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에는 귀납적인 방법과 연역적인 방법이 있으며 둘 다 유효한 수단입니다.
즉, 경험(실험)에 의해 도출된 이론(귀납)이나, 이론으로부터 결론은 유도하는 것(연역) 모두 과학적 결과입니다.
물론 그 과정이 바르게 진행되았다는 전제 하에서죠.

그리고 종종 과학을 어떤 하나의 결과물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글 쓰신 분도 포함해서)
과학이란 방법론이지 결과물이 아닙니다.
과학적 방법을 거쳐서 나온 결과물이 과학적인 것이지 어떤 고정된 실체로서의 과학이란 존재하지 않죠.

그리고 과학은 끊임없는 자기부정과 의심을 거쳐 진화합니다.
그래서 어제까지 과학적인 진실(?)이라고 믿어지던 것이 오늘 새로운 이론이나 실험결과가 확인되면
내일부터는 비과학적인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글 쓰신 분께선 자신있게 의학을 과학이라고 확신하고 계신데
의학은 연역법보다는 귀납법에 아주 많이 기대고 있는 과학적 응용사례의 하나일 뿐입니다.
(즉, 의학=과학 이게 아닙니다. 의학=과학적방법을 거쳐나온 결과물 이게 정확하죠.)
분자생물학, 기초의학쪽에서는 보다 연역적인 방법들을 쓰고있죠.

그럼 한의학이 과학일까요? 아닐까요?

한의학은 귀납적으로 만들어진 이론을 가지고 만들어진 치료법에 가깝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경험에 의거하여 만들어진 이론으로 다시 실제에 적용한 것이란 거죠.
물론 그 결과물인 치료법도 여러세대를 거치면서 실험적으로 검증이 되었을 것입니다.
(몰론 요즘 하는 것처럼 엄격하게 통제된 상황에서 한 실험은 아니지만,
또 반대로 그 실험기간과 실험의 횟수로만 따진다면 요즘의 실험이 도저히 따라가기
어렵다고도 할 수 있겟죠.)
그러므로 한의학도 과학적 방법의 결과라고 볼 수 있겠지요.

다만,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과거 어느시점에서부터 한의학적 방법들이
발전을 멈추었다는, 또는 그렇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즉, 과학에서 강조하는 자기의심의 과정이 멈추었다는 것인데
이건 최근의 새로운 한의학자들(기초) 및 한의학에 관심을 가진 서양의학자들에 의해
많은 새로운 연구가 이루어지고있으니 앞으로 다시 발전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정리하자면 한의학은 발전이 정체된 과학적 결과물(치료법 체계)라고 볼 수 있겠죠.

서양의학도 예전 의학 발전사를 보면 황당무계한 치료법이 수도 없이 많았죠.
두통을 없애려면 두개골에 구멍을 뚫으면 된다는 등의...
잘못된 치료법으로 고통을 주고 다치게한 환자도 수없이 많았고...
만약에 또 수십,수백년이 지난다면
지금 현재의 치료법을 가지고도 미래의 사람들은 원시적이고 무식한 치료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아마 틀림없이 그렇게 될 듯...)
과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은 20세기말 21세기초에는 비과학적인 방법으로 치료를 했다고
주장할 것입니다.(글 쓰신 분처럼)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현재에 보기에 서양의학은 과학적인 방법으로 발전하고있고
현재에 가장 과학적인 치료법들입니다.

한의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귀납법을 과학적인 방법론의하나로 인정한다면
한의학도 과학적으로 도출된 치료법임이 분명합니다.
다만 조선조 이래로 발전이 정체되고있을 뿐.

그리고 상대방을 비판하는 많은 분들이 자신이 겪은 사례들을 가지고 상대방을 비판하시는데
그것도 과학적이 되려면 정확한 통계수치를 가지고 비판하셔야지
내가 겪어본 사례들 몇가지를 보니 저것은 전부 다 사기라고 주장하신다면
이 또한 비과학적인 결론이 됩니다.(지나친 일반화의 오류)
귀납법도 지켜야할 규칙이있죠.

