愛別離苦

소선재에서 2008. 9. 11. 23:03

愛別離苦 애별리고. 사랑하는 것들과 헤어지는 고통. 그 어느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는 여덟가지고통중의 하나이다. 이 애별리고를 요새 톡톡히 치르고 있다.

8월3일부터니까 한달하고도 열흘이 지났다. 오늘은 울면서 엄마아빠를 찾았다고, 아이의 할머니는 서둘러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전화기너머에서 아이는 아빠를 부른다. 첫음절 아에 강세를 주고 나서, 잠시 멈추고서는 곧이어 빠를 길게 끈다. 피아노의 솔과 라, 기본자리에서 한옥타브 더 높은 음이다.

지난 22개월의 시간이 아이에게 얼마만큼이나 기억으로 남아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한달하고도 열흘이 지난 지금, 아이는 아직도 아빠를 찾고 아빠를 부른다는 것이다.

나는 그 솔!라~음을 기억하며 지난 22개월의 시간이 담긴 사진을 들춰본다. 한달하고도 열흘이 이렇게 긴 시간일 줄이야. 제대를 기다리는 말년병장때도 이렇진 않았었다. 세상일 중엔 겪어보지 않고서는 짐작이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짐작컨데, 아이가 아빠를 못 보는 고통보다, 내가 아이를 못 보는 고통이 더 크다. 뼈속까지 아파지기 전에 다시 만나야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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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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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학교 역경원에서 펴낸 한글대장경본으로 중아함경을 읽었다. 중아함경은 아함부경전의 하나다. 발행년도가 1967년이다. 세로쓰기에 촘촘한 2단편집은 물론이고 묵은 책 냄새는 과연 40년의 세월을 느끼게 했다. 다행히 한자가 많지는 않아 읽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어떤 경전은 불법과 세존을 찬탄하는 내용이 길어 지루한 점도 있는데, 아함경은 초기경전답게 일화중심이어서 읽는데 지루하지 않다. 물론, 경전의 특성상 반복되는 부분이 많긴 하나, 이러한 반복은 오히려 이해를 높이는 측면도 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노차경'과 '유행경'이다. 노차경은 노차라는 비구와 부처님과의 대화를 실은 경전이다.  그중 부처님께서 '그렇지 않다. 나라는 생각이 있어 나라고 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라는 말씀이 특히 눈을 사로잡았다.

유행경은 부처님 열반시의 일을 기록한 경전이다. 굉장히 생생하게 묘사가 되어 있어서 읽는 내내 마치 영화를 보는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자등명 법등명'이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으로 알고 있었다. 아주 틀린 건 아니지만 유행경에  나타난 부처님 최후의 말씀은 '방일하지 마라. 이것이 여래의 마지막 말이다'이다.

'방일하지 마라'. 대개 부지런히 수행에 정진하라라는 뜻으로 새겨진다. 팔리어로는 어떤 말인지 모르겠으나, 한자어인 방일을 보면 의 일에는 게으르고 나태하다는 뜻이 있고, '방'이라는 글자는 놓아버린다라는 뜻이 있다. 여기에 방점을 일에다가 두면 부지런해야한다는 측면이 크고, 방에 초점을 맞추면 놓아버리지 않고 꼭 붙잡아둔다는 뜻이 크다.

방일하지 말라에는 부지런히 힘써야 한다는 뜻도 있겠지만,  수행의 방편을 놓지 않고 매진해야한다는 뜻도 아울러 새겨야한다는 게 아닌가 싶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고 아난존자와 마하가섭과의 대립도 경전을 소개하고 있다. 부처님의 다비가 7일동안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불을 붙이려해도 불이 붙질 않았다고 한다. 마하가섭존자가 7일후 도착하고 나서야 다비가 진행됐는데, 아마 이것은 당시 승단내에 마하가섭존자의 세력이 컸다는 것을 나타내는게 아닌가 싶다. 마하가섭존자가 아난존자에게 부처님의 모습을 뵙고자 청하나 아난존자는 이미 장례준비가 끝난 점을 들어 거절한다. 이에 부처님이 관밖으로 발을 내보였다고 되어있다.

