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선재에서'에 해당되는 글 169건

  1. 2008.03.27 결국은 '욕심'이다
  2. 2008.03.25 좌익분자 달라이 라마
  3. 2008.03.22 한창기와 샘이깊은 물
  4. 2008.03.22 노무현의 한길 사람 속
  5. 2008.02.22 5년의 세월
  6. 2008.02.07 [펌]한의학은 과학적인가?
  7. 2008.01.30 검소에 대하여-도덕경을 보고
  8. 2008.01.29 상관형 인간
  9. 2008.01.27 나의 문제
  10. 2008.01.27 명리학 강의

'보수'와 '진보'로 나눴을때 가장 큰 대척점은 무엇일까? 나는 욕심이라고 본다. 좀더 사욕이 없는 사람과 좀더 사욕이 큰 사람. 이렇게 진보와 보수는 갈린다고 본다. 좀 더 욕심이 많은 사람은 좀 더 어리석고, 욕심이 덜한 사람은 좀 덜 어리석다. '붓다'와 '예수'모두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가진 것이 없어서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들이었다.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고, 예전에 없던 욕심들이 생겨난다. 더불어 두려움도 커간다. 답은 붓다의 가르침에 있으나, 나는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기엔 너무 어리석고 너무 게으르고 너무 비겁하다. 욕심이 커가는 이유이다.

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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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테스트결과다. 유명인사중 나와 가장 비슷한 위치에 있는 사람은 달라이라마다. 불자라면, 그러니까 제대로 된 붓다의 제자라면 좌파가 될 수 밖에 없다는 평소 나의 지론이 증명된 셈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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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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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이 깊은 물 표지(2001년 10월호).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2001년 11월호가 마지막이다.


대학교다닐때 도서관에서 놀았다. 난 돈이 없었고 학교도서관은 무료였다. 도서관에서 나는 이것 저것 읽으면서 놀았는데, 책도 읽었고 신문도 읽었고 시집도 읽었고 그리고 잡지도 읽었다. 학교도서관 정기간행물열람실에는 '월간 사진'같은 잡지도 있었고 - 예술적인 누드 사진은 항상 누군가에 의해 찢겨져 있었다 - '건축'같은 잡지도 있었고, 그리고 '샘이 깊은 물'도 있었다.

샘이 깊은 물의 표지사진은 언제나 흑백의 젊은 여성사진이었다. 표지 안쪽에는 '어디에 사는 누구씨'라고 표지사진의 인물에 대한 설명이 있었는데, 언제나 일반인이 그 모델이었다. 그 몇 페이지 뒤에는 의례히 '강운구'의 사진이 있었는데, 나는 그의 사진이 좋았다. 일테면 강원도 산골의 '너와집' 사진. 고추를 말리는 사진. 시골 할머니의 사진. 그 모두가 좋았다. 강운구의 사진은 별 얘기가 없는 듯하면서도 은근히 얘기가 많은 그런 사진이었다. 부담스럽지 않으면서 묵직한, 그리고 조금 떨어져있으면서도 친근한 그런 사진이었다.

나는 샘이 깊은 물의 기사도 좋았다. 그때 그러니까, 90년대 초반이었는데 '이주향교수'의 칼럼도 종종 실렸다. 나는 한번은 이주향교수에게 반론비슷한 편지를 보낸 적도 있다. 나중에 이주향교수는 샘이 깊은 물에 실린 자신의 글을 책으로 펴냈는데, 잡지의 글과 달랐던 기억이 있다. 내심 나의 편지가 효과가 있었나 보다는 추측을 해보았다.

이제 오래전 일이라 어떤 기사들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뒷 편에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의 구술을 그대로 활자화한 '못다한 이야기'인지 '가슴에 담은 이야기'인지 그런 기사가 있었다. 사투리를 그대로 활자화한 탓에 읽는데 시간이 꽤나 걸리는 그런 글이었다. 그리고, 잡지 맨 뒤에는 내가 제일 좋아했던 '논평'이 있었다. 어디에서도 그 어느곳에서도 들을 수 없는 반가운 소리를 접할 수 있던 곳이었다. 예를 들자면 그때 그 시절에 벌써 샘이 깊은 물은 '붉은 악마의 전체주의 파쇼적 위험성'에 대한 얘기를 하곤 했던 것이다.

샘이 깊은 물 잡지의 제호는 '샘물체'라는 폰트의 효시이기도 하다. 내 동생이 샘이 깊은 물에 그 폰트에 대한 문의를 했던 것 같은 기억도 있다. 아래아한글의 가는 안상수체를 보고서는 '샘물체'의 모방이라고 느끼기도 했다. 종성받침이 아래로 내려와서 붙는 샘물체는 단아한 느낌으로 그 잡지의 이미지와도 정확히 일치했다.

샘이 깊은 물은 '한창기'라는 사람이 만든 잡지였다. 그 한창기라는 사람은 고향이 벌교 도읍이라고 한다. 그 잡지는 97년에 폐간되었다. 한창기라는 사람이 이 세상을 뜬 것도 97년도다. 그 잡지를 펼치면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그 잡지는 차분히 담담하게 화려하지는 않지만 세련되게 내게 세상을 구경시켜주었다. 내 20대의 한 시절, 샘이 깊은 물이 있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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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을 기리는 형식이 잡지라는 건 참 드문 일이다. 잡지같이 만든 책 『특집! 한창기』(강운구와 쉰여덟 사람 지음, 창비 펴냄)를 펼쳐 읽어 가노라면 “아하!” 느낌표가 절로 찍힌다. 언론-출판인이란 한마디로는 도저히 짚어낼 수 없는 한창기(1937~97)를 표현하는 데 잡지야말로 맞춤한 매체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복잡 미묘한 고인의 삶, ‘한국적 잡지의 한 완성’을 이룬 망자를 추모하는 데 잡지는 제구실을 톡톡히 한다. ‘뿌리 깊고’ ‘샘이 깊은’ 한국 잡지의 원조(본지 2007년 3월 18일자) 한창기 10주기를 맞아 나온 『특집! 한창기』는 그를 잊지 못하는 59명이 완성시킨 한창기의 전기라 할 수 있다. 좌담과 그림엽서, 사진과 회고 등 다양한 글을 묶은 472쪽 두툼한 책은 제법 잡지 냄새를 피운다.

편집자로서 책머리에 글을 쓴 설호정(전 ‘샘이깊은물’ 편집주간)씨는 “이 책은 한창기에 대한 쉰아홉 명의 낡은 기억의 편린으로 짜 맞추어진 퍼즐 같은 것”이라며 “완성된 퍼즐은 흥미로운 집체 창작물 같다. 한창기의 사진이 아니라 한창기의 그림을 본다고 생각하기 바란다”고 썼다.

