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유'에 해당되는 글 249건

  1. 2010.05.30 닭과 달걀
  2. 2010.05.29 [나의詩] 父 子
  3. 2010.05.29 [나의詩] 이민자
  4. 2010.05.29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5. 2010.05.27 왕정복고
  6. 2010.05.26 현실의 구세주
  7. 2010.05.25 이해의 서
  8. 2010.05.25 보통 사람
  9. 2010.05.13 오쇼 라즈니쉬 - 침술에 대하여
  10. 2010.04.29 Where I shall live

닭과 달걀

소선재에서 2010. 5. 30. 16:35


 http://gyuhang.net/1938

이번 한겨레의 김규항칼럼은 동의하기 어렵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맞다고 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사민주의가 힘을 얻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왼쪽의 사회주의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 이는 바로 김규항이었다. 나는 사민주의가 힘이 있을 때 사회주의가 자리를 잡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민주노동당의 지지율과 원내진출이 가장 두드러졌던 때는 바로 노무현이 탄핵소추되었을 때, 즉 중도 우파정당이 과반수를 차지했을 때였다. 탄핵역풍이 휩쓸었던 때, 비판적 지지자는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 진보신당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그때 민주노동당의 성과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진보세력이 보수정치판으로 투항했다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비판적지지는 어떻게 볼 것인가? 내가 노무현을 찍을 때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정당은 인하대 교수를 후보로 세웠던 사회당이었다. 병막가카나 노무현이나 매한가지라고 김규항은 말하겠지만, 사회당이 지금의 진보신당만큼 되려면, 국민참여당이 지금의 한나라당만큼 되어야 한다고 본다.

유권자들은 어리석지만, 바보는 아니다. 노무현은 한나라당 표를 빼앗아 올 것을 연구했다. 실패하긴 했지만 한나라당을 끌어안고서 남강에 몸을 던지려고 했다. 최소한 김규항의 촛불과 짱돌보다는 훨씬 더 현실적이다.

거리로 나갈 사람들은 애당초 최악을 찍지도 않는다. 최악이 싫어서 촛불시민이 된 사람들에게 다시 또 최악이 당선될 투표를 하라는 건 너무나 가혹한 말이다. 그리고, 뭣보다 나는 닭이 먼저여야 달걀이 나온다고 본다. 2002년이 다시 온다면, 그래도 나는 사회당후보가 아닌 노무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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父 子 



겨울도 아닌 겨울
나와 돌지난 아이는
북쪽으로 떴다가
남쪽으로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내
붉었던 구름은 검은 밤으로 비집고 들어와
날카로운 얼음비로 창문을 두드리고
두터운 서리바람으로 문밖에서 울고 있었다

십오촉 주광등은
희미한 그림자만 만들어 낼 뿐
어디건 기댈 데 없는
천리깊은 이국의 겨울밤에

나는 배웠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온도는
삽십육쩜오도라는 것을

나는 네게 생명을 주었으나
너는 내게 삶을 주는구나

안아도 안아도
식지않는 조그마한 용광로

한 젊은 아비의
가슴을 녹인다


                                                  20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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移 民 者
 



뭐라고는 하는데 말이야
무슨 소린줄 알 수가 있어야지
그래 그냥 웃고 말았지 뭐

뭐라고는 해야겠는데 말이야
말이 나와야 말이지
그래 그냥 예스하고 말았지 뭐

내가 알았나
여기와서 반귀머거리가 되서
반벙어리고 살게 될 줄

내가 알았나 뭐
귀머거리가 듣지 못한다고 되는게 아니고
벙어리가 입이 붙는다고 되는게 아니라는 걸

이제 알았지 뭐야
머나먼 남쪽 나라 여기에 오면
반벙어리에 반귀머거리는
순식간이라는 것을


                                                  2010. 5 

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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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사모라고 공연이 있다길래 다녀왔다. 교회에서였다. 어제 본 사람들도 있었고, 1년여만에 본 얼굴도 있었다. 아내는 공연을 감상했고, 나는 공연장을 돌아다녔으며, 아이는 또래와 뛰어 놀았다.

