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바친다라는 좀 무시무시한 말이 있다. 이 정도로 사람은 자기를 알아주는 것에 약하다. 누구나 인정받고 싶고 자기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때문이다. 이 인정받음의 대표격이 바로 '칭찬'이다.

인터넷 게시글 밑에 '추천' 구걸하는 문구들. 바로 자기를 알아달라는 것이다. 인정욕구의 표현이다. 이는 나이가 들어서도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하면 더 하다.

최근에, 황석영이 변절했네 어쩌고 하는데, 이 또한 '이명박'의 칭찬에 넘어간 결과다. 황석영 왈 '그분은 나한테 참 잘하신다' -_-;;; 김용옥도 과거 김우중의 칭찬에 넘어가 '대화'라는 책까지 써서 바친 적이 있다.

사람을 다루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런 약점을 잘 이용한다. 이명박이 대통령까지 된 재주가 이것이다. 위 아래로 사람비위를 잘 맞추는 것이다. 순진한 사람들은 아무리 박사할아버지라도 넘어가게 되어있다. 말이 좋아 순진한 거지 사실은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남의 칭찬에 홀라당 흔들리는 사람은 남의 비방에도 여지없이 흔들리기 마련이다.

붓다의 말씀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여래는 칭찬에도 흔들리지 않고 비방에도 흔들리지 않는다고. 조련사의 칭찬에 춤을 추게 된다면 그것은 조련사에게 농락당하는 것 밖에 안 되는 것이다. 자유인이라면,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어찌 그럴수 있겠는가?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지만, 제대로 사람이고자 하면 남의 칭찬에 놀아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소선재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상과 자유  (0) 2009.07.14
빨간색이 안 나오는 텔레비젼  (0) 2009.06.21
비열한 자의 비겁함  (0) 2009.06.08
김주하와 손미나  (0) 2009.06.08
이명박씨의 재능  (0) 2009.05.30
Posted by 일호 김태경
,

하도 읽을 거리가 없다 보니, 이명박의 '신화는 없다'도 봤다. 자서전이라고 하는데, 보기에 전부 대필작가의 작품이다.

보고 있으니, 이명박이라는 사람의 비열함이 곳곳에서 눈에 띄인다. '신화는 없다'라고 한 것이 열정과 노력의 소산임을 말하고 싶은 가 본데, 그것이 비열함과 잔머리에 대한 열정과 노력이라면 그 신화는 없다라는 말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닐 듯 하다.

이런 비열한 인간에게 '신의'는 헌신짝과 같다. 이런 사람의 교활함과 교언영색에 속다가는 나중에 백퍼센트 뒤통수맞는다. 아마 한 둘이 아닐것이다.

이명박의 말은 하나같이 신뢰할 수 없는데, 그것은 이런 부류의 사람에게는 옳고 그름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이해관계만이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이익앞에서는 악마와도 손을 잡을 수 있는게 이런 인간들이다. 겉다르고 속다른 이명박의 유일한 장점은 남이 듣기 싫어하는 말은 안 하는 것이다. 그 목적은 물론, 자신의 이익이다.

끼리끼리모인다고, 주위의 인간들을 봐도 다 그 모양일 것이다. 박은혜라고 엠비씨에서 기자하다가 청와대갔다지? 안 봐도 훤하다. 이런 인간들을 미리 알아보는 것이 지혜다. 이런 인간들을 겪어보고 후회하는 것이 어리석음이고 겪어보고도 모르는 것은 똥대가리들이다.

검색창에 넣어봤더니, 유신공주팬인 꼴통 예비역 지만원이 군데 군데 거짓을 밝혀놓았다. 자서전에서 어린 시절의 이야기도 뻥이고, 이명박과 이상득이 배다른 형제고, 병으로 군대 면제받은 것도 다 뻥이라는 얘기다. 이명박이 그럼 그렇다고 할 줄 알았나? 평생 거짓술수와 위선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물론, 본인은 모른다. 자기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니까.



http://kr.blog.yahoo.com/grandpapa76/MYBLOG/dist_frame.html?d=http%3A%2F%2Fkr.blog.yahoo.com%2Fgrandpapa76%2F1357%3Fm%3Dc%26amp%3Bno%3D1357&s=n

'소선재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빨간색이 안 나오는 텔레비젼  (0) 2009.06.21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0) 2009.06.10
김주하와 손미나  (0) 2009.06.08
이명박씨의 재능  (0) 2009.05.30
어느 왕따의 죽음  (0) 2009.05.30
Posted by 일호 김태경
,
책 제목 : 안녕하세요 김주하입니다. 손미나 - 태양의 여행자

요새는 정말 개나소나 책을 내는 시절이 되었다. 한글로 된 읽을거리가 귀하다 보니, 이런 사람들이 쓴 책도 읽게 된다.