설씨는 또 “원래 의도대로 10주기 기념 출간을 하지 않고 11주기에 책을 내게 되었다. 진부한 것을 못 견뎌 하기로는 세상에 둘도 없이 유난했던 한창기를 기리는 책인 만큼,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이 ‘참신한’ 결과에 우리도 만족한다”고 했다.

잡지가 그렇듯이 어느 쪽을 펼쳐 어디서부터 읽어 나가기 시작해도 괜찮다. 한창기에게 강한 인상을 받고 잊을 수 없는 연을 맺은 글쓴이 모두가 고인의 향기를 진하게 풍기는 덕이다. 이를테면 사진가 강운구(전 ‘샘이깊은물’ 사진편집위원)씨가 쓴 ‘한창기 사진’의 한 대목이 그렇다. 고인의 말년을 되짚는 한마디 한마디가 묵직한 울림을 준다.

“한 선생은 전체보다는 세부에 아주 민감했다. 말하자면 숲보다는 잎, 또 그보다는 잎의 맥과 숨구멍이나 솜털 같은 것까지 늘 주목하고 판단했다. 판단의 결론은 그것을 스스로가 좋아하느냐 아니냐인 수가 많았다. (…) 그런 한 선생은 말하자면 좀스러운 구석이 많은 좀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호연지기가 이 나라 다 망친다’고 개탄하던 위대한 좀팽이였다. (…) 그러나 건강검진은 회피했다. 장사 지내는 날, 지곡 마을 선산자락의 한 선생이 묻히는 밭은 자리와 주변, 먼 앞산의 높고 가파르며 날카로운 능선을 둘러보던 윤구병(‘뿌리깊은나무’ 초대 편집장)이 풍수공부도 했는지, 혼잣소리인 듯이 중얼거렸다. ‘한 사장 성질 그대로다, 성질 그대로다’라고. 그렇다면 그야말로 잘 어울리는 명당이겠다.”

박정희(1917~79) 전 대통령과 한창기(1936~97) 두 사람을 대비해 가며 글을 쓴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의 분석은 예리하다. ‘박정희식’에 맞선 ‘한창기식’ 혁명에 대한 강 교수의 논지는 이렇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인가? 박정희도 이런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는 걸 알았을까? 그는 그것마저 해결해 주겠다고 나섰다. 언제부턴가 ‘민족 주체성’을 역설하기 시작했다. 이순신과 세종대왕 찬양을 국책사업으로 추진하더니, 방송마저 ‘민족 주체성’으로 흘러 넘치게 하겠다고 결심했다. (…) 위에서부터 아래로 군사작전식으로 추진된 ‘우리 것 사랑하기’는 실은 ‘우리 것’에 대한 모독이었다.

시대정신은 ‘우리 것’ 다시 보기를 요구하고 있었지만, 박정희의 방식으로 그건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박정희식 히스테리만이 계속되었더라면 ‘우리 것’은 오히려 경멸의 대상이 되었으리라. 한창기의 ‘뿌리깊은나무’가 출현한 건 바로 이런 상황이었다. 그건 박정희식 ‘우리 것 모독’에 대한 소리 없는 저항이었다. (…)

‘뿌리깊은나무’는 딱 한 번 합병호를 낸 적이 있는데, 그건 1980년 6·7월호였다. 신군부의 광주 학살에 대한 항의 표시로 휴간한 결과다. 그리고 8월호가 나왔다. 그러나 그게 마지막이었다. 신군부에 의해 강제 폐간된 것이다.”

강운구씨가 ‘위대한 좀팽이’라 했던 고인의 괴팍한 일상을 엿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연상(이연상세무사무소 대표)씨가 회고하는 한창기씨는 콩트 캐릭터를 연상시킨다.

“그는 순경만 와도 긴장할 만큼 겁이 많았지만 목표한 바를 이루는 데에는 비상한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욕심도 많았다. 자신의 물건에 대한 애착이 커서, 앰배서더 호텔에서 자신의 손톱깎이가 변기에 빠지자, 오물 탱크를 뒤져서 그것을 찾아냈다는 말도 직접 들었다. 한국브리태니커회사를 창립하던 해에, 외제 책상을 샀는데 그것이 퍽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가 1985년에 퇴임을 한 뒤, 내가 그 책상을 이어서 썼고, 브리태니커를 나올 때 후임 여사장이 원하지 않기에 갖고 나와 지금도 쓰고 있는데, 어떤 자리에서 그 사실을 알고 나서는 나중에 한창기 박물관을 만들려고 하니 그 책상을 자신에게 줄 수 없겠느냐고 몇 번이나 말했다. 아마 그가 지금껏 살아 있다면, 여전히 그 책상을 탐냈을 것이다.”

시시콜콜한 일상에서 건져 올린 추억도 한창기를 두루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다. 자잘한 조각보를 맞춰 한 인간을 톺아보는 기쁨이 있다.
“앵보는 한창기 선생의 자작 호이다. 그는 아이 적에 늘 ‘앵앵’ 우는 아이로 동네에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잡지에 글을 쓸 적에는 ‘한앵보’라는 필명을 쓰곤 했다.”(이명현 서울대 명예교수)

“나는 일 년에 나흘, 네 분 스승의 기일에 단식한다. 그 네 분은 함석헌 선생과 공병우 박사, 라즈니시, 한창기 사장이다.”(송현 한글문화원장)

“‘절 짓는 일에는 왜 그렇게 마음을 쓰셨어요?’ 벌교에 다녀온 어느 날 나는 불쑥 물어보았다. 순천시 낙안에 폐사지로 있던 금둔사를 다시 세우는 일에 그가 애를 썼다는 말을 듣고 왔기 때문이다. 그는 무슨 생뚱맞은 소리냐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나 반 중이잖아’.”(소설가 윤후명)

“혹자는 평생을 독신으로 보낸 한창기에겐 일남 일녀가 있다는 말을 하는데, 일남은 ‘뿌리깊은나무’요 일녀가 바로 ‘샘이깊은물’이라는 것이다.”(강준만 전북대 교수)

이 잡지에는 한창기를 한 번도 만난 일이 없는 사람들의 글도 있다. ‘초등학교만 나온 사람이면 누구나 막힘 없이 읽을 수 있는 우리말과 글’을 내세운 그의 잡지 철학이 끌어당긴 인연이다. 칼럼니스트 김규항씨는 수원에서 청계천 헌책방 거리를 수십 번 오가며 창간호부터 폐간호까지 모두 모았던 사연을 돌아보며 말한다.