양의사도 한의사도 정직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거짓을 일삼는 사람도 있고,
실력있는 좋은 의사가 있는가 하면 실력이 떨어지는 의사도 있는 법입니다.
몇가지 사례로 전체를 매도해선 안 되겠죠.

아, 그리고 한의학이 연역적이라고 생각하시는데
역사상 대부분의 의학은 귀납적으로 발전했다고 봐야합니다.
한의학이 중세 서양의학에 비해 정교한 이론적인 체계를 갖추고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한의학의 처방들이 전부 연역적으로 도출된 것이라고 보긴 어렵죠.
전부는 아니라도 많은 처방은 긴 시간에 걸친 경험의 결과가 축적되었다고 봐야합니다.
특히 종교에 비유한 부분은 좀 지나친 것 같네요.

서양의학도 기초분야에서 연역적인 방법을 많이 사용하고,
또 치료의 선택등에 있어 철학등과 결합될 여지도 많습니다.
실재로 그런 연구도 있는 것 같구요.

정작 서양의학이 발명된 곳에서는 열린마음을 가지고 계속 새로운 영역과 방법을 과학적으로 찾아나서는데
그걸 받아들인 우리나라에서는 서양의학이 종교처럼 떠받들어지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과학은 방법이지 결과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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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

六十七. 天下皆謂我道大, 似不肖, 夫唯大, 故似不肖, 若肖久矣, 其細也夫, 我

 有三寶, 持而保之, 一曰慈, 二曰, 三曰不敢爲天下先, 慈故能勇, 儉故能

 廣, 不敢爲天下先, 故能成器長, 今舍慈且勇, 舍儉且廣, 舍後且先, 死矣, 夫

 慈以戰則勝, 以守則固, 天將救之, 以慈衛之.

   

   67. 천하가 모두 이르기를 나의 도는 크기는 하지만 불초한 것 같다고 한다. 대저 오직 크기 때문에 불초한 것 같다. 만일 현명하다면 그 작은 것이 오래였으리라.

   나에게 세 가지 보배가 있다. 잘 간직하여 이를 보배로 삼는다. 그 첫째는 자비요, 둘째는 검소함이요, 셋째는 감히 천하의 앞장이 되지 않는 것이다. 자비하므로 능히 용기가 잇으며, 검소하므로 능히 널리 베풀 수 있고, 감히 천하의 앞장이 되지 않으므로 능히 기량있는 자의 우두머리가 된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자비를 버리고도 또한 용감하려 하고, 검소를 버리고도 널리 베풀려고 하고, 뒤에서 따르지 않으면서 또한 앞장서려고 하는데, 그러면 죽을 것이다.

   대저 자비는 이것으로 싸우면 곧 이기고, 이것으로 지키면 견고하다. 하늘이 장차 이를 구하고자 자비로써 이를 지킨다.



박정희나 정주영을 찬양하는 덜 떨어진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씨부랑거리는 얘기가 있다. 바로 '검소함'이다. 박정희가 얼마나 검소한 삶을 살았는지, 정주영같은 갑부가 얼마나 근검절약을 했는지에 대해서다. 만약 '검소함'이 한 개인의 인품과 훌륭함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면, 세상엔 벌써 '성인군자'가 넘쳐났을 것이다. 우선 나부터가 그렇다.

나? 나, 근검절약 바로 그 자체다. 나는 우선 모든 것이 아깝다. 인색하다고? 그렇다. 인색하다. 나는 모든 것에 인색해서,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기때문에 나는 모든 것에 대한 지출을 줄인다. 뿐만이 아니다. 나는 미래에 대해서도 인색하다.

여기 50개들이 사과 한 상자가 있다고 하자. 50개의 사과중에서 매번 제일 싱싱하고 맛있어 보이는 것만을 골라먹는 사람이 있고, 또 나처럼 50개의 사과중에서 매번 제일 상태가 나쁜 사과만을 골라먹는 사람이 있다. 먼저의 사람은 언제나 맛있고 제일 좋은 사과를 먹게 된다. 하지만, 나중에 5개, 또는 10개의 사과가 썩어서 아예 못먹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매번 제일 상하기쉬울 것 같은 사과를 골라먹기때문에, 언제나 제일 맛없는 사과를 먹지만, 상해서 버리는 사과는 없다.

