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의 칼럼이 최근 한겨레에 연재되고 있다. 공지영씨가 보는지는 모르지만 댓글도 꼬박꼬박 달고 있다. 그의 칼럼을 보고 팬이 되었기때문이다.

그의 소설은 딱 하나 봤다. 연초에 읽은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뭐 그냥 대중소설이라는 느낌이다. 따라가기 힘든 묘사도 없고 소설가특유의 잘난 척도 없다. 그의 문체자체가 아주 쉬워서 부담없이 볼 만한 소설이었다. 은희경의 소설처럼 소설자체에 대한 매력은 없었다.

그런데, 그의 한겨레칼럼을 읽고서는 그의 매력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첫째, 그는 미인이다. 사실 본인은 별로 생각도 안 하고 또 이런 말 싫어하겠지만, 어쩌랴. 예쁘니까 예쁘다고 하지. 텔레비젼에 나오는 천편일률적인 어린 것들보다는 훨씬 더 낫다.

둘째, 그의 글에는 유머가 있다. 유머 이거 굉장히 어렵다. 유머는 '관조'와 '사랑'에서 나온다. 유머가 나오기 위해서는 상대방에 대한 용서가 있어야 하고 증오를 넘어선 사랑이 있어야 한다. 링컨의 유머가 그랬다. 그를 비난하는 수많은 공격을 그는 유머로 받아넘겼다. 유머로서 방어할때 상대방의 공격은 부메랑이 되어 그 상대방 스스로르 거꾸러뜨린다. 노무현에게서 좀 아쉬웠던 건 유머다. 말귀 못 알아듣는 국민들에게 강의대신 유머를 구사했다면, 재임중 훨씬 더 파워가 컸을 것이다.
 
공지영은 세번의 이혼을 통해 인생의 한 고비를 넘긴 듯하다. 그는 가톨릭의 품에서 분명 구원을 받았다. 종교의 역할은 이런 것이다. 십일조내고 복을 바라는 게 아니라. 공지영이 붓다의 가르침에서 구원의 길을 발견했다면 나로서는 훨씬 더 반가웠겠지만, 공지영은 공지영에게 맞는 가르침을 찾아냈고 구원을 받았다.

그의 유머는 이런 삶의 성장에 따른 선물이다. 그래서 그는 깨달았을 것이다. 앞으로 나는 유머를 말하리라. 그러나 작가의 말대로 이게 어디 보통 내공으로 되는 일인가. 그러나 쉽지 않아도 공지영은 유머의 길에 들어섰고, 아니 들어설 수 밖에 없었고, 그 유머는 용서와 화해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나는 그의 칼럼을 읽고 팬이 된 것이다.

셋째, 이건 매력은 아닌데, 공지영은 좀 교활하다. 여우같은 구석이 있다. 공지영작가는 63년생이다. 이젠 나이도 좀 먹어서인지 아주 능구렁이가 되어서 사람들을 좀 가지고 논다. 2007년 1월 1일자 한국일보 인터뷰(아주 장문의 인터뷰다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701/h2007010217183284290.htm)를 보면 '황석영의 정황묘사를 좋아한다'는 말이 나온다. 작가들의 공통점이겠지만, 독자를 맘대로 굴리려는 그런 구석이 보인다. 작가니까 어쩔 수 없겠지만.

공지영의 인터뷰와 기사를 한나절동안 검색해봤다. 세번째남편은 누구인지 알아내지 못했다. 공지영작가의 생일은 1963년 1월 1일이다. 양력이고, 시간은 확실한 묘시이다. 그래야 모든 것들이 설명이 된다 (인터넷에서 보니 묘시가 아니라 사시, 그러니까 기사시라고 한다. 내가 틀린 셈이다). 년 월의 인수가 강해서 책보는 것도 좋아하고 문학소녀이지만 시간 정화상관이 없으면 그의 총명함이나 수다스러움, 소설가로서의 상상력등이 설명이 안 된다. 더군다나 묘시이어야 도화가 되고 일지 술과 합을 한다. 인수가 가득했다면 아주 외롭기만 했을 텐데, 묘목 도화가 그의 미모나 패셔너블한 매력등이 설명이 되고 또 묘술합이 주위의 친구들과 결혼을 설명해준다.

