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내가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나와 아내는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

나는 여전히 스트레스를 받으며 직장생활을 했을 것이고,

아내 역시 결혼 전 다녔던 회사에 계속 다녔을 것이다.

그리고, 아내와 나는 아마 아파트에서 부모님과는 따로 떨어져 살았을 것이다.

나는 아마 차를 샀겠지?

아버지는, 내가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도 돌아가셨을 것이다.

등산은 계속 다녔을 것이다.

지리산도 가고 금강산도 가고 아마 백두산은 못 갔을 것이다.

한국은 휴가내기가 어렵고, 그 휴가도 며칠 되지도 않는다.

아마 한번쯤을 해외여행을 했을 수도 있겠다.

중국? 아니면, 일본에 짧게.

만약에, 한국에 있었다면 나는 행복했을까?

글쎄, 아마 그러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는 행복한가?

글쎄.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행복은 어디에 있느냐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 것.

알고는 있지만, 하기는 어려운 것.

그것이 삶이고, 그것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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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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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에 정치성향테스트를 한번 해봤다. 질문중의 하나가 유난히 기억에 남았다.

질문은 "이민자들은 새로운 사회에 동화될 수 없다"였다.

나는 이 질문에 '동의'한다고 했다. 이 질문에 대한 정답(그러니까, 진보로서)은 아무래도 '아니다'가 아닐까 싶다. 내가 만약 20대에 이곳에 와서 20대에 이 질문을 접했다면, 아마 '아니다'라고 했을지 모른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보수화되는 것일까?

집으로 오는 길의 전철은 대개 만원이다. 이곳 생활 3년이 넘어서, 나는 사람들의 옷차림만으로 대개 그들의 출신지역을 짐작한다. 이곳 토박이들, 중국, 한국 출신, 또는 중동지방, 인도. 그들은 모두 외모이전에 옷차림부터 차이가 난다.

이곳 토박이들의 옷차림은 대개 호주다운 분위기가 난다. 넥타이에 셔츠도 아주 formal 하다기보다는 좀 날라가는 분위기가 나고, 거기다 낡은 배낭이 어깨에 걸려있다. 젊은 친구들은 대개 낡은 티셔츠 낡은 바지, 그것도 엉덩이가 드러나는 힙합스타일의 반바지에, 내가 제일 싫어하는 쪼리. 여자들은 아주 시원한 상의에 브래지어끈은 언제나 드러나있고, 짧은 치마 바지에 역시 쪼리.

그들이 이민올때 가지고 온 옷들을 입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곳에서 옷을 사입어도 그들이 입던 스타일의 옷을 고수해서일까? 그들의 식성처럼, 그들의 옷차림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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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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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와 '진보'로 나눴을때 가장 큰 대척점은 무엇일까? 나는 욕심이라고 본다. 좀더 사욕이 없는 사람과 좀더 사욕이 큰 사람. 이렇게 진보와 보수는 갈린다고 본다. 좀 더 욕심이 많은 사람은 좀 더 어리석고, 욕심이 덜한 사람은 좀 덜 어리석다. '붓다'와 '예수'모두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가진 것이 없어서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들이었다.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고, 예전에 없던 욕심들이 생겨난다. 더불어 두려움도 커간다. 답은 붓다의 가르침에 있으나, 나는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기엔 너무 어리석고 너무 게으르고 너무 비겁하다. 욕심이 커가는 이유이다.

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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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김규항의 블로그에 들어가 봤다. 그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다. B급좌파인 그는 크리스챤이다. 물론, 그의 예수는 한국의 대다수 기독교인들의 예수와  다르다.
박노자는 부디스트이다. 박노자가 따르는 붓다 역시 대다수 한국의 불자 - 경상도에 사는 중년이후의 여성으로 대표되는-들이 '믿는' 부처님과는 다르다.
붓다와 예수는 이처럼 어리석은 보수주의자들의 '왕초'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불온한 사회주의자들의 '왕초'이기도 하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충 김규항와 박노자를 동일지점에 놓인 사람이라 봤을때, 어째서 그들은 각기 예수와 붓다를 따르게 되었을까? 김규항이 예수에게서 본 것을 나는, 그리고 박노자도 그러리라 보는데, 붓다에게서 본다. 그렇다면 김규항은 붓다의 제자가 될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나 역시 김규항의 '예수'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공감하나, 그렇다고 내가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좀 부족하다.

설명이 안 되는 뭔가가 있다고 본다. 그것이 '전생의 인연'인지 아니면 또는 그 무엇이던지.
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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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말이다. 이런 정도의 사고를 하는 사람 드물다. 사람들은 알까? 노무현의 생각은 이런 것이라는 것을.


역사는 진보한다. 이것이 나의 신념이다.

