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를 읽었다는 자 누구인가

박민영의 <논어는 진보다>, 각양각색에 완전히 모순적이기까지 한 공자의 말씀

▣ 로쟈 인터넷 서평꾼 http://blog.aladdin.co.kr/mramor


“논어를 뒤집는다. 공자를 바로 본다, 다시 본다”라는 문구가 눈에 띄어 집어든 책은 박민영의 <논어는 진보다>(포럼 펴냄)이다. 일반인들이 공자에 대해 알고 있는 상식(혹은 편견)을 바로잡고자 하는 게 저자의 의도인데, 제목으로 미루어 그가 문제 삼는 건 공자와 논어를 ‘보수’로 보는 태도다. 비록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주장에 박수친 바 없으나, 크게 보아 나 또한 그런 태도에서 예외가 아니었으니 정확히 책이 목표로 하는 독자이겠다. ‘공자님 말씀’을 모아놓은 고전이니 기꺼이 여러 종의 번역본을 모셔두긴 하지만 진지하게 읽어볼 생각은 하지 못한 독자 말이다.

사실 유교 문화권에서 공자와 논어가 가진 영향력은 기독교 문화권에서 성경이 가진 영향력에 비견될 만큼 크고 방대한 것이다. <논어금독>을 펴낸 리쩌허우에 따르면, 서양문명과 다르게 중국에는 진정한 종교전쟁이 없었던 것도 유학의 포용성과 큰 관계가 있으니 그 영향은 ‘말씀’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유가와 법가가 혼용된 윤리적·정치적 규범 혹은 법칙이 중국 역사 2천 년을 지배해왔다고도 말해지는 것이니 자세를 바로 하고 좀 진지하게 ‘선생님’의 말씀에 귀기울여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예의를 갖춰서 논어를 대할 때, 두 가지 점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먼저, 리쩌허우의 지적대로 기원전 500여 년에 공자가 한 말을 기록한 내용(말하자면 어록)의 대부분을 오늘날에도 읽고 이해할 수 있다는 점. 물론 한문에 대한 기본 지식을 갖고 있는 독자의 경우지만 한국인이 중세 국어를 더듬더듬 읽을 수밖에 없는 것과 비교하면 분명 놀라운 일이다. 저자에 따르면 논어에 쓰인 한문은 “약간의 한문학적 지식만 있으면 누구나 해석할 수 있을 만큼 쉽다”.

하지만 그렇듯 평이하게 읽힘에도 논어에 대한 번역과 주석은 각양각색이며 놀랍게도 심지어는 모순적이기까지 하다. 역시나 리쩌허우에 따르면 “고대문자는 간단하면서도 포괄적이어서 오늘날의 언어로 정확하고 분명하게 바꾸어야만 잘 파악할 수 있다”. 문제는 ‘정확하고 분명하게’ 바꾸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는 데 있다. 논어의 이름난 주석자만 하더라도 2천 명이 넘는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예컨대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란 첫 구절만 하더라도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익힌다는 의미인지, ‘시’(時)의 의미가 ‘때에 따라’인지 ‘때때로’인지 아니면 ‘계속’인지 저마다 의견들이 다른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 구절은 “(仁을) 배워서 때에 따라 (禮를) 익히니”로 해석되어야 한다. ‘위정’편 16장에 대한 해석은 더 현격한 차이를 드러낸다. ‘공호이단, 사해야이’(攻乎異端, 斯害也已)란 구절을 “이단을 전공하는 것은 해로울 뿐이다”로 읽는 게 전통적인 해석이었지만 저자는 “이단을 공격하는 것은 그 자체가 해로운 것이다”로 새긴다. 이 모두가 가능하다고 친절하게 소개해주는 번역서도 있지만 전혀 상반되는 해석이 양립 가능하다면 공자가 한 입으로 두말한 것이 되는가?

저자는 “공자의 본래 문제의식이 무엇이었는지, 공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직접 원문을 읽어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동시에 “논어를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한문학적 지식보다는 오히려 광범위한 인문학적 지식과 철학적 사고능력”이라고 덧붙인다. 사실 논어에 대한 허다한 번역과 주석들이 모두 원문 읽기에서 나온 것이니 ‘원문 읽기’만으로 그간의 오해와 편견이 모두 불식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리쩌허우조차도 모호한 대목들은 그대로 놔두는 수밖에 없다고 한다).

