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손영기의 책 '한의학,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를 봤다. 그리고 그의 블로그에 가서 그가 써 놓은 글들을 읽어봤다. 나름대로 공부를 많이 한 듯하다. 주역이나 경전도 열심히 본 것 같다. 또한 학창시절 '역학원리강화'와 '우주변화의 원리'를 탐독한 것 같은데, 나 역시 갓 스무살을 넘긴 시절 끼고 다니던 책이라 반갑기까지 했다.

반가운 것은 이런 얘기에 이르면 더해진다. 손영기한의사는, 한의학을 잘 하기위해서는 먼저 '경전'을 봐야한다는 것인데, 내 생각또한 그렇다. 난 지난 1년동안 한의학에서 '도덕경'의 흔적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도덕경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과연 한의학의 근본원리를 알 수나 있을까? 하여튼, 경전을 봐야 한다. 경전은 그것 자체로 엄청난 파워가 있다. 그렇기때문에 경전인 것이다. 논어와 도덕경은 정말 필수인 것이다.
 
이 손영기한의사는 본인의 말처럼 '뛰어난 직관력'을 가지고 있고, 또한 붓다의 제자이기도 하다. 냉철한 이성과 합리적인 사고, 홀로 움직이는 독립군기질에 약간은 시니컬한 말투까지, 커다란 동류의식을 느낄 수 있었다. 이만하면 '동지'로 여길 수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 반가움은 곧 실망으로 바뀌고 말았는데, 그것은 바로 그의 정치적인 지향때문이다. 적시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이번 대선에서 '이명박'을 지지한 듯 하다 (그리고, 지난 두번의 대선에서도 최소한 '민주당'을 찍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이번 대선을 누구를 원해서가 아니라 누가 싫어서라고 했는데, 아무리 누가 싫다고 해도 어떻게 '이런 사람'이 이명박을 지지할 수 있는지 정말 쇼킹할 따름이다.

무식하고 욕심많은 인간들이 한나라당지지하는 거야 그렇다 치자. 하지만, 이 정도 생각과 이 정도의 명석함을 가지고 한나라당을 지지한다니, 더군다나 손영기한의사는 개떼처럼 몰려다는 그런 스타일도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어이가 없는 걸 넘어, 한 개인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실망스럽기까지 하다. 그러고보니, 같은 빨치산출신 부모를 두고도 한 사람은 '극우'가 되고, 한 사람은 '불순분자'가 되는게 인간들의 삶이긴 하다. 정말 그 사람의 성향으로 정치적인 지향을 판단할 일이 아니라는 걸 새삼 느낀다. 손영기 한의사의 부모님은 아무래도 영남출신이 아닐까? 이것이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최상의 해석이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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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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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얼티메이텀을 봤다. 아주 잘 만든 영화다. 네이버에서 검색해보면, 이 영화에 뿅간 애들이 한 두마디 해 놓았다. 이렇게 멋있는 영화는 다시 없다는 건데, 이런 평가야 어린 애들의 눈높이이긴 하지만, 어쨌건 잘 계산해서 만든 영화이긴 하다.

허문영- 이 사람은 동아일보기자가 아닌가 싶은데 - 이라는 사람이 씨네21에 글을 썼다. 내가 이 영화에 매력을 느낀 부분을 제대로 짚어줬는데, 영화속 주인공은 무엇보다 '단독자'로서의 모습이 두드러졌다. 주인공이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하는 초인적인 모습을 보면서 어린아이들은 수퍼맨을 만난 듯 환호하는 것이겠지만, 나는 주인공이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스스로가 스스로의 주인이 되어, 잃어버린 나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그러니, 결국 이 영화도 또한 '구도자'의 얘기가 아닌가. 살인을 일삼던 그도 나중엔 더 이상 살생을 하지 않는다. 잃어버린 나를 찾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다시 나무 아미타불을 할 수 밖에. 나무 아미타불.



http://movie.naver.com/movie/mzine/read.nhn?section=rev&office_id=140&article_id=0000009288&mb=c


[전영객잔] 본 시리즈에 대한 뒤늦은 생각들
[씨네21 2007-11-08 09:12]