이 두사람이 쓴 책의 장점이라면 딱 한가지. 대필작가의 흔적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정체가 여과없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별로 평할 건 없고,

김주하. 자기가 엄청나게 예쁘다고 알고 있다. 사실도 그러니 할 말은 없다만, 아는것도 없고 본인이 어떻게 멍청한지도 잘 모른다. 별로 답이 안 나오는데, 기자생활 그만 해야 할 듯.

손미나. 자기가 예쁘다고 알고 있다. 멋내면 다 예뻐지나? 하여튼, 자기가 똑똑하고 아주 잘난 줄 알고 있다. 여행을 하는 이유는 세상을 겪어보는 것인데, 이 잘나서 욕심많고 똑똑해서 할 말 많은 여자에게 어디 여행이 되겠나? 백날 구경만 다녀봤자 아무 짝에도 도움이 안 될 듯.

덧붙여, 김주하 손미나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그래봤자 인생 행복해지지 않는다. 꿈 깨라. 테레비좀 그만 보고 그 시간에 차라리 한비야가 쓴 책이나 한번 봐라.

'소선재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0) 2009.06.10
비열한 자의 비겁함  (0) 2009.06.08
이명박씨의 재능  (0) 2009.05.30
어느 왕따의 죽음  (0) 2009.05.30
그를 대통령으로 뽑지 말았어야 했다  (0) 2009.05.28
Posted by 일호 김태경
,
아래 글은 허지웅기자라는 사람의 글이다.

/////////////////////////////////////////////////////////////////////////////////////////
 
가난한 사람들은 왜 부자를 위해 투표하나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한 사람들이 진보정당에 투표하는 일은 언뜻 상식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 같은 상식은 상식이 아니다. 왜 그럴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난하다. 하지만 그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한다. 얼핏 분열증 같아 보이는 이 현상은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수수께끼처럼 진보진영의 논객들을 괴롭혀왔다. 논객과 진보 정치인들은 사람들이 계급적 정체성에 밝지 못하고, 눈을 뜨지 못하고, 상식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데 분노한다. 그리고 계몽하려 애쓴다. 하지만 이 계몽은 쉽게 작동하지 않는다.

경제학자들은 인간이 결국에 사사로운 이익관계를 좇아 움직일 수 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실제 대부분의 인간은 사익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한다. 이는 매우 상식적인 이야기로 들린다. 하지만 이 상식은 머릿속의 상식이다. 현실에서 우리는 자신의 주머니 사정에 따라 투표하는 사람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많은 수의 진보 운동가와 논객, 정치인들은 선택받은 가정에서 온갖 혜택을 받고 자랐다. 그러고도 분배를 논한다. 많은 수의 가난한 사람들은 그와 같은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자랐다. 그러고도 집중을 논한다. 앞서 말한 상식이 통했다면 소수의 집중되고 편향된 자본을 위해 종사하는 보수 정당은 절대 집권할 수 없다.  

그 같은 상식이 현실의 상식이라면 다음과 같은 권유는 정당하다. - 당신의 주머니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정당과 후보에게 투표하라. 당신의 주머니를 지지하라는 말은 요구라기보다 질문이며, 이는 곧 당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묻는 것이다. - 하지만 사실 이런 식의 주문은 헛되다. 왜 당신의 계급에 따라 투표하지 않느냐고 지적하고 계몽하는 일은 끔찍할 정도로 소모적이다. 궁극적으로, 이런 식의 주문은 실제 가난한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귀에다 대고 소리 질러도, 동의를 구할 수 없다. 실제 들리지 않는다! 가난한 당신이 이명박을 선택했을 때 당하게 될 온갖 종류의 불이익을 도표로 만들어 오른손에 들고, 권영길을 선택했을 때 얻게 될 온갖 종류의 혜택을 도표로 만들어 왼손에 들고 그들에게 외쳐봐라. 당장은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가난한 사람들의 대다수가 결국 이명박을 선택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도대체 왜? 

