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새해를 맞는다. 바깥에서 보는 한국의 새해맞이 풍경은 조금은 유난스럽다. 해돋이를 보려는 해맞이 인파가 그것이다.

12월 31일 자정이 되기 전 서울의 종로거리나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앞이나 똑같이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 1월 1일이 되는 순간 시드니의 하버브릿지에서는 요란한 불꽃놀이가 시작되며 새해를 축하한다. 같은 시간 한국에서는 보신각의 종이 서른 세번 울린다. 이 보신각의 종소리는 결코 새해를 맞는 것이 아니다. 묵은 해를 보내는 제야의 타종이다. 1월1일 0시가 되면 새해를 맞이하지 않고 묵은 해를 보내는 종을 친다. 그렇다면, 새해는 언제 맞이하는 것일까?
 
한국의 새해는 1월 1일 영시가 아니라 아침시간, 즉 일출과 함께 시작한다. 한국의 새해는 해가 떠야 비로소 새해이다. 방송국의 카메라는 말할 것도 없고, 많은 사람들은 뜨는 해를 보러 바다로 산으로 급기야는 교통정체에 도로 위에서 새해를 맞게 된다. 해가 뜨지 않으면 그것은 새해가 아니고, 아침이 아니면 그것은 새날의 시작이 아니다. 자정이 넘어가면 새로운 날이 되고, 12월 31일이 끝나면 바로 새해가 되는 서양과는 다르다. 미묘하나, 분명히 다르다.
 
이렇게 설명하는 역사학자가 있다(출처는 김대근씨이다). 우랄산맥 근처 알타이지역에 태양을 숭배하는 무리가 있었다. 떠오르는 태양을 쫓아 동쪽으로 동쪽으로 이주하여 한반도에 정착했다. 나라 이름을 아침해가 선명하다해서 조선이라 했다. 우리가 고조선이라 부르는 그 조선이다. 한반도에 정착한 사람들 중 일부는 또 동쪽으로 일본열도로 갔다. 해의 근본이라 일본이라 했다. 삼족오는 그들의 상징이었다.
 
대학시절 엠티를 가서는 밤새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시고 다음날 새벽 일출을 보러 꾸역꾸역 기어나가는 이들이 있었음을 기억한다. 산에 올라가도, 나 역시 그랬듯이, 특별한 날이 아님에도 일출을 보러 꼭두새벽부터 천황봉으로 대청봉으로 기어오르는 이들이 아직도 많음을 알고 있다. 한국의 지명, 성산의 일출봉이나 여수의 향일암이나 포항의 영일만이나 하다 못해 이름없는 동해 바다 어디를 가도 아침잠을 줄여 일출을 봐야만 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고 많음을 나는 알고 있다.
 
과문한 탓인지, 한국사람이 아닌 사람들이 이렇게 일출을 집단적으로 즐긴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하였다. 호주의 시드니는 전 세계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다. 아침잠을 설치며 낚시를 가고 골프장에 가는 사람은 봤어도 일부러 일출을 보러 간다는 사람은 아직 만나 보지 못했다.
 
1월 1일 일출을 보러 어둠속에 길을 나서는 사람들에게 왜 일출을 보러 가는지 묻는다 치자. 여러분들도 한번 자문해보자. 답변은 아마도 옹색할 것이다. 누군가의 답은, '한민족은 태양의 후손이요, 태양의 기상을 타고 났소'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파라오의 후손인 이집트사람들과 우리는 배다른 형제가 되는 것인가? 그나마 말이 되는 답은 '새해의 첫날이니까'가 될 것이다. 우리는 새해가 되었으니 해맞이를 하러가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또 묻겠다. 왜 새해의 첫날에 해맞이를 해야하는가? 이 질문에는 답이 없다. 답이 있을 수가 없다.

우리가 하는 많은, 거의 모든 행동에는 사실 이유가 없다. 그것이 포유류 영장목에 속하는 호모 사피엔스의 본능에 따르는 것이든, 아니면 집단의 전통과 문화에 의해 무의식에 저장된 채로 행하는 의식이든, 사실은 내가 하는 것이 내가 하는 것이 아니며, 내가 하는 생각이 사실은 내가 하는 생각이 아닌 것이다.