반복하는 역사가 있고 진보하는 역사가 있다. 대립과 갈등, 패권의 추구, 지배와 저항, 이런 역사는 반복되어 왔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되돌아가지 않는 역사가 있다. 왕과 귀족들이 누리던 권력과 풍요와 여유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확산되어 왔다. 말하자면 인간의 존엄, 자유와 평등의 권리가 꾸준히 확산되어 왔다. 나는 이것을 역사의 진보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 진보는 계속될 것이다.

역사의 진보는 민주주의, 민주적 시장경제, 개방과 협력, 평화와 공존의 질서로 발전해 왔고 발전해 갈 것이다. 좀 더 간단한 말로 표현하자면, 세계 인류가 함께 행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가야하고 또 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민주주의

한국의 민주주의는 진보를 계속하고 있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민주주의 헌법을 채택한 이후, 60년 4.19혁명, 79년 부마항쟁, 80년 광주민주화운동, 87년 6월항쟁이라는 반독재 투쟁을 거치면서 민주주의의 핵심요소인 국민에 의한 정부 선택의 권리를 확보하였다. 87년 국민의 손으로 대통령을 직접 뽑는 직선제 헌법을 쟁취함으로써 독재에 의해 정지되어 있던 민주주의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93년 문민정부 출범을 통해 군사정권을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시켰고, 98년에는 여야간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면서 우리 국민 스스로 민주주의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민주주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오랜 독재체제 아래서 형성된 특권의식과 권위주의 문화의 청산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었다.

변화는 2002년말 치러진 대통령 선거로부터 시작되었다.

인터넷을 통한 사이버 선거운동과 시민들의 자발적인 성금 모금이 새롭게 도입되면서 수천억원씩 들어가던 선거자금이 수백억원 단위로 줄어들었고, 그마저도 대통령 스스로 대선자금 수사를 받는 결단을 통해 선거문화가 획기적으로 바뀌는 계기를 만들었다.

선거뿐만 아니라 우리 정치 전반에 걸쳐서도 자유롭고 투명하고 공정한 경쟁체제가 구축되고 있다.

대통령에게 집중되어 있던 권력이 국회와 지방정부, 시민단체, 그리고 시장에 분산됐고, 정경유착이나 권언유착과 같이 힘센 기득권끼리 뒷거래를 하며 이익을 챙기는 유착구조도 해체되었다. 정보 통제와 공포 분위기 조성으로 국민 위에 군림하던 권력기관도 법과 국민의 통제를 받는 민주적인 기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만큼 권력은 합리화됐고 사회 투명성은 크게 높아졌다.

이제 한국의 민주주의 과제는 ‘대화와 타협의 정치문화’를 뿌리내리는 것이다.

한국 정치에는 독재와의 오랜 투쟁 과정에서 비롯된 대결적 정치문화가 남아 있다. 이에 따라 정당간 정치적 타협이 잘 안되고 갈등과 대립이 심해 국가적 의사결정 과정이 더디고 국민통합이 저해되고 있다. 정책이 아니라 지역으로 나뉘어 대립하는 지역구도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대화와 타협의 정치문화는 반드시 필요하다.

우선, 정당한 가치와 이해관계를 기초로 합리적이고 균형을 갖춘 정치구도가 형성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토대 위에서 정책을 중심으로 토론하고 타협하고 결과에 승복하는 문화가 만들어져야 한다.

국민들의 정치의식도 한 단계 더 높아져야 한다. 개개인 또는 집단적으로 추구하는 가치와 이해관계가 각 정당이 추진하는 정책, 노선과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지를 파악하고, 이를 성취하고 반영하기 위해 정당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언론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정보의 균형잡힌 소통과 책임있는 의제선정을 통해 합리적인 토론이 가능한 공론의 장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정부는 언론의 건전한 비판에 대해서는 정책으로 적극 수용하고, 부정확한 내용은 바로잡을 것을 요구하면서 건강한 견제와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아울러 행정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해서 국민의 알권리 충족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민주적 시장경제

한국은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적 도약을 이뤄냈다. 그러나 정부 주도로 이루어진 성장과정에서 관치경제와 정경유착이라는 부작용을 낳았고, 결국 97년말 외환위기를 불러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제 권력이 시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다시 말해 시장의 자유는 확보됐다. 그런데 시장에서 경쟁하다보면 강자가 생기게 마련이고, 이 강자가 게임의 규칙을 지배하게 되면 시장의 자유는 강자의 자유가 되고 시장의 권력은 강자의 권력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과정을 통해 독점이 생기면 시장의 효율성이 떨어지고, 경제적 약자나 경쟁의 낙오자를 소외시키는 시장이 된다. 결국 시장의 민주주의가 파괴되는 것이다.

사람을 위한 시장이 되어야 한다. 시장도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공동체를 파괴하는 시장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복지와 행복을 위한 시장이 되어야 한다. 그런 뜻에서 지금도 나는 방명록에 서명할 때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문구를 즐겨 쓴다.