아난존자의 거절이유가 마하가섭존자에 대한 부담감때문에 그랬는지, 아니면 경전에 나타난 그대로 이미 준비가 다 끝난 상태여서 거절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부처님의 발이 밖으로 나왔다는 것도 어떻게 해석이 되야할지 잘 모르겠다. 마하가섭존자에게 법이 전해졌다는 염화시중의 미소처럼 해석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마하가섭존자가 아난존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의 시신을 친견한 것인지 나로서는 알기 어렵다.

오랜만에 경전을 읽으니 그 재미와 감동이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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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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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를, 서쪽은 오행으로 금이니 서양 사람들은 금에 해당하는 폐기운이 강하고 동양인들은 상대적으로 신장으로 대표되는 수기가 강하단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상체가 당당하고 나이가 들면 어깨가 굽어지는 것이고, 동양인들은 나이가 들면 허리가 굽어진다는 얘기다.

일견 일리있는 얘기다. 허리가 굽어지는 것이 오히려 수기가 약해서 그쪽부터 약화되는 것이 아니냐는 반박도 가능하지만, 이런 얘기는 백퍼센트 논리적으로 적합성을 띠는게 아니니 그냥 넘어갈만 하다.

그러고 보니, 서양여자들이 가슴을 드러내는 옷차림을 선호하는데 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추운날 목도리를 두르고 장갑까지 끼고서도 가슴을 거의 훤하게 드러내는 티셔츠를 입고 다닌다. 반면 아시안들은 가슴이 아무리 당당해도 그렇게 노출하는 것은 많이 보지 못했다.

가슴의 추위를 모르는 여자들, 나이들면 과연 어깨가 움츠려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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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과 나

소선재에서 2008. 8. 19. 16:13


丹. 붉을 단 . 그러니까 님 향한 일편丹心의 단이기도 하고, 단전호흡의 단이기도 한 그 단이다. 이 글자가 책 제목을 달고 나온 적이 1980년대 후반이다. 김정택이라는 이로 기억하는데 소설형식으로 도가수련을 한 노인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축지법을 하고 경공술을 펼치는 얘기가 사실감있게 그려져 당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책이다. 당시 대한민국은 70년대를 지나 부의 축적의 시대에 접어들던 때였다. 굶주림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점점 더 행동반경을 넓히기 시작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민족주의의 발호였다. 먹고 살만하니 내가 - 아니, 우리가 -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 것이다.

이 책은 이런 흐름의 처음에 있던 책이었다. 백두산 동이족의 우수함. 그 부제가 말하는 한민족의 자긍심은 시대의 흐름이기도 하고, 또한 시대의 흐름에 따르는 결과물이기도 했다. 이 책 이후에 서점에는 한민족의 우수성에 대해 역설하는 책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김일부의 정역도 그렇고, 증산도의 책들도 한 몫했다. 이런 책들의 배경 - 학술적인 가치는 별로 없지만 - 은 동양의 사상인데, 공통점은 동양사상의 원류를 죄다 한민족의 것으로 갖다 붙이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천오백년전에는 한민족이 없었으므로, 그들이 찾은 건 동이족이라는 말이었다. 그때의 동이족이 지금의 한민족이라는 것이다. 결론 또한 천편일률적이어서, 앞으로의 시대는 후천시대가 됐건 용화세상이 됐건 간에, 한민족이 이 세계를 영도하는 민족이 되고 이 세상은 한민족의 지도아래 낙원이 된다는 것이다.

30년가까지 지난 지금까지도 이런 얘기들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역학쪽에서는 지축이 바로 서는 후천이 이미 도래했다고 하고, 단전호흡을 하는 기업에서는 한민족의 우수성을 근거로 그들의 상품을 팔고 있다. 한국에서 열린 월드컵때 우리는 얼마나 많이 치우천황의 얘기를 들어야만 했는가? 이런 얘기들이 사실이라면 그러면 언제 한민족은 세계의 제일민족이 되는 것인가?