- 시민사회의 부재와 국가로부터의 탈주 의지 가진 포스트 영웅 제이슨 본 -


기억을 잃었으나 능력을 잃지 않은 사내의 힘겨운 모험담(<본 아이덴티티> <본 슈프리머시> <본 얼티메이텀>)에 늦었지만 몇 가지 단상을 보태고 싶다. 그럴 만한 가치가 본 시리즈에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시리즈를 007 시리즈나 <미션 임파서블>과 같은 첩보영화와 비교하기보다 할리우드 영웅담의 변모라는 시야에서 보고 싶다. 이 시리즈가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나 <스파이게임> 같은 수정주의 첩보 장르 혹은 포스트 첩보 장르에 속한다는 건 분명하지만, 무엇보다 영웅상을 민첩하게 갱신하는 할리우드의 능력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할리우드의 변치 않은 능력 가운데 하나는 당대 미국인의 자기 이미지 혹은 자아이상형을 동시대의 공기 안에서 표현하는 능력이다. 존 포드와 프랭크 카프라에서부터 스티븐 스필버그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자아이상형으로서의 인민주의자/영웅을 포기한 적이 없고, 그 면모는 시대의 조건과 환경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해왔다. 그리고 오늘, 제이슨 본이라는 새로운 영웅이 도착했다. 당대의 대중들은 그를 열렬히 환대했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알고 있기나 한가. 이 질문은 중요한데 그것이 영화 안에서 본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본 시리즈는 21세기의 최상급 대중영화 가운데 하나다. 세편 모두 넋을 잃을 만큼 재미있는데 물론 그건 심오한 주제 때문이 아니라 탁월한 영화적 테크닉 덕일 것이다. 워털루역 광장에서 쫓고 쫓기는 <본 얼티메이텀>의 한 장면은 김혜리의 훌륭한 표현대로 사람들의 추격신을 자동차 추격신처럼 찍은, 이 방면의 대가들이 만들어낸 빛나는 세공품이다. 그렇다 해도, 그 테크닉들은 단순한 유혹의 기술에 그치지 않고 무언가 절박하게 동시대의 불안과 욕망을 불러들인다. 그 점이 이 시리즈를 더욱 흥미롭게 만든다.

공동체에 무관심한 영웅, 제이슨 본



정체성의 혼란, 혹은 이중적 정체성은 그 자체로는 새롭지 않은 소재다. 우리는 두 가지 정체성을 지닌 영웅들을 꽤 오래 만나왔다. 예컨대 최근 수년간 스크린을 점령해온 만화 출신의 슈퍼히어로들인 슈퍼맨, 스파이더 맨, 배트맨, 혹은 경계에 선 엑스맨. 그들은 지상에서 두 가지 신분으로 살아가든가, 아니면 그 양자 사이에서 갈등한다. (소)시민과 고립된 영웅이라는 이들의 두 가지 정체성은 때로 충돌하지만 자아의 연속성을 훼손할 정도는 아니다. 두 정체성의 분리에 반영된 사적 행복과 공동체적 소명의 분리는 양자가 조화를 이뤘던 고전기 이후의 오랜 소재이지만, 할리우드는 양자가 끈질기게 교섭하고 협상케 했다.

여기엔 시민사회에 대한 견고한 신뢰가 있다. 국가기관과 제도(establishment)는 어김없이 무능하거나 음험하고 그로 인해 홀로 악과 맞서야 하는 영웅은 늘 고립되지만 그는 시민사회로 표상되는 공동체를 끝내 포기하지 않는다. 이때 ‘소중한’ 가족과 ‘선한’(적어도 무고한) 이웃은 영웅이 회의와 좌절에 빠질 때 그의 영웅성을 복원하는 윤리적 결단의 근거지이며, 시민사회 안에서의 영웅의 심리적 거처다.

전철에 탄 익명의 시민들은 악귀와도 같은 닥터 옥토퍼스와 맞서느라 만신창이가 된 스파이더 맨을 보호하기 위해 옥토퍼스의 앞을 정의롭고 무모하게 가로막는다. 무엇보다 평범한 학생 피터 파커를 영웅의 길로 이끈 것은 삼촌의 죽음이며 숙모의 격려다. 고전적 영웅담은 아니지만 <디파티드>에도 이와 연관된 대목이 있다. 경찰 신분뿐만 아니라 시민의 신분도 삭제된 코스티건(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이 “내가 원하는 건 경찰 복직이 아니라 오직 신분(아이덴티티) 회복”이라고 말할 때, 그는 (나쁜) 제도의 대립항으로서의 (선한) 시민사회를 상정하고 있다.