송나라의 유학자 정이(程?)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논어를 읽는데, 논어를 읽기 전에도 이런 사람이고 논어를 읽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이런 사람이라면 읽지 않은 것과 같다.” 우리의 문제는 이렇다. “논어를 이렇게도 읽을 수 있고, 저렇게도 읽을 수 있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읽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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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의 세월

소선재에서 2008. 2. 22. 19:24
사진을 보니, 노무현도 많이 늘었다.

하기사, 그도 이젠 환갑이 지났으니.

이젠 예전만큼 노무현의 말이 전달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아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노무현의 말을 비난하는, 정말 보고 듣고 있으면 복장이 터지는 그런 소리를 좀 덜 듣고 볼 테니 그건 좀 다행이기도 하다.

골치아픈 나라에서 대통령노릇하느라 정말 수고많으셨다. 이런 똑똑한 대통령은 내가 살아있는동안에 또 만나기 어렵지 않을까 싶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자유로운 공간을 찾아서 - 퇴임을 앞둔 노무현 대통령이 22일 낮 청와대 춘추관에서 열린 출입기자들과의 고별 오찬에 참석, ‘이제 화장을 지우고’ ‘자유로운 공간을 찾아 떠난다’며 퇴임 소회를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盧 대통령 "조금 별난 시민으로 돌아간다"
[프레시안] 2008년 02월 22일(금) 오후 02:36   가| 이메일| 프린트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마지막 인사

 [프레시안 윤태곤/기자]

   노무현 대통령은 22일 청와대 출입기자들에게 "마주 보고 싸우는 관계가 아니라 어느 방향을 함께 바라보고 함께 가는 관계가 되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노 대통령은 이날 문재인 비서실장이 주재한 춘추관 기자단 오찬에 참석해 이같이 말했다. 노 대통령은 출입기자들과 건배하며 "대통령을 그만 두면 가장 좋은 것은 뉴스를 편안한 마음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고 그 다음은 화장을 안 해도 된다는 것"이라며 "화장(품)이 피부에 닿는 느낌을 싫어한다"고 말했다.
 
  이어 "상징적으로도 대통령은 무대 위에 있기 때문에 항상 화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특별한 긴장감을 갖고 연기를 계속해야 하는데 이제 안 해도 된다"며 "대통령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항상 무대 위에 서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토로했다.
 
  "정치적 성공을 미루다 대통령까지 됐다"
 
 
노 대통령은 "그 다음으로 느리고 적게 쓰고 살려고 하는데 그건 어려운 일인 것 같고 (대통령직을 떠난 뒤) 제일 하고 싶은 전환은 마주 서서 대결하고 승부를 맺어 나가야 하는 승부의 세계를 떠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승부의 대척점에 서 있진 않겠지만 자유로운 공간에서, 자유로운 공간 때문에 여러분과 좀 더 여유로운 공간이 열리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또 "저도 자기의 이해관계를 중시하는 사람"이라고 전제한 뒤 "그러나 이익을 탐한다 해도 당장의 이익이 시간이 지나면 독이 되고 손해가 되는 일이 많고 이익을 늦추면 대의가 되고 가치가 되는 일이 많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가치와 이익이 서로 구분된 것이 아니라 시간의 문제, 이익의 폭이 어느 정도 넓으냐의 문제"라며 "우리의 폭을 어디까지로 잡느냐에 따라 이익이 남을 위한 일이 될 수도 있고 시간을 길게 보면 손해가 이익이 되기도 한다"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이익을 미루면 전략적으로도 좋은 이익이 된다"며 "저도 대통령이 된 것도 정치적인 성공을 뒤로 미루다 보니 대통령까지 한 것"이라고 소개했다.
 
