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를 저열하게 살아가는 고뇌하는 지식인으로서 2011년 11월 21일 오늘의 현실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고뇌하는 지식인의 특성이라면 생각이 100, 말은 1, 그리고 행동은 완전 제로라는 것. 행동하지 않는 양심으로 2012년을 전망하고 희망해 본다.


1.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1) 문씨와 안씨, 그리고 박씨
앞으로 1년하고도 한 달 후면 대한민국의 제 십팔대 대통령이 결정된다. 사람의 모습을 띤 설치류께서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신 탓에 차기 대통령은 그나마 인간다운 인간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대결구도를 보자면, 저쪽 선수로는 박근혜, 이쪽선수로는 안철수 또는 문재인이 예상된다. 1년을 남겨둔 이 삼자외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지난 대선때는 사실상 여권의 후보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정동영)는 따로 있었지만, 존재감은 극히 미약했다. 노무현은 퇴임 전 날까지 자기가 할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한나라당은 (얼씨구나하고) 노무현만 붙잡고 늘어졌다. 노무현이 대선후보였다면 노무현과 한나라당의 싸움이 의미가 있었겠지만, 노무현은 후보가 아닌 물러나는 대통령이었다. 대통령이 될 수 없는 상대방과 싸우다니, 사실상 이병막은 부전승으로 이겼다.

여담이지만, 어떻게 이병막같은 인간이 대통령 - 아무리 그래도 일국의 대통령인데 - 이 될 수 있나?하는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병막의 무기는 바로, 싸우지 않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직접 싸우고 이기면서 토너먼트를 올라 갈 때, 이병막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쪽 등에 업혀서 묻어 올라갔다.

그렇다고 이병맛이 싸움을 마냥 피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겉으로만 안 싸우는 척 할 뿐이다. 이병맛은 맞짱을 뜨지 않고 뒤에서 칼을 찌른다. 상대방이 방심하게 해 놓고 기습을 하는 것이다. 고개를 조아리며 빈 손이라고 악수를 하면서 소매끝에 감춰놓은 칼로 찌르는 것이다. 이건 싸움이 아니니 기습이라고 할 수도 없다. 비열한 닌자의 암수같은 것이다. 닌자쥐박이의 암수.

말하자면, 이병맛은 싸우지 않는 성인의 도를 암수차원에서 적절하게 이용해 대통령까지 된 것이다. 능력은 능력인 것이고, 그러니 나름대로는 뛰어난 인간, 아니 설치류인 것이다.

다시 돌아와서, 현직 대통령인 노무현이 대통령 선거의 한쪽 선수였기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표를 줄 선수를 막판까지 찾아야했다. 문국현해프닝이 바로 그것이었다. 내년의 이쪽 선수로 뛰려면, 지금부터는 나와야 한다. 손에 흙묻히기 싫다고 마지막에 짠하고 나타나면 문국현이나 정몽준처럼 된다. 이것이 안철수와 문재인 이 둘 이외에는 다른 선수가 없다고 보는 이유이다.

저쪽은 박씨라는 것에 오백원 건다. 아무리 어쩌고 저쩌고 해도 저쪽은 대안이 없다. 박근혜덕분에 국회의원하는 사람들도 너무 많다.


아~ 생각100중에 말1만 하는 고뇌하는 지식인으로서 말이 너무 많았다. 다음에 계속........

(2) 문씨와 안씨의 토너먼트

2. 2012년 대한민국 제 19대 국회의원 총선거
(1) 민주당
(2) 진보통합정당
(3) 한나라당

3. 한국사회의 비희망 - 안철수와 나는 꼼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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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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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출근

소선재에서 2011. 5. 11. 21:05


월요일.
첫 출근 오전 11시 반. 퇴근 오후 네시반. 환자 딱 한명, 클리닉 주인인 카일리의 일곱살짜리 아들 엘리엇. 침을 놓으려고 했는데 엘리엇이 울고 불고 지랄발광을 하는 바람에 왼팔 척택혈에 하나 놓고 더 못 놓았다.
카일리가 칠개월짜리 딸 린지가 코가 막혔다면서 침을 놓아달라고 하길래, 공손에다 놓고나서, 비익을 놓으려고 침을 찌르니 이 칠개월짜리 애기가 응애~ 하고 비명을 지른다.
카일리가 수요일날 돈을 주겠다고 말은 하는데, 말은 하면서도 돈을 낼 것 같은 분위기가 아니다.
지가 침값을 70불 내면 어차피 그 절반은 자기가 먹는 건데 말이지.
돈 낼 필요없다고 했다.
이래저래 짐정리하고 책상정리.
 
