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hani.co.kr/arti/culture/entertainment/341318.html


아쉬움은 신촌블루스의 노래 제목이기도 합니다. 한영애씨가 그만둔다니 아쉽고, 이런 좋은 프로그램이 없어진다니 애석하기만 합니다.

처음에 제가 한영애의 문화한페이지를 듣게 된 건 퇴근길에서였습니다. 그때가 2002년이었던걸로 기억하는데, 하여튼 초창기였습니다. 방송시간은 오후 4시였죠. 한영애씨의 빼어난 진행실력에 저는 홈페이지에 글을 올렸죠.

담당PD의 엄청난 안목, 이런 진행자를 섭외하는 놀라운 안목에 저는 찬탄을 금치 못했었습니다. 담당PD는 제 기억에 여자분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프로그램 제목역시도 아주 신선했습니다. 홈페이지같기도 하고, 책 한 페이지같기도 하고.....

저는 애청자가 되었고, 그때 코너에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청취자 참여코너였는데, 우면동에 있는 EBS에 가서 제가 쓴 원고로 녹음을 했었지요. 출연료는 잘 기억이 안 나고 하여튼 EBS시계는 받은 기억이 납니다.

3분짜리 일주일치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제가 생각해도 잘 쓴 원고였고, 녹음도 잘 했지요. 릴테잎은 돌아가고 전 NG한번 내지 않았습니다. 아마 조연출이었던 분이 제게 칭찬을 무지막지하게 퍼 부으면서 '혹시 전에도 이런 것 했었냐?'고 묻기까지 했었습니다.

당연하게도 그럴 것이 전 다른 방송국(공중파입니다)의 라디오PD였거든요. 지금은 저도 방송국을 떠났지만, 라디오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연출하고 녹음도 하고, 때로는 스튜디오에 들어가서 마이크앞에도 앉아본 저니까 당연히 잘 할 수밖에요.

물론,라디오PD라고 해서 모두 마이크앞에서 잘 하는 건 아닙니다만, 전 특집같은 프로그램은 진행해본 적도 있으니, 별로 떨 일이 없었지요.

그때 남자분PD에게 사실대로 말 못해서 죄송합니다. ^^

지금 전 방송국을 떠났고, 외국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으로는 라디오PD를 다시 할 것 같지는 않지만, 만약 제가 라디오PD를 다시 하게 된다면, MC 섭외 1순위는 한영애씨입니다.

한영애씨! 꼭 기억해주세요. ^^ 당신은 한때 라디오PD였던 제게 제일 빼어난 진행자로 기억되고 있다고요.

/////////////////////////////////////////////////////////////////////////////////////////////


문화지킴이 북극여우 한영애입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작성자 운영자

오늘 방송에서 이야기했던 북극여우의 초이스의 글로

여러분들께 드리는 제 마음의 인사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내일이면 저는 문화 한페이지를 잠시 떠납니다.
그동안 습관적 으로 방송을 하진 않았는지..
너무 정형화된 틀 속에 저의 사고와 시선을 맞춘 것은 아닌지..
자유롭기 위해 자유에 갇혔던 건 아닌지..이제 돌아보려 합니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문화 한 페이지와 보낸 8년간의 세월이
더욱 더 또렷하게 머리에, 가슴에 떠오릅니다.
때론 주어진 조건보다 더 많은 열정으로 발로 뛰었던 많은 스텝들,
또 조금은 외진 이곳 우면동까지 한걸음에 달려와 아낌없이 자신들의
지식과 문화의 마음을 나누고 가셨던 많은 패널분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드러내진 않았지만 전국에,외국에 계신 청취자 여러분들의 사랑스런 숨결이 느껴집니다.
우리 정말 열심히 문화 한 페이지 써내려 갔지요?