  노 대통령은 "이익을 같이 하는 사람이 모이고 대의를 같이 하는 사람이 모이고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 모이고 정서가 비슷한 사람이 모이는데 여러분은 까다로운 논리를 생산하는 직업이고 저도 까다로운 사람으로 통하는데가 많이 있을 수 있다"며 "여러분과도 뜻을 같은 방향에 두고 만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언론과 편치 않았던 관계를 의식한 듯 출입기자들에게 "개별 사건보다는 전체적으로 정서적 공감을 보여준 때도 있었는데 오래 같이 있다 보니 미운 정, 고운 정이 쌓여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무척 고맙다"고 말했다.
 
  이어 "저는 돌아간다. 고향으로, 일반 국민으로 돌아간다"며 "1987년 이전, 대통령 이전, 정치를 시작하기 이전 시민이나 대통령 후에 힘이 됐던 시민들, 조금은 별난 시민들로 돌아가는 것일 수도 있다. 시민의 위치에서 여러분을 만나게 되면 좀더 새로운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직접적이진 않지만 정치적 활동을 펼치겠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그는 "홈페이지도 열어 놓고 여러분과 간접적으로 소통하면 같이 있는 느낌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며 "우리의 인연이 계속 소중하게 기억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윤태곤/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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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대통령 “이제 뉴스 편히 볼수 있어”
청와대 직원ㆍ기자 송별간담회…‘소폭 원샷’
춘추관 방문 5년간 소회 밝혀…공식일정 마무리
연합
» 자유로운 공간을 찾아서 - 퇴임을 앞둔 노무현 대통령이 22일 낮 청와대 춘추관에서 열린 출입기자들과의 고별 오찬에 참석, ‘이제 화장을 지우고’ ‘자유로운 공간을 찾아 떠난다’며 퇴임 소회를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노무현 대통령은 퇴임을 사흘 앞둔 22일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머물고 있는 춘추관을 방문해 지난 5년간의 소회를 밝히는 것으로 사실상의 공식 일정을 마무리했다.

부인 권양숙 여사와 함께 춘추관을 찾은 노 대통령은 "지난 5년간 무척 힘들었다"는 말을 시작으로 참여정부 5년간의 소회와 향후 일정 등을 간략하게 밝혔다.

노 대통령은 "저는 이제 고향으로, 일반 국민으로 돌아간다"며 "1987년 이전, 대통령이 되기 전, 정치를 시작하기 전의 시기나 대통령에 당선될 때 제게 힘이 됐던 조금 별난 시민들에게 돌아가는 것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지난 5년간 언론과 빚어온 갈등을 떠올린 듯 "대통령을 그만두면 제일 좋은 것은 뉴스를 편안한 마음으로 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 뒤 "이제 (언론과) 서로 마주보고 싸우는 관계가 아니라 어딘가 방향을 함께 가는 관계로 전환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또 "이제 화장을 안 해도 된다"며 "(화장을 하면) 피부에 느낌이 안 좋아 화장을 싫어하는데, 대통령은 항상 무대 위에 있기 때문에 화장하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무대자세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특별한 긴장과 연기를 계속해야 하는데 이제 좀 안 해도 돼서 아주 좋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저에겐 이런 자유가 아주 큰 행복"이라며 "또 가능할 지 모르겠지만 머리도 적게 쓰고 사적으로 살아보고 싶은데...라고 희망을 피력하면서도 "그게 좀 어려울 것 같다"고 덧붙였다.

노 대통령은 "제가 제일 하고 싶은 전환은 마주서서 대결하고 승부를 항상 맺어나가야 되는 승부의 세계를 떠나는 것"이라며 "착한 소리도 하고 군소리도 할 수 있겠지만 (앞으로) 저는 그 승부의 대척점에 서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 점이 제게 자유로운 공간을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노 대통령은 "이익을 뒤로 미루면 전략적으로도 좋은 이익이 생길 수도 있다"며 "제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 그런 과정이라 할 수 있으며, 정치적인 이익을 뒤로 미루다 보니 결국 대통령까지 됐다. 정치인으로서 큰 성공을 한 것"이라고 자평했다.