호주를 후진국이라 생각하는 나의 어머니는 호주에 와서 딱 하나 하고 싶은게 있으셨다. 그것은 해돋이를 보러가는 것. 나는 늦잠꾸러기라 한번도 해돋이를 보여드린 적이 없다. 나의 아이들은 1월 1일에 해돋이를 보러 갈 것인가? 한국에서 자라면 그리 될 것이고, 한국이 아닌 곳에서 살면 그리 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하는 말과 생각과 행위가 사실은 내가 하는 게 아니라는 것. 이것이 붓다의 연기법이고, 제법에 무아가 아닐까. 깨달음이 있다면 이것이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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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새해이다. 이번엔 2011년이 묵은 해가 되고 2012년이 새해가 된다. 이방인으로서 느끼는 낯설은 모습은 신년맞이에도 예외가 아니다.
 
12월 31일 자정이 되기 전 서울의 종로거리나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앞이나 똑같이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 1월 1일이 되는 순간 시드니의 하버브릿지에서는 요란한 불꽃놀이가 시작되며 새해를 축하한다. 같은 시간 한국의 풍경은 조금 다르다. 보신각의 종소리는 묵은 해를 보내는 제야의 종소리이다. 같은 시간에 서구에서는 새해를 맞이하는 축포가 퍼지고, 한국에서는 지난 해를 떠나보내는 종소리가 퍼진다. 한국에서는 먼저 묵은 해를 보낸다고? 그렇다면, 새해는 언제 맞이하는가?
 
한국의 새해는 1월 1일 영시가 아니라 새벽시간, 일출과 함께 시작한다. 한국의 새해는 해가 떠야 비로소 새해이다. 방송국의 카메라는 말할 것도 없고, 많은 사람들은 뜨는 해를 보러 바다로 산으로 급기야는 교통정체에 도로 위에서 새해를 맞게 된다. 해가 뜨지 않으면 그것은 새해가 아니고, 아침이 아니면 그것은 새날의 시작이 아니다. 자정, 미드나잇이 넘어가면 새로운 날이 되고, 12월 31일이 끝나면 바로 새해가 되는 서양과는 다르다. 미묘하나, 분명히 다르다.
 
혹자는 이리 말한다. 우랄산맥 근처 알타이지역에 태양을 숭배하는 무리가 있었다. 떠오르는 태양을 쫓아 동쪽으로 동쪽으로 이주하여 한반도에 정착했다. 나라 이름을 아침해가 선명하다해서 조선이라 했다. 우리가 고조선이라 부르는 그 조선이다. 한반도에 정착한 사람들 중 일부는 또 동쪽으로 일본열도로 갔다. 해의 근본이라 일본이라 했다. 삼족오는 그들의 상징이었다.
 
나는 한국에 있을때, 엠티를 가서는 밤새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시고 다음날 새벽 일출을 보러 꾸역꾸역 기어나가는 이들이 있었음을 기억한다. 산에 올라가도, 나또한 그랬듯이, 특별한 날이 아님에도 일출을 보러 꼭두새벽부터 헤드렌턴을 켜고 천황봉으로 대청봉으로 기어오르는 이들이 아직도 많음을 알고 있다. 한국의 지명, 성산의 일출봉이나 여수의 향일암이나 하다 못해 동해 바다 어디를 가도 아침잠을 줄여 일출을 봐야만 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쎄고 쌨음을 나는 알고 있다.
 
한편, 여기 사람들과 별 교류가 없는 탓인지 몰라도 호주인들이 일출을 즐긴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시드니에는 전 세계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다. 아침잠을 설치며 낚시를 가고 골프장에 가는 사람은 봤어도 해돋이를 일부러 보러 간다는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동포들에게 묻고 싶다.
 
"왜? 왜? 해를 맞으러 가는 것입니까?"
 
누군가는 답할 것이다. '한민족은 태양의 후손이요, 태양의 기상을 타고 났소' 그렇다면 파라오의 후손인 이집트사람들과 우리는 배다른 형제가 되는 것인가? 누군가는 답할 것이다. 일출의 기를 받으면 여러모로 좋대요. 아~ 그래서 밤을 새서 술마시는 것일지도.
 
나는 생각한다. 해돋이를 보러 가는 건 이유가 없다고. 해돋이를 보러 가는 건 옆집 철수가 가기때문이고 옆집 철수가 가는 건 그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랬기 때문이고, 그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 할아버지 할머니의 할아버지의 할머니의......
 
