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281965.html

내가 전에 어머니한테 말한 적 있었는데, 자기 집값 오르길 바란다.

그런데, 그게 진짜 오른게 되려면, 다른 곳의 집값이 오르지말고, 자기 집값만 올라야한다.

그리고, 그 이익이 실현되려면, 집을 팔아야 한다. 그 집에 계속 살고 있는 한 집값이 오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결국, 집값이 오르는 걸 좋아하는 인간들은 다 투기꾼이라고 보면 되겠다.

왜 아니냐?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282212.html
[김형태칼럼] 북한산에 입장료를
김형태칼럼
한겨레
» 김형태 변호사
전세계 국립공원 중에서 단위면적당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북한산국립공원이다. 연 500여만명, 제대로 집계하기도 쉽지 않단다. 공원쪽에 따르면 2007년 4월29일 오전 10시에서 11시까지 한 시간동안 도봉주능선에만 8231명이 매달렸다. 정비석은 ‘산정무한’이란 수필에서 금강산 비로봉의 아낙네 살결보다 흰 자작나무 바다며 마애태자 무덤의 쓸쓸함을 노래했지만 한가했던 옛 시절의 사치일 뿐. 이제 도봉주능선에서 보이는 건 끝없는 사람들의 행렬이다.

몇 해전 삼지연을 거쳐 백두산에 올랐다. 천지를 노랗게 물들이며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낙엽송, 침엽수들. 끝없이 이어지는 원시림과 맑은 계곡물 … 사람은 그림자도 없었다. 돌아오면서 걱정이 들었다. 통일이 되면 이런 장엄한 풍광도 끝이겠지. 그런데 요즈음 인터넷 사이트에 가보니 벌써 ‘산악인을 위한 백두산 완전종주’를 내건 관광상품들이 수두룩하다. 지난 겨울 북한산 눈속을 내려오는데 덩치 큰 청년들이 쇠이빨 많이 달린 아이젠으로 바위를 콱콱 찍으며 지나쳤다. 좀 살살 다닐 수 없을까. 도봉산 포대능선의 바위들을 자세히 보면 겨우내 아이젠에 시달려 상처투성이다. 그들은 백두대간 종주가 얼마나 멋진지를 열심히 이야기했다. 백두대간도 이제 앞날이 뻔해 보인다.

작년초 국립공원 입장료를 폐지한 뒤 산들이 몸살을 앓고 있다. 길들이 수없이 새로 생기고 오솔길은 4차선 신작로가 되었다. 2001년에서 2005년 사이 대략 연간 1800만명 안팎이던 전국 25개 국립공원 입장객 수가 최근들어 2400만명 가까이로 늘었다. 북한산은 50%가량 늘었다는 말도 있다. 국회공청회 기록등을 보면 입장료 폐지는 다분히 정치논리에 의해 결정된 것 같다. 환경부등 폐지론자들은 이런 근거를 댔다. ‘국가는 국민들의 환경권과 여가권을 보장할 의무가 있다. 인공시설이 아닌 자연환경에는 수익자 부담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폐지의 근거로 든 ‘국민을 위하여’는 말 자체로는 멋지다. 그런데 말만 멋지다. 전라도 해남 뻘속 낙지가 어디 사람에게 먹히려고 이 세상에 났다던가. 온갖 길짐승이며 날짐승, 물고기를 칼로 자르고 삶고 튀겨먹으면서 ‘최고예요’, 엄지손가락을 세우는 텔레비전 화면을 보고 있노라면 무섭다. 그리고 어디 저 포대능선 바위가 내 아이젠에 찍히고 부서져 내리려고 저 하늘 중턱에 걸려 있단겐가. 백운대며 만장봉 그리고 그 계곡을 빨갛게 물들이는 진달래 무더기는 ‘국립’, 국가나 국민이 만든 게 아니다. 우리는 그저 바위며 진달래 눈치보면서, 미안해하면서 흔적없이 다녀올 일이다.

환경에는 수익자부담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잘못되었다. 산에 오르는 ‘국민’들의 여가권을 보장해주기 위해 관리, 보전에 드는 비용을 받지 않으면 그 돈은 세금에서 나간다. 결국 산에 가지 않는 국민들도 산의 관리비용을 부담하라는 것이니 형평에 어긋난다. 산을 있는 모습 그대로 지키려면 적정수준의 입장료를 받아 입산객 숫자를 통제하는 길 밖에 없어 보인다. 요즈음은 평일에도 등산복차림의 중년남자들이 길거리에서 많이 보인다. 간간히 젊은이도 있다. 자본주의 경쟁과 효율에 밀려난 이들에게 산은 고마운 안식처요 소일거리다. 그들에게 입장료를 내라는 게 가혹하긴 하다.