시장의 실패와 한계를 보완해 나가는 것은 국가의 기본적인 책무이다. 시장의 창의성을 억제하는 정부의 개입은 최소화되어야 하지만, 시장의 규칙을 정하고 공정하게 관리해 나가는 것, 그리고 경쟁에서 낙오하는 사람에게 최소한의 생존권을 보장하고 재도전의 기회를 부여해서 사회전체의 생산력을 높이는 것은 국가가 해야 할 일이다. 축구경기에 비유하면 경기규칙을 정하고 운동장을 다듬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 정부의 역할은 더욱 확대되어야 한다. 한국의 재정규모는 GDP 대비 28% 수준으로 영국 44%, 독일 47%, 프랑스 54%에 비해 턱없이 작은 규모이고, 게다가 재정에서 복지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이들 나라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국민의 안정된 삶을 보장하는 사회안전망 구축과 미래에 대한 기회 보장, 공정한 시장 관리 등을 통해 진정한 의미에서의 민주적 시장경제를 실현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개방과 협력

세계의 문명 발달사를 보면, 개방과 교류를 활발히 한 국가는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했지만, 문을 닫은 나라가 성공한 경우는 없다.

한국도 지난 반세기 동안 개방을 통해 세계와 함께 호흡함으로써 세계 10위권의 경제로 올라설 수 있었다. 개방 때마다 많은 반대와 우려가 있었지만, 우리 국민은 그때마다 도전을 새로운 기회로 만들어냈다.

그러나 한편으로 개방을 거부하는 폐쇄주의의 흐름도 있었다. 19세기말 서양문물을 배척하고 통상에 반대하는 위정척사론이 폐쇄적 시대를 끌어오다 급기야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는 한 원인이 되었다.

세계 역사를 봐도 단일의 사상체계를 가지고 모든 것을 해석하고 다른 제도나 문화에 대해서 배타적인 입장을 취했던 교조주의는 성공하지 못했고, 결국 인간사회에 큰 불행을 안겨주었다.

한국이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와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하고, 외국자본이나 외국인 근로자 등에 대해서도 보다 개방적인 사고를 가져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개방의 대세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한국의 미래가 달려있다.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해서 우리 경제의 성장잠재력과 경쟁력을 한층 높이는 계기로 삼아나가고자 한다.

평화와 공존

나는 모든 도덕률과 종교적 가르침은 공존의 지혜로 귀결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류 역사는 이상만으로 인간의 행복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20세기 들어서도 전쟁과 혁명, 이념갈등 등 극단적 대결의 과정을 겪어왔다.

냉전질서가 해체되었을 때, 세계 질서가 또 다른 대립과 투쟁의 시대로 갈 것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고, 평화와 공존의 시대로 간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단연 후자 쪽이었다. 지금도 그러한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EU에서 찾는다. 유럽은 이제 전쟁과 대결의 역사를 마감하고 평화와 번영의 공동체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여기에는 아데나워를 비롯한 유럽지도자들의 창조적 상상력과 시민들의 성숙한 정치의식이 있었다. 특히 부끄러운 과거를 반성할 줄 아는 독일국민의 양심과 용기,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실천이 동력이 되었다.

한국이 위치하고 있는 동북아의 질서도 EU와 같은 방향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지금 동북아시아의 질서는 유럽이나 심지어 동아시아의 그것과도 크게 다르다. 제국주의와 냉전에서 비롯된 역사적, 이념적 앙금이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있고, 지역차원의 패권경쟁과 세계적 차원의 세력경쟁이라는 잠재적 대결구도가 중첩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이 가야할 길은 두 가지다. 그 하나는 우리 스스로의 힘을 키우고 균형외교를 펼쳐 이 질서 속에서 안정을 도모해가는 것이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한국이 힘이 없고 균형을 잡지 못했을 때 한반도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고 동북아의 평화는 깨어졌다.

다른 하나는 동북아 질서 자체를 통합의 질서로 바꿔나가는 것이다. 이 지역에 상호존중과 협력의 분위기를 확산하는 것은 물론, 대결구도를 근본적으로 해소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누구에게 해를 끼친 일이 없고, 분단과 전쟁을 겪으면서 평화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는 한국은 이러한 질서를 만들어나갈 자격과 역량이 있다고 생각한다.

동북아에 평화와 공존의 질서가 만들어지면 동북아는 세계 평화에 위험요인이 되지 않고, 오히려 세계 질서의 안정에 적극적으로 기여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나는 한국과 동북아의 미래 뿐 아니라 세계가 직면한 여러 과제에 대해서도 오래 전부터 많은 관심을 가져왔다.

기아와 질병, 빈곤, 전쟁의 공포, 자원의 고갈, 환경 파괴, 정보격차와 같은 도전들을 극복해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만들어가야 한다. 인류가 함께 연대하고 협력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일 것이다. 한국도 이러한 길에 적극 동참해 나갈 것이다.

그것이 역사의 진보를 이루는 책임 있는 자세라고 믿는다.
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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