호주를 후진국이라 생각하는 나의 어머니는 호주에 와서 딱 하나 하고 싶은게 있으셨다. 그것은 해돋이를 보러가는 것. 나는 늦잠꾸러기라 한번도 해돋이를 보여드린 적이 없다. 나의 아이들은 해돋이를 보러 갈 것인가? 한국에 살면 그리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하다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두가 해돋이를 보러 가니 말이다. 그것이 바로 몇천년동안 변하지 않은, 해돋이를 가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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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호 | 등급변경 | 조회 67 |추천 0 | 2011.09.13. 17:33 http://cafe.daum.net/rescueourselves/71eI/1654

 안철수 등장으로 인한 충격이 아직도 가시지 않는다. 안철수 이미 서울시장불출마를 선언했고, 차기 대통령선거에도 나갈 같지는 않다.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이는 '안철수' 개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안철수 대선주자의 반열에 올려놓은 '시대' 와 '세대' 관한 이야기이다.

 

1. 노무현세대와 안철수세대

 

노무현 민주당의 비주류, 소수였다. 그런 노무현 대통령이 있었던 것은 바로 386세대의 지지였다. '콩은 콩이고 팥은 팥이다'라고 말하는 노무현 바로 386세대가 추구하고 원하는 정치인이었다. 옳고 그름과 정의를 말하는 노무현 386 만들어낸 대통령이었다.

 

이전의 세대는 이런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보수주의자 김훈 한겨레 마지막 기사는 기성세대의 충격을 묘사하고 있다(링크 김훈이 한겨레를 떠난 이유). 뒤집어 말하자면 평생 먹고 사는 일에만 전력해온 세대들은 옳고 그름으로 살지 않았다. 이만큼 먹고 살만한 시대를 만들어 놓았는데, 이젠 아래 세대로부터 옳지 못했다고 부정을 당하는 현실. 그들은 부정당하는 자신의 모습에 반발할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10 전이다.

 

이번 안철수 등장은 노무현 등장과 한편 비슷하면서도 한편 다르다. 비슷한 점은 안철수 상징되는 젊은 세대는 386 그랬던 것처럼 이전 세대의 부정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성 정치권에 대한 실망, 구태로 인한 무관심등 기성세대에 대한 부정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대안을 기다리고 있던 차에 안철수 등장에 환호를 보낸 것이다.

 

다른 점은 안철수 상징하는 가치는 노무현 그것과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노무현 옳고 그름을 나타냈다면, 안철수 이상 옳고 그름이 아니라 개인의 성공을 표상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노무현세대와 안철수세대의 가장 차이점이다.

 

 

2. 시대의 아이콘 안철수

그렇다고, 안철수 젊은 세대의 아이콘으로 한정된 것만은 아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때 노무현 등을 돌린 사람들, 많지 않다고는 하나, 어쨌거나 이명박에게도 표를 주었다. 이명박이 아니었던 사람들은, 문국현 등장에 희망을 걸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 안철수 지지율에는 지금의 40 역시 기여를 하고 있다.

이명박, 문국현, 안철수. 이들은 대표하는 세대는 다를지라도, 모두 기업가출신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성공한 개인’ 이젠 세대를 막론하고, 누구나 소망하고 꿈꾸는 시대의 가장 커다란 우상이 것이다. 안철수 혜성같은 등장도 이런 ‘시대의 아이콘’으로서의 모습과 아울러 ‘새로운 세대’의 대변자로서의 모습에 기초하고 있다고 있다.

 

지금 안철수 부상은 단지 개인 안철수 지지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시대의 흐름, , ‘개인의 성공’과 ‘새로운 세대’ 나타내는 것이며, 앞으로의 시대는 두가지 흐름속에서 펼쳐진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3. 한나라당과 민주당

한나라당의 이름은 지난 97년부터 바뀌지 않고 있다. 현재의 정당중에 가장 오래되었다. 게다가 1당이다. 밥에 나물이긴 하지만, 정당의 이합집산과 신당창당등이 밥먹듯이 이어지는 현실에서 똑같은 이름으로 1당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보수세력의 뿌리가 얼마나 강한지 보여준다.

국회에 진출한 정당을 보면 민주당의 대표도 한나라당 출신이고, 자유선진당도 한나라당 대선후보를 번이나 했던 이회창의 정당에다가, 미래희망연대도 한나라당의원인 박근혜 계보이니, 사실 한나라당의 1당독주는 최전성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번 안철수 등장으로 한나라당은 이젠 내리막길에 접어들었다고 보인다. 한나라당은  안철수 상징되는 가치를 포용하기에는 너무 늙었다. 안철수 표상되는 가치, , ‘개인의 성공’과 ‘새로운 세대’중에 개인의 성공은 한나라당의 이념으로도 충분히 커버할 있는 분야이나, 새로운 세대를 표방하기에는 기존의 지지층을 버려야 한다.