나는 음식도 버리는게 없을 뿐더러, 옷도 집도 차도 모든 것을 아낀다. 설령 그것이 내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나는 아까워서 아낀다. 인색한 사람들중의 한편은 아껴서 모은 것을 보다 더 큰 소비와 지출, 즉 더 큰 만족과 효용을 위한 기회비용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도 아니다. 나는 무엇을 아껴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게 아니다. 정주영이 돈이 없어서 양말을 기워신고 구두를 고쳐가며 신었겠는가? 그냥 아까우니까 아낄 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검소'와 '근검절약'이 몸에 밴 사람은 과연 칭송받을만한 사람인가? 검소와 근검절

약은 분명 그렇지 않은 것에 비해 수준높은 인식이자 행위임에는 틀림없다. 도덕경에서 말하는 '검소함'의 힘이 바로 그렇다. 그렇다해도 그 '검소'와 '근검절약'이 다른 부분까지도 평가할 만한 기준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더군다나, 이미 '검소'와 '근검절약'이 몸에 밴 사람은 이미 그것이 '무위'의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일이므로 어떠한 노력의 댓가도 아니고, 따라서 그런 사람들에게 그런 자연스러운 모습을 칭찬한다고 칭찬으로 여겨지는 것도 아니다. 밥먹고 물마시는 것과 같이 자연스러운 것을 '훌륭한 인격'으로 추켜세우는 것은 아부거나 아니면 무식 둘중의 하나이다.

덧붙여 ''봉사'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타인에 대한 '봉사'를 자기일인양 하는 사람도 있다. 사회복지기관 봉사, 입양 등등. 그중에는 '봉사'가 자기자신이나 가족보다 우선해서, 남을 위한 삶자체를 사는 그런 사람도 있다. 과연 그렇다면 그것이 칭송받을만 한가? 물론, 칭송받을 만한 일이나, 그 사람과는 별개 문제다.

국외자의 입장에서 보면 '검소, 근검절약, 봉사'와 같은 삶이, 해야하고 따르고 본받아야만 하는 그 무엇이 되겠고, 또 그런 이유로 그런 사람들을 '칭송의 대상'으로 본보기삼는 것이겠지만, 사실 그 대상이 되는 사람들과는 별 상관없는 일이다. 밥먹고 똥싸고 하는 걸 칭찬하는 것과 마찬자지일뿐이다. 그러니, 근검절약한다고 해서 그들을 칭찬하지 말일이다. 그들이 봉사한다고 해서 그들을 칭찬하지 말일이다. 박정희나 정주영이 여자까지 멀리하고 모든 '욕망'에서 벗어난 인간들이라면 마땅히 우러러 따를 일이나, 그들은 그냥 아까우니까 근검절약하고 그게 몸에 배서 '검소'했을 뿐이다.

사실, 2008년, 소비만이 존재의 이유이자 목적인것만 같은 시대에, 그런 검소와 근검절약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누가 검소하게 살자라고 했다간,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그러니, 그런 삶의 모습이 '존경'스럽게 될 수도 있다 싶지만, 그래도 아닌건 아닌게 아닌가? '검소함'과 사람은 구별해야 한다. 오랜만에 도덕경을 보다가 '검소함'이라는 말이 있어 떠올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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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관형 인간

소선재에서 2008. 1. 29. 07:35

꼭 비싼 것만 시키는 인간이 있다. 꼭 비싼 것만 먹고, 꼭 비싼 것만 타고 꼭 비싼 것에만 눈이 가는 그런 인간들이 있다, 참 희한하게도. 그들의 눈은 사시인가? 메뉴판의 이런 저런 메뉴중에, 그들의 눈은 메뉴의 내용이 아닌 '가격'에 꽂혀서, 제일 비싼 것 - 기호와 취향과는 상관없이 단지 그게 제일 비싸다는 이유하나만으로- 만 주문하는 그런 인간들이 있는 것이다.