그러나, 관이 없고 묘도화는 갑목의 양인이니 본인이 너무 강하다. 공지영작가는 전 남편들로 인해 커다란 상처를 받았지만, 그 전남편들도 공작가로 인해 고통받았을 것이다. 부연설명하건데, 공지영작가가 잘못했다는게 전혀 아니다. 그 전남편들의 고통은 본인들의 어리석음으로 자초한 것이 틀림없다. 공지영작가는 틀린 게 없는 사람이다. 모든 것이 경우에 맞는다. 그 시대 한국남자들을 못 벗어난 전 남편들의 탓이다. 공지영작가의 잘못이라면 그런 것들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지. 보다 현명했다면 그런 것들을 품에 안아줄 그런 여유가 있었을텐데 말이다. 지금의 공작가는 그것이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공작가가 다시 사랑하게 된다면 그건 분명 서로에게 축복이 되리라.

공지영작가에게 행복이 가득하길. 이미 '주님'안에서 충분히 행복하겠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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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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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와 개죽음

소선재에서 2008. 10. 16. 15:39


인터넷의 댓글이란게 참 영양가없기도 한데, 그래도 대충 훑어보면 현재 여론의 흐름이랄까, 한국사람들의 의식수준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노무현에 대한 비난기사가 올라오면 (사실 비난도 아니고 악의에 찬 중상모략이다), 그래도 노무현을 옹호하는 반응이 최소한 3분의 1은 넘는다. 최근에 주간조선에서 아주 섹시하게 '노무현의 황제골프'라고 냈는데, 오히려 기사를 반박하는 댓글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반면 강의석의 시위나 발언에 대해서는 지지하는 반응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강의석의 메세지는 '군축'과 '징집거부' 나아가서 '군대폐지'인데, 이 당연한 주장이 동의와 지지는 커녕 미친놈의 개소리로 몰리고 있다.

내전의 경험과 계속된 대치상황, 쓰레기 민족주의까지 가세해서 이 당연한 '군축'과 '평화'에 대한 주장이 정신병자의 헛소리가 되버리는 것이다.

군축과 평화같은 건 둘째치고, 군대를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건 지옥이다. 현역사병에게는 감옥이자 지옥인 곳이 바로 군대다. 사람을 '개'로 만드는 곳이고, 사람을 '개'로 만들어서 사회에 다시 내보내는 곳이 바로 군대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도저히 두번 다시 갈 수 없는 곳이 군대다. 내가 다닌 군대는 그렇지 않았다고? 그렇다면 그건 당신이 이미 개였나 보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고,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는 멍멍 강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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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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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 우석훈, 진중권, 박노자, 고종석..... 다 노무현을 싫어한다. 이유는 노무현이 신자유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조갑제, 이문열, 기타 쓰레기들.....역시 노무현을 싫어한다. 이유는 노무현이 친북좌파이기 때문이다.

노무현은 양쪽모두로부터 배척받는 현실이 답답해 '그럼 나는 신자유주의좌파'라고 반어적으로 얘길 했더니, 그것마저도 욕을 먹었다고 했다.

김규항은 지금 사민주의가 한국에서 힘을 못 쓰는 이유는 바로 '사회주의세력이 지나치게 약하기'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니, 사민주의자들은 사회주의를 욕할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존중해줘야 한다는 얘기다. (http://gyuhang.net/trackback/1257)

나는 아나키스트정당에 투표를 하고 싶은데, 이런 정당이 나오려면 사회당이 집권당정도는 되어야 한다. 사회주의정당이 집권당정도가 되려면, 그 전에 사민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아야 하고 사민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으려면 중도우파가 주류고 극우보수는 소수파거나 보이질 않아야 한다.
 