한나라당은 단지 이명박의 실정때문이 아니라, 앞으로의 시대를 이끌기는 커녕 흐름을 쫒아가기도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당으로서는 내년의 총선과 대선이 몰락의 서곡이 것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한나라당이 사는 길은 민주당과 합당하는 길밖에는 없을 것이다.

 

민주당 역시 한나라당과 별반 다를게 없어 보인다. 민주당도 한나라당의 제일 파트너로서 정치시장의 독과점을 유지해왔으나, 새로운 세대의 등장으로 이상 안방마님의 역할은 어렵게 되었다고 본다. 민주당이 말해 ‘정의’는 이십대와 삼십대의 세대에게는 이상 호소력을 가지지 못한다. 앞으로 민주당이 대안이 없는 이상, 민주당에게 남겨진 소명은 한나라당과 자폭하는 밖에 없지 않나 싶다. 그것이 그나마 정의를 얘기해 민주당의 마지막 기여가 것이다. 한나라당과의 합당을 마지막으로 기대해 본다.

 

4. 문재인과 유시민

안철수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같지 않다. 하지만, ‘개인의 성공’과 ‘새로운 세대’는 다음 대통령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이 것이다. 문재인 만약 대통령후보로 나선다면, 일각의 비난을 감수하고라도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 ‘개인의 성공’을 얘기하는 순간 진보주의 진영으로부터의 비난은 피할 없게 된다. 신자유주의자라는 딱지가 따라 붙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고는 대통령이 없을 것이다.

유시민 역시 마찬가지다. 새로운 세대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그들이 욕망하는 ‘개인의 성공’에 대한 답을 내놓아야 한다. 안타깝게도 문재인이나 유시민 모두 젊은 세대가 원하는 ‘성공한 개인’에 대한 롤모델은 되지 못한다. 안철수처럼 삶의 이력으로 그들의 공감을 이끌어 없다.

 

안철수 등장을 보면서 장강의 뒷물결은 앞물결을 밀어낸다는 말이 떠오른다. ‘사회의 정의’가 ‘개인의 성공’에 밀리는 것을 지켜보자니 씁쓸함을 감출 없다. 하지만, 이것이 강물의 흐름인 또한 부인할 없다. 과연 문재인 또는 유시민은 ‘개인의 성공’을 얘기할 있을까? 다음 대통령선거는 바로 여기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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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호 | 등급변경  | 조회 128 |추천 0 | 2011.09.08. 01:13 http://cafe.daum.net/rescueourselves/71eI/1652 


안철수
시대

 

2011 늦여름, 경악이다. 안철수 '서울시장 출마를 고려하고 있다' 마디. 볼일 없을 같은 한마디의 말이 금년에 들어본 뉴스중에 가장 충격적인 소식이 줄은 몰랐다. 그가 박원순변호사에게 양보를 해서가 아니다. 여론조사결과, 그것이 비록 인기투표의 성격은 있다 해도, 그리고 새로운 인물에 대한 기대감이 반영된 것이라 해도, 서울시장은 물론 대통령선거에서도 1위를 기록을 것은 충격 자체였다. 아니, 안철수 도대체 뭐길래? 이어지는 글은 이에 대한 나의 고민의 결과이다.

 

  

현자(賢者) 안철수

 

안철수 훌륭함을 여기서 꺼낼 필요는 없겠다. 나에게 안철수 씨이오도 아니고 교수도 아니고 현자(賢者)이다. 무엇보다 그는 현재를 사는 사람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미래를 , 오늘을 있는 사람은 그것만으로 '' 가지게 된다. 하지만, 그런 삶의 '' 바로 정치적인 ''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그의 사상은 보수이다. 스스로 시장자유주의자라고 밝혔듯이 그는 굳이 말하자면 건강한 보수라 있다. 지금 한국사회가 워낙 후안무치한 사기꾼들이 판을 치고 있어서, 그가 상대적으로 진보적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그는 결코 진보의 가치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다. 그의 역시도 지극히 개인의 삶을 걸어왔을 , 공적인 영역에서 의미있는 행보는 없었다. 정치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는 안철수 유력한 대선후보로 부상한 것은 도대체 어떤 이유에서인가?

