 일행으로부터 '사진사였냐?'는 말을 몇 번 들었다. 다 그 길다란 망원렌즈덕분이었다.


5.

디지털 카메라가 나왔을 때, 저건 분명 나를 위한 카메라라고 생각했다. 이젠 더 이상 필름값, 현상인화료 걱정없이 셔터를 누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너무 늦게 나왔다. 기다림에 지쳐 나는 망부석이 되어버렸다. 카메라에 대한 열망은 디카가 나오기전에 이미 화석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카메라를 가지기에는 나는 너무나도 오랫동안 카메라를 가지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동생이 내 생일 선물로 캐논 파워샷 G5를 보내왔을때도, 나는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그리고, 나의 아내가 캐논 익서스 똑딱이를 샀을때도, 그 카메라는 나의 카메라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핫셀 블러드를, 아니면 니콘 F4나, 캐논 1D를 원한 것도 아니다. 백만원은 커녕 오십만원짜리. 내겐 단지 나의 카메라가 필요했던 것이다.


6.

우울하다. 일은  힘들다. 파타임잡이라고 하지만, 일을 하면 우울해진다. 힘든 몸은 자괴감을 낳는다. 지금 무얼 하는 건가? 이럴려고 여길 왔나? 단지 몸뿐만이 아니라 의욕까지 상실이다. 기말고사가 내일 모레지만 될대로 되라지. 하릴없이 인터넷을 보는데, 한겨례의 SLR 디지털 카메라 기사가 났다. 니콘과 캐논의 DSLR을 비교한 기사였다.

오래된 화석이 다시 살아나는 기분이다. 그래, 나도 카메라같은 카메라를 갖고 싶다 말이다. 2백만원 오백만원짜리는 아니더라도, 그냥 백만원정도만, 그냥 바디 렌즈만 있으면 되겠다 말이다. 내가 뭐 거창한 거 바라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나의 사진에 대한 욕심, 내가 누른 셔터수, 그리고 그 셔터 수에 대한 고민은, 요새 젊은 애들이 아무렇게나 질러버리는 DSLR하고는 그 차원이 다르단 말이다. 누가 뭐래도 나는 카메라를 가질 자격이 있단 말이다.


7.

몇달전 시티의 하이드파크에 갔는데, 여자애 둘이 - 한 스물 두셋쯤 되었으려나?- 목에 SLR 카메라를 걸고 지나갔더랬다. 한국애임을 직감했다. 저렇게 나이도 어린 애들이 저렇게 큰 SLR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애들은 한국애들뿐이다. 몰라서 그렇지, 한국 사람들이 너도 나도 핸드폰을 들이대는 광경은 진풍경이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 게 일상적인 나라는 거의 한국뿐이다. 이렇게 개나 소나 SLR - 싱글 렌즈 리플렉스, 일안 반사라는 말이다 -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나라도 역시 한국뿐이다.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한국은 어디 갈 곳도 없고, 할 거리도 없으니, 싸이질을 하려면 이런 것으로라도 가지고 놀아야 한다.

하지만, 걔네들이 알까? 한번의 셔터에 대한 고민을. 아무렇게나 연사로 찍어도 되고, 맘에 안 들면 바로 삭제해버려도 되는 그런 디지털 카메라로. 전문가라도 다르진 않을 것 같다. 얼마전에 애기 돌 사진을 찍으러 갔는데, 그 찍사녀석은 Eos 카메라로 한 시간 동안 기관총 갈기듯이 찍어댔다. 사진은? 단 하나도 건질 게 없었다. 생각이 없이 갈겨댄다고 좋은 사진이 나오겠나?


8.

한겨레의 디카 기사는 잠자는 내 욕심에 다시 불을 질러 놓았다. 그러나 뭐하랴? 그 불은 더 이상 번지지 못하고 수 초만에 꺼져버렸다. 나는 카메라를 가질 수도 없고, 설사 있어도 찍으러 갈 수도 없는 사내이다. 마치 불능의 사내처럼. 그러니, 한겨레의 DSLR기사는 오히려 나의 우울을 악화시킨 셈이다. 과연 내가 카메라를 가질 수 있는 그 날은 언제일까?

니콘 D80 이다. 내가 뭐 전문가도 아니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 더 커봤자 무겁기만 하고. D80은 현재 바디만 80만원정도 하나보다. 셔터속도는 4000분의 1초다. 8000분의 1초는 사실 별로 필요없다. 그럼에도 이름이 80인건, 아마 F-801의 후속시리즈이기때문일까?
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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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에 가면 박노자의 블로그가 있는데, 얼마전에 누가 시비를 걸었다.

"너는 왜 댓글에 대한 답을 안 하냐? 잘났다고 무시하는 거냐?"

나도 내 블로그의 댓글에 답을 잘 안한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별로 할 말이 없어서다.
"아~ 그러세요"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이런 얘기라면 안 하는게 낫다 싶어서다. 나의 블로그는 무슨 싸이월'도'나 인기좋은 블로그처럼 방문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그런 페이지가 아니다.

나는 두가지 이유로 블로그를 하는데, 첫째는 기록용이다. 내게 필요한 정보를 저장하는 도구이다. 두번째는 배설용이다. 나는 나의 얘기를 할 뿐이다. 누가 읽어주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무슨 칭찬을 듣고 싶어서도 아니다.

그러니, 나의 블로그는 사실 나의 독백에 다름아니다. 한마디로 공개된 일기장인 셈인데, 최근에 이런 내 생각을 고치게 한 두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첫번째는, 내가 글을 쓰면서 나의 가장 친한 친구 이름을 (중이라, 법명이다) 써버렸는데, 그걸 내가 즐겨찾는 블로거 중 한명이 알아본 것이다. 그러니, 그 사람과는 한다리 건너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괜찮다. 그 사람이 아는 건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지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더 심란한데, 나를 직접적으로 아는 사람이 내 블로그를 방문한 것이다. 공개된 내 블로그주소를 따라서 말이다.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나의 익명성은 완전히 해체가 되어버린 셈이다.

사실, '발언'이라는 행위 자체가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니, 완전한 익명성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의 정체가 까발려진 상태에서는 자신의 내밀한 속마음을 드러내기가 쉽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인 아내에게도 안하거나 못하는 말,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귀 가진 사람들에게 못하는 말을 여기다 하는 건데, 이런 상태에서는 지금까지의 '털어놓기'가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블로그를 폐쇄하고, 이곳으로 다시 옮겨오게 되었다. 마지막 블로그는 상당히 공을 들여서 만들었고, 또 채 두달도 되지 않은 상태여서, 그냥 계속 쓸까도 했지만, 결국은 폐쇄해버렸다. 과연 이곳에는 얼마나 익명의 섬으로 남을 수 있을려나.
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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