“‘뿌리깊은나무’를 넘어설 만한 잡지가 없다는 얘기는 곧 ‘뿌리깊은나무’의 ‘보편적 불온성’을 넘어서는 잡지가 없다는 뜻이다. 보편적이면 쓰레기이고 불온하면 보편적이지 않기 십상이다.”

잡지 표지 사진은 한창기가 60년대에 쓰던 수첩 묶음을 찍은 것이다. 막 나온 잡지를 훑어보다가 정상적인 위치에서 0.2~0.3㎜쯤 더 떨어져 있는 마침표를 발견하고는 노발대발한 적도 있다는 고인이다. 지독하게 꼼꼼했던 편집자답게 그는 기록의 대가였다. 저 세상에서도 그 버릇을 버리지 못했을 테니 벌써 손때 묻은 수첩 수십 권이 그의 머리맡에 놓여 있을 것이다.
사진 강운구(사진가)


다시 보는 한창기

한창기는 1936년 전남 보성군 벌교읍 고읍리에서 태어났다. 광주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한 뒤 명성 높은 사전인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한국 지사를 만들어 ‘세일즈 신화’를 만들며 수많은 ‘세일즈 영웅’을 훈련시켰다. 76년 3월 혁신적인 종합 월간잡지 ‘뿌리깊은나무’를 창간해 한글 전용과 가로쓰기, 전문 미술집단에 의한 지면 배열로 한국 잡지사에 새 장을 열었으나 80년 8월 신군부에 의해 강제 폐간당했다.

84년 11월에 여성 종합문화지 ‘샘이깊은물’을 내며 여성잡지 시장에 새 바람을 불어넣었다. 잡지 발간 한편으로 남한 땅 종합 인문지리지 『한국의 발견』 11권, 이름 없는 민중의 구술 역사책 『민중 자서전』 20권, 충실한 해설집을 단 한국 전통음악 음반 전집을 냈다. 일찌감치 한국 토박이 문화에 눈떠 방짜 유기·옹기·백자·한복·한옥·차·염색 등 전통 문물을 되살리는 일에 힘썼다. 97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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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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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이다. 노무현의 홈페이지에 올렸다.


닮은 꼴의 노명박?

노무현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없어도 노무현의 속을 아는 사람은 얼마 안 되는 것 같다. 한겨레의 성한용기자는 작년 대선에서 노무현과 이명박의 닮은 꼴을 기사로 썼다. 88만원세대의 저자인 우석훈 박사도 노무현과 이명박은,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얼마 전부터 하게 되었다고 했다. 강준만교수역시 최근 칼럼(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276482.html)에서 '노명박'이라는 말까지 들어가며 둘의 닮은 점이 많다는 것을 얘기한다. 이명박을 '진보'로 보고 표를 준 사람들은 5년전 노무현을 찍은 사람들이었다.

 

바보라는 별명에, 지지자를 반대자로 만들어(또는 뺏겨)버린 노무현. 여기서도 욕먹고 저기서도 욕먹은 노무현. 사실 그는 보통의 한국인과는 조금 다르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금은 다른, 그리고 약간은 특별한 성찰이 필요하다.


뒤로 물러섬으로 인해 앞에 나선다

노무현은 앞에 나서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앞에 나서는 것을 싫어하고 누구에게 잘 보이는 것도 싫어한다. 그는 좋은 말로 꾸미고 얼굴색을 감추는 것을 싫어한다. 청와대 나오면서 그가 제일 좋았던 건 더이상 화장안해도 되는 것이었고, 고향에 와서는 편하게 입고 신고 다닌다. 누구에게 보이려는게 아니라, 스스로 편해서 할 따름이다. 그를 칭송하자는 게 아니다. 그는 그럴 뿐이다. 퇴임후의 그의 모습을 두고 '소탈하고 솔직하다'며 많이들 반기는데, 재임시의 그를 두고 언론은, 사람들은 '막말' 또는 '품위가 없다'고들 했다. 그리고 하나 더 나가자면 그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만남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한겨레의 김선주칼럼에도 나왔듯이 그는 스킨쉽이 부족하다). 단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있을 뿐이다(홈페이지의 글은 반기나 봉하마을의 관광객들은 반기지 않는다. 단지 예의를 갖추러 인사하러 나간다).

이기고 지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


그리고, 노무현은 이기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 역시 오랜시간동안 '선거'라는 승부의 세계에서 살아왔다. 하지만, 그의 '바보'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단지 '승리'를 목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원칙과 신념의 관철을 위해서 행동을 하는 인간이다. 여기서 따르는 '승패'는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 '승리'가 눈앞에 다가왔을때라도 그의 원칙에 반하면 그에게 '승리'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이 역시도 그가 무슨 성인군자라서가 아니라 단지 그런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기는 것만이 옳은 것인 한국사회에서는 희귀한 유형이고,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을 '오만'과 '독선'으로 오해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가 이렇게 눈앞의 승부에 초월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을 얻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무현은 욕심이 없는 사람이다. 무엇을 가지려고 하지도 않고, 무엇을 바라지도 않는다. 단지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할 뿐이다. 물론, 그 역시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기획하고 의도한 대로 이루어졌을때 행복해한다. 그는 그렇게 정리되고 계획대로 이루어지고 순리대로 풀어져나가는 것을 좋아하고, 그리고 그렇게 되는 것을 원한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그가 즐기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생각하고 사람들과 그 생각을 나누는 것이며, 그 나누는 과정인 토론과 또 그것에서 얻어지는 지적인 충만함과 그 결실을 즐긴다. 그러니, 생각없는 사람들은 노무현의 다변을 싫어하겠지만, 노무현의 사색과 연구’, 그리고 그 결과인 강의와 토론이야말로 그의 본 모습이라 할 만하다. 노무현의 '막말'이라 했을때, 그 말의 외양은 발가락양말과 쓰레빠신는 촌부의 것이나, 그 내용은 왠만한 교수보다 뛰어난 사색가의 그것이다. 생각과 내용이 아예없는 이명박의 막말과는 그 수준이 다르다.


견리사의 - 유연한 독선

그의 -한국사회의 기준에서는 지나치리만치- 원칙을 우선시하는 태도는, 반대로 승리와 이익을 위해서 '원칙'과 '정의'를 내팽개치는 사람들에게는 융통성없고 앞 뒤가 꽉막힌 사람이 된다. 이명박은 그 반대이다. 이명박은 반대로 원칙이 없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살아남고 이기는 것이 옳은 것이다. 강준만교수가 노무현을 '승부를 즐기고 승부에 능한 사람'이라고 한 것은 사람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 하는 말이다.