 

이삼십대의 등대가 되다

 

한나라는 것도 없고민주당도 별반 다를게 없다. 그렇다고 민노당이나 민노당에서 떨어져나온 진보신당은 꽉막혀 보인다. 그나마 참여당이 쿨해보이긴 하나거기도 얘기를 해주지는 않는다. 자기를 대변해줄 정당이 없으므로 당연히 지지할 정당이 없다. 이것이 지금 이십대와 삼십대의 정서다. 이렇게 마음을 곳이 없는 이삼십대에게 안철수 나타났다. 안철수 이삼십대에게 등대의 불빛이 되었다. 이삼십대는 안철수폭발의 진원지이며, 안철수 서울시장출마를 고려할 있는 토대이다.

 

어떻게 안철수 이삼십대의 마음을 얻었을까? 지금의 이삼십대는 윗세대와 다르다. 전쟁의 폐허에서 밥을 굶은 세대도 아니고, 그런 부모밑에서 억압을 당한 세대도 아니다. 어렸을때는 풍요로운 성장기를 거쳤지만, 대학과 사회에 진출해서는 무한경쟁속에 힘들어하고, 88만원세대라는 말처럼 상대적 박탈에 고통받고, 비정규직의 비굴함에 억울해하며, 따라서 충족되지 않는 욕망에 분노한다.

 

안철수 되고 싶어여

 

안철수 삶은 지금 이십대와 삼십대가 꿈꾸는 바로 모습이다. 안철수 유능하고 성공한 사람이다. 그런데, 성공의 모습은 기존의 양태와 다르다. 일단 구질구질하지 않다. 그는 의사였다. 기성세대라면 여기서 끝이다. 그런데, 안철수 재밌는 일을 찾아 컴퓨터전문가가 되었다. 그리고 성공했다. 거기다가 기성세대와는 달리 깔끔하다. 악착같이 돈을 벌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발악을 하면서 살아온 것도 아니다. 지저분한 빽과 뇌물과도 거리가 멀다. 기성세대의 구태의연한 모습은 하나도 찾아 없다. 오히려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현자로서 다른 사람의 멘토가 되고도 남을 사람이다. 이렇게 자기의 인생을 살고 거기서 성공을 했으니, 지금의 젊은이들에게는 이보다 더한 롤모델이 없다.

 

물론, 여기에는 기존의 정치권에서 젊은이들에게 희망과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책임이 있다. 하지만, 단순히 어부지리뿐만은 아니다. 안철수 삶의 모습은 지금의 젊은 세대가 추구하는 이상에 정확히 부합되며 이것이 젊은 세대를 휘어잡는 안철수 힘의 근원이다.

 

안철수 되는 것과 안철수처럼 되는

 

그러나, 나는 안철수에게 표를 주고 싶지 않다. 그것은 내가 윗세대 (386세대나 산업화세대)여서가 아니라, 안철수 내포하는 가치가 사회공동체의 유지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안철수 표상되는 가치는 ‘개인’과 ‘성공’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안철수 방식은 젊은이 사람 사람에게는 희망을 몰라도, 사회구성원에게는 전혀 도움이 수가 없다.

 

물론, 집단주의의 억압적인 기능을 생각해본다면, 개인주의의 순기능과 확산은 반길 일이다. 386세대역시 그들이 이룩하고 기여한 많은 일에도 불구하고, 전체주의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지금 이삼십대의 개인주의는 분명 사회가 다양화에 기여할 것이고, 결과적으로 개인의 자유나 인권의 확대로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시장자유주의자인 안철수 지금의 부조리를 열거하면서 앞으로 공정한 게임의 룰을 만든다는 주장은, 언뜻 보면 공명정대하게 생각되지만, 게임자체가 이미 적자생존이고 약육강식의 법칙일 뿐이다. 정치는 게임을 공정하게 진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보다 중요한 것은 게임에서 있을 밖에 없는 패자도 배려하는 것이다. 누가 이기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지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정치의 문제라고 있는데, 안철수 표상되는 가치는 나도 한번 이겨야겠다는 것에 불과하고, 이것은 단지 피아만 바뀌었을 문제는 여전하다고 있는 것이다.

 

386세대의 공만큼 분명히 과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학생운동은 공동체로서의 사회를 우선시했고, 결과적으로 민주주의의 확대에 기여했다. 지금 이삼십대의 보수화 경향을 그들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는 일이나, 분명 알아야 것은 안철수 된다고 해서 안철수처럼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에필로그

1.