 
수요일.
출근 12시. 퇴근 다섯시. 오늘은 환자 한명도 없음. 벽에다가 트리커 포인트 차트를 스카치테이프로 붙였다. 그리고는 별로 할 일이 없어서 서류정리를 했다. 피자 두조각 데워먹고 컵라면도 먹었다. 카일리가 와서 클리닉 입구에 붙이는 싸인에 대해 얘기했다. 지역신문에 내 광고도 내 준다고. 그래봤자, 지 클리닉광고겠지만.
리셥셔니스트 바바라는 영국사람이다. 동양문화에 대한 호기심 내지는 호감. 스스로 인털리전트하다고 생각하는 백인들중에 이런사람들이 있지. 지적인 선망이랄까? 알고보면, 이것도 결국에는 지 욕심이지만.
그래도 어찌보면 내 사무실이 생긴 느낌이다. 책상 하나 베드 하나뿐이지만, 별 방해받는 것 없이 나 혼자 사무실에 고요히 앉아있는것. 어찌보면 내가 대학교때 꿈꿨던 모습이 아닌가?
산다는 건 감사하고 행복할 일 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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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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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말한다. 열가구 정도의 작은 마을에도 반드시 나처럼 충직하고 신의를 중시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만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십실지읍 필유충신 여구자언 불여구지호학야 (十室之邑 必有忠信 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

 

논어 공야장편에 나오는 말이다.  나만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어찌 보면 아주 단순한 말이다. 나만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니. 이 말은 공자는 공부하기를 좋아했다는 말로 이해될 뿐이고, 공자가 얼마나호학하는 사람이었는지에 대한 근거로 인용될 뿐이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을 조금 달리 생각해본다. 나는 이 말을 배우기를 좋....로 해석하기 보다는배우기에 보다 더 초점을 둬서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나의 얘기는 이렇다.

 

'배운다'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일단가르친다로 상정해보자. 물론, 남을 가르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배우는 것이기도 하다. 가르침이라는 행위를 통해 나의무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르친다는 것은 배운다의 다른 말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좁은 의미의 가르친다, , 나의 앎을 다른 이에게 전수하는 행위에만 초점을 맞춰 보기로 하자.

 

배운다의 반대말로가르친다를 상정하고, 여기에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라는 공식을 대입해보면, ‘배운다 '가르치지 않는다' 내지는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가 된다.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라는 것이 곧바로배운다가 되지는 않지만, ‘배운다에는가르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포함이 된다. 배우는 것은 모르는 사람의 행위이고, 모르는 사람은 가르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위에 인용한 공자의 말에 대입해 보자.

 

나만큼 가르치려 하지 않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가 된다.

 

나는 여기서 우리의 삶을 본다. 우리는 평생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산다.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부모는 자식을, 자식은 부모를, 상사는 부하를, 부하는 상사를, 나는 남을, 남은 나를, 우리는 끊임없이 남을 가르치고 가르치려 하고 가르쳐주고 싶어하면서 산다. 우리는 왜 그렇게도 가르치려 하는 것일까?

 

나는, 공자는 가르치려 하지 않는 사람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공자는 당시 매우 유명한 스승이었다. 2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영향력이 막강한 선생이다. 그가 이렇게 힘있는 스승이 된 것은 그가 누구보다 ‘가르치려 하지 않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을 가르치려 하지 않았기때문에 뛰어난 스승이 되었고, 남을 가르치려 하기 보다 자기의 무지에 대해 배우려고만 했기 때문에 시간을 뛰어넘는 스승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나만큼 가르치려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라는 공자의 말에서, 나는, 남을 가르치려고 하는 자는 결코 남을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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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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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호 2010-11-08 (월) 09:27
그러니까, '나는 못깨달았다'는 말에도 역시,
'깨달음'이 여기 아닌 다른 곳, 다른 사람의 일이라는 생각이 있는 거군요.
다시말해, '깨달음'이라는 그 어떤 권위 내지는 기존의 관념에 종속,지배당해있는
거라는 거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인지 아닌지 쫌 머리가 복잡해지면서........

깨달았다 못깨달았다가 아니라, 깨닫지못했다라는 관념속에 들어있는 그러니까, 외부의 권위에 눌려서,아니, 외부의 권위에 종속되어서는, 아니, 거기에 세뇌되어서는, 뭐 그런건지.... 좀 더 생각을....

음.. 하여튼 요잔님 감사드립니다. 


막 울화가 치밉니다
글쓴이 : 요잔 (나눔지수:3040점) 날짜 : 2010-11-08 (월) 00:49 조회 : 47
글주소 :
오스카 멤버가 이제 열 명 남짓인데
그 중에 깨닫지 못한 분이 무려 세 명이나 계시는군요.
분위기를 보아하니 말을 안할 뿐이지 나머지 분들도....
 
이건 뭐,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믿는 것보다 더 확고한 믿음입니다. 
 
제가 명상계에서 만나는 거의 모든 분들께 하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분들로부터 완전히 무시당하는 말이기도 하지요.
 
"나는 깨닫지 못했다."는 이 믿음!
선언에 가까울만큼 확고한 이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요?
깨달음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은 의심과 회의를 갖고 있으면서
"나는 못 깨달았다"는 생각은 어찌 그리 확고하신지요?
도대체 근거가 무엇입니까?
 
P.S:
"그럼 너는 깨달았냐?"
이런 등신같은 질문을 하도 많이 들어서 이젠 막 울화가 치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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