문화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저는 참 많은 것들을 얻었습니다.
새로운 시선, 새로운 인식, 새로운 세계관이 생겼구요,
자연과 더불어 사람과 사람이 어떻게 아름다운 유기적 연대를 이룰 수
있는지를 조금 알게 됐습니다.
상대를 이해하고 인정하면서 욕심을 조금 놓게 됐구요,
더불어 세상의 하나하나 모든 것은 스스로의 가치를 지니고 아름답게
존재한다는 것을 다시금 새기면서 더 깊은 배려와 겸손을 알게 됐습니다.
물질만능의 시대, 더 구체적으로는 돈이 우선이고, 돈이 모든 기준의
잣대가 되는 이 시대에 문화프로그램은 한 방울의 물로서
사람이 사람으로 존재하기 위한 해법들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으며
삶이 힘들어도 조금 쉬어가고 기쁘고 행복하고 스스로 만족하며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삶의 태도를 알려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잘못만 있고 사과는 없는 요즘의 우리 주변을 봅니다.
프로그램 폐지의 이유와 절차에 대해 어떤 소명도 없이
회피로 일관하던 EBS 편성부는 느닷없이 퀄리티가 낮아서 프로그램을 폐지한다고 대국민 발표를 했습니다.
2009년 EBS 사장의 신년사에도 나와있듯이
EBS의 주인인 청취자들,패널들,한문페 스텝들과 프로그램을 만든 피디들, 저 모두를 일방적으로 매도 했습니다.
단 한번의 소통도 없이 그들은 그들 얼굴에 스스로 침을 뱉었습니다.
그들이 문화 프로그램을 들어왔다면 좀 상식있는 사람으로 행동하지 않았을까요?
저는 계약직이 아닙니다. 또 방송은 6개월 단위로 프로그램을 위해 모이고 해체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중요합니다.
설명도 없고 소통도 없는 일방적인 결정.
예의가 없는 거지요.
잘못된 것인줄 알면서도 반성없이 반복되는 이런 관행들이 이제는
없어지면 좋겠습니다. 솔선수범해서 고쳐 나가야 그들의 다음 세대가
성장하고 더불어 우리도 함께 행복해질 겁니다.
그들은 아직도 사과하지 않고 있습니다.

한문페는 여러분이 만들고 써내려간 프로그램입니다.
여러분 하나하나가 각자 나 만의 문화정원을 가꾸며
그렇게 8년간의 정성을 들였습니다.
예술문화를 통해 삶의 미적 가치를 추구하고 희망의 에너지를 얻었던
한문페는 문을 닫지만 여러분들은 매일매일의 책장을 펼치고 정원을 거닐며 삶의 여유를 즐기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예의와 배려, 이해와 소통을 통해
나의 얘기를 당당히 할 수 있는 페이지를 가꿔가시길 바랍니다.
그 정원에는 사계절의 노래가 끊임없이 이어지겠지요.
문화 한 페이지는 바로 당신이 계신 그 곳이니까요.
문화는 당신과 나의 이야깁니다.
한문페 여러분 즐거웠습니다.
고맙습니다. 건강하십시요.

'소선재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녀교육 지침서  (0) 2009.03.03
주시  (0) 2009.03.02
반작용과 주시  (0) 2009.02.28
주시  (0) 2009.02.28
Americans in Pyongyang  (0) 2009.02.28
Posted by 일호 김태경
,
일호님께
등록인 요잔 등록일 2009.02.20 | 조회: 196
첨 부

조심스럽지만, 제가 이해한 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주시'는 불가능합니다.
다만 '감시'가 일어날 뿐이지요.

우리는 어떤 때에 주시하려고 노력하나요?
행복하고 기쁨에 넘칠 때 '주시'해야겠다는 생각이 일어나나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행복감을 느낄 때 "이 행복을 주시해야 한다."는 생각이 일어나나요?
우리가 '주시'하려는 생각을 일으킬 때에는 분노나 미움 등 부정적인 감정을 느낄 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분노와 미움에 대해 '부정적'이라는 수사를 쓰는 것일까요?
무엇을 기준으로 부정적이라는 말인가요?
자기 스스로 구축해 놓은 '자기 이미지'에 부응하지 않기 때문에 부정적이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나는 항상 우아하고 평화로운 사람이어야 하는데, 그런 이상향에 맞지 않으니까
부정적 감정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지요.

사실, 분노와 미움이라는 감정 자체는 부정적이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의 '자기 이미지'를 훼손시키는 감정이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내가 구축해 놓은 '자기 이미지'를 기준으로 볼 때 부정적이라는 말이지요.
 