진보세력에서는 지난 5년간 노무현을 물고 늘어졌다. '왼쪽 깜박이를 켜고 오른쪽으로 갔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투표를 하는 사람들은 노무현이 '왼쪽깜박이를 켜고 확실히 왼쪽으로 갔다'고 생각했다.

만약 진보진영이 노무현을 두고 '잘한다고'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노무현 탄핵때 민주당이 전국을 휩쓸던 분위기에서 민주노동당이 원내3당 10석을 차지했다. 그리고, 지금 극우보수들(한나라당과 박근혜 이회창당)이 휩쓸면서, 민주당은 말할 것도 없고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다 쪼그러들었다.

따지자면 노무현은 애시당초 진보진영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그는 '민주당'의 대통령후보였지, '민주노동당'의 후보가 아니였기 때문이다. 노무현이 오른쪽으로 갔다고 한 것도 사실 진보진영만의 생각일 수 있다. 강준만이 수없이 얘기한대로 이젠 대통령이 맘대로 하는 시대가 아니다.

노무현정권 5년동안 조선일보에서 노무현을 칭찬한 건 딱 두가지밖에 없었다. 노무현이 자이툰부대를 방문한 것 하나. 한미FTA를 체결한 것이 나머지 하나다. 진보진영에서 노무현보고 잘 했다는 건? 글쎄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한국의 진보 세력은 내가 온건 또는 중도적 진보라고 생각한 노무현 정부 수준의 개혁성에 만족하고 더 적극적으로 지지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진보 세력이 훨씬 더 급진적인 노선을 주장한다면 범국민적인 지지를 받지도 못하고 만년 소수 야당으로 이젠 사람들이 관심도 같지 않게 된 촛불 시위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게 될지 모른다" (http://blog.hani.co.kr/newyorker/14481)

뉴요커님 말이다. 진보세력이 노무현을 더 적극적으로 지지했다면 훨씬 더 큰 세력을 가지게 되었을지 모른다. 최소한 지금보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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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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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316072.html


실제 한국 개신교의 자금력은 익히 공인되어온 바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지난 2006년도 종교단체 연간 운영자금 내용을 보면 불교가 4610억원, 천주교가 3390억원인 데 비해 개신교는 3조1760억원이었다. 다른 종교단체에 비해 거의 10배에 육박한 자금력이다. ‘한국교회의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은 개신교인 500만명의 월평균 헌금액을 12만5600원으로 보고 연간 헌금액을 7조50여억원으로 추산하기도 한다.

이번 조사 연구 책임자인 정재영(실천신학대학원대) 교수는 “조사자들은 헌금이 (사용될) 우선적인 목적에 대해 대부분이 사회봉사와 구제라고 믿었으나 실제 한국 교회의 사회봉사 및 구제활동에 대한 지출은 전체 예산의 10%에도 훨씬 미치지 못하며 대개 5% 수준에 불과하고, 지출의 대부분이 이웃과 사회가 아니라 내부 유지를 위해 사용되고 있다”면서 “헌금 사용의 공동체성과 공공성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바른교회아카데미는 이번 조사를 놓고 오는 24일 오후 2~5시 서울 명동 청어람에서 학계의 ‘헌금:근거,역사, 실천’을 주제로 연구논문 발표회를 연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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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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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의 말이다.

“예수 그 사람 그런 사람 아니야. 알고 보면 정말 반하고 말 걸. 나를 믿고 한번 읽어봐.”

2000년에 붓다에 관한 책을 읽고 나서 나역시도 그랬다. 그때 나는 사람들에게 말만 하면, '이런 가르침이 있네요'라고 말만 해주면 사람들 모두 붓다의 제자가 될 줄 알았다. 이런 가르침이 있다는 것을 미처 몰랐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이런 가르침이 있다는 것만 얘기해주면 왠만한 사람들은 다 불자가 되리라 생각했다. 그때는 그랬다. 내게 전해진 붓다의 파워가 그만큼 강했다.

다시 또 김규항의 말이다.