지겨웠었던 익숙한 노래들이 대부분이었고, CCM이라고 하나? 교회음악도 두어 곡 있었다. 기타연주회라기 보다는 노래공연에 더 가까웠다. 그 모임에 나가게 되면 나도 내년에 무대에 설 수 있을까? 내 인생 첫 무대를 교회에서 맞고 싶지는 않다. 뭣보다 우선 한국에 있는 내 기타를 가져와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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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정복고

소선재에서 2010. 5. 27. 20:52

호주는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는 입헌군주제 국가다. 입헌군주제국가. 생각보다 많다. 영국을 위시해서 영연방국가는 대부분 그렇고,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도 왕이 있는 나라다. 스페인도 그렇구나. 이탈리아에는 왕이 없지만, 로마안에는 교황이 살고 있다.

한국옆에는 덴노헤이까 반자이도 있다. 음력은 안 쓰고 양력만 쓰면서, 년도 표기는 서력기원을 안 쓰고 연호를 쓰는 나라. 하여튼 일본도 입헌군주제국가다. 동남아에는 태국이 대표적이다. 프랑스는 대혁명이후에 단두대에서 사람들 목이 잘려나가면서 결국 왕정이 해체되었다. 독일과 이탈리아를 애기하려면 내 역사지식이 짧다. 합스부르크왕조에다가 그 뭣이냐 베스트팔렌조약인가 이런 얘기까지 나와야 한다. 인구규모가 큰 선진국중에서 보자면, 미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오스트리아 정도가 왕이 없다. 어찌보면 왕이 없는 나라가 더 적다고 하겠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고 하지만, 사실 한국도 일제식민지시절을 겪지 않았다면, 입헌군주제가 되었을 것이다. 대한제국이 망하고 조선황실이 일본왕실과 혈통이 섞이면서 해방후에 조선의 왕족들은 돌아올 수가 없었다. 대신 이승만이 대통령이라는 이름으로 나랏님이 되었다.

세상이 바뀌었으니 왕도 없어지고 나랏님 명칭도 대통령이 되었지만, 백성들에게 대통령이나 왕이나 나랏님이긴 마찬가지.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왕이었다. 뒤를 이은 박정희도 마찬가지. 짐이 곧 국가다 라고 한 루이14세나, 맘대로 헌법을 고치고 종신으로 대통령이 된 박정희나 별다른 차이를 느낄 수 없다. 육영수 - 그냥 육영수라고 하면 뭔가 이상하다. 꼭 육영수여사라고 해야 제대로 부른 듯한 이 묘한 느낌 -여사가 총에 맞았을때, 국모가 죽었다며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모여 울었다.

사람들은 길들이면 길들여진다. 이승만에 길들여지고 박정희에 길들여지고. 더군다나 박정희의 독재는 근 20년을 이어가며 세대를 넘어 나랏님이 누군지 확실하게 각인을 시켰다. 아직도 역대 대통령 인기투표를 하면 박정희 가 1등이다.

다음대통령은 누가 될까? 현재로서는 유신공주가 제일 유력하다. 유신공주의 파워는 막강하다. 모든게 자기 맘대로인 가카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한번 떴다하면, 유신공주 손을 잡으려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특히나 나이드신 분들은 환장하신다. 공주가 출현하셨기 때문이다.

호주에서도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노년층이다. 그리고 그 뿌리를 영국에 두고 있는 사람들이다. 한국은 박정희 시대를 그리워하는 사람들, 그리고 경상도가 고향인 사람들. 박정희는 그 사람들에게 왕이었고, 박근혜는 국모의 역할까지 했던 공주다.

대통령의 아들은 영식을 붙이고, 대통령의 딸은 영애라고 붙이던 시절이 있었다. 유신공주가 대통령이 되면, 영애에서 가카가 되겠구나. 2010년이라는 년도가 창피하다. 그냥 왕정복고가 되면 연도표기도  '유신'이라는 연호로 바꾸는 게 어떨지? 북한은 주체, 남한은 유신. 잘 어울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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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가 많이 왔다. 새찬 비가 내리기는 오랜만이다. 여기는 비가 오면 추워지는 곳이다. 바람도 한 몫 단단히 한다.
귀가길에 앵벌이를 하는 거지가 있었다. 저쪽부터 2달러를 구걸하며 오다가 나에게까지 왔다. 불쌍한 표정으로 구걸하다 통하지 않자 'Get fucked'라고 했다.굳이 번역하자면 씹할 이런 말이다.
아마 내가 못 알아들을거라고 생각한 듯하다. 왜 유독 내게 그랬을까? 아마 이 앵벌이 아줌마 눈에 내가 섹시해보였나보다, 그러지 않고서야 말이지. 아하! 웃으며 대답해 줄 것을. 두 유 워너 퍽 위드 미?