그래도 그 아들·딸들도 도봉산 소롯한 오솔길에 피어오른 노랑제비꽃을 보게 하려면 입장료는 어쩔수 없다. 만경대 바위와 계곡물, 진달래와 산벚을 향해 ‘국민’의 권리를 주장하지 말라. 그런데 ‘완전종주’가 시작된 저 백두산은 또 어찌하나.

김형태 변호사

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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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society/life/281978.html

뜸 명상 등 곁들여 스스로 고치게 ‘마음 수술’
[향기 나는 사람들] 대체의술 펴는 전홍준 원장

외과의로 독일병원 갔다가 침 명상 치료에 ‘새 눈’
환자에 도움 되면 뭐든 ‘통합’…‘신념요법’ 처방도
하니Only 권복기 기자
» 통합의학 펼치는 전홍준 의사.
전홍준(61) 하나통합의원 원장은 환자의 마음까지 고치고 싶어 합니다. 병의 발생과 치료에 마음이 크게 영향을 미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마음까지 고친다는 게 어떤 것일까요. 광주시 진월동에 자리한 하나통합의원을 찾았습니다. 주변에 대규모 아파트단지나 오피스 빌딩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이 병원에는 전국 각지에서 환자들이 찾아오고 있었습니다.

국회의원 선거가 있던 9일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비가 내리는 궂은 날이지만 낮 12시가 넘은 시각에도 병원 안에는 진료를 기다리는 환자들이 10여 명이 넘었습니다. 전 원장은 “다른 지방에 사는 분들이 휴일이 아니면 올 수가 없다고 해서 하는 수 없이 오전에 병원문을 열었다”고 말했습니다.

온갖 검사에도 아무 이상 없다지만 그래도 아프다면?

전 원장은 대구에서 온 50대 여성을 배웅하면서 “오늘 배운 것 집에 돌아가서 잊지 말고 꼭 하세요”라고 당부했습니다. 그가 그 여성에게 권한 내용은 뜸과 목욕이었습니다. 두통, 불면증, 소화불량, 사지통증 등 온갖 증세에 시달리고 있지만 병원에서 온갖 검사를 해도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한다는 환자였습니다.

그는 아침 저녁으로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는 온열요법과 흉선, 간, 위 등 면역 관련 기능을 하는 7곳에 뜸을 뜨는 방법을 알려줬습니다.




1시간 가량 상담을 하면서 특별한 ‘처방’도 했습니다. ‘신념요법’이라 이름 지은 방법입니다. 일종의 마인드컨트롤이라고 볼 수 있지요. 전 원장은 이를 위해 환자가 찾아올 때마다 보여주는 글이 있습니다. 한 목사의 위장병 탈출기입니다. 죽만 먹어도 배가 아플 정도로 위장이 약했던 한 목사는 어느 날 성경을 보다가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시니 너희들은 이미 구한 것을 다 얻었음을 알고 감사하라’는 구절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위장병이 다 나았음을 믿기로 했습니다. 그날 아침 다른 가족과 똑같이 밥과 반찬을 놓고 식사를 합니다. 결과는? 배가 아파 데굴데굴 굴렀고 먹은 음식은 모두 설사로 나왔습니다. 점심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그 목사는 성경 구절을 의심하지 않고 저녁 약속이 있던 뷔페에서 5접시의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위장병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고 합니다.

전 원장은 병원을 찾아온 환자, 특히 암환자에게 그 목사가 쓴 글을 보여주며 “건강하다고 믿고, 쉰다고 누워서 지낼 것이 아니라 평소 하고 싶었던 일을 즐겁게 하면서 살라”고 강조합니다. 그 여성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시장 상인인 그 여성은 얼마 전 화재로 재산을 잃고부터 그런 증세가 시작됐다고 합니다.

“그 분에게 병원에 가서 검사해 봐도 병이 없다고 하니 그렇게 믿으시라고 했습니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이 있냐고 물었더니 남을 돕는 일이라고 해서 돌아가거든 곧바로 봉사활동을 시작하라고 거듭 당부했습니다.”

서양의학, 장점도 많지만 썩은 물에 모기 생기면 살충제 뿌리는 식

전 원장은 이처럼 주사, 약, 수술 등과는 거리가 먼 방법으로 환자의 질병 치료를 돕습니다. 그는 환자에 따라 뜸, 생식, 겨자찜질, 운동, 단식 등 다양한 요법을 권합니다. 빛명상, ‘화해와 감사의 산책’ 등으로 환자 스스로 마음을 바꾸도록 합니다.