노 대통령은 자신을 취재해온 기자들에게 "뜻을 같은 방향으로 두고 만났으면 좋겠다. 정서적으로 통하는 데를 만들어 자주 봤으면 좋겠다"고 친근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노 대통령은 퇴임 뒤 개인 홈페이지 운영 사실을 전하면서 "글이 올라오면 보고, (글들을) 모아서 느낌을 얘기하고 서로 소통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같이 있는 느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문재인 비서실장 주최로 열린 출입기자단 송별 오찬에 잠깐 격려하는 형식으로 방문한 노 대통령은 환송 꽃다발을 전달받은 뒤 기자들과 소주폭탄주로 건배를 하기도 했다.

노 대통령은 앞서 청와대에서 전 직원이 참석한 가운데 송별 다과회를 갖고 그간 자신을 보좌해온 직원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격려했다.

문재인 비서실장도 출입기자들과 오찬을 하며 "제가 취임할 때 `참여정부에 하산이 없다'고 했는데 그 말이 씨가 됐는지 마지막까지 일이 많았고, 끝까지 언론보도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일도 그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문 실장은 "어쨌든 개인적으로 아주 홀가분하다. 해방 아니냐"라며 "언론보도로부터의 해방이 가장 크지 않을까 싶다. 매일 뉴스에 신경을 쓰고 노심초사하고 때론 뉴스 때문에 속이 상하기도 했는데 이제 그만두면 뉴스를 편안하게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청와대 마지막 대변인인 천호선 홍보수석은 이날 고별 브리핑에서 "그동안 정말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했다. 어느 하루 힘들지 않은 날이 없었고 아쉬운 때도 적지 않았다"면서 "5년간의 참여정부의 공과를 놓고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을 정도로 논란이 계속됐는데, 이제 한걸음 뒤에서 심호흡하고 냉정하고 객관적인 평가가 이뤄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상헌 기자 honeybee@yna.co.kr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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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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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에는 귀납적인 방법과 연역적인 방법이 있으며 둘 다 유효한 수단입니다.
즉, 경험(실험)에 의해 도출된 이론(귀납)이나, 이론으로부터 결론은 유도하는 것(연역) 모두 과학적 결과입니다.
물론 그 과정이 바르게 진행되았다는 전제 하에서죠.

그리고 종종 과학을 어떤 하나의 결과물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글 쓰신 분도 포함해서)
과학이란 방법론이지 결과물이 아닙니다.
과학적 방법을 거쳐서 나온 결과물이 과학적인 것이지 어떤 고정된 실체로서의 과학이란 존재하지 않죠.

그리고 과학은 끊임없는 자기부정과 의심을 거쳐 진화합니다.
그래서 어제까지 과학적인 진실(?)이라고 믿어지던 것이 오늘 새로운 이론이나 실험결과가 확인되면
내일부터는 비과학적인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글 쓰신 분께선 자신있게 의학을 과학이라고 확신하고 계신데
의학은 연역법보다는 귀납법에 아주 많이 기대고 있는 과학적 응용사례의 하나일 뿐입니다.
(즉, 의학=과학 이게 아닙니다. 의학=과학적방법을 거쳐나온 결과물 이게 정확하죠.)
분자생물학, 기초의학쪽에서는 보다 연역적인 방법들을 쓰고있죠.

그럼 한의학이 과학일까요? 아닐까요?

한의학은 귀납적으로 만들어진 이론을 가지고 만들어진 치료법에 가깝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경험에 의거하여 만들어진 이론으로 다시 실제에 적용한 것이란 거죠.
물론 그 결과물인 치료법도 여러세대를 거치면서 실험적으로 검증이 되었을 것입니다.
(몰론 요즘 하는 것처럼 엄격하게 통제된 상황에서 한 실험은 아니지만,
또 반대로 그 실험기간과 실험의 횟수로만 따진다면 요즘의 실험이 도저히 따라가기
어렵다고도 할 수 있겟죠.)
그러므로 한의학도 과학적 방법의 결과라고 볼 수 있겠지요.