본 시리즈에서 가장 이상한 점은 제이슨 본이 결코 가족을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가족이라는 관념 자체가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물론 친구도 이웃의 자리도 없다. 그가 죽음을 무릅쓰고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알아내려 할 때, 그의 관심은 정말 정체성 회복일까. 이렇게 물어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에게 회복할 무엇이 있기나 한 것일까. 불행하게도 그는 돌아갈 곳이 없다. 본을 낳았으며 그가 돌아갈 시민사회가 여기엔 보이지 않는다.

영화를 보고 나면 그의 목표는 애초에 명백했다. 국가기관에 기록된 자신의 신분을 확인하고 그것을 영원히 없애는 것, 즉 아이덴티티의 회복이 아니라 삭제이며 기억이 아니라 망각이다. 이것은 그의 과거가, CIA라는 국가기관 소속이라 해도 암살 전문 요원이었으니, 얼핏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본이 묻지 않은 것이 또 있다. ‘내가 왜 그 일을 자원했을까.’ 그의 뇌리를 찔러오는 단편적 기억에 따르면 그는 분명히 암살요원을 자원했으나, 그 경위는 어디에도 드러나지 않는다. 가까스로 마주한 그의 옛 상사는 이렇게 말한다. “네 운명은 킬러야. 그걸 바꿀 순 없어.” 그런데 그 킬러의 본성은 국가기관의 세뇌와 훈련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아니면 어떤 분노나 각성의 계기가 있었던 것일까. 본은 그것을 묻지 않고, 영화는 우리의 물음에 답하지 않는다.

서사의 허점처럼 보이는 이 공백은 어떤 영웅담에서도 찾기 힘든 단절을 만들어낸다. 암살요원으로서의 과거의 본과 단독자로서의 오늘의 본 사이에는 연속성이 거의 결여돼 있다. 물론 암살 대상의 딸을 보고 머뭇거렸던, 본이 기억을 잃어버린 계기가 된 사건(<본 아이덴티티>),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상부의 어떤 명령에 거역하다 고문을 당하는 사건(<본 얼티메이텀>)이 오늘의 본의 태도와 희미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그것이 어제 러시아 의원 부부를 교묘하고도 무참하게 암살하고(<본 슈프리머시>) 오늘 그 딸에게 사과하는(<본 얼티메이텀>) 태도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오늘의 본은 죄의식에 시달리지만 과거의 자신을 제거하고 싶을 뿐 해명할 의지는 전무하다. 이 의지의 부재는 망각에의 욕망을 반영하며 정확히 시민사회의 부재와 조응한다. 그는 과거에도 국가와 홀로 마주했고, 오늘도 그러하다. 선택은 두 가지밖에 없다. 투신 혹은 탈주. 그는 어제 투신을 택했고 오늘 탈주를 택한다. 그가 귀신처럼 감시망을 피해 CIA 본부로 접근해올 때 본의 옛 상관은 국장에게 말한다. “본은 어떤 행동도 목적의식 없이 하지 않아요. 명령에 따라서만 움직이죠.” 국장이 묻는다. “상관도 없는데 누가 명령한다는 거지?” 옛 상관의 대답, “그 자신이죠”.