이 나라에서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70퍼센트에 달한다. 하지만 실제 한국의 중산층은 40퍼센트가 채 되지 않는다. 이 놀라운 통계의 마술은 한 가지 명징한 진실을 환기시킨다.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가상의 필터를 ‘가치관’이라고 부른다. 수많은 장르영화들이 이 같은 소재를 다뤄왔다. 사람들은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에 따라 투표하지 않는다. 바로 이 가치관에 따라 투표한다.

요컨대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를 위한 정책 정당을 지지하는 이유는, 그들이 부자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부유함이나 풍요로움 같은 부자의 가치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와 함께 수반돼 연상되는 보수적 언어를 ‘옳은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누가 혹은 어떤 정당이 서민을 대변하고 말고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사람들은 부자를 보며 박탈감을 느끼지 않는다. 성공신화에 매료될 뿐이다. 부와 이익이라는 (그들이 생각하기에) 긍정적 에너지에 박수를 보낼 뿐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적지 않은 부자들이 적당한 부패와 조작과 위장을 즐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지는 않는다. 그저 부자라면 그 정도는 저지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훌륭하게 입신에 성공한 저 부자들은 그만한 권리와 폭력을 응당 행사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다.  

이것은 단순한 존경이나 예우와 다르다. 겨우 존경심 때문에 사익과 반대되는 선택을 할 정도로 인간의 두뇌가 간단하지는 않다. 그건 우리가 여태 태어나서 자라고 배우고 번식하고 경쟁하고 버티고 버텨 살아온 이 사회가 근본적으로 보수적인 언어의 토대 위에 건설된 탓이다. 사람들은 부자 - 성공 - 상위 3퍼센트 - 대기업 - 수출 - 재벌 - 시장주의 같은 단어들에서 긍정적 에너지를 느낀다. 반대로 복지 - 중소기업 - 88만원 세대 - 분양원가공개 등에선 무언가를 박탈당하는 듯한 상실감 따위의 부정적 에너지를 느낀다. 시장주의에 반대되는 입장을 표현하는데 사용되는 단어가 고작 '반시장주의'다. 세상에, 얼마나 부정적인가. 그 내밀한 사정에 대해선 무관심하다. 사람들은 보수적인 단어와 인식의 틀 위에서 살아왔다. 보수성을 ‘궁극적으로 안전하고 탄탄한‘ 것으로 인식한다. 

간단한 예로 TV와 영화 속 가부장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짚어보자. 철옹성 같은 권위를 가진 아버지는 온갖 폭력과 부정을 저지르면서도, 결국에 가서 아들과의 화해에 이른다. 설명되지 않는 뜨거운 눈빛을 주고받으며 관계의 정상화를 이룬다. 가부장으로 대표되는 보수 이데올로기가 뜨거움과 결합하면서 ‘설명되지 않는 끈끈함’ 따위의 수사로 포장된다. 놀라운 건 대중이 이 같은 광경을 보며 감동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천하장사 마돈나>같은 예외도 있다. 그건 그 영화를 만든 자들의 진보성과 현실인식의 탁월함을 증명한다. <천하장사 마돈나>는 흥행에 실패했다. 간단하다. 사람들은 소위 진보적인 상식이나 언어들을 ‘머리로’ 인식한다. 반대로 보수적인 상식이나 언어들은 ‘가슴으로’ 인식한다. 따로 학습이나 교육이 필요하지 않다. 

그럼으로써 ‘택시기사 농담’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은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택시기사들 가운데 상당수가 보수정권을 옹호하는 현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대다수 노동직 근로자들이 그들의 가정에서 가부장적인 권위에 목말라 있으며, 경제가 어려워질수록 실추되는 가정 내 권력에 대해 큰 피해의식을 갖고 있음을 상기해보자. 간단한 이야기다. 택시기사는 바보가 아니다. 그들은 노동자라는 계급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을 결정하는 가치관과 정체성은 보수주의에 닿아있는 거다. 미국의 고속도로 트러커들 대다수가 공화당을 지지하는 것과 마찬가지 맥락이다.