노무현의 '원칙'에 대한 집착을 사람들과 언론들이 '오만과 독선'으로 매겼을때, 노무현은 너무나도 억울하고 답답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노무현 스스로 생각하기에 누구보다도 개방적이고 유연하다고 - 또는 최소한 그러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터인데, '오만'과 '독선'이라니. 강준만은 노무현을 스스로의 오류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고 했는데, 노무현은 스스로 언제나 오류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렇기때문에, 노무현 스스로가 수긍하기 어려운, 즉 비합리적인 반박에는 절대로 수긍하지 않지만, 스스로가 납득하게 되면 지금까지의 입장을 순식간에 되돌릴 수도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노무현은 '토론'을 중요시한다. 토론의 과정에서 오류가 발견되면 즉시 용인하고 수정한다. 그리고, 정답이 없는 토론에서는 '타협'또한 중시한다. '대연정'같은 경우도, 정책의 결정권자로서 내린 결정이었지, 그것이 반대를 묵살하고 진행된 것이 아니었다(오마이뉴스의 오연호기자인터뷰참조). 문제는 노무현에게 가해지는 반박과 비판이 노무현에게 '납득'이 안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FTA같은 경우는 좀 예외이긴 하나, 대부분의 비판은 어느 면에서는 현실성이 없었고, 또 어느 면에서는 말이 안 되는 것들이었기때문이다.

덧붙여, 강준만은 노무현이 '타협'을 중시하는 여의도 문화를 혐오한다고 했는데, 이 타협이 밀실에서 이뤄지는 타협, 원칙을 저버리는 타협, 예를 들자면, 3당야합 같은 경우라면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 '타협'이 '대화'와 '토론'과 '양보'를 통해 도출되는 '타협'이라면 그것은 노무현이 꿈꾸던 바이다. 노무현의 대연정구상이나, 모든 정치지향은 사실상 민주주의 내용의 완성인 '대화'와 '타협'의 정치문화정착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군자의 길, 무위의 도

생각이 있는 노무현과 생각이 없는 이명박. 생각을 하고 시작하는 노무현과 생각하지 않고 무턱대고 시작부터 하는 이명박. 노무현은 모시기는 쉬운 사람이나, 기쁘게 하기는 어려운 사람이다. 이명박은 모시기는 어려운 사람이나, 기쁘게 하기는 쉬운 사람이다. 앞으로의 이명박5년은 정말로 피곤한 시절이 될 것이다. 생각없이 촐싹대는 사람을 뽑은 탓을 톡톡히 치를 것이다.

사실, 노무현은 대통령될 사람이 아니었다. 누구처럼 어릴적부터 소원도 아니었고, 또 반드시 대통령이 되어야 할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초선때인가 재선때는 의원직도 사퇴하려고 했더랬다. 그가 대통령이 된 것은 어찌하다보니, 그냥 자신의 모습대로 살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다. 단지 자신이 생각하는 원칙, 상식, 공정, 정의, 기준, 타인에 대한 예의에 따라서 살아왔을 뿐이다(물론, 그가 불의에 분노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그리고 그 불의에 맞서는 용기가 있었지만, 이것도 욕심이 없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비겁함은 욕심에서 나온다). 이렇게 그 어느 것에도 욕심내지 않고, 그 어느것에도 앞서지 않음으로서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앞서는 사람이 되었고, 모든 사람들이 가지지 못하는 것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의 욕심없음이나 남 앞에 나서지 않음이 그의 의도한 바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 생각이 있었으면, 결코 남앞에 서게 되고 국가를 운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노무현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음으로써 가장 큰 것을 가지게 되었고, 그리고 하지 않음으로써 가장 훌륭한 업적을 남긴 것이다.  노무현, 진정 다시 보기 어려운 우리 시대의 無爲人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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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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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의 세월

소선재에서 2008. 2. 22. 19:24
사진을 보니, 노무현도 많이 늘었다.

하기사, 그도 이젠 환갑이 지났으니.

이젠 예전만큼 노무현의 말이 전달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아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노무현의 말을 비난하는, 정말 보고 듣고 있으면 복장이 터지는 그런 소리를 좀 덜 듣고 볼 테니 그건 좀 다행이기도 하다.

골치아픈 나라에서 대통령노릇하느라 정말 수고많으셨다. 이런 똑똑한 대통령은 내가 살아있는동안에 또 만나기 어렵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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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로운 공간을 찾아서 - 퇴임을 앞둔 노무현 대통령이 22일 낮 청와대 춘추관에서 열린 출입기자들과의 고별 오찬에 참석, ‘이제 화장을 지우고’ ‘자유로운 공간을 찾아 떠난다’며 퇴임 소회를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盧 대통령 "조금 별난 시민으로 돌아간다"
[프레시안] 2008년 02월 22일(금) 오후 02:36   가| 이메일| 프린트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마지막 인사

 [프레시안 윤태곤/기자]

   노무현 대통령은 22일 청와대 출입기자들에게 "마주 보고 싸우는 관계가 아니라 어느 방향을 함께 바라보고 함께 가는 관계가 되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노 대통령은 이날 문재인 비서실장이 주재한 춘추관 기자단 오찬에 참석해 이같이 말했다. 노 대통령은 출입기자들과 건배하며 "대통령을 그만 두면 가장 좋은 것은 뉴스를 편안한 마음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고 그 다음은 화장을 안 해도 된다는 것"이라며 "화장(품)이 피부에 닿는 느낌을 싫어한다"고 말했다.
 
  이어 "상징적으로도 대통령은 무대 위에 있기 때문에 항상 화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특별한 긴장감을 갖고 연기를 계속해야 하는데 이제 안 해도 된다"며 "대통령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항상 무대 위에 서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토로했다.
 
  "정치적 성공을 미루다 대통령까지 됐다"
 
 
노 대통령은 "그 다음으로 느리고 적게 쓰고 살려고 하는데 그건 어려운 일인 것 같고 (대통령직을 떠난 뒤) 제일 하고 싶은 전환은 마주 서서 대결하고 승부를 맺어 나가야 하는 승부의 세계를 떠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승부의 대척점에 서 있진 않겠지만 자유로운 공간에서, 자유로운 공간 때문에 여러분과 좀 더 여유로운 공간이 열리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또 "저도 자기의 이해관계를 중시하는 사람"이라고 전제한 뒤 "그러나 이익을 탐한다 해도 당장의 이익이 시간이 지나면 독이 되고 손해가 되는 일이 많고 이익을 늦추면 대의가 되고 가치가 되는 일이 많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가치와 이익이 서로 구분된 것이 아니라 시간의 문제, 이익의 폭이 어느 정도 넓으냐의 문제"라며 "우리의 폭을 어디까지로 잡느냐에 따라 이익이 남을 위한 일이 될 수도 있고 시간을 길게 보면 손해가 이익이 되기도 한다"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이익을 미루면 전략적으로도 좋은 이익이 된다"며 "저도 대통령이 된 것도 정치적인 성공을 뒤로 미루다 보니 대통령까지 한 것"이라고 소개했다.
 