그가 결과적으로 국가기관 일부를 정화하긴 하지만, 그건 탈주의 완성을 위한 것이며, 죽음을 무릅쓰고 모스크바에 잠입해 자신이 살해한 러시아 의원 부부의 딸을 만나려는 것도 단지 자신이 그들을 죽였으며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다. 오늘의 그에겐 실존적 윤리만 있을 뿐이며 본이라는 단독자와 국가를 매개할, 그러니까 영웅의 분노를 촉발하거나 정제하고 소명의식을 격려할 시민사회 내의 거처가 이 영화에 묘사된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징후적으로도 드러난다. 제이슨 본의 아이덴티티를 파헤치다 CIA의 비밀작전에 접근해오는 <가디언>의 기자를 CIA는 거리낌없이 암살한다(<본 얼티메이텀>). 첩보영화의 관습과 실제 세계 모두에서 시민사회를 지탱하는 중요한 존재인 언론인이 여기에선 소리없이 제거되는 것이다. 단독자인 오늘의 본에게 가장 소중한 인물이 거처가 불분명한 현대판 집시여인이라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전 지구적 시각을 가진 국가에 대한 공포



미국 시민사회가 부시의 재선도 그의 전쟁도 막지 못했다는 정치적 무력감이 여기에 은밀히 반영돼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본 시리즈를 특징짓는 시민사회의 부재와 필사적인 망각과 탈주의 의지는 어떤 공포감의 우회적 표현인 것 같다. 영화의 이야기 안에서 그 공포의 대상을 찾자면 국가기관, 구체적으로는 CIA의 극우파 중간간부가 창설한 비밀암살 조직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일까. 이미 30여년 전에 나온 <콘돌>을 비롯해 수많은 유사 첩보영화들과 포스트 첩보 장르 영화들에서 부도덕하거나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관료/정치인 그리고 그들이 움직이는 비밀조직의 무자비한 행각은 닳고 닳은 소재가 아닌가.

본 시리즈의 이야기를 성립시키고 이끌어가는 보이지 않는 힘은 결국 시각 테크놀로지에 대한 공포에 있는 게 아닐까. 걸프전과 이라크전에서 육안의 한계는 물론이고 어둠마저 뛰어넘어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대상의 형상을 재현하는 모니터로 그 대상을 정확히 파괴하는 전자 광학의 초월적 능력을 실시간으로 안방에서 목격한 오늘의 인류에, 첨단 전자 광학테크놀로지-최상의 전쟁 무기-미국(국가기관)의 능력이라는 등식은 체험된 지식이 되었다. “전쟁기계 옆에는 늘 정찰기계가 있었다”고 폴 비릴리오는 말했다. 본 시리즈에서 지구상의 모든 곳을 정찰하는 첨단의 광학시스템이 가동될 때, 전쟁이 언급되지 않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미 전쟁을 느낀다.

전쟁 무기로 즉각 전환될 수 있는 전 지구적 정찰 시스템에 의해 내가 보여지고 있다는 동시대인의 심원한 불안을 짊어지고 제이슨 본은 숨어서 세상을 떠돈다. <본 얼티메이텀>에서 워털루역 광장에서의 추격신이 명장면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정찰과 은폐라는 광학테크놀로지 전쟁의 양상을 고스란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본은 비슷한 설정의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의 두 주인공과 달리 어떤 기계장치도 없이 자신의 육체적 능력만으로 국가기관의 신의 경지에 이른 시야를 능수능란하게 피해다닌다. 정찰의 숏들과 은폐의 숏들의 폭포수 같은 교차편집 끝에 본이 두눈과 초인적인 지각만으로 빈 공간을 어김없이 찾아낼 때, 그는 진정으로 광학테크놀로지의 공포에 맞설 수 있는 우리의 영웅이 되는 것이다. 동시에 그는 국가를 증오하고 공동체에 무관심한, 더이상 영웅이 아닌 포스트 영웅이다.

(글) 허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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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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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

소선재에서 2007. 11. 28. 18:53

탈무드의 얘기다.

두 사람이 굴뚝에 들어갔다 나왔다. 한 사람 얼굴에 검댕이 묻었다. 누가 얼굴을 씻을까?

답은 검댕이 안 묻은 사람이다.

상대방의 얼굴을 보고 나도 검댕이 묻었겠거니 하고 얼굴을 씻는 것이다.

시리즈에 계속 된다. 같은 질문의 두번째 답은 '당연히' 검댕이 얼굴에 묻은 사람이 씻는 것'이고, 세번째 답은 '둘이 들어갔다 나왔으니, 둘다 검댕이 묻어서 둘다 씻는다'이다.

첫번째 답에 주목한다.

다른 사람을 비추어 나를 돌아보아는 것, 이것을 반성 또는 성찰이라 한다.