그렇다면 지난 10년간 자칭 진보 정권이라고 불린 두 정부의 집권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는 보수와 진보 사이의 경쟁이었다기보다, 개혁세력의 안티 담론이 성공적으로 작동한 것에 더 가까웠다. 실제 이 두 정권의 정책은 조금도 진보적이지 않았다. 그저 과거와의 단절과 안티 담론의 연장선상 위에서 지루한 말싸움을 해온 것에 불과하다. 가끔씩 진보진영의 수사만 빌려왔는데, 이건 그저 한나라당과 자리싸움하는데 필요했기 때문이다. 특히 노무현 정권의 집권은 눈여겨볼만 하다. 그는 보수의 언어를 들고 나와 진보의 탈을 쓰고, 이를 뜨거운 개혁의 이미지로 치환하는데 성공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인식했고, 결국 대선 승리의 드라마로 이어졌다. 욕할 게 아니라 공부해야 할 일이다. 그는 진정 언어의 마술사였던 것이다.

많은 수의 진보주의자들이 노무현 정권에 속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덤을 판 건 진보진영 스스로다. 정권 내내 진보진영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사람들의 행동에 옳고 그름의 틀을 가져가 비판했다. 어떻게 부정부패 우익 세력을 지지할 수 있냐고 꾸짖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보수적 가치관 안에서 살아왔을 뿐이다. 그 위로 당위성을 겹쳐 놓으면 격렬한 반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보이지 않아서 보지 못하는 건데, 그에 대해 욕을 하고 보수반동꼴통 소리를 서슴치 않았다. 보수진영이 가지고 있는 언어는 안정적으로 보였지만, 진보진영이 가지고 있는 언어란 고작해야 ‘쟤들은 안 돼’ 정도였다. 조롱이 팔할이었다.

현실 정치에서 진보진영이 얼마나 그릇된 전략에 따라 움직이고 있느냐가 바로 여기서 드러난다. 안티 담론에 의해 움직이다간 결코 긍정적인 이미지의 틀 안으로 진입할 수 없다. 기껏해야 상대하기 피곤한 사람 취급 밖에 받을 수 없다. 그런데도 진보진영은 도덕의 황폐화를 부르짖고 세상이 당장 망할 것처럼 시일야방성대곡을 목 놓아 불렀다. 유동적인 중간층은 서슬 퍼런 진보진영의 손을 들어주기 힘들어진다. 도무지 안정적인 비전을 제시할 그룹으로 비춰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보수진영에선 진보진영의 언어를 가져다가 잘 활용했다. 이회창 후보가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 천민자본주의, 이거 안 됩니다”라고 말했을 때, 많은 진보주의자들은 이를 두고 술자리 안주삼아 실컷 비웃었다. 하지만 언어의 힘이란 무섭다. 불안정한 진보주의자보다는 안정적인 보수주의자의 개혁적 언동에 솔깃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명박 후보도 ‘청년 실업’이나 ‘비정규직 문제’ 같은 진보진영의 화두를 고스란히 가져가 자기 언어로 흡수해버렸다. 진보진영은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 속수무책이었다.

진보진영의 선동가와 계몽주의자들은 스스로 판 무덤 속에 기어들어갔다. 여기서 탈출하고 싶다면 보다 전략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대중에게 꾸준히 진실을 알리고 보수진영의 부조리를 밝힘으로써 마침내 상식이 통하게 될 것이라 낙관하는 자세는 금물이다. 그 진실은 진보진영에게만 들리는 진실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틀에 의해 판단한다. 이 틀은 그들의 세계관이고 가치관이다. 이 가치관은 주머니 사정과 별개로 작동한다. 상식을 운운하면 반감만 산다. 보수진영의 움직임에 일일이 대응하는 방식으로 무게중심을 가져가다간 결코 집권할 수 없다. 대중이 어떻게 진보의 언어에 관심을 기울일 것인지 연구해야 한다. 그런 관심 안에서 진보의 가치관과 인식의 틀이 보수의 그것 못지않은 안정적 이미지를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진보진영이 입에 문 언어들이 닮고 싶고 갖고 싶고 추구하고 싶은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여기에는 다소간의 패션화 전략도 필요하다. 진보의 언어를 개발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 한, 한국의 진보진영에 미래는 없다.


허지웅 (GQ 1월호)


Posted by 일호 김태경
,

당신과 한시대를 산 것은 제겐 축복이었습니다. 사랑했습니다. 고맙습니다.




Posted by 일호 김태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