이 '자기 이미지'란 무엇인가요?
"나는 마땅히 이러저러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이상향이지요.
그런데 내가 그 이상향과 딱 부합되는 사람이라면 그런 이상향 자체를 가질 필요가 없지요?
어떤 이상향이 있다는 것은 내가 그 이상향과 어긋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상향과 어긋나는 사람'이 바로 지금 그대로의 내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이상향을 가진다는 것은 지금의 나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겠다는 뜻입니다.

이런 의지의 밑바닥에는 자기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마음이 숨어 있습니다.
'주시'에 대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그 이상향에 부합되는 인간이 되고 싶다는 뜻이고,
그 밑바닥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과 미움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죄인으로 만들어 놓고 그 죄인을 감시하는 것이지요.
죄수와 간수의 이중역할을 수행하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주시'의 정체입니다.
그래서 제가 주시가 아닌 '감시'라고 말하는 것이고요.
 
사실, 인간이 메커니즘이라는 말은 조금만 자신을 관찰해보면 쉽게 수긍이 갑니다.
어떤 인간도 이 메커니즘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다만 그 메커니즘에서 일어나는 작용을 어떻게 전개해 나가느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아래 글에서 우리는 작용에 이어 즉각 반작용을 일으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작용이 전개되는 방식은 반작용 외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일까요?
만일 반작용이 아닌 다른 식의 전개방식이 있다면,
여기서 우리는 어렴풋이나마 주시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될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럼 감시가 아닌 주시는 뭐냐?"하고 묻습니다.
우리는 너무 성급한 경향이 있습니다.
감시하려는 노력의 무의미함을 이해하는 게 우선이지요.
아니, 무의미하다는 말은 점잖게 표현한 것이고,
감시가 지나치면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되고 인성이 황폐해집니다.
사회적 센스를 잃고 자기 안에 갇혀 버립니다.
그는 '감시받는'대상으로서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게 되고,
그런 몰두를 통해 '감시자'의 구미에 맞게 행동하려고 노력합니다.
스스로 위선자가 되는 것이지요.
 
이런 해악을 깊이 성찰하고 당장 감시를 그만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제가 이해한 바로는 그렇습니다.
확대축소인쇄이메일
   
도반님들이 남겨주신 의견입니다 (3개)
일호
2009-02-20
21:00
일호입니다. 답변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되풀이해서 숙독하였습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에서 비롯되는 감시. 반작용이 아닌 다른 식의 전개방식. 자기 자신을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

범부는 첫번째 화살을 맞은 후에 곧이어 (분노같은) 두번째 화살을 초래하는 반면, 성자는 첫번째 화살로 그친다는 얘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후로 저는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화가 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답변 주신데 대해 감사인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요잔
2009-02-18
14:56
*반공과 저는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 사이이니 아래 글을 읽는 분들은 오해하지 마세요*

재미있게 좀 꼬집어 드릴까요?^^
조건이 있고 반작용이 일어나는 게 아니라 조건에서 작용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 작용에 대해 반작용이 일어나죠.
조건에서 작용이 일어나는 것은 모든 인간의 메카니즘입니다.
(인간은 메카니즘 이상이 아니라는 유지의 말을 전제할 필요는 없겠죠?)
그런데 이 작용(action)에 따라붙는 반작용(reaction)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분노를 예로 든다면, 누군가에게 피해를 당하고 화가 나는 것은 메카니즘의 작용입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이 작용에 대해 '참아야 한다'는 반작용을 일으키고,
명상인들은 '의식적으로 주시해야 한다'는 반작용을 일으킵니다.
분노까지는 메카니즘의 속성이므로 문제될 게 없어요.
문제는 이 메카니즘의 작용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것을 개선 또는 변화시키려는 반작용을 일으키는 것이죠.
그러니까 자연스러운 메카니즘의 작용을 '무의식'으로 폄하하게 되고,
이렇게 스스로 폄하한 것을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려고 하는 것이지요.
마음이라는 메카니즘을 폄하하니까 '에고의 잠꼬대'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고,
이렇게 스스로 자학개그를 해놓고 보니 '우아해야 할' 자기 정체성이 상처를 입게 되고
그것이 견디기 힘든 일이 됩니다.
그래서 훼손된 자기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해 
뭔가 영적인 차원으로 올라가려는 또 하나의 반작용을 일으키고,
그래서 '에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무거운 짐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일호
2009-02-19
13:42
저..요잔님께 질문드려도 될까요?
메카니즘의 작용(예를 들어서 분노)에 대한 반작용에 대해서인데요, 보통 사람들(참아야 한다)과 명상인(주시해야한다)의 반작용으로 말씀해주셔서 제게 좋은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궁금한 점이 있는데 그럼 붓다같은 분들, 유지나 오쇼같은 훌륭한 스승님들 반작용은 어떤 것들이 될런지요?
그 분들에게는 아예 메카니즘의 작용이 적용되지 않는 건가요?(즉, 반작용 자체가 없는 건가요?)
아니면, 보통 사람들의 반작용과 다른 반작용이 있는 건가요?