세상엔 별노무 인간이 많긴 하지만, 이런 인간들을 보는 것도 웃긴 일이다. 나도 '가격'에 눈이 간다. 나는 이왕이면 '싼' 것을 시키는데, 누가 돈을 내던지 간에 말이다. 내가 돈을 낼 때도 그렇고, 내가 돈을 내지 않아도 빚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 또한 그렇다.

어제 누구를 만났다. 지난번 처럼 제일 비싼 쥬스를 시켜서 먹더니, 배가 아프다며 화장실에 갔다 왔다. 그 인간과 세시간넘게 얘기를 하고 왔다. 글쎄, 그것이 얘기였는지 아니였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는 말을 하고 나는 듣고, 또 나도 말을 했다. 내 말을 그가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제일 경멸하는 인간이 있는데, 명리학적으로 얘기하자면 '상관'이 쎈 인간들이다. 이런 형의 인간들은 자기 마음대로라서, 제어가 안 되는 인간들이다. 모든 구속과 간섭을 싫어하면서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구속과 간섭을 행사하는 표리부동의 극치를 달리는 그런 인간들이다. 말이 많고, 말이 많은 만큼 다른 사람의 얘기는 듣지 않고, 교만하고 싸가지가 없으며, 예의범절도 모르고 자기멋대로에 탐욕도 심하다.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은 하는데, 알고보면 인간과 세상은 자기를 중심으로 돈다고 믿는 이런 또라이들.  한마디로 소인배의 전형이요, 사회악의 근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상관'형의 인간과 어제 마주 앉아있었는데, 이런 인간들과 얘기를 하다보면, 참 허무해진다. 그 시간, 차 값, 말을 해야 하는데 쓰이는 나의 에너지. 이 모든 것들이 아까워진다. 아무리 얘기를 해도, 전혀 남의 얘기를 들으려 하지 않고, 이해하려하지 않고. 결국엔 자기 자신의 얘기만 하는 그들. 그래서, 종국에는 남에게 자기를 강요하는 그들.

아무리 명리학공부를 했다해도, '자기'의 틀을 벗어나는 건 또 별개의 문제다. 그렇게 내가 얘기를 했건만, 여전히 내게 모욕과 간섭을 일삼는 그를 보며, '명리학 공부를 하면 뭐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내가 '상관'형 인간들과 상종하지 않으려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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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제

소선재에서 2008. 1. 27. 22:42

얼마전에 나와 같은 시기에 이 곳에 온 사람을 만났다. 나보다 2년정도 아래이니 거의 동년배라해도 무방하다. 직장생활에 대해 묻자 그는 말했다.

"처음엔 인종차별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그럴만도 해요"

그는 대한민국사람이라면 최소한 절반은 아는 그런 다국적기업에 다닌다. 그가 영어를 못 해서 느끼는 괴로움을 토로하며 내게 한 말이다 - 여기서 영어를 잘 못한다는 건, 상대방의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하고, 나의 의사표현을 정확하게 제때에 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한다 - . 그가 내게 더 이상의 설명을 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이건 바로 나 또한 일터에서 똑같이 겪는 상황이기때문이다.

'이것들이 말을 못한다고 사람까지 바보로 아나?'

안타깝게도 대답은 예스이다. 내가 한국어에 얼마나 능숙하고 한국에서 얼마나 잘났는가는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말귀가 안 통하는 사람, 말해줘도 이해도 못하고, 또 무슨 말인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하는 사람, 즉 '바보'이기 때문이다.

명시적으로 바보라는 말을 듣지는 않지만, 그들의 눈빛에서 그리고 그들이 나를 대하는 표정과 분위기에서 '바보'취급을 받을 때는 기분이 나.쁘.다. 그렇지 않겠냐? 바보취급을 받는데?