"진보라는 것은 행복하자, 잘 살자는 것입니다. 진짜로. 행복이 아닌 것을 행복이라 믿고서 인생을 소모시키거나 더욱더 고단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위한다며 아이들을 못살게 구는 것이 아니라, 진짜 행복하자 더 잘살자는 것입니다. 올바르고 정의롭기 때문에 고통과 헌신을 감수하자는 것이 아니라 진짜 더 잘살고 더 행복해지자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함께 되새겨보는 시간을 갖기를 여러분들에게 그리고 저 자신에게 정중하게 제안합니다."

김규항의 말이나 역시 또 오래된 나의 생각이다. 요즘 자주 드는 생각은 제대로된 붓다의 제자라면 '진보'가 아닐 수가 없겠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진보적이지 않은 사람들은 사실 제대로 된 불자라고 할 수 없다.

불교가 욕망의 충족을 위한 수단이 될 때 그 어디에서도 붓다의 가르침은 찾아 볼 수 없다. 욕망의 충족은 행복에 이르는 길이 아니다. 잠시동안 만족감을 줄 수는 있어도 욕망의 충족은 곧이어 또 다른 결핍감을 불러 온다. 쳇바퀴이다. 그러니, 그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 욕망의 소멸로 그 해답을 구해야한다.

진정한 진보라면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 욕망의 해소를 모색해야 한다. 그 길은 좌우를 막론하고 세상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길이다. 그것이 잘 살고 그리고 행복해지는 길이다. 그 외에 다른 길은 없다, 지금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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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지역의 온산중학교에서 학부모들에게 보낸 '사랑의 체벌'동의서



여기 선진국이라고 하지만 사실 별로 좋아보일 것도 없다. 아니 한국보다 못하다. 오래된 건물에 낡은 시설, 지저분한 거리 오래된 자동차들. 그런데, 눈에 안 보이는 부분은 얘기가 달라진다.


클래스메이트중에 노암이라는 놈이 있다. 서른넘은 총각에 한국여자가 제일 예쁘다고 하는 유태인이다. 이 놈은 끊임없이 말하고 잠시도 가만히 있질 못한다. 당연히 강의가 소란스러워진다. 대만에서 온 리는 한번은 참지 못하고 조용히 하라고 하기까지 했다. 소용없다.

교수중에 이 노암에게 뭐라고 한 사람은 딱 한명이다. 싱가폴출신의 양. 중국계이다. 이 교수는 예민한건지 누가 떠들면 짜증을 낸다. 그러나, 다른 백인교수들은 자기들도 짜증이 좀 날만한데,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

리는 한번은 학과장에게 수업시간이 너무 소란스럽다고 당신책임이니 노암에게 주의를 줘야 한다고 불평을 했다. - 이렇게 학과장 교수에게 불평하고 요구하는 것도 어째 나로서는 상상이 안 되었던 일이다.

내가 리로부터 전해들은 학과장의 대답은 '내가 주의를 주면 그는 기분이 나빠질 것이다. 나는 그를 기분나쁘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학과장은 워낙 사람이 좋으니 그렇다고 해도, 다른 교수들도 전혀 뭐라고 하지 않는다. 물론, 교수들도 자기들끼리는 얘기를 하겠지. 누구는 어떻고 지금 학년은 어떻고 등등

너의 일에 상관안 한다는 개인주의. 이 나라에서는 소란스러운 강의분위기도 개인의 문제인 듯 싶다. 교수는 강의를 하면 그만. 학생들은 듣고 싶으면 듣고 말고 싶으면 그만이다. 내 강의 듣기 싫다는데 뭐 어쩌라고? 어쨌거나 그들은 수업료를 내는 학생들이고 나는 내가 가르칠만큼 가르치기만 하면 되니까.