다만,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과거 어느시점에서부터 한의학적 방법들이
발전을 멈추었다는, 또는 그렇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즉, 과학에서 강조하는 자기의심의 과정이 멈추었다는 것인데
이건 최근의 새로운 한의학자들(기초) 및 한의학에 관심을 가진 서양의학자들에 의해
많은 새로운 연구가 이루어지고있으니 앞으로 다시 발전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정리하자면 한의학은 발전이 정체된 과학적 결과물(치료법 체계)라고 볼 수 있겠죠.

서양의학도 예전 의학 발전사를 보면 황당무계한 치료법이 수도 없이 많았죠.
두통을 없애려면 두개골에 구멍을 뚫으면 된다는 등의...
잘못된 치료법으로 고통을 주고 다치게한 환자도 수없이 많았고...
만약에 또 수십,수백년이 지난다면
지금 현재의 치료법을 가지고도 미래의 사람들은 원시적이고 무식한 치료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아마 틀림없이 그렇게 될 듯...)
과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은 20세기말 21세기초에는 비과학적인 방법으로 치료를 했다고
주장할 것입니다.(글 쓰신 분처럼)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현재에 보기에 서양의학은 과학적인 방법으로 발전하고있고
현재에 가장 과학적인 치료법들입니다.

한의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귀납법을 과학적인 방법론의하나로 인정한다면
한의학도 과학적으로 도출된 치료법임이 분명합니다.
다만 조선조 이래로 발전이 정체되고있을 뿐.

그리고 상대방을 비판하는 많은 분들이 자신이 겪은 사례들을 가지고 상대방을 비판하시는데
그것도 과학적이 되려면 정확한 통계수치를 가지고 비판하셔야지
내가 겪어본 사례들 몇가지를 보니 저것은 전부 다 사기라고 주장하신다면
이 또한 비과학적인 결론이 됩니다.(지나친 일반화의 오류)
귀납법도 지켜야할 규칙이있죠.

양의사도 한의사도 정직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거짓을 일삼는 사람도 있고,
실력있는 좋은 의사가 있는가 하면 실력이 떨어지는 의사도 있는 법입니다.
몇가지 사례로 전체를 매도해선 안 되겠죠.

아, 그리고 한의학이 연역적이라고 생각하시는데
역사상 대부분의 의학은 귀납적으로 발전했다고 봐야합니다.
한의학이 중세 서양의학에 비해 정교한 이론적인 체계를 갖추고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한의학의 처방들이 전부 연역적으로 도출된 것이라고 보긴 어렵죠.
전부는 아니라도 많은 처방은 긴 시간에 걸친 경험의 결과가 축적되었다고 봐야합니다.
특히 종교에 비유한 부분은 좀 지나친 것 같네요.

서양의학도 기초분야에서 연역적인 방법을 많이 사용하고,
또 치료의 선택등에 있어 철학등과 결합될 여지도 많습니다.
실재로 그런 연구도 있는 것 같구요.

정작 서양의학이 발명된 곳에서는 열린마음을 가지고 계속 새로운 영역과 방법을 과학적으로 찾아나서는데
그걸 받아들인 우리나라에서는 서양의학이 종교처럼 떠받들어지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과학은 방법이지 결과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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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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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

六十七. 天下皆謂我道大, 似不肖, 夫唯大, 故似不肖, 若肖久矣, 其細也夫, 我

 有三寶, 持而保之, 一曰慈, 二曰, 三曰不敢爲天下先, 慈故能勇, 儉故能

 廣, 不敢爲天下先, 故能成器長, 今舍慈且勇, 舍儉且廣, 舍後且先, 死矣, 夫

 慈以戰則勝, 以守則固, 天將救之, 以慈衛之.

   

   67. 천하가 모두 이르기를 나의 도는 크기는 하지만 불초한 것 같다고 한다. 대저 오직 크기 때문에 불초한 것 같다. 만일 현명하다면 그 작은 것이 오래였으리라.

   나에게 세 가지 보배가 있다. 잘 간직하여 이를 보배로 삼는다. 그 첫째는 자비요, 둘째는 검소함이요, 셋째는 감히 천하의 앞장이 되지 않는 것이다. 자비하므로 능히 용기가 잇으며, 검소하므로 능히 널리 베풀 수 있고, 감히 천하의 앞장이 되지 않으므로 능히 기량있는 자의 우두머리가 된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자비를 버리고도 또한 용감하려 하고, 검소를 버리고도 널리 베풀려고 하고, 뒤에서 따르지 않으면서 또한 앞장서려고 하는데, 그러면 죽을 것이다.