안철수 부상으로 가장 피해자는 유시민이 되었다. 유시민은 기존의 정치권에 식상한, 반한나라 비민주 그리고 민노당이나 진보신당의 답답함에 등을 돌린 이들이 지지층이었다. 그런데, 이번 안철수 등장으로 유시민으로서는 이상 확장을 없게 되었다. 대안으로서의 가능성은 완전히 안철수에게 빼앗겨버렸다. 안철수 전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문재인의 등장에 이어 안철수 부상은 유시민으로 하여금 이상 가망성이 없다는 판단을 하게 만들 것이다.

 

2.

386세대는 이제 서산에 지는 해가 되었다. 한때 역사의 주역이었던 그들의 앞에는 민주주의의 확립과 자유의 신장이 놓여있지만, 그들의 뒤에는 개인의 안위만을 꿈꾸는 ‘늙은 젊은이’들이 있다. 안철수 표상되는 ‘늙은 젊은이’들은 누구의 탓인가? 386 탓에서 자유로울 있을까?

 

3.

문재인 차기대통령이라치고 얘기하자면, 문재인의 가장 고민은 바로 지금의 이삼십대 ‘늙은 젊은이’들이 되어야 것이라 본다. 이들을 움직이는 , 천하를 얻으리라.

 

 

2011. 9. 8. 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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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가 정치관련해서 댓글달아놓은걸 며칠후에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저를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영락없는 한나라당 지지자로 보겠더라구요. 저는 이병막이나 한나라당얘기는 거의 안하는데요. 이유는 설치류나 겁많은 욕심쟁이들은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것.
그래서 소위 말하는 진보쪽에 애정어린 충고랍시고 의견을 다는데 며칠후에 보니 보수쪽에서 진보욕하는 것과 같은 말이더군요. 내가 보수였단 말인가 싶었습니다. 전 사회당 지지에 아나키스트인데 말입니다. 쫌 쇼크였습니다.

2.
예전엔 깨달은 사람은 없나보다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붓다나 예수같은 사람이 어디있겠냐 하는 생각이었는대요, 지금생각엔 깨닫고 사는 사람이 꽤 많은 것 같습니다. 제가 인생의 스승이라 생각하는 분들도 그런 것 같고요. (제 아내는 잘 모르겠지만) 김어준도 그런 것 같고요. 한겨레인터뷰애서 김어준이 '나꼼수가 선동아니냐?'는 질문에  '하다못해 일기라도 모든 메세지는 다 선동이다'면서 자기는 선동할 수 있는 자유를 선동한다고 하더군요. 김어준도 한소식한것 같고요. 별로 호감가지는 않지만 안철수도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걸 보면 자신을 아는 것 같기도 하고,또 이래저래 이름없는 사람들중에도 자신의 모습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꽤 되는 것 같습니다.

3.
물론 깨달음으로 사기치는 사람들도 많지만 실재 자신의 삶으로 깨달음을 말없이 증거하는 사람들도 많지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깨달음이라는 말에 전혀 관심없는 분들가운데서도 그런 분들은 많운게 아닌가 싶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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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나는 꼼수다의 출연진 중의 한 명이자, 편집을 맡고 있는 김용민의 답변을 보니, 제 모습을 보게 되었네요.
 
교만이 제 병이라, '나는 꼼수다'를 선동이라고 본 저는, 엘리트의식에 계몽주의자의 모습이었다 싶네요. 이젠 더 이상 '진보진영'을 가르치는 댓글을 쓰지 말아야겠습니다. 매년 11월만 되면 크게 배우는군요. ^^
 
김용민의 답변.
* 트위터에 보니까 나꼼수가 인기가 많아지면서 남들을 가르치려는 엘리트주의에 빠진 것 아니냐는 의견도 의외로 많더라.
김용민 : 쉽게 말해서 나꼼수가 청취자들을 세뇌시킨다 얘기다. 이건 나꼼수 청취자들의 수준이 낮다는 식의 비판이다. 반대로 우리는 수용자들의 수준이 높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잘못하고 막나가면 수용자들은 우릴 떠나갈 것이다. 그렇게 청취자들이 고차원이다. 나꼼수가 엘리트주의에 빠졌다는 사람들이야말로 엘리트주의는 아닌가. 비판하는 자신들은 고차원이고 나머지는 수준이 떨어진다는 의식이 있는 것 아닐까. 그런 진보가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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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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