사람들은 타인에 대해 재단을 하지만, 거기서 멈출 뿐 스스로를 돌아볼 줄 모른다.

과연 누가 다른 사람을 재단할 수 있으리요.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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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트럴가는 길

소선재에서 2007. 11. 28. 18:40


센트럴에서 학교가는 길은 지하보도가 길게 이어져있다. 느린 걸음으로는 한 5분, 종종 걸음으로도 한 3분은 걸리는 길이다. 매일 아침 학교가고 그리고 집에 오는 길에 다니는 이 길은, 매일 같으면서도 매일 다르다.

그 지하보도를 걸어가며, 마치 '스모크'에서 가게 주인(영화속 배우는 하비 키이텔이었다)이 매일 아침 같은 시각 가게앞 풍경을 사진으로 남겨놓는 것처럼, 나는 이 곳의 사진을 찍어놓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집에 있는 디지털카메라가 애기차지라 당분간 내 차례가 되긴 어렵겠지만, 나는 매일 아침 같으면서도 다른 센트럴 지하보도의 사진을 찍어 보고 싶다.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 출근하는 사람들, 학교에 가는 학생들, 카트를 밀고 가는 노숙자, 구걸하는 거지, 신문 또는 광고지를 나눠주는 사람들, 사람들의 동전을 바라며 기타를 둘러메고 노래하는 사람들(특히 그 중에 나는 수요일 아침의 흑인아저씨가 제일 좋다), 판토마임을 하는 사람도 단골이고, 장님으로 보이는 여자가 무반주로 노래를 부를 때도 있다. 아침에는 손금을 봐주는 할머니가 입구에 있고, 중간쯤에는 여호와의 증인을 전도하는 할머니가 있다. 꼬맹이로는 중국계, 한 여덟살쯤 되었나, 키보드를 놓고 피아노곡을 치기도 했고, 중국계로 보이는 할아버지는 해금같은 악기를 연주하기도 하고, 또 다른 중국계 할아버지는 어설픈 인형놀이를 하기도 한다.

한번은 저녁 시간에 젊은 백인 커플 둘이 남자는 기타로 반주를 하고, 여자는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는데, 귀에 익은 그 멜로디는 U2의 With or Without You였다. 현악기의 합주가 너무나 멋들어져, 걸음을 계속하면서도 내 귀는 그들의 연주를 쫓고 있었다. 내게 만약 50센트의 여유가 있었더라도, 그들의 음악을 더 듣고 왔을 것이다(아쉽게도 그들은 두번 다시 볼 수 없었다).

수요일 아침마다 바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만면에 웃음을 띠고 노래를 전해주는 흑인아저씨. 그가 바닥에 펼쳐놓은 기타케이스에는 동전이 가득하다. 매번 그냥 지나치기가 미안해, 눈웃음으로 대신해볼까도 싶었는데, 역시 50센트의 여유가 부담스러웠다.

센트럴 가는 길, 아직 내게는 50센트의 여유가 없는 길이기도 하다.


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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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콘의 추억

소선재에서 2007. 11. 28. 18:34



1.

89년이니 거의 20년이 다 되어간다. 같이 재수하던 녀석 둘이 사진으로 전공을 바꿨다. 이유는 단 하나. 공부해서 대학가기보다 사진으로 가기가 훨씬 쉬웠기 때문이다. 둘 다 삼수끝에 하나는 중앙대 사진학과를 가고 하나는 신구전문대 사진학과를 갔다. 나는, 돈이 없어서 전공을 바꾸지 못했다. 대신 그 둘을 따라 다녔다. 그리고 알아버렸다. '사진'이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사진은 돈이 많이 드는 놀이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디카'라는 것이 없었던 시절. 사진하는 사람들은 '매거진'에 필름을 담고, '확대기'를 갖다놓은 '암실'에서 '밀착'으로 사진을 뽑는 그런 때였다. 일반인들은 필름을 사서 찍고 현상인화를 맡겨야 했었다. 모두 돈이 드는 일이다. 나는 함부로 셔터를 누를 수가 없었다.