'소선재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시  (0) 2009.03.02
아쉬움 - 한영애의 문화 한페이지 폐지  (0) 2009.02.28
주시  (0) 2009.02.28
Americans in Pyongyang  (0) 2009.02.28
한심한 국민수준 - 병역거부와 국가기밀  (0) 2009.02.18
Posted by 일호 김태경
,

주시

소선재에서 2009. 2. 28. 21:35
까린바바님은 이미 돌아가신듯 하군요.
 
저도 한때는 스승님이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스승님이나 구도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데,
 
까린바바님의 글(물론 이곳 명상나라에 있는)은 제게 많은 것을 주었습니다.
 

'멈추고 나를 바라볼때, 나를 바라보는 그것은 그럼 마음이 아닌가요?' 하는 질문이 생겼습니다. 
 
문답게시판이 없어서요. 어쩌면 문답게시판이 있는게 더 이상하겠습니다만.  

이곳 상담게시판에 오면 작년 10월쯤 자살도 운명인가요? 라는 글에 달린 첫번째 답변이 떠오릅니다.
 
운명과 자유의지에 대한 아주 명쾌한 설명이었다고 기억되거든요. 
  
 
////////////////////////////////////////////////////////////////////////////////////////////////////////

♡도반 R1147 2009.02.25 00:07     
마음이 멈춘 그것이 "나"일 뿐입니다.
멈추고 나를 바라본다는 것은 고로 동어반복입니다.

마음이 그 자유를 잃고 멈추게되면 나는 자연스럽게 행복과 함께 드러나게됩니다.
그것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멈추기만 하면 됩니다.

마음을 멈춘다는 것은 물이 새들어오는 배에서 그 물을 쉬지않고 퍼내는 것같은 치열한 과정입니다.
순진한 마음으로 물 한바가지 퍼냈다고 마음을 멈췄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물이 들어오든 말든 내몰라라하고 멍~한 상태를 마음을 멈췄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면 물이 들어오자마자 퍼내버리는 어떤 시스템을 만들겠지요.
그것이 각종 명상이나 종교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은 어떤 시스템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멈추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마음을 멈춘 곳에 무엇이 있는지 상상하는 것 자체가 마음입니다.
한쪽에서 바가지로 열심히 물을 퍼내는데 다른 한쪽에서 펌푸로 물을 올리는 격입니다.
그러니 의심의 여지없이 마음을 멈추는 것에 모든 심혈을 기울일 일입니다.

얄굿게도 배에서 물이 거의 빠져나가 밑바닥이 보일때가 되어서야 
마음이 멈춘 곳에 답이 있다는 확신이 생깁니다만
멈추지 않고 물을 퍼내기위해서 처음부터 필요한 것이 확신입니다.
그래서 스승이 필요한 것입니다. 달리 스승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대신 물을 퍼주는 것이 스승이 아닙니다. 

수학이나 과학같은 것 잘하는 사람은 
답이 0으로 떨어지는 어떤 묘한 진리감각같은
스승없이 어떤 확신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과학이 스승이라 할 수도 있겠지요.

지금 현재의 마음이 비워진 마음인지 아닌지 판단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상쾌한데 이 마음이 비워진 마음이 아닐까?" - 아닙니다.
마음이 정말 비워지면 조금의 의문도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니 멈추고 나를 바라보는 그것이 마음인지 아닌지 궁금해하면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을 멈추는 것이지 마음을 쓰는 것이 아니기때문입니다.

♡질문자 2009.02.25 18:52     
질문올린 사람입니다. 첫번째 답변주신분께 먼저 감사인사부터 드리겠습니다.
전 초보자라 아직 '주시'한다는게 어떤건지 잘 몰라서 이곳 게시판에 질문을 올렸습니다.