2.
춘린의 영어는 발음도 그러거니와, 유창한 영어라고 하기 어렵다. 의사소통은 잘 하지만 고급영어는 아니다. 하지만.
오늘 마흔이 넘은 여자환자는 인공수정을 시도하는 환자이다. 이 환자는 학생에게 침을 맞으러 온 것이 아니라 춘린을 보러 온 것이다. 춘린을 데리고 들어가니 귀에까지 입이 걸린다. 현실의 구세주는 내 몸의 병을 고쳐주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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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의 서

소선재에서 2010. 5. 25. 21:39

제 아이가 만 세살입니다. 지금까지 뽀로로는 오백번은 넘게, 파이어맨 샘(소방관 샘) DVD는 한 삼백번도 넘게 보지 않았나 싶습니다. 매번 볼때다마 지겨워 하지 않고 봅니다. 아마도 기억력이 좋질 않거나, 아니면 아이들 특유의 상상력으로 매번 새롭게 보는 듯 합니다.
 
메가톤급 히트를 한 영화중에는 한번 본 관객들이 보고 또 보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천만관객이라는 숫자가 나오는 것이지요. 이런 영화에는 여러가지 서사가 들어있습니다. 사랑, 복수, 정의, 스릴 여러가지 이야기가 볼때마다 새롭게 다가옵니다. 다양한 관객층에게도 어필할 수 있지요. 우선 기억나기로는 매트릭스라는 영화가 있군요. 액션팬들에게도, 심오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리고 백마탄 왕자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도 이 영화는 재미를 가져다 주지요. 본 아이덴티티라는 액션영화도 잃어버린 자기 자신을 찾는 순례의 이야기로 해석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영화뿐만은 아닙니다. 모든 이야기는 듣는 사람들의 해석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그러니, '어제의 나'가 '오늘의 나'와 다르다고 한다면, 같은 텍스트라 할지라도 '받아들이는 나'가 다르니 당연히 그 의미도 다를 것입니다.
 
'읽을 때마다 새롭다'라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일 겁니다. 제게는 '논어'와 '도덕경'이 그러했습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성경'이 그렇겠지요.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나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가지 습관'같은 책은 어떨지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예전에 읽었던 오쇼의 '금강경'과 '법구경'은 제게는 좀 먼 얘기였습니다. 그때는 제가 힘이 잔뜩 들어간 때였습니다. 이번에 '이해의 서'에서 듣는 오쇼의 가르침은 한결 편했습니다. 마치 옆에 앉아서 얘기를 듣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책을 다 읽고 표지를 다시 보니, '내면에서 찾는 자유의 날개'라는 부제가 있었습니다. The Book of Understanding - Creating your own path to freedon 이라는 원제에서 번역한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번역하신 분은 오쇼의 제자라고 하는데, 제가 잘은 몰라도, 심미안을 놓고 보자면 그 스승에 그 제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책 뒷부분에 인간의 삶을 낙타와 사자와 아이의 세 단계로 나눈 니체의 비유가 나옵니다. 낙타에서 사자로, 다시 사자에서 아이로 되가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제가 아이가 된다면 같은 영화를 수백번 봐도 매번 새롭게 볼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자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마 그때가 되면 제 백반증걸린 호랑이아이콘도 더이상 소용이 없어지겠지요.
 
덧붙여서,
한국에서 온 우편물을 받는 기쁨, 산뜻한 표지의 멋진 책을 소유하게 된 기쁨. 한국말로 된 책을 읽는 기쁨, 저자의 친필사인이 들어간 책을 받는 기쁨, 그 싸인이 마치 그림과도 같아서 덩달아 미술품감상까지 하게 된 기쁨.  책을 보면서 갈증을 없애는 약을 만난 듯한 기쁨. 이 모든 기쁨을 선사해주신 요잔님과 질라님께 감사드리며, 이 감사의 인사로 입을 싹 씻고자 합니다. 어흥~  (명상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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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

소선재에서 2010. 5. 25. 21:31
1.
시드니 유니에 갔다. 학교와 멀지 않았다. 캠퍼스는 넓었고 아름다웠다. 고색창연한 건물과 모던한 건물들 사이로 한적한 길들이 이어졌다. 잦게 비가 뿌려 더욱 운치가 있었다.