나는 생각해본다. 예언들은 이미 성취됐을수도 있다고. 아시아에서 한국의 인기는 독보적이다. 한국은 일본과 같은 침략자의 이미지도 없다. 베이징올림픽에서 한국은 중국빼고 아시아를 제패했다. 그리고, 말끝마다 들이대는 경제규모 세계 10위의 경제대국. 그게 아니라도 사실 한국보다 더 잘 사는 나라는 없다. 다들 힘들게 살아서 그렇지, 먹고 자고 좋은 옷에 차에 한국만큼 잘 사는 나라 찾기가 쉽지 않다.

메이드 인 코리아보다 좋은 물건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 된 것이다. 정말 지축이 바로 서고 후천개벽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그 못살던 한국이 더이상 아시아는 놀 물이 안되고, 이제는 구미와 나란히 서니 말이다. 그런데, 나는 의아하다. 이렇게 한민족이 세계를 영도하는 민족이 되었는데, - 또는 거의 다 되고 있는데, 사람들은 여전히 불만이 가득해 보인다. 한민족이 세계 제일의 민족이 된다는 건, 아마 그 민족의 구성원들에게는 해당이 안 되는 얘기인가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세계에서 제일가는 민족이 사는 건 어느 누구보다도 더 힘들다고 하니 말이다.

그렇다면 말인데, 민족이 잘 나가는 것과 내가 잘 사는 것과는 별개 아닌가? 한민족의 우수성이 실현되는 지금, 우리는 새삼 배워야할지 모른다. 아~ 민족과 나는 별개구나. 금메달과 태극기를 보며, 세계를 놀라게 하는 한민족의 우월함을 보며, 우리는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국가나 민족이 잘났다고 내가 잘난게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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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는 참으로 소탈하다. 도대체 꾸밈이 없다.

인도 남부 어느 사회단체에 연사로 초청되었을 때였다. 행사가 끝나고 만찬이 준비되어 있었다. 인도에서는 상식적으로 누구를 초대하는 식사거나 또 좀 잘사는 사람들의 식사는 거의가 채식이다. 이날도 그 단체에서는 당연히 달라이 라마도 채식주의자일 것으로 알고 전통대로 채식 위주로 먹을거리를 장만했다.

그런데 행사가 끝나고 만찬장에 들어갈 때 달라이 라마는 ‘Non Veg.’, 즉 채식이 아닌 고기도 먹는 식당으로 들어간 것이다(티베트 불교에서는 육식이 금지돼 있지 않다). ‘Non Veg.’ 쪽의 음식을 ‘조촐하게’ 준비한 주최 측은 적이 당황했다.

하지만 달라이 라마는 식당에서 “저는 순수한 채식주의자는 아니고, 티베트식으로 가끔 고기도 먹지요”라면서 그 소박하고 평범한 음식을 웃어 가면서 맛있게 들었다. 이튿날 그 지방 신문에 큰 활자로 ‘달라이 라마는 채식가가 아니다’란 표제와 함께 전날 밤에 있었던 일이 상세히 보도되었다.

이런 단순한 일도 많지만 가끔 외국인들이나 명상가들이 달라이 라마에게 “당신은 깨달았는가” 하는 질문을 많이 한다. 그러면 그는 “내가 깨닫다니요. 내가 부처나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라니요” 하며 얼른 법상 위의 물을 한 잔 들이켜면서, “보세요, 부처나 보살이라면 이렇게 목이 타서 물을 마시겠습니까” 하고 답한다.

또 고개를 숙여 뒷목 부분을 보여 주며 “요즘 여기에 종기가 나서 잘 때도 불편하고요” 하면서 웃음을 자아낸다. 그는 끝까지 부처님의 제자일 뿐이며 출가 스님들과 똑같이 매일 경전 읽고 공부하는 한 승려임을 소탈하게 말한다.

필자도 한국 스님들 중 몇 명이 이와 똑같은 질문을 해 통역했던 일이 기억난다.

한 스님은 법문을 듣고 있다가 “그러면 당신은 깨달았습니까” 하고 좀 거북한 질문을 했다.