  노 대통령은 "이익을 같이 하는 사람이 모이고 대의를 같이 하는 사람이 모이고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 모이고 정서가 비슷한 사람이 모이는데 여러분은 까다로운 논리를 생산하는 직업이고 저도 까다로운 사람으로 통하는데가 많이 있을 수 있다"며 "여러분과도 뜻을 같은 방향에 두고 만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언론과 편치 않았던 관계를 의식한 듯 출입기자들에게 "개별 사건보다는 전체적으로 정서적 공감을 보여준 때도 있었는데 오래 같이 있다 보니 미운 정, 고운 정이 쌓여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무척 고맙다"고 말했다.
 
  이어 "저는 돌아간다. 고향으로, 일반 국민으로 돌아간다"며 "1987년 이전, 대통령 이전, 정치를 시작하기 이전 시민이나 대통령 후에 힘이 됐던 시민들, 조금은 별난 시민들로 돌아가는 것일 수도 있다. 시민의 위치에서 여러분을 만나게 되면 좀더 새로운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직접적이진 않지만 정치적 활동을 펼치겠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그는 "홈페이지도 열어 놓고 여러분과 간접적으로 소통하면 같이 있는 느낌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며 "우리의 인연이 계속 소중하게 기억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윤태곤/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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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대통령 “이제 뉴스 편히 볼수 있어”
청와대 직원ㆍ기자 송별간담회…‘소폭 원샷’
춘추관 방문 5년간 소회 밝혀…공식일정 마무리
연합
» 자유로운 공간을 찾아서 - 퇴임을 앞둔 노무현 대통령이 22일 낮 청와대 춘추관에서 열린 출입기자들과의 고별 오찬에 참석, ‘이제 화장을 지우고’ ‘자유로운 공간을 찾아 떠난다’며 퇴임 소회를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노무현 대통령은 퇴임을 사흘 앞둔 22일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머물고 있는 춘추관을 방문해 지난 5년간의 소회를 밝히는 것으로 사실상의 공식 일정을 마무리했다.

부인 권양숙 여사와 함께 춘추관을 찾은 노 대통령은 "지난 5년간 무척 힘들었다"는 말을 시작으로 참여정부 5년간의 소회와 향후 일정 등을 간략하게 밝혔다.

노 대통령은 "저는 이제 고향으로, 일반 국민으로 돌아간다"며 "1987년 이전, 대통령이 되기 전, 정치를 시작하기 전의 시기나 대통령에 당선될 때 제게 힘이 됐던 조금 별난 시민들에게 돌아가는 것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지난 5년간 언론과 빚어온 갈등을 떠올린 듯 "대통령을 그만두면 제일 좋은 것은 뉴스를 편안한 마음으로 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 뒤 "이제 (언론과) 서로 마주보고 싸우는 관계가 아니라 어딘가 방향을 함께 가는 관계로 전환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또 "이제 화장을 안 해도 된다"며 "(화장을 하면) 피부에 느낌이 안 좋아 화장을 싫어하는데, 대통령은 항상 무대 위에 있기 때문에 화장하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무대자세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특별한 긴장과 연기를 계속해야 하는데 이제 좀 안 해도 돼서 아주 좋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저에겐 이런 자유가 아주 큰 행복"이라며 "또 가능할 지 모르겠지만 머리도 적게 쓰고 사적으로 살아보고 싶은데...라고 희망을 피력하면서도 "그게 좀 어려울 것 같다"고 덧붙였다.

노 대통령은 "제가 제일 하고 싶은 전환은 마주서서 대결하고 승부를 항상 맺어나가야 되는 승부의 세계를 떠나는 것"이라며 "착한 소리도 하고 군소리도 할 수 있겠지만 (앞으로) 저는 그 승부의 대척점에 서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 점이 제게 자유로운 공간을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노 대통령은 "이익을 뒤로 미루면 전략적으로도 좋은 이익이 생길 수도 있다"며 "제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 그런 과정이라 할 수 있으며, 정치적인 이익을 뒤로 미루다 보니 결국 대통령까지 됐다. 정치인으로서 큰 성공을 한 것"이라고 자평했다.




노 대통령은 자신을 취재해온 기자들에게 "뜻을 같은 방향으로 두고 만났으면 좋겠다. 정서적으로 통하는 데를 만들어 자주 봤으면 좋겠다"고 친근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노 대통령은 퇴임 뒤 개인 홈페이지 운영 사실을 전하면서 "글이 올라오면 보고, (글들을) 모아서 느낌을 얘기하고 서로 소통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같이 있는 느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문재인 비서실장 주최로 열린 출입기자단 송별 오찬에 잠깐 격려하는 형식으로 방문한 노 대통령은 환송 꽃다발을 전달받은 뒤 기자들과 소주폭탄주로 건배를 하기도 했다.

노 대통령은 앞서 청와대에서 전 직원이 참석한 가운데 송별 다과회를 갖고 그간 자신을 보좌해온 직원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격려했다.

문재인 비서실장도 출입기자들과 오찬을 하며 "제가 취임할 때 `참여정부에 하산이 없다'고 했는데 그 말이 씨가 됐는지 마지막까지 일이 많았고, 끝까지 언론보도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일도 그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문 실장은 "어쨌든 개인적으로 아주 홀가분하다. 해방 아니냐"라며 "언론보도로부터의 해방이 가장 크지 않을까 싶다. 매일 뉴스에 신경을 쓰고 노심초사하고 때론 뉴스 때문에 속이 상하기도 했는데 이제 그만두면 뉴스를 편안하게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청와대 마지막 대변인인 천호선 홍보수석은 이날 고별 브리핑에서 "그동안 정말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했다. 어느 하루 힘들지 않은 날이 없었고 아쉬운 때도 적지 않았다"면서 "5년간의 참여정부의 공과를 놓고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을 정도로 논란이 계속됐는데, 이제 한걸음 뒤에서 심호흡하고 냉정하고 객관적인 평가가 이뤄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상헌 기자 honeybee@yna.co.kr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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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에는 귀납적인 방법과 연역적인 방법이 있으며 둘 다 유효한 수단입니다.
즉, 경험(실험)에 의해 도출된 이론(귀납)이나, 이론으로부터 결론은 유도하는 것(연역) 모두 과학적 결과입니다.
물론 그 과정이 바르게 진행되았다는 전제 하에서죠.