이제 갓 스물넘은 마이클이 50넘은 학과장어깨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기대고 서서 농담을 한다. 학생들은 끊임없이 강의실을 들락 날락거리고 휴대폰도 여기 저기서 쉴새없이 울린다. 강의시간에 도시락 샌드위치 먹는 놈들은 항상 한 두명씩 있다. 교수강의도중에 가방싸고 나가면서 교수한테 굿바이 하고 간다.

하이스쿨도 마찬가지인듯 하다. 수업분위기가 개판인게 제일 힘들다고, 하이스쿨 티쳐인 켄은 내게 말했었다. 반면 선생은 학생들에게 소리만 질러도 잘린다고 켄은 역시 말했다.


서양에서도 체벌은 강했다. 그러다가 어떻게 지금처럼 체벌이 없는 교육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교육이론의 영향인지 아니면 사회문화의 영향인지 알 수는 없으나 어쨌건 지금 여기서는 선생이 학생들에게 소리만 질러도 잘린다. 체벌? 체벌을 하면 교도소로 가겠지. 부모가 애를 때려도 잡혀들어가는 판에 선생은 무슨....

사랑의 체벌은 없다. 체벌이 사랑이 되려면 붓다정도는 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붓다가 되지 못한 상태라면 그건 폭력이다. 체벌은 학생들을 선생말 듣게 하려고 하는 강제수단이고 육체와 정신에 가해지는 폭력에 불과하다. 이런 폭력으로는 절대 사람을 바꾸지 못한다. 애들을 바꾸고 싶다면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 사랑으로 대하는 건 어렵고 힘들고 오래 걸리고 쉽게 되지 않으니 선생들이 몽둥이를 드는 것이다. 체벌을 하면 우선 애들이 폭력앞에 수그러들어서 일단 말 듣는 것으로 보이고, 선생은 힘들게 말로 안 해도 되고 금방 효과나고 얼마나 편한 일인가?

하지만 그 어떤 폭력도 사람을 바꾸지 못한다. 일시적으로 말 듣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더군다나 이런 폭력이 학교에서 '사랑의 매'라는 이름으로 자행된다면 그건 더 무섭다. 왜냐하면 그 폭력은 폭력으로 인지되지 않는, 폭력의 탈을 쓰지 않은 폭력이기때문이다. 폭력인데 폭력이 아니라니. 애들은 폭력에 길들여지고 폭력에 무감각해진다. 폭력에 당하면서도 폭력이라 생각하지 못하고, 남들에게 폭력을 가하면서도 이게 폭력이라는 생각을 못 한다. 모두 이것이 '사랑의 매'의 효과다.
 
이런 폭력을 보고 자라고 경험한 사람들의 몇가지 공통점이 있다. 자존감의 결여다. 괜히 주눅이 들어서 어딜가도 당당하지 못하다. 누가 뭐라고 할까봐 미리부터 주눅이 들어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폭력의 체화다. 상대가 자기보다 약하면 그때부터는 자신이 폭력적으로 된다. 7~80년대에 사랑의 체벌이 당연했던 시대. 그때 국민학교 중고등학교를 다닌 바로 나의 얘기다.

기사를 보니, 불량학생들이 하도 말을 안 들어서 이제부턴 때려서 가르쳐야겠다고 한다. 아직도 '사랑의 체벌'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이런 나라에 어떻게 내 자식을 보낼 수 있을지, 한국에 가고 싶다가도 이런 걸 보면 정이 확 달아난다. 강한자에겐 약하고 약한자에겐 강하고, 폭력에 길들여진 우리들의 초상이다.



http://kr.news.yahoo.com/service/news/shellview.htm?linkid=12&articleid=2008101402350667219&newssetid=82

사진은
http://kr.news.yahoo.com/service/news/shellview.htm?linkid=453&articleid=2008101403104137034&newssetid=1270


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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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명이 여러 지랄을 하고 있다.

첫째, 회사 대표이사의 마누라의 엄마가 죽었는데 그 장례식이 회사에서 논의된다.

둘째, 그 결과 장례식에 관해 직원들간의 업무분장이 결정된다.

셋째, 회사의 모든 직원들은 대표이사 마누라의 엄마 장례식에 근무시간에 참석한다.