첫번째, '주시'한다는 것이,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지금 말하고 밥먹고 움직이는 나를 '또 다른 내'가 지켜보는 그런 형태의 의식적인 노력인가요? 물론, 까린바바님은 어떤 노력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만, '주시'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몰라서요. 만약에 그렇다면, 위빠사나와 비슷하다고 얘기할 수 있는 건지요?

두번째, 화가 나서 막 화를 내고 있을때, 어떨때는 지금 내가 화를 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이런 것을 주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요?

세번째, 그리고 '주시한다'고 했을때, 과연 어떤 것을 주시하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어 주위의 계속적인 소음이 어떨때는 '인지'가 되고, 어떨때는 '인지'가 안 됩니다. 
그 소음이  '인지'가 될 때 '생각을 멈추고 그 소리를 그냥 받아들이는 것'을 주시한다고 하는 것인지(물론 생각을 잠시라도 멈춘다는것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만), '인식이 되는 소리'를 듣고 있는 나를 주시하는 것인지요?

사실, 이런 것이 질문거리가 되는지 안 되는지, 해도 되는 질문인지 아니면 쓸데없는 질문인지도 잘 모릅니다. 제가 잘 몰라서 그러니, 어떤 답변이라도 감사하게 생각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마음을 멈춘다고 했을때, 그 '마음'은 불교에서 말하는 '번뇌'와 같은 걸로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도반 R1151 2009.02.26 13:16     
첫번째, 주시는 마음과 나를 분리해내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결국 마음은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한 공부입니다.
"주시해야지~"하는 노력자체도 마음이기때문에 
마음을 부정하려는 공부를 위해 다른 마음을 키워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모든 일을 함에 냉정함을 잃지 않고 자기 마음의 흐름을 감각하려는 무의식적 습관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두번째, 그것이 주시가 맞습니다. 하지만 한 층 더 깊이 내려가야합니다.
내가 화를 내고 있다는 생각에는 어떤 모순이 있습니다. 
그것을 지켜보는 나는 화를 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화를 내는 나는 원인과 결과에 묶여 어쩔 수 없이 나타난 현상에 불과하고
그것을 지켜보는 나는 그 모든 원인과 결과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존재임을 이해하십시오.
몸이 자기라는 뿌리깊은 착각때문에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세번째, 주시의 대상은 나입니다. 몸이 나라는 착각이 있을동안은 그 몸을 주시하면 됩니다.
하지만 결국 몸만 나는 아니므로 모든 것을 주시하게 됩니다.
몸을 주시할 동안은 "내가 했어!"같은 행위의 감각을 주시하면됩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주시함에도 "나를 느껴줘!"하는 감각을 주시하면 됩니다.

모든 자극은 그것이 감각되어지는 존재가 없으면 일어날 수 조차 없습니다.
텅 빈 존재가 주인이고 자극은 나타났다 사라지는 손님입니다.
자극이 "나를 느껴줘" 할때마다 그건 내가 아니라고 부정해야합니다.
손님이 주인자리를 빼앗으려고 온갖 화려한 쑈를 하지만 그것은 모두 가짜일 뿐입니다.
모든 가짜를 주시를 통해 일소하는 것이 결국은 "멈춤"입니다.

거기엔 주인밖에 없습니다. 
나만 존재할 뿐입니다.

모든 마음은 번뇌입니다. 행복한 마음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으로 이해할 수 없고 비움으로써 이해해야합니다.

  ♡질문자 2009.02.26 13:43     
답변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많은 선사나 스승들의 가르침이 어떨때는 너무 막연하다 싶은 느낌도 있었는데, 이곳 명상나라의 글들을 보고 어렴풋이나마 뜬구름같은 말은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시'에 대해서 좋은 가르침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질문자 2009.02.26 19:09     
염치없지만 하나 더 여쭤보고 싶습니다.