그리고 종종 과학을 어떤 하나의 결과물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글 쓰신 분도 포함해서)
과학이란 방법론이지 결과물이 아닙니다.
과학적 방법을 거쳐서 나온 결과물이 과학적인 것이지 어떤 고정된 실체로서의 과학이란 존재하지 않죠.

그리고 과학은 끊임없는 자기부정과 의심을 거쳐 진화합니다.
그래서 어제까지 과학적인 진실(?)이라고 믿어지던 것이 오늘 새로운 이론이나 실험결과가 확인되면
내일부터는 비과학적인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글 쓰신 분께선 자신있게 의학을 과학이라고 확신하고 계신데
의학은 연역법보다는 귀납법에 아주 많이 기대고 있는 과학적 응용사례의 하나일 뿐입니다.
(즉, 의학=과학 이게 아닙니다. 의학=과학적방법을 거쳐나온 결과물 이게 정확하죠.)
분자생물학, 기초의학쪽에서는 보다 연역적인 방법들을 쓰고있죠.

그럼 한의학이 과학일까요? 아닐까요?

한의학은 귀납적으로 만들어진 이론을 가지고 만들어진 치료법에 가깝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경험에 의거하여 만들어진 이론으로 다시 실제에 적용한 것이란 거죠.
물론 그 결과물인 치료법도 여러세대를 거치면서 실험적으로 검증이 되었을 것입니다.
(몰론 요즘 하는 것처럼 엄격하게 통제된 상황에서 한 실험은 아니지만,
또 반대로 그 실험기간과 실험의 횟수로만 따진다면 요즘의 실험이 도저히 따라가기
어렵다고도 할 수 있겟죠.)
그러므로 한의학도 과학적 방법의 결과라고 볼 수 있겠지요.

다만,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과거 어느시점에서부터 한의학적 방법들이
발전을 멈추었다는, 또는 그렇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즉, 과학에서 강조하는 자기의심의 과정이 멈추었다는 것인데
이건 최근의 새로운 한의학자들(기초) 및 한의학에 관심을 가진 서양의학자들에 의해
많은 새로운 연구가 이루어지고있으니 앞으로 다시 발전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정리하자면 한의학은 발전이 정체된 과학적 결과물(치료법 체계)라고 볼 수 있겠죠.

서양의학도 예전 의학 발전사를 보면 황당무계한 치료법이 수도 없이 많았죠.
두통을 없애려면 두개골에 구멍을 뚫으면 된다는 등의...
잘못된 치료법으로 고통을 주고 다치게한 환자도 수없이 많았고...
만약에 또 수십,수백년이 지난다면
지금 현재의 치료법을 가지고도 미래의 사람들은 원시적이고 무식한 치료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아마 틀림없이 그렇게 될 듯...)
과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은 20세기말 21세기초에는 비과학적인 방법으로 치료를 했다고
주장할 것입니다.(글 쓰신 분처럼)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현재에 보기에 서양의학은 과학적인 방법으로 발전하고있고
현재에 가장 과학적인 치료법들입니다.

한의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귀납법을 과학적인 방법론의하나로 인정한다면
한의학도 과학적으로 도출된 치료법임이 분명합니다.
다만 조선조 이래로 발전이 정체되고있을 뿐.

그리고 상대방을 비판하는 많은 분들이 자신이 겪은 사례들을 가지고 상대방을 비판하시는데
그것도 과학적이 되려면 정확한 통계수치를 가지고 비판하셔야지
내가 겪어본 사례들 몇가지를 보니 저것은 전부 다 사기라고 주장하신다면
이 또한 비과학적인 결론이 됩니다.(지나친 일반화의 오류)
귀납법도 지켜야할 규칙이있죠.

양의사도 한의사도 정직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거짓을 일삼는 사람도 있고,
실력있는 좋은 의사가 있는가 하면 실력이 떨어지는 의사도 있는 법입니다.
몇가지 사례로 전체를 매도해선 안 되겠죠.

아, 그리고 한의학이 연역적이라고 생각하시는데
역사상 대부분의 의학은 귀납적으로 발전했다고 봐야합니다.
한의학이 중세 서양의학에 비해 정교한 이론적인 체계를 갖추고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한의학의 처방들이 전부 연역적으로 도출된 것이라고 보긴 어렵죠.
전부는 아니라도 많은 처방은 긴 시간에 걸친 경험의 결과가 축적되었다고 봐야합니다.
특히 종교에 비유한 부분은 좀 지나친 것 같네요.

서양의학도 기초분야에서 연역적인 방법을 많이 사용하고,
또 치료의 선택등에 있어 철학등과 결합될 여지도 많습니다.
실재로 그런 연구도 있는 것 같구요.

정작 서양의학이 발명된 곳에서는 열린마음을 가지고 계속 새로운 영역과 방법을 과학적으로 찾아나서는데
그걸 받아들인 우리나라에서는 서양의학이 종교처럼 떠받들어지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과학은 방법이지 결과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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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

六十七. 天下皆謂我道大, 似不肖, 夫唯大, 故似不肖, 若肖久矣, 其細也夫, 我

 有三寶, 持而保之, 一曰慈, 二曰, 三曰不敢爲天下先, 慈故能勇, 儉故能

 廣, 不敢爲天下先, 故能成器長, 今舍慈且勇, 舍儉且廣, 舍後且先, 死矣, 夫

 慈以戰則勝, 以守則固, 天將救之, 以慈衛之.

   

   67. 천하가 모두 이르기를 나의 도는 크기는 하지만 불초한 것 같다고 한다. 대저 오직 크기 때문에 불초한 것 같다. 만일 현명하다면 그 작은 것이 오래였으리라.

   나에게 세 가지 보배가 있다. 잘 간직하여 이를 보배로 삼는다. 그 첫째는 자비요, 둘째는 검소함이요, 셋째는 감히 천하의 앞장이 되지 않는 것이다. 자비하므로 능히 용기가 잇으며, 검소하므로 능히 널리 베풀 수 있고, 감히 천하의 앞장이 되지 않으므로 능히 기량있는 자의 우두머리가 된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자비를 버리고도 또한 용감하려 하고, 검소를 버리고도 널리 베풀려고 하고, 뒤에서 따르지 않으면서 또한 앞장서려고 하는데, 그러면 죽을 것이다.

   대저 자비는 이것으로 싸우면 곧 이기고, 이것으로 지키면 견고하다. 하늘이 장차 이를 구하고자 자비로써 이를 지킨다.