이처럼 전 원장이 하고 있는 특별해 보이는 의료행위는 보완대체의학 또는 통합의학이라고 불립니다. 그는 이를 “병원 중심의 질병치료의학인 서양의학과 다른, 생활 중심의 전인치유의학”이라고 정의합니다.

생활습관을 고치고 마음을 바꿔 ‘완전한 몸, 마음, 생명’을 되찾으면 건강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는 것이 생활 중심의 전인치유의학이 병을 고치는 방법입니다. 그러기 위한 방법으로 그는 에이비시디이(ABCDE)를 고안했습니다. 운동(Activity), 호흡(Breathing), 의식 활동 (Consciousness), 음식(Diet), 자연 및 사회적 환경(Environment) 등 이지요.

“제가 해주는 것은 없습니다. 저는 이런 방법이 있으니 한번 해보시라고 권할 뿐이고 환자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전 원장은 서양의학이 장점이 많지만 주로 병증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병이 생기는 원인을 없애지는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비유하자면 썩은 물에서 파리와 모기가 생기면 썩은 물을 정화하는 대신 살충제만 뿌리는 격이라는 것입니다.

자신도 한 때는 한약 먹거나 쑥뜸 뜬 환자는 미신 따른다고 여겨

외과의사로서 그도 한 때 서양의학이 병을 고치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한약을 먹거나 쑥뜸을 뜬 환자는 미신을 따른다며 혼을 내곤 했습니다. 하지만 의사로 환자를 치료하면서 그가 철썩 같이 믿었던 서양의학의 한계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수술 뒤 암이 재발해 다시 입원한 환자의 임종을 지켜보는 일은 무척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1984년 독일 하이델베르크의대 방문은 의사로서 새로운 길에 눈을 뜨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농촌 의료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하이델베르크의대 방문은 그 분야에 앞선 독일의 제도를 배우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700년의 서양의학 역사를 지닌 그곳에서 암 수술 환자나 만성 질환자에게 숯치료, 물치료, 침, 단식, 명상, 사혈요법 등을 쓰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때부터 대체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지요. 86년 봄에는 일본에 침구의학을 부활시킨 이름난 외과의사 마나카 요시오 도쿄 기타사토대 교수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마나카 교수는 침구의 치료효과를 서양의학적 분석법으로 입증하고 이를 환자 치료에 적용해 유명해진 사람입니다.

“마나카 교수는 저를 앞에 놓고 오랜 시간 강의를 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말이 있습니다. 전깃불이 병증이라면 서양의학은 그 빛을 천으로 가리거나 아예 전구를 깨뜨려 버린다. 하지만 대체의학은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스위치를 찾아내 살짝 건드리는 것만으로 전깃불을 끈다는 비유였습니다. 서양의학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지요.”

전 원장은 이듬해인 1987년 마나카 교수의 소개로 “홋카이도에서 기타큐슈까지” 일본 전역을 다니며 대체의학자로 거듭난 의사들을 찾아가 대체의학을 배웠습니다.

농촌 의료를 위해 전남 나주군에 개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에 그가 1년 동안 병원 문을 닫고 일본으로 간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86년 마나카 교수를 만나고 돌아온 뒤 그가 일하던 병원에 말기 간암환자가 찾아왔습니다. 서울의 이름난 병원에서도 포기한 환자였습니다. 자신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읽고 있던 대체의학 책을 보여주며 “나도 해본 적은 없지만 한 번 해보겠냐”고 대체의학 방법 몇 가지를 해볼 것을 권했습니다. 3달 뒤 그 환자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암세포 크기가 절반으로 줄었다는 것이었습니다. 6개월 뒤 그 환자는 완치됐습니다. 비슷한 사례는 또 있었습니다.