책을 읽을때나, 남의 말을 들을때도 '주시'가 가능한가요? 제가 주로 해야하는 일이 남의 말을 듣고, 책을 읽고, 또 글을 써야하는 일이라서요. 제가 읽는 행위를 좋아하는데, 텍스트에 빠져있을때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고 있습니다. 이걸 '집중'이라고 한다면, 주시와 집중은 양립가능한 건가요? 마찬가지로 누군가와 대화할때도 '주시'가 가능한지 궁금합니다. 
제 생각엔 주시를 한다고 하면, 단지 화났을 때같은 때만 아니라, 눈뜨고 있을때는 언제나 주시가 이어져야 하는게 아닌가 생각됩니다만.
주시가 끝없이 이어지면, 잠들어 있을때도 주시가 되나요?
자꾸 여쭤만 봐서 송구스럽습니다. 귀한 답변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제 이곳에서부터 시작해서 어찌어찌해서 다니다 보니, 대구에서 도덕경을 강의하시는 분의 이야기를 읽게 되었는데요, 그 분의 말씀이 키란 바바님의 말씀과 매우 흡사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분은 책도 내고 하시는 분이지만, 자신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분들중에서도 참 훌륭하신 분이 많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물론, 어느 분 말씀대로 '스스로 깨달았다면서 자기를 높이는' 그런 분들도 많겠지만요.

  ♡질문자 2009.02.27 09:46     
주시의 목적이 그럼, '번뇌의 제거'에 있는게 아니란 말씀으로 이해가 됩니다. 번뇌가 일어나는대로 주시하는 건가 봅니다. 말로는 가능한데, 번뇌가 일어나면(마음이 작용을 하면) 말씀하신대로 '주시해야지~'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명상이 무엇인지 굉장히 막연했는데, 말씀해주신대로라면 은 그냥 지켜보는 것인가 봅니다.

  ♡질문자 2009.02.27 09:49     
자극이 "나를 느껴줘" 할때마다 그건 내가 아니라고 부정해야합니다. 
=> 여기서 '나'는 자극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라고 생각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도반 R1156 2009.02.27 11:11     
책을 읽을때나 남의 말을 들을때도 주시는 가능합니다.
주시는 처음에는 행위로 시작하지만 엄밀히는 행위가 아니기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처음 아이를 가지면 처음에는 다른 일을 전혀 할 수 없지만
나중에는 아이가 어떤 상태인지 항상 감지하면서도 다른 일을 척척 해나갈 수 있는 것과 유사합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주시와 집중은 양립이 가능합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내가 아닌 다른 것처럼 의식한다면 아이를 보는동안 집중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이를 돌보는 어머니는 오히려 마음이 안정되고 더욱 집중할 수 있습니다.

주시는 자나깨나 무엇을 하던간에 지속됩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런 깊은 주시는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더욱 철저히 주시하려는 욕심만 거대해짐으로써 부작용만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마음을 흐르는 대로 흐르게 하면서 
그때 그때 관찰하는 것부터 차근차근 해나가시길 바랍니다.

번뇌가 일어날때마다 "주시해야지~"하는 마음이 일어났다면 그대로 놔두십시오.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은 마음입니다. 그것은 정상적인 현상입니다.
하지만 그 주시를 통해서 뭔가 더 좋은 결과를 이루고자 욕심을 부린다면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인위적인 주시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주시가 아니라 욕심일 뿐입니다.

"나를 느껴줘"라고 표현한 것은 마음의 근원을 감지하는 방법의 하나의 예를 든 것입니다.
모든 마음의 근원은 "나"에 대한 생각입니다. 그래서 자극에 대해서 "나를 느껴줘"라고 
감정이입을 함으로써 자기자신의 마음이 그 자극을 느끼고자하는 마음을 역지사지의 원리처럼
주시할 수 있게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방법적인 것은 자신의 주시의 단계가 깊어짐에 따라 
자신의 상태에 맞게끔 자연적으로 터득하게 됩니다.
자신이 이해하기 힘들고 받아들이기 힘든 방법은 과감히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모든 방법적인 것들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주시의 원리를 터득하기 전까지는 참고사항이 될 뿐입니다.
너무 이런 가르침아닌 가르침에 연연해하지 마시고
스스로 깨우친 부분을 직접 실천해봄으로써 그 진위여부를 확인해나가보시길 바랍니다.

도움은 항상있으니 서두르지 마십시오.

  ♡질문자 2009.02.28 09:15     
고맙습니다. 많은 도움이 되고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답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곳 게시판에 처음에 글을 올리고 삭제버튼을 찾았는데 없더군요. 삭제기능이 없는 것이 오히려 더 잘 된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귀한 답변 얻을 수 있었습니다.