사실 내 카메라도 없었다. 집에 있던 펜탁스카메라, 아사히 펜탁스의 기술제휴로 만들어진 50미리 표준렌즈가 달린 그 카메라가 가끔 내 장난감이 되어주었다. 어쩌다 흑백필름 한통을 사서 친구들을 찍어주곤 했다. 하지만 역시 필름값, 현상인화료는 만만치 않았다.



2.

제대하고 우선 카메라가방을 샀다. 조만간 니콘 F-801을 넣으리라 다짐을 했지만, 결국 책가방으로만 쓰였다. 그때 가격으로 F-801은 50만원이 안 되었던 것 같다(확실치는 않다). 니콘의 F-801은 셔터속도가 8000분의 1초까지 구현이 된다. 4000분의 1초가 그때까지 최고의 셔터속도였다. 물을 뒤집어쓰고 있는 남자를 8000분의 1초로 찍은 모습이 Nikon F-801 의 광고사진이었다. 그 광고사진을 오랫동안 가지고 다녔었다.

민한이 졸업식날 민한이 누나가 F-801을 들고왔다. 나는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35-70렌즈가 달려있었다. 반셔터를 누르면 렌즈가 오토 포커싱을 위해 앞뒤로 왔다갔다한다. 경이로웠다. 만져보자고 하고 싶었지만, 끝내 참았다. 속쓰린 날이었다.



나의 속을 쓰리게 만들었던 F-801. 니콘은 그래서 갖고 싶기도, 또 안 갖고 싶기도 하다.




3.

어쩌다 보니 집에 Nikon-FM2가 있었다. 아버지의 작품이다. 직장의 비품으로 카메라를 사는데, 모든 직원들의 요구-즉, 자동카메라, 필름도 자동으로 감기는 자동카메라를 사자는 요구-를 물리치고, 손으로 렌즈를 돌려 초점을 맞추는 니콘의 FM2를 산 것이다. 그러니 다른 직원들은 그 카메라를 사용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전유물이 된 그 카메라는 잠도 우리집에서 자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내 눈에 띈 것이다.

그 이후로 FM2는 몇 년간 나의 카메라가 되었다. 사진을 찍을때는 FM2를 들고 나갔다. 나는 그 카메라가 싫었다. 몸통도 구식이다. F-801의 세련된 느낌도 없고, 좀 오래된 거라 그런지, 뷰파인더도 선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니콘렌즈가 그런지 몰라도, 색감이 선명하질 않았다. 무엇보다 50미리 표준렌즈는 확실히 제한적이었다. 그렇다고 없는 돈에 렌즈를 더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좋건 싫건, 선택의 여지 없이 내 카메라는 Nikon FM2였다.


완전 타의로 내 카메라가 되었던 Nikon FM2.  2년전 집에 도둑이 들어서 이 FM2 카메라를 가져갔다. 이 망할 도둑놈아, 벼룩의 간을 빼먹어라.




4.

카메라는 무기다. 생긴 것도 꼭 총같기도 하거니와, 그 자체가 하나의 '힘'이다. 대학때 수많은 시위현장에서 가장 쎄 보이는 사람들은 최루탄도 화염병도 아니고 '사다리'와 '카메라'였다(기자들은 작은 사다리를 들고 다닌다). 그들은 시위현장에 있으면서도 또한 시위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폼도 잡고 싶었다. 길다란 망원렌즈가 달린 카메라도 갖고 싶었다. 대학4학년때 도라산전망대에 갈 일이 있었다. 좀 폼을 잡고 싶었던 나는 꾀를 냈다. 현상소주인에게 말했다.

'이 카메라 하루만 빌리면 안 될까요?' 

그래서, 나는 책가방으로 쓰던 카메라가방에 FM2와 망원렌즈가 달린 카메라(아마 캐논이었던 것 같은데)를 넣고, 자랑스럽게 도라산전망대가는 버스에 올랐다. 그 날 나는 일행으로부터 '사진사였냐?'는 말을 몇 번 들었다. 다 그 길다란 망원렌즈덕분이었다.


5.