상담과 교육이 ‘특효약’…억압된 감정 풀도록 도와

일본에서 돌아온 뒤 그는 대체의학으로 환자를 치료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한동안 ‘외도’가 불가피했습니다. 비리재단이 쫓겨난 뒤 조선대 총장이 된 이돈명 변호사의 제안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세상을 고치는 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고교 때 월남파병반대운동으로 구속됐고, 대학 때는 한일회담반대 시위로 제적됐습니다. 의대생이 된 뒤에도 민청학련 참여, 교련 반대시위 조직 등 늘 민주화 운동의 전선에 서있었습니다. 그러던 그였기에 ‘사회를 치료하자’는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가 다시 환자를 돌보게 된 것은 그로부터 2년이 훨씬 지난 뒤였습니다. 조선대가 정상화된 뒤 그는 외진 곳이라 의사들이 가기를 꺼리는 조선대 부속 광양병원 근무를 자청해 대체의학으로 환자를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환자의 마음 상태가 질병 치료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알게 됐습니다. 그를 찾아온 환자 가운데 마음에 담아둔 여러 가지 억압된 감정을 없앤 뒤 병이 쉽게 나은 이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관련 분야를 연구하고 명상 프로그램도 배워 ‘신념요법’, 빛명상, ‘화해와 감사의 산책’ 등을 환자 치료에 적용했습니다.

그는 1년 전 다른 의사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대체의학을 연구하고 환자 치료에 적용하고자 하나통합의원을 열었습니다. 처음 “보완대체의학 동아리 모임 장소”정도로 생각했지만 소문을 듣고 찾아온 환자들이 늘면서 바빠졌습니다. 그럼에도 병원 운영은 여유롭지가 않습니다. 그의 의술은 주로 상담과 교육이어서 수익성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전 원장은 병원 운영에 대해서는 “하늘에 다 맡기고 산다”고 했습니다.

“부족한 사람인데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분들이 많아 걱정입니다.” 환자 앞에서 늘 겸손하고 “환자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어떤 것도 거부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가진 그를 믿고 전국 각지에서 많은 환자들이 오늘도 그를 찾고 있습니다. (062)225-9626.

광주/글·사진 권복기 기자 bokkie@hani.co.kr

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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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도서관에 갔다. 혹시 못본 한국영화가 들어왔나 싶어 봤더니, ‘토요상설국악공연이라는 동영상CD가 있었다. 그렇다. 국립국악원의 그 공연이었다.


1994
년에 나는 말년병장이었다. 감옥과 같은 군대생활이니, 읽을 거리도 없었다. 샘터지, 국방일보, 육군지 아니면 전투교범같은 것들. 그것들이라도 아쉬운 마음에 꼼꼼히 봤는데, 육군지에 장병들의 교양을 증진시킬 목적으로 국악에 대한 기사가 났다. 국립국악원의 학예사가 기고한 글이었다. 그 기사로 최소한 한 사병의 교양과 상식은 증진이 되었다. 나는 그 연재가 끝나기 전에 제대를 했고, 민간인이 된 나는 국립국악원으로 편지를 보냈다. 마저 교양과 상식이 증대되고 싶다고.

 

친절한 학예사는 답장과 함께, ‘토요상설공연에 대한 안내까지 보내줬다. 제대후 어디 갈데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던 나는 사당역에서 버스를 내려서 국립국악원까지 걸어갔다. 남부순환도로는 차들의 도로였다. 늦가을 토요일 저녁. 인적없는, 차만이 가득한 길을 걸어가 나는 공연을 봤다. 청중은 대부분, 중고생들. 숙제인지 그들은 학교에 낼 티켓이 필요했다. 나는 티켓을 제출해야할 의무가 없었으므로 그들에게 선선히 내어주었다.

 

공연은 때로 지루했지만, -국악이 대개, 정악은 더 그렇지만- 아주 만족스러웠다. 특히나 대금과 해금의 소리는 가슴깊이 저며왔다. 가난하고 쓸쓸한 청춘에게 훌륭한 친구가 되어주었다. 어느새 10년도 훨씬 전의 일이나, 지금도 선명한 기억은 사물놀이 앉은반의 공연이었다. 서서하는 건 선반이고 앉아서 하는 건 앉은 반이다. 학교운동장에서 학생들이 어설프게 두들기던 꽹과리 장구 북이 아니었다. 10여분 남짓한 시간은 폭풍과도 같았다. 원시적인 타악기로 사람을 몰아가더니, 나중에는 온 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듯 하고, 심장이 쿵쾅쿵쾅 밖으로 튀어 나올 것만 같았다. 끝나고 나오는데 관중석에는 배낭여행객으로 보이는 금발머리의 푸른 눈들이 많았다.

 

한동안 다닌 기억은 나는데, 어쩌다 멀어지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입장료가 올라서였는지, 아니면 학교다니느라, 아니면 그 차들 가득한 남부순환도로를 걷기 싫었는지, 아니면 혼자 가서 혼자 앉아서 혼자 구경하고 혼자 돌아오는 것이 싫었는지. 만나면 헤어지는 법이니까.