도서관 사서는 나즈막한 목소리로 차분히 설명을 해줬다. 그의 친절은,  저널을 찾거나 복사를 하거나 출력을 하기 위해 충전을 해야하는 수고를 덜게 했다. 그가 한 것이라고는 몇 번의 클릭뿐이었으나 나에게는 많은 짐을 덜어준 것이었다.

한시간을 걸었다고 다리가 뻐근해졌다. 잰 걸음이라 해도 평지였을 뿐인데.

2.
지난 일요일에는 노무현추모제에 다녀왔다. 좋은 시간이었다. 사람은 유유상종이라, 비슷한 족속은 알아보기 마련이다. 정치적으로는 우파인 사람들이긴 해도 이곳 시드니에서 이만한 사람들을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들. 흔하지 않다. 오프라인 모임에도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3.
이 추모제에서 기타치고 노래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아저씨 둘이, 하나는 김광석의 노래를, 또 다른 아저씨는 홀로 아리랑을 불렀다. 노래를 잘 했다. 진심이 들어있어 더 와닿은 듯 하다. 역시 이 모임에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국에 있는 기타를 가지고 올 것을.

4
한 고개를 건너면 그만큼 내공이 쌓이고 그 내공은 유머로 빛을 발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유머가 깊은 사람은, 그 유머가 깊을 수록 깊고 험한 고개가 뒤에 있었다고 봐야 한다. 점잔을 빼거나 폼잡는 인간들을 보면, 웃기기만 할 뿐이다. 웃기다고 유머는 아닌 것이다.

5.
나의 영원한 스승, 아내는 내가 모르는 사실을 많이 가르쳐준다. 변호사, 의사, 무슨 무슨 장이라면서 앞에 나가면 사람들은 일단 그 타이틀에 무게를 둔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자가 소개를 할때 항상 약력이나 타이틀을 언급하는구나, 싶긴 하다. 그래도 내겐 도무지 와 닿지 않는다. 사람은, 내가 알기로는, 특별한 인간이란 없는 것이다. 이명박도, 이건희도, 빌 게이츠도, 바락 오바마도 그냥 보통 사람인 것이다. 그들이 보통 사람과 다르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보통 사람들과 다르고 싶어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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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술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침술은 전적으로 동양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서양적인 마음을 가지고 동양의 학문에 접근한다면 많은 것을 놓치게 된다. 접근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대의 모든 접근 방식은 방법론적이고 논리적이며 분석적이다. 그러나 동양의 학문은 과학이라기보다는 예술에 가깝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그대의 에너지를 지력(知力)보다는 직관(直觀)에 쏟을 수 있는지, 그대가 남성에서 여성으로 변화할 수 있는지, 양에서 음으로 변화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접근 방식에서 수동적인 접근 방식으로 변화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그대는 수동적이고 수용적이 될 수 있는가? 오직 그 때에만 침술을 배우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렇지 않다면 침술에 관한 모든 것을 배울 수는 있지만 그것은 전혀 침술이 아닐 것이다. 그대는 침술에 관한 모든 것을 알 수 있지만 침술 자체는 모를 것이다. 가끔은 침술에 관해서 많이 알지 못하는 사람이 침술을 알기도 한다. 그러나 이때의 침술은 요령이다. 단지 침술에 대한 통찰인 것이다.

동양의 여러 학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서양은 동양의 학문에 관심을 갖는다. 동양의 학문은 심오하기 때문이다. 서양은 동양의 학문에 관심을 갖지만 서양의 마음을 가지고 동양의 학문을 이해하려고 한다. 서양의 마음이 들어오는 순간, 동양의 학문은 기초부터 파괴된다. 그때 단편들만 남게 되며 이런 단편들은 결코 작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침술이 작용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침술은 작용한다. 그러나 오직 동양적인 접근 방식을 지닐 때에만 작용한다.

그러므로 그대가 정말로 침술을 배우고 싶다면 침술에 대해 아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본질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라. 가능한 모든 것을 배우라. 그리고 나서 배운 것을 모두 잊고 어둠 속을 더듬어 나아가라. 그대 자신의 무의식에 귀를 기울이라. 그리고 환자와 일체감을 느끼기 시작하라. 그것은 다르다…….