   대저 자비는 이것으로 싸우면 곧 이기고, 이것으로 지키면 견고하다. 하늘이 장차 이를 구하고자 자비로써 이를 지킨다.



박정희나 정주영을 찬양하는 덜 떨어진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씨부랑거리는 얘기가 있다. 바로 '검소함'이다. 박정희가 얼마나 검소한 삶을 살았는지, 정주영같은 갑부가 얼마나 근검절약을 했는지에 대해서다. 만약 '검소함'이 한 개인의 인품과 훌륭함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면, 세상엔 벌써 '성인군자'가 넘쳐났을 것이다. 우선 나부터가 그렇다.

나? 나, 근검절약 바로 그 자체다. 나는 우선 모든 것이 아깝다. 인색하다고? 그렇다. 인색하다. 나는 모든 것에 인색해서,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기때문에 나는 모든 것에 대한 지출을 줄인다. 뿐만이 아니다. 나는 미래에 대해서도 인색하다.

여기 50개들이 사과 한 상자가 있다고 하자. 50개의 사과중에서 매번 제일 싱싱하고 맛있어 보이는 것만을 골라먹는 사람이 있고, 또 나처럼 50개의 사과중에서 매번 제일 상태가 나쁜 사과만을 골라먹는 사람이 있다. 먼저의 사람은 언제나 맛있고 제일 좋은 사과를 먹게 된다. 하지만, 나중에 5개, 또는 10개의 사과가 썩어서 아예 못먹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매번 제일 상하기쉬울 것 같은 사과를 골라먹기때문에, 언제나 제일 맛없는 사과를 먹지만, 상해서 버리는 사과는 없다.

나는 음식도 버리는게 없을 뿐더러, 옷도 집도 차도 모든 것을 아낀다. 설령 그것이 내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나는 아까워서 아낀다. 인색한 사람들중의 한편은 아껴서 모은 것을 보다 더 큰 소비와 지출, 즉 더 큰 만족과 효용을 위한 기회비용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도 아니다. 나는 무엇을 아껴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게 아니다. 정주영이 돈이 없어서 양말을 기워신고 구두를 고쳐가며 신었겠는가? 그냥 아까우니까 아낄 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검소'와 '근검절약'이 몸에 밴 사람은 과연 칭송받을만한 사람인가? 검소와 근검절

약은 분명 그렇지 않은 것에 비해 수준높은 인식이자 행위임에는 틀림없다. 도덕경에서 말하는 '검소함'의 힘이 바로 그렇다. 그렇다해도 그 '검소'와 '근검절약'이 다른 부분까지도 평가할 만한 기준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더군다나, 이미 '검소'와 '근검절약'이 몸에 밴 사람은 이미 그것이 '무위'의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일이므로 어떠한 노력의 댓가도 아니고, 따라서 그런 사람들에게 그런 자연스러운 모습을 칭찬한다고 칭찬으로 여겨지는 것도 아니다. 밥먹고 물마시는 것과 같이 자연스러운 것을 '훌륭한 인격'으로 추켜세우는 것은 아부거나 아니면 무식 둘중의 하나이다.

덧붙여 ''봉사'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타인에 대한 '봉사'를 자기일인양 하는 사람도 있다. 사회복지기관 봉사, 입양 등등. 그중에는 '봉사'가 자기자신이나 가족보다 우선해서, 남을 위한 삶자체를 사는 그런 사람도 있다. 과연 그렇다면 그것이 칭송받을만 한가? 물론, 칭송받을 만한 일이나, 그 사람과는 별개 문제다.