박정희나 정주영을 찬양하는 덜 떨어진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씨부랑거리는 얘기가 있다. 바로 '검소함'이다. 박정희가 얼마나 검소한 삶을 살았는지, 정주영같은 갑부가 얼마나 근검절약을 했는지에 대해서다. 만약 '검소함'이 한 개인의 인품과 훌륭함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면, 세상엔 벌써 '성인군자'가 넘쳐났을 것이다. 우선 나부터가 그렇다.

나? 나, 근검절약 바로 그 자체다. 나는 우선 모든 것이 아깝다. 인색하다고? 그렇다. 인색하다. 나는 모든 것에 인색해서,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기때문에 나는 모든 것에 대한 지출을 줄인다. 뿐만이 아니다. 나는 미래에 대해서도 인색하다.

여기 50개들이 사과 한 상자가 있다고 하자. 50개의 사과중에서 매번 제일 싱싱하고 맛있어 보이는 것만을 골라먹는 사람이 있고, 또 나처럼 50개의 사과중에서 매번 제일 상태가 나쁜 사과만을 골라먹는 사람이 있다. 먼저의 사람은 언제나 맛있고 제일 좋은 사과를 먹게 된다. 하지만, 나중에 5개, 또는 10개의 사과가 썩어서 아예 못먹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매번 제일 상하기쉬울 것 같은 사과를 골라먹기때문에, 언제나 제일 맛없는 사과를 먹지만, 상해서 버리는 사과는 없다.

나는 음식도 버리는게 없을 뿐더러, 옷도 집도 차도 모든 것을 아낀다. 설령 그것이 내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나는 아까워서 아낀다. 인색한 사람들중의 한편은 아껴서 모은 것을 보다 더 큰 소비와 지출, 즉 더 큰 만족과 효용을 위한 기회비용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도 아니다. 나는 무엇을 아껴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게 아니다. 정주영이 돈이 없어서 양말을 기워신고 구두를 고쳐가며 신었겠는가? 그냥 아까우니까 아낄 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검소'와 '근검절약'이 몸에 밴 사람은 과연 칭송받을만한 사람인가? 검소와 근검절

약은 분명 그렇지 않은 것에 비해 수준높은 인식이자 행위임에는 틀림없다. 도덕경에서 말하는 '검소함'의 힘이 바로 그렇다. 그렇다해도 그 '검소'와 '근검절약'이 다른 부분까지도 평가할 만한 기준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더군다나, 이미 '검소'와 '근검절약'이 몸에 밴 사람은 이미 그것이 '무위'의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일이므로 어떠한 노력의 댓가도 아니고, 따라서 그런 사람들에게 그런 자연스러운 모습을 칭찬한다고 칭찬으로 여겨지는 것도 아니다. 밥먹고 물마시는 것과 같이 자연스러운 것을 '훌륭한 인격'으로 추켜세우는 것은 아부거나 아니면 무식 둘중의 하나이다.

덧붙여 ''봉사'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타인에 대한 '봉사'를 자기일인양 하는 사람도 있다. 사회복지기관 봉사, 입양 등등. 그중에는 '봉사'가 자기자신이나 가족보다 우선해서, 남을 위한 삶자체를 사는 그런 사람도 있다. 과연 그렇다면 그것이 칭송받을만 한가? 물론, 칭송받을 만한 일이나, 그 사람과는 별개 문제다.

국외자의 입장에서 보면 '검소, 근검절약, 봉사'와 같은 삶이, 해야하고 따르고 본받아야만 하는 그 무엇이 되겠고, 또 그런 이유로 그런 사람들을 '칭송의 대상'으로 본보기삼는 것이겠지만, 사실 그 대상이 되는 사람들과는 별 상관없는 일이다. 밥먹고 똥싸고 하는 걸 칭찬하는 것과 마찬자지일뿐이다. 그러니, 근검절약한다고 해서 그들을 칭찬하지 말일이다. 그들이 봉사한다고 해서 그들을 칭찬하지 말일이다. 박정희나 정주영이 여자까지 멀리하고 모든 '욕망'에서 벗어난 인간들이라면 마땅히 우러러 따를 일이나, 그들은 그냥 아까우니까 근검절약하고 그게 몸에 배서 '검소'했을 뿐이다.

사실, 2008년, 소비만이 존재의 이유이자 목적인것만 같은 시대에, 그런 검소와 근검절약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누가 검소하게 살자라고 했다간,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그러니, 그런 삶의 모습이 '존경'스럽게 될 수도 있다 싶지만, 그래도 아닌건 아닌게 아닌가? '검소함'과 사람은 구별해야 한다. 오랜만에 도덕경을 보다가 '검소함'이라는 말이 있어 떠올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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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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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관형 인간

소선재에서 2008. 1. 29. 07:35

꼭 비싼 것만 시키는 인간이 있다. 꼭 비싼 것만 먹고, 꼭 비싼 것만 타고 꼭 비싼 것에만 눈이 가는 그런 인간들이 있다, 참 희한하게도. 그들의 눈은 사시인가? 메뉴판의 이런 저런 메뉴중에, 그들의 눈은 메뉴의 내용이 아닌 '가격'에 꽂혀서, 제일 비싼 것 - 기호와 취향과는 상관없이 단지 그게 제일 비싸다는 이유하나만으로- 만 주문하는 그런 인간들이 있는 것이다.

세상엔 별노무 인간이 많긴 하지만, 이런 인간들을 보는 것도 웃긴 일이다. 나도 '가격'에 눈이 간다. 나는 이왕이면 '싼' 것을 시키는데, 누가 돈을 내던지 간에 말이다. 내가 돈을 낼 때도 그렇고, 내가 돈을 내지 않아도 빚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 또한 그렇다.

어제 누구를 만났다. 지난번 처럼 제일 비싼 쥬스를 시켜서 먹더니, 배가 아프다며 화장실에 갔다 왔다. 그 인간과 세시간넘게 얘기를 하고 왔다. 글쎄, 그것이 얘기였는지 아니였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는 말을 하고 나는 듣고, 또 나도 말을 했다. 내 말을 그가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제일 경멸하는 인간이 있는데, 명리학적으로 얘기하자면 '상관'이 쎈 인간들이다. 이런 형의 인간들은 자기 마음대로라서, 제어가 안 되는 인간들이다. 모든 구속과 간섭을 싫어하면서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구속과 간섭을 행사하는 표리부동의 극치를 달리는 그런 인간들이다. 말이 많고, 말이 많은 만큼 다른 사람의 얘기는 듣지 않고, 교만하고 싸가지가 없으며, 예의범절도 모르고 자기멋대로에 탐욕도 심하다.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은 하는데, 알고보면 인간과 세상은 자기를 중심으로 돈다고 믿는 이런 또라이들.  한마디로 소인배의 전형이요, 사회악의 근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상관'형의 인간과 어제 마주 앉아있었는데, 이런 인간들과 얘기를 하다보면, 참 허무해진다. 그 시간, 차 값, 말을 해야 하는데 쓰이는 나의 에너지. 이 모든 것들이 아까워진다. 아무리 얘기를 해도, 전혀 남의 얘기를 들으려 하지 않고, 이해하려하지 않고. 결국엔 자기 자신의 얘기만 하는 그들. 그래서, 종국에는 남에게 자기를 강요하는 그들.