환자가 양의(洋醫)를 방문하면 의사는 추리하고 진단하고 분석하며, 질병이 어디에 있는지, 질병이 무엇인지, 어떻게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지 알아내려고 한다. 그는 마음의 한쪽 부분, 즉 이성적인 부분을 이용한다. 그는 질병을 공격하며, 질병을 정복하기 시작한다. 이제 의사와 질병 사이에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환자는 게임에서 벗어나 있다. 의사는 환자에 대해서 신경쓰지 않는다. 그는 질병과 싸우기 시작하며, 환자는 완전히 무시된다.

그러나 침술사를 찾아가면 질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환자가 중요해진다. 질병을 만든 것은 환자이기 때문이다. 질병의 원인은 환자에게 있으며, 질병은 단지 증상일 뿐이다. 그대는 증상을 바꿀 수 있으며, 그러면 새로운 증상이 계속 나타날 것이다. 그대는 한 가지 질병을 약으로 제압해서 질병이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있으나 그 질병은 다른 곳에서 좀더 위험하고 좀더 심하게 나타날 것이다. 나중에 생긴 질병은 처음 것보다 치료하기가 더 어려울 것이다. 그대가 두 번째 질병도 약으로 제압한다면 세 번째 질병은 치료하기가 훨씬 더 어려워질 것이다.

역증요법은 이렇게 해서 암을 만들었다. 의사는 계속해서 질병을 한쪽으로 밀어 놓는다. 그때 질병은 다른 쪽에서 나타난다. 그러면 의사는 또 다른 쪽으로 질병을 밀어 놓는다. 이제 질병은 극도로 화를 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의사는 환자를 변화시키지 않는다. 환자는 그대로 남아 있다. 원인이 남아 있으므로 계속해서 결과가 생기는 것이다.

침술은 원인을 다룬다. 결코 결과를 다루지 말라. 항상 원인을 다루라. 어떻게 하면 원인에 다가갈 수 있는가? 이성(理性)은 원인에 다가갈 수 없다. 이성은 그저 결과를 다룰 수 있을 뿐이다. 원인은 이성에 비해 훨씬 크기 때문이다. 오직 명상만이 원인에 다가갈 수 있다. 그래서 침술사는 먼저 환자를 느껴 본다. 그는 자신의 지식을 모두 잊고 단지 환자와 같은 느낌이 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는 환자와 일체감을 느낄 것이며, 자신과 환자 사이에 다리가 놓였음을 느낄 것이다. 그는 환자의 질병을 자신의 몸 속에서, 자신의 에너지 체계 속에서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질병의 원인이 무엇인지 직관적으로 느낄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왜냐하면 원인은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거울이 되며 자신 속에서 그 반영(反影)을 찾아낸다.

이것이 침술의 모든 과정이다. 침술은 가르쳐지지 않는다. 가르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침술은 몰수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제안한다. 먼저 서양에서 2년 동안 침술에 대해 배우라. 그리고 극동의 나라로 가서 최소한 6개월 동안 침술사와 함께 있으라. 그의 현존 속에 있으라. 그가 작업하는 것을 지켜보라. 그의 에너지를 흡수하라. 그러면 그대는 무엇인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는 힘들 것이다.

서서히 자신의 에너지를 느끼기 시작하거나 몸 속에 있는 에너지의 작용을 느끼기 시작한다면 침술은 기술에 멈루지 않고 도구가 될 것이다. 침술은 통찰이며―그대는 기술을 배울 수 있지만 그것으로부터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예술이라기보다는 직감에 가깝다. 고대의 기술들이 어려운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고대의 기술들은 과학적인 것이 아니다. 과학적인 견해를 가지고 고대의 기술에 접근한다면 약간의 지식은 얻겠지만 많은 부분을 놓치게 될 것이다. 그대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많지 않을 것이고, 그대는 실망할 것이다.

고대의 접근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그것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다. 그것은 좀더 여성적이고 좀더 직관적이며 비논리적이다. 그것은 과학적인 마음이 생각하듯이 삼단 논법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에 깊이 참여하고 있기에 오히려 꿈이나 몽상에 가까우며, 자연으로 하여금 자신의 비밀과 신비를 드러내도록 한다. 그것은 자연을 공격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자연을 설득하는 것이다. 그것은 내면으로부터 접근한다.