자상하게 말씀해주신 점 또한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도반 R1158 2009.02.28 10:09     
삭제버튼이 없어 여러번 질문하신것을 서두른 것이라 착각했군요. 미안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멈춘 마음에 가까운 상태입니다.
사실은 상당히 내공이 높으신 분 아닌가요? ^^;
님의 정진을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소선재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쉬움 - 한영애의 문화 한페이지 폐지  (0) 2009.02.28
반작용과 주시  (0) 2009.02.28
Americans in Pyongyang  (0) 2009.02.28
한심한 국민수준 - 병역거부와 국가기밀  (0) 2009.02.18
오바마의 어머니  (0) 2008.11.06
Posted by 일호 김태경
,
 
좀전에 TV에서 'Americans in Pyongyang'이라는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작년에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평양공연을 다룬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입니다. 편성표를 보니 독일에서 만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쉽게도 끝부분 10여분정도밖에 보지 못했습니다.
 
미국국가가 연주될때 관객들은 기립해있더군요. 관객들의 인터뷰도 있었는데, '소감'을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한 남자는 '어쨌거나 문화사절단으로 왔으니 환영한다'였고, 어떤 여자분은 웃음말고는 끝내 아무 대답도 안했습니다. 북한의 통역자는 'She is shy, I think'라고 말했습니다.
 
남자들은 대부분 양복에 넥타이였고, 여자들은 한복이 많았습니다. 카메라가 잡는 관객을 보면 북한 사회의 엘리트들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선입견도 작용했겠지만요. 끝곡은 '아리랑'이었습니다. 일부 관객들과 연주단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서로를 향해 손을 흔들었습니다. 보기 좋았습니다.
 
가보고 싶은 곳이 여러 곳 되는데, 평양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호기심이 병이라 그곳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싶고 어떻게 사는지 보고 싶지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국가보안법도 괜히 무섭습니다.
 
다른 생각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는 숨이 막힙니다. 북한도 그런 사회에 들겠지요.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개개인의 삶은 특별히 다를게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프로그램을 보면 드는 생각입니다.
 
현재 한국에서는 북한에 대한 정보가 너무나 차단되어 있습니다. 국가정보원에 말해주고 싶은데 '주사파'를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북한 텔레비젼을 하루종일 고대로 방송해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얼마후에는 시청률이 제로가 되면서 아무도 북한을 동경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반면 북한에 대한 증오나 선입견은 줄어들지 않을까요? 사실 국가정보원이 제일 무서워하는게 그것일지도 모르겠지만요.
 
추신. 공안당국에서는 절 수사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전 이적단체를 찬양, 고무할 의도도 없고 이적단체구성원과 접촉한 적도 없고, 잠입 탈출의도도 전혀 없습니다. 그냥 북한 한번 구경하고 싶은 생각뿐입니다. 이것도 국보법에 위반된다면 기꺼이 포기하겠습니다. 
 

'소선재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반작용과 주시  (0) 2009.02.28
주시  (0) 2009.02.28
한심한 국민수준 - 병역거부와 국가기밀  (0) 2009.02.18
오바마의 어머니  (0) 2008.11.06
교사폭력의 법적 근거 - 아직도 구타가 횡행하는 한국  (0) 2008.10.28
Posted by 일호 김태경
,


보면 볼수록 한심한 나라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08/12/24/0200000000AKR20081224092800043.HTML?did=1179r


국가기밀이라는 것이, 말 그대로 비밀, 관련된 소수만 비밀로 아는 것이니,
그렇다면 '공지의 사실', 즉 모든 사람이 아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그런데도, 포털사이트에서 누구나 다 검색히면 알 수 있는 것을 '기밀'이라고 하면,
도대체 기밀아닌 것이 무엇인가?
기가 막힐 뿐이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08/10/15/0200000000AKR20081015102400061.HTML

'소선재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시  (0) 2009.02.28
Americans in Pyongyang  (0) 2009.02.28
오바마의 어머니  (0) 2008.11.06
교사폭력의 법적 근거 - 아직도 구타가 횡행하는 한국  (0) 2008.10.28
귀양살이의 죄목  (0) 2008.10.24
Posted by 일호 김태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