아무리 명리학공부를 했다해도, '자기'의 틀을 벗어나는 건 또 별개의 문제다. 그렇게 내가 얘기를 했건만, 여전히 내게 모욕과 간섭을 일삼는 그를 보며, '명리학 공부를 하면 뭐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내가 '상관'형 인간들과 상종하지 않으려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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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제

소선재에서 2008. 1. 27. 22:42

얼마전에 나와 같은 시기에 이 곳에 온 사람을 만났다. 나보다 2년정도 아래이니 거의 동년배라해도 무방하다. 직장생활에 대해 묻자 그는 말했다.

"처음엔 인종차별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그럴만도 해요"

그는 대한민국사람이라면 최소한 절반은 아는 그런 다국적기업에 다닌다. 그가 영어를 못 해서 느끼는 괴로움을 토로하며 내게 한 말이다 - 여기서 영어를 잘 못한다는 건, 상대방의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하고, 나의 의사표현을 정확하게 제때에 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한다 - . 그가 내게 더 이상의 설명을 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이건 바로 나 또한 일터에서 똑같이 겪는 상황이기때문이다.

'이것들이 말을 못한다고 사람까지 바보로 아나?'

안타깝게도 대답은 예스이다. 내가 한국어에 얼마나 능숙하고 한국에서 얼마나 잘났는가는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말귀가 안 통하는 사람, 말해줘도 이해도 못하고, 또 무슨 말인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하는 사람, 즉 '바보'이기 때문이다.

명시적으로 바보라는 말을 듣지는 않지만, 그들의 눈빛에서 그리고 그들이 나를 대하는 표정과 분위기에서 '바보'취급을 받을 때는 기분이 나.쁘.다. 그렇지 않겠냐? 바보취급을 받는데?

그러면, 잘 못 알아들었다고 하라고? 그것도 한 두번이지, 매번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누가 말끝마다 '뭐라고?'를 한다고 해봐라. 한번으로 끝나면 그나마 다행이다. 한번 못 알아들은 말은, 두번세번이 아니라, 다섯번 여섯번정도 '쏘리?'를 해야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된다. '쏘리?'도 한 두번이지.

문제는 '나'만 그런 것 같다는 것이다. 독일에서 유학온 놈은 독일어억양으로 이래저래 끊임없이 떠벌리고, 또 보아하니 이곳 사람들의 말도 거침없이 알아듣는 것 같다. 필리핀출신 아저씨도 발음은 약간 다를지라도, 온갖 슬랭으로 웃음을 선사한다.
 
얼마전에 사고가 있어서 매니저와 전화통화를 한 적이 있다. 사고경위를 설명해야하는데, 도대체 설명하기도 어렵고, 또 매니저는 나보고 뭐라고 하는데, 도대체 무슨 소린지도 모르겠고.

도대체! 도대체, 도대체...............

다른 한 사람은, 나보다 한 5년아래인데, 세대가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좀 더 개인주의적이고(바람직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좀 더 현실지향적인 듯 하다. 오늘 그와 얘기를 하면서는 '영어'에 대한 얘기는 단 한마디도 나오질 않았다. 20대에 유학을 와서 여기서 자리잡은 그들에게서는 '영어'에 대한 불편함, 어려움은 찾아볼 수 없다. 이곳사람을 대상으로 한 비즈니스를 하고, 또 이곳사람들과 직장생활을 하는 그 부부는 '영어'는 그냥 '말'일 뿐이지, 어떠한 걸림돌도 아니고, 아무런 장애도 아니다.

언어로 인한 장벽을 느낄때마다, 나를 지탱해주는 힘이 한웅큼씩 없어져버리는 느낌이다. 마치 '스트리트 파이터'게임에서, 상대방의 기술에 걸려, 에너지가 순식간에 줄어드는 그런 것처럼 말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나의 늦은 나이? 또는 나의 무식? 게으름? 비겁? ....?.....?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 나의 문제는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낼 힘조차 없다는 것이다. 과연, 나의 문제는 해결이 가능한 것인가? 정말 나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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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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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리학 강의

소선재에서 2008. 1. 27. 13:53

아무래도 명리학강의를 하긴 하게 될 것 같다. 몇명이나 모일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지금 개업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아마 몇 명의 학생들이 대상이지 않을까 싶다. 많아야 10명? 아니, 한 다섯명 정도도 생각하고 있다.

그래도, 칠판앞에서 하는 강의이니만큼 준비가 없을 수 없다. 어제 그제는 일하는 짬짬이 리허설도 해 봤다. 머리속에 있는 내용이긴 하지만, 말로서 전달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요즘 내가 아주 무력해져 있어서, 과연 내 말에 얼마나 파워가 실릴지 좀 걱정된다. 사실 말이 중요한게 아니다. 같은 말이라도 그 말을 누가 하느냐에 따라 그 말이 갖는 힘이 달라지고, 또 심지어는 의미까지도 달라진다.

그다지 너그럽지 않아서, 사실은 아주 속이 좁아서, 못마땅한 사람들을 앞에 앉혀놓고 얘기해야하는 것도 부담이다. 내 스타일이, 잘난 척하지 않으면서 잘난 척을 하는 내 스타일이 그 사람들에게 얼마나 거부감을 줄까 싶기도 하고, 하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나를 드러낼 방법도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가르치는 건 최상의 배움이다. 내가 가르치면서 내가 아는 건 더 잘 알게 되고 내가 모르는 것이 무언지 알게 되는 그런 최고의 배움이 바로 가르치는 것인데, 문제는 내가 지금 뭘 배우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이래저래 무력한 나날이라고 할까? 차라리 '분노'의 힘으로 살았던 예전이, 훨씬 더 힘찼던 때였다는 생각이다.

그러니, 힘도 없고 열정도 없는 지금, 지금은 가만히 있어야 할 때인데, 남앞에 서게 되다니, 내게 독이 될 것인가? 약이 될 것인가? 하여튼 조심스럽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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