그대는 가장 깊은 중심에서부터 자신의 육체로 접근해 들어가야 한다. 7백 군데의 포인트는 객관적으로 알려진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깊은 명상 속에서 알려진 것이다. 그대가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서 내면으로부터 모든 것을 바라볼 때, 마치 별들로 가득 찬 밤하늘을 보듯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침술의 포인트를 볼 수 있다. 이것은 굉장한 경험이다. 포인트를 보았을 때 비로소 그대는 준비가 된 것이다. 이제 그대는 내면을 이해하게 되어, 다른 사람의 몸을 만져 봄으로써 신체의 어느 부위에서 에너지가 빠졌는지, 어디에 에너지가 흐르고 어디에 흐르지 않는지, 어디가 차갑고 어디가 따뜻한지, 어디가 살아 있고 어디가 죽어 있는지를 느낄 수 있게 된다. 포인트 중에는 감응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전혀 감응하지 않는 곳도 있다.

그대는 자신을 아는 정도에 비례해서 침술을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을 알고 침술을 알게 될 때 거기 위대한 빛이 있을 것이다. 그 빛 속에서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그대는 자신에 대해서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신체에 대해서도 알게 될 것이다. 마치 제3의 눈이 열린 것처럼 새로운 비전이 보일 것이다.


침술은 과학이 아니라 예술이다. 모든 예술은 깊은 내맡김을 요구한다. 침술은 기술자가 조작할 수 있는 다른 기술과는 다르다. 침술은 가슴을 필요호 한다. 그대는 마치 화가가 그림을 그리거나 시인이 시를 쓰거나 음악가가 연주를 할 때 자신을 잊어버리듯이, 그대 자신을 잊어버려야 한다. 침술은 그런 것이다. 기술자도 침술을 시술할 수 있지만, 결코 꼭 필요한 사람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다. 물론 몇몇 사람을 도울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침술은 위대한 예술이며 위대한 기예다. 그대는 침술을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 그 비밀은 내맡기는 것이다. 그대가 침술 속에 자신을 완전히 내맡길 수 있다면, 그대가 자신을 바쳐 침술에 몰두할 수 있다면, 침술 속으로 뛰어들라. 기쁘게 온 힘을 다해 침술 속으로 뛰어 들라.


그대 자신이 되기 시작하라. 그대 자신만의 비법을 발견해야 한다. 침술은 비법이며 예술이다. 그리고 침술에서는, 누군가를 규칙처럼 따라야 할 필요가 없다. 침술에는 아무 규칙이 없다. 단지 통찰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대 스스로 시작해 보라……. 처음에는 다소 확신이 서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아닌지 자꾸 걱정이 될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렇게 헤매며 시작하는 것이다. 조만간 그대는 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일단 문을 찾아나서게 되면 헤매는 일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당장 시작해 보라!


다른 사람의 몸을 만지거나 침을 놓을 때 그대는 신을 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매우 공손해야 하며 신중해야 하다. 그대는 지식이 아니라 사랑으로 시술해야 한다. 지식은 결코 적절하지 않으며 충분하지도 않다. 지식으로 사람을 대하면 항상 부족함을 느끼게 된다. 지식은 한계가 있는 데 반해, 상대방은 하나의 온전한 세계이며, 거의 무한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대를 건드리지만 결코 그대를 건드리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표면을 건드리지만 그대는 사랑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깊은 중심 속에 있다. 인간은 신비이며, 영원히 신비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인간이 신비인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신비가 바로 그의 존재다.

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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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re I shall live

소선재에서 2010. 4. 29. 10:44

호주에서 살면 좋은 점을 묻는 글에 달린 답변이다. 네이버 카페에서 퍼왔다.
이런 질문은 주기적으로 올라와서 사람들이 댓글다는 것도 신통치 않아하는 분위기이다.
이 사람은 브리스번에 사는 듯 하다.
대개가 공감이 가는 내용이나, 이곳의 단점은 영어스트레스만은 아니다. 할 것도 없고 갈 곳도 없다. 사는 재미가 없는 게지. 애들 학교야 여기서 다니는게 좋겠지만, 내가 사는 거 생각하면 더는 못 살겠다는 생각이다. 밥 해먹는 부엌일하며 뭣보다 지금처럼 몸이 아플때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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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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