넷째, 뿐만 아니라, 장례식일도 한다.

다섯째, 그 일을 40시간이상 잠도 안 자고 한다.

여섯째, 근로복지공단의 '장례식으로 인한 과로사'는 업무와 관계가 없다는, 당연한 결정이 실상은 억울한 결정이 되어버린다.

일곱째, 법원은 이러한 억울한 결정을 뒤집어주긴 하지만, 한편으로 사장마누라의 엄마 장례식이 바로 회사일이었다는라는 말도 안되는 사실을 법적으로 인정해버린다.

여덟째, 아무도 이 지랄이 지랄인줄을 모른다.

아홉째, 따라서 이 지랄이 당분간은 계속될 것이다.

열번째, 지랄이 지랄이 아닌 나라, 바로 지랄같은 나라이다.






“장례식장서 일 도와주다가 사망하면 업무상 재해”


회사 대표이사의 장모 장례식장에서 조문을 받는 등 장례 절차를 진행하다 쓰러져 숨진 40대가 업무상 재해판결을 받았다.

서울행정법원은 10일 회사 대표이사 장모의 장례식에 갔다가 숨진 박모씨의 유족이 업무상 재해로 인정해 달라며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박씨가 회사 결정에 따라 장례식 업무를 맡았고, 회사는 장례 지원을 위해 임직원들에게 근무시간에 장례식에 참여하도록 하는 등 박씨의 장례 절차 진행은 업무의 일환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또 “연일 계속되는
초과근무로 과로가 누적된 상태에서 장례식을 총괄하면서 40시간 이상 수면을 제대로 취하지 못하고 1000명이 넘는 조문객을 안내하는 등 과로와 스트레스가 박씨를 사망에 이르게 한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영화제작사 총무팀장이던 박씨는 지난해 대표이사 장모의 장례식장에서 례절차를 총괄하던 중 갑자기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졌다.

박씨의 유족은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인정을 신청했지만 공단 측이 대표이사 장모의 장례식 업무는 사적인 것으로 업무와 관계없다며 거부하자 소송을 냈다.

〈경향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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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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愛別離苦

소선재에서 2008. 9. 11. 23:03

愛別離苦 애별리고. 사랑하는 것들과 헤어지는 고통. 그 어느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는 여덟가지고통중의 하나이다. 이 애별리고를 요새 톡톡히 치르고 있다.

8월3일부터니까 한달하고도 열흘이 지났다. 오늘은 울면서 엄마아빠를 찾았다고, 아이의 할머니는 서둘러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전화기너머에서 아이는 아빠를 부른다. 첫음절 아에 강세를 주고 나서, 잠시 멈추고서는 곧이어 빠를 길게 끈다. 피아노의 솔과 라, 기본자리에서 한옥타브 더 높은 음이다.

지난 22개월의 시간이 아이에게 얼마만큼이나 기억으로 남아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한달하고도 열흘이 지난 지금, 아이는 아직도 아빠를 찾고 아빠를 부른다는 것이다.

나는 그 솔!라~음을 기억하며 지난 22개월의 시간이 담긴 사진을 들춰본다. 한달하고도 열흘이 이렇게 긴 시간일 줄이야. 제대를 기다리는 말년병장때도 이렇진 않았었다. 세상일 중엔 겪어보지 않고서는 짐작이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짐작컨데, 아이가 아빠를 못 보는 고통보다, 내가 아이를 못 보는 고통이 더 크다. 뼈속까지 아파지기 전에 다시 만나야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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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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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학교 역경원에서 펴낸 한글대장경본으로 중아함경을 읽었다. 중아함경은 아함부경전의 하나다. 발행년도가 1967년이다. 세로쓰기에 촘촘한 2단편집은 물론이고 묵은 책 냄새는 과연 40년의 세월을 느끼게 했다. 다행히 한자가 많지는 않아 읽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어떤 경전은 불법과 세존을 찬탄하는 내용이 길어 지루한 점도 있는데, 아함경은 초기경전답게 일화중심이어서 읽는데 지루하지 않다. 물론, 경전의 특성상 반복되는 부분이 많긴 하나, 이러한 반복은 오히려 이해를 높이는 측면도 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노차경'과 '유행경'이다. 노차경은 노차라는 비구와 부처님과의 대화를 실은 경전이다.  그중 부처님께서 '그렇지 않다. 나라는 생각이 있어 나라고 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라는 말씀이 특히 눈을 사로잡았다.