그러면, 잘 못 알아들었다고 하라고? 그것도 한 두번이지, 매번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누가 말끝마다 '뭐라고?'를 한다고 해봐라. 한번으로 끝나면 그나마 다행이다. 한번 못 알아들은 말은, 두번세번이 아니라, 다섯번 여섯번정도 '쏘리?'를 해야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된다. '쏘리?'도 한 두번이지.

문제는 '나'만 그런 것 같다는 것이다. 독일에서 유학온 놈은 독일어억양으로 이래저래 끊임없이 떠벌리고, 또 보아하니 이곳 사람들의 말도 거침없이 알아듣는 것 같다. 필리핀출신 아저씨도 발음은 약간 다를지라도, 온갖 슬랭으로 웃음을 선사한다.
 
얼마전에 사고가 있어서 매니저와 전화통화를 한 적이 있다. 사고경위를 설명해야하는데, 도대체 설명하기도 어렵고, 또 매니저는 나보고 뭐라고 하는데, 도대체 무슨 소린지도 모르겠고.

도대체! 도대체, 도대체...............

다른 한 사람은, 나보다 한 5년아래인데, 세대가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좀 더 개인주의적이고(바람직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좀 더 현실지향적인 듯 하다. 오늘 그와 얘기를 하면서는 '영어'에 대한 얘기는 단 한마디도 나오질 않았다. 20대에 유학을 와서 여기서 자리잡은 그들에게서는 '영어'에 대한 불편함, 어려움은 찾아볼 수 없다. 이곳사람을 대상으로 한 비즈니스를 하고, 또 이곳사람들과 직장생활을 하는 그 부부는 '영어'는 그냥 '말'일 뿐이지, 어떠한 걸림돌도 아니고, 아무런 장애도 아니다.

언어로 인한 장벽을 느낄때마다, 나를 지탱해주는 힘이 한웅큼씩 없어져버리는 느낌이다. 마치 '스트리트 파이터'게임에서, 상대방의 기술에 걸려, 에너지가 순식간에 줄어드는 그런 것처럼 말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나의 늦은 나이? 또는 나의 무식? 게으름? 비겁? ....?.....?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 나의 문제는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낼 힘조차 없다는 것이다. 과연, 나의 문제는 해결이 가능한 것인가? 정말 나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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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리학 강의

소선재에서 2008. 1. 27. 13:53

아무래도 명리학강의를 하긴 하게 될 것 같다. 몇명이나 모일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지금 개업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아마 몇 명의 학생들이 대상이지 않을까 싶다. 많아야 10명? 아니, 한 다섯명 정도도 생각하고 있다.

그래도, 칠판앞에서 하는 강의이니만큼 준비가 없을 수 없다. 어제 그제는 일하는 짬짬이 리허설도 해 봤다. 머리속에 있는 내용이긴 하지만, 말로서 전달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요즘 내가 아주 무력해져 있어서, 과연 내 말에 얼마나 파워가 실릴지 좀 걱정된다. 사실 말이 중요한게 아니다. 같은 말이라도 그 말을 누가 하느냐에 따라 그 말이 갖는 힘이 달라지고, 또 심지어는 의미까지도 달라진다.

그다지 너그럽지 않아서, 사실은 아주 속이 좁아서, 못마땅한 사람들을 앞에 앉혀놓고 얘기해야하는 것도 부담이다. 내 스타일이, 잘난 척하지 않으면서 잘난 척을 하는 내 스타일이 그 사람들에게 얼마나 거부감을 줄까 싶기도 하고, 하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나를 드러낼 방법도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가르치는 건 최상의 배움이다. 내가 가르치면서 내가 아는 건 더 잘 알게 되고 내가 모르는 것이 무언지 알게 되는 그런 최고의 배움이 바로 가르치는 것인데, 문제는 내가 지금 뭘 배우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이래저래 무력한 나날이라고 할까? 차라리 '분노'의 힘으로 살았던 예전이, 훨씬 더 힘찼던 때였다는 생각이다.

그러니, 힘도 없고 열정도 없는 지금, 지금은 가만히 있어야 할 때인데, 남앞에 서게 되다니, 내게 독이 될 것인가? 약이 될 것인가? 하여튼 조심스럽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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