 

그러다가, ‘토요상설국악공연을 오늘 도서관에서 만난 것이다. 씨디롬은 모두 4종류였다. 민요와 사물놀이, 그리고 해금 연주가 들어있는 것을 골랐다.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않다. 국악은 어떤 녹음과 재생장치로도 현장을 되살려주지 않는다. 그것은 국악자체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국악은 그 곳에 모인 사람들끼리 연주자와 청중이 같이 연주하고 같이 듣는 음악이다. 악기가 그러하며 노래 또한 그러하다. 그러니, 아무리 기술이 발전한다고 해도 그 녹음과 재생이 완벽할 수는 없다. 아쉽게도 사물놀이는 더욱 실망스러웠다. 반가움 컸기에 더 실망스러웠던 것일까? 하지만, 오랜만에 동창을 만난 것처럼, ‘토요상설공연은 나를 그때의 그곳으로 보내주었다. 공연이 끝나고 보니, 이곳은 그때의 거기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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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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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없는 이 곳, 사방이 지평선이다. 도심을 빼면, 5층건물도 드물다. 이곳 12층에 서면 비행기의 이착륙이 손에 잡힌다. 공항은 도심과 가깝다. 소음. 때문에 비행기는 그 길을 자주 바꾼다. 나누면 줄어드는 법이다.

 

오늘은 비행기가 북쪽에서 온다. 새벽에 내린 비가 개고, 구름은 하늘 뒤로 물러간다. 푸른 하늘, 부시다 못해 시린 하늘이 도시로 다가오고, 비행기는 그 하늘을 난다.

 

오른쪽 하늘 멀리 작은 점이 점점 커진다. 날개가 보이고, 동체와 꼬리날개가 드러난다. 그 덩치가 커지는가 싶더니, 바퀴도 내려와 있다. 햇빛을 받은 색깔은 은빛회색이다. 고요히 비행기는 고도를 낮춘다. 지난 밤의 고단한 비행을 마치고 이제 대지의 품으로 내려간다. 밤하늘과 별빛은 푸른 하늘과 구름이 되었다.

 

비행기는 교회첨탐과 공장의 굴뚝을 지나, 점점 더 커져간다. 커져가는 만큼 느려진다. 그리고는 마친내 가만히 땅에 안긴다. 살포시 내려앉은 비행기는 이제 시야에서 멀어져간다. 공항의 건물들 사이로 멀이 작아지는 수직꼬리날개만이 이제 비행기가 내렸음을, 간 밤의 비행의 끝났음을 말해준다.

 

나는 생각한다. 저 비행기에는 누가 타고 있을까? 비행기에서 내려 이 낯선나라에 들어오는 그들에게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외로움을 두고 내릴 수 있다면 그들의 비행은 좀 더 수월했을텐데. 하지만 우리의 숙명은 그럴 수 없나니, 언젠가 다시 돌아간다 해도 외로움을 두고 떠날 수는 없다. 비행기는 외로움을 내려주지 않기에. 오직 외로운 자만이 비행기를 탈 수 있기에.

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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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라면을 많이 먹는다. 하루 걸러 하나씩. 배가 고파서다. 도시락으로 충분치 않을 때면 가방속의 라면을 먹는다. 물론, 사먹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돈이 든다. 꽤나 비싸다. 이 곳의 음식은 결코 충분하지 않다. 나같은 대식가는 3인분이 필요할 것이다. 게다가 음식이라야 빵 맥도널드 또는 샌드위치같은-,  파스타. 가격도 비싸고 자주 먹을 만한 음식이 아니다. 물론 밥도 있다. 볶음밥, 스시롤로 불리는 김밥도 있다. 하지만 역시 비싸다. 양은 말할 수 없이 적다.

 

희한한 건, 내가 먹고 싶은 것이 비싸게 느껴질 때, 나는 돈이 더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안 든다는 것이다. 내가 돈이 많아서 이것 저것 다 사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음식값이 싸서 내가 사먹을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자기중심적인가? 내가 이 세상의 기준이라는? 아니다. 나는 안다. 여건과 환경을 내게 맞출 수는 없다. 그래서 나의 선택은 라면이 된다. 고량진미를 위한 돈보다다는 차리리 라면을 택하는 것이다. 가방속의 봉지라면. 스프를 뿌려 우드득 씹어먹는 생라면.

 

배가 고파 라면을 먹는 이들에게 축복이 있을지니. 굶주린 위장과 텅 빈 지갑은 가난한 마음의 표상이므로.

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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