유행경은 부처님 열반시의 일을 기록한 경전이다. 굉장히 생생하게 묘사가 되어 있어서 읽는 내내 마치 영화를 보는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자등명 법등명'이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으로 알고 있었다. 아주 틀린 건 아니지만 유행경에  나타난 부처님 최후의 말씀은 '방일하지 마라. 이것이 여래의 마지막 말이다'이다.

'방일하지 마라'. 대개 부지런히 수행에 정진하라라는 뜻으로 새겨진다. 팔리어로는 어떤 말인지 모르겠으나, 한자어인 방일을 보면 의 일에는 게으르고 나태하다는 뜻이 있고, '방'이라는 글자는 놓아버린다라는 뜻이 있다. 여기에 방점을 일에다가 두면 부지런해야한다는 측면이 크고, 방에 초점을 맞추면 놓아버리지 않고 꼭 붙잡아둔다는 뜻이 크다.

방일하지 말라에는 부지런히 힘써야 한다는 뜻도 있겠지만,  수행의 방편을 놓지 않고 매진해야한다는 뜻도 아울러 새겨야한다는 게 아닌가 싶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고 아난존자와 마하가섭과의 대립도 경전을 소개하고 있다. 부처님의 다비가 7일동안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불을 붙이려해도 불이 붙질 않았다고 한다. 마하가섭존자가 7일후 도착하고 나서야 다비가 진행됐는데, 아마 이것은 당시 승단내에 마하가섭존자의 세력이 컸다는 것을 나타내는게 아닌가 싶다. 마하가섭존자가 아난존자에게 부처님의 모습을 뵙고자 청하나 아난존자는 이미 장례준비가 끝난 점을 들어 거절한다. 이에 부처님이 관밖으로 발을 내보였다고 되어있다.

아난존자의 거절이유가 마하가섭존자에 대한 부담감때문에 그랬는지, 아니면 경전에 나타난 그대로 이미 준비가 다 끝난 상태여서 거절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부처님의 발이 밖으로 나왔다는 것도 어떻게 해석이 되야할지 잘 모르겠다. 마하가섭존자에게 법이 전해졌다는 염화시중의 미소처럼 해석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마하가섭존자가 아난존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의 시신을 친견한 것인지 나로서는 알기 어렵다.

오랜만에 경전을 읽으니 그 재미와 감동이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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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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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를, 서쪽은 오행으로 금이니 서양 사람들은 금에 해당하는 폐기운이 강하고 동양인들은 상대적으로 신장으로 대표되는 수기가 강하단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상체가 당당하고 나이가 들면 어깨가 굽어지는 것이고, 동양인들은 나이가 들면 허리가 굽어진다는 얘기다.

일견 일리있는 얘기다. 허리가 굽어지는 것이 오히려 수기가 약해서 그쪽부터 약화되는 것이 아니냐는 반박도 가능하지만, 이런 얘기는 백퍼센트 논리적으로 적합성을 띠는게 아니니 그냥 넘어갈만 하다.

그러고 보니, 서양여자들이 가슴을 드러내는 옷차림을 선호하는데 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추운날 목도리를 두르고 장갑까지 끼고서도 가슴을 거의 훤하게 드러내는 티셔츠를 입고 다닌다. 반면 아시안들은 가슴이 아무리 당당해도 그렇게 노출하는 것은 많이 보지 못했다.

가슴의 추위를 모르는 여자들, 나이들면 과연 어깨가 움츠려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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