디지털 카메라가 나왔을 때, 저건 분명 나를 위한 카메라라고 생각했다. 이젠 더 이상 필름값, 현상인화료 걱정없이 셔터를 누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너무 늦게 나왔다. 기다림에 지쳐 나는 망부석이 되어버렸다. 카메라에 대한 열망은 디카가 나오기전에 이미 화석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카메라를 가지기에는 나는 너무나도 오랫동안 카메라를 가지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동생이 내 생일 선물로 캐논 파워샷 G5를 보내왔을때도, 나는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그리고, 나의 아내가 캐논 익서스 똑딱이를 샀을때도, 그 카메라는 나의 카메라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핫셀 블러드를, 아니면 니콘 F4나, 캐논 1D를 원한 것도 아니다. 백만원은 커녕 오십만원짜리. 내겐 단지 나의 카메라가 필요했던 것이다.


6.

우울하다. 일은  힘들다. 파타임잡이라고 하지만, 일을 하면 우울해진다. 힘든 몸은 자괴감을 낳는다. 지금 무얼 하는 건가? 이럴려고 여길 왔나? 단지 몸뿐만이 아니라 의욕까지 상실이다. 기말고사가 내일 모레지만 될대로 되라지. 하릴없이 인터넷을 보는데, 한겨례의 SLR 디지털 카메라 기사가 났다. 니콘과 캐논의 DSLR을 비교한 기사였다.

오래된 화석이 다시 살아나는 기분이다. 그래, 나도 카메라같은 카메라를 갖고 싶다 말이다. 2백만원 오백만원짜리는 아니더라도, 그냥 백만원정도만, 그냥 바디 렌즈만 있으면 되겠다 말이다. 내가 뭐 거창한 거 바라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나의 사진에 대한 욕심, 내가 누른 셔터수, 그리고 그 셔터 수에 대한 고민은, 요새 젊은 애들이 아무렇게나 질러버리는 DSLR하고는 그 차원이 다르단 말이다. 누가 뭐래도 나는 카메라를 가질 자격이 있단 말이다.


7.

몇달전 시티의 하이드파크에 갔는데, 여자애 둘이 - 한 스물 두셋쯤 되었으려나?- 목에 SLR 카메라를 걸고 지나갔더랬다. 한국애임을 직감했다. 저렇게 나이도 어린 애들이 저렇게 큰 SLR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애들은 한국애들뿐이다. 몰라서 그렇지, 한국 사람들이 너도 나도 핸드폰을 들이대는 광경은 진풍경이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 게 일상적인 나라는 거의 한국뿐이다. 이렇게 개나 소나 SLR - 싱글 렌즈 리플렉스, 일안 반사라는 말이다 -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나라도 역시 한국뿐이다.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한국은 어디 갈 곳도 없고, 할 거리도 없으니, 싸이질을 하려면 이런 것으로라도 가지고 놀아야 한다.

하지만, 걔네들이 알까? 한번의 셔터에 대한 고민을. 아무렇게나 연사로 찍어도 되고, 맘에 안 들면 바로 삭제해버려도 되는 그런 디지털 카메라로. 전문가라도 다르진 않을 것 같다. 얼마전에 애기 돌 사진을 찍으러 갔는데, 그 찍사녀석은 Eos 카메라로 한 시간 동안 기관총 갈기듯이 찍어댔다. 사진은? 단 하나도 건질 게 없었다. 생각이 없이 갈겨댄다고 좋은 사진이 나오겠나?


8.

한겨레의 디카 기사는 잠자는 내 욕심에 다시 불을 질러 놓았다. 그러나 뭐하랴? 그 불은 더 이상 번지지 못하고 수 초만에 꺼져버렸다. 나는 카메라를 가질 수도 없고, 설사 있어도 찍으러 갈 수도 없는 사내이다. 마치 불능의 사내처럼. 그러니, 한겨레의 DSLR기사는 오히려 나의 우울을 악화시킨 셈이다. 과연 내가 카메라를 가질 수 있는 그 날은 언제일까?

니콘 D80 이다. 내가 뭐 전문가도 아니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 더 커봤자 무겁기만 하고. D80은 현재 바디만 80만원정도 하나보다. 셔터속도는 4000분의 1초다. 8000분의 1초는 사실 별로 필요없다. 그럼에도 이름이 80인건, 아마 F-801의 후속시리즈이기때문일까?
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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