국외자의 입장에서 보면 '검소, 근검절약, 봉사'와 같은 삶이, 해야하고 따르고 본받아야만 하는 그 무엇이 되겠고, 또 그런 이유로 그런 사람들을 '칭송의 대상'으로 본보기삼는 것이겠지만, 사실 그 대상이 되는 사람들과는 별 상관없는 일이다. 밥먹고 똥싸고 하는 걸 칭찬하는 것과 마찬자지일뿐이다. 그러니, 근검절약한다고 해서 그들을 칭찬하지 말일이다. 그들이 봉사한다고 해서 그들을 칭찬하지 말일이다. 박정희나 정주영이 여자까지 멀리하고 모든 '욕망'에서 벗어난 인간들이라면 마땅히 우러러 따를 일이나, 그들은 그냥 아까우니까 근검절약하고 그게 몸에 배서 '검소'했을 뿐이다.

사실, 2008년, 소비만이 존재의 이유이자 목적인것만 같은 시대에, 그런 검소와 근검절약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누가 검소하게 살자라고 했다간,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그러니, 그런 삶의 모습이 '존경'스럽게 될 수도 있다 싶지만, 그래도 아닌건 아닌게 아닌가? '검소함'과 사람은 구별해야 한다. 오랜만에 도덕경을 보다가 '검소함'이라는 말이 있어 떠올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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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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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관형 인간

소선재에서 2008. 1. 29. 07:35

꼭 비싼 것만 시키는 인간이 있다. 꼭 비싼 것만 먹고, 꼭 비싼 것만 타고 꼭 비싼 것에만 눈이 가는 그런 인간들이 있다, 참 희한하게도. 그들의 눈은 사시인가? 메뉴판의 이런 저런 메뉴중에, 그들의 눈은 메뉴의 내용이 아닌 '가격'에 꽂혀서, 제일 비싼 것 - 기호와 취향과는 상관없이 단지 그게 제일 비싸다는 이유하나만으로- 만 주문하는 그런 인간들이 있는 것이다.

세상엔 별노무 인간이 많긴 하지만, 이런 인간들을 보는 것도 웃긴 일이다. 나도 '가격'에 눈이 간다. 나는 이왕이면 '싼' 것을 시키는데, 누가 돈을 내던지 간에 말이다. 내가 돈을 낼 때도 그렇고, 내가 돈을 내지 않아도 빚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 또한 그렇다.

어제 누구를 만났다. 지난번 처럼 제일 비싼 쥬스를 시켜서 먹더니, 배가 아프다며 화장실에 갔다 왔다. 그 인간과 세시간넘게 얘기를 하고 왔다. 글쎄, 그것이 얘기였는지 아니였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는 말을 하고 나는 듣고, 또 나도 말을 했다. 내 말을 그가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제일 경멸하는 인간이 있는데, 명리학적으로 얘기하자면 '상관'이 쎈 인간들이다. 이런 형의 인간들은 자기 마음대로라서, 제어가 안 되는 인간들이다. 모든 구속과 간섭을 싫어하면서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구속과 간섭을 행사하는 표리부동의 극치를 달리는 그런 인간들이다. 말이 많고, 말이 많은 만큼 다른 사람의 얘기는 듣지 않고, 교만하고 싸가지가 없으며, 예의범절도 모르고 자기멋대로에 탐욕도 심하다.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은 하는데, 알고보면 인간과 세상은 자기를 중심으로 돈다고 믿는 이런 또라이들.  한마디로 소인배의 전형이요, 사회악의 근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상관'형의 인간과 어제 마주 앉아있었는데, 이런 인간들과 얘기를 하다보면, 참 허무해진다. 그 시간, 차 값, 말을 해야 하는데 쓰이는 나의 에너지. 이 모든 것들이 아까워진다. 아무리 얘기를 해도, 전혀 남의 얘기를 들으려 하지 않고, 이해하려하지 않고. 결국엔 자기 자신의 얘기만 하는 그들. 그래서, 종국에는 남에게 자기를 강요하는 그들.

아무리 명리학공부를 했다해도, '자기'의 틀을 벗어나는 건 또 별개의 문제다. 그렇게 내가 얘기를 했건만, 여전히 내게 모욕과 간섭을 일삼는 그를 보며, '명리학 공부를 하면 뭐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내가 '상관'형 인간들과 상종하지 않으려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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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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