달라이 라마는 꽤 실망한 모습으로 한참을 계시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얼마 있다가, “예, 상대방이 깨달았는지 안 깨달았는지는 본인이 지혜의 눈을 갖췄다면 알아볼 수 있는 거지요”라고만 답하셨던 게 기억난다

또 한 스님은 나를 보자마자, “이곳에 많은 스님이 저리 공부도 않고 허송세월을 하는데 빨리 화두 하나씩 가르쳐 주어 공부하도록 하지 뭐 하는가”라는 말까지 했다. 모든 종교와 사상은 자기 문화에 맞게 발전되고 익어 가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 것이 옳다고 해서 어찌 다른 종교인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할 수 있을까. 황새가 뱁새 보고, ‘네 다리는 왜 그리 짧은가, 나처럼 길게 빼 주마’ 하는 식이 아니겠는가.

달라이 라마는 참 바쁘게 지낸다. 세계 곳곳을 방문하며 인종과 종교, 국가를 초월해 이 시대에 맞는 메시지를 전한다. 우선 부처의 제자인 한 스님으로서 꼭 불교만을 얘기하지는 않는다. 당신 표현대로 ‘인간성의 향상과 종교 간의 화합이 나의 보편적인 가르침의 목적’이라고 한다. 이 시대에 과학이 있고, 다 열린 세상에서 꼭 어느 한 종교만이 진리라고 말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특히 유럽의 불교단체에서 법문할 때는 보리심(菩提心·이웃에 헌신하는 마음)과 공성(空性)에 기반을 두고 말하며, 불교인으로서의 삶은 연기(緣起)법에 의거한 비폭력의 삶임을 강조한다.

대승불교의 큰 스승 용수(2∼3세기) 보살이 수행하던 곳으로 일컬어지는 인도 남부 아마라바티에서 올해 1월에 열린 칼라차크라 행사에는 한국에서도 200여 명이 참석했다. 여기서도 달라이 라마는 용수 보살의 ‘중론(中論)’ 강의를 통해 세계 평화를 강조했다. 1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모인 법회 장소에서 12일간 내내 보리심의 사상과 실천을 법문했다.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에서 인도로 망명 나온 지 1년이 지난 1960년의 일이다. 티베트 전역에서 독립을 위해 반(反)중국 민간부대가 설립되어 각처에서 중국군에 피해를 줄 때였다. 그중 용감하고 힘이 있는 단체가 캄파 유격대였다. 그들은 네팔 접경지대인 히말라야 산중에 근거를 두고 중국군을 괴롭혔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중국 정부는 네팔 정부에 티베트 게릴라들이 네팔 지역에 머물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그 높고 넓은 히말라야 지역의 어디를 가서 뭘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결국 네팔 정부는 히말라야 산속에 흩어져 있는 게릴라들을 해산해 달라고 티베트 망명정부로 연락했다.

달라이 라마는 곧 육성을 녹음해 네팔 산속에 있는 유격대에 인편으로 전했다. 산속의 전 부대원은 자신들의 희망인 달라이 라마가 드디어 말씀을 준다고 용기백배해 다 모였다. 대장 이하 모든 티베트 게릴라는 녹음기에 삼배의 정례를 올린 뒤 긴장한 채로 녹음기에 집중했다.

그러나 녹음기에서 흘러나온 말씀은 이랬다. “나라를 위하여 고생하고 싸우는 것은 훌륭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것은 법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불살생(不殺生)을 첫째의 덕목으로 가르쳤습니다. 내가 그대들의 뜻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부처님의 법을 펴는 부처의 한 제자로서 명합니다. 여러분이 나를 믿는다면 법을 따라야 합니다. 모두 총을 버리고 나를 따라 인도로 망명해 오든지, 아니면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십시오.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원합니다. 중국 사람도 우리와 똑같아서 불행을 원치 않습니다. 남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바르지 않습니다….”

달라이 라마의 말이 이어지자 이쪽저쪽에서 훌쩍거리기 시작하더니 모든 사람이 대성통곡하는 자리로 변해 버렸다.

말씀이 끝나고 사태가 수습되었을 때 부대의 대장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자, 우리 모두는 부처님과 같은 존자님 달라이 라마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 하지만 군대의 대장으로서 총을 버린다는 것은 적에게 굴복하는 것이니 나는 이곳에서 대표로 자결을 하겠다.” 그러고는 부대를 해산한 뒤 끝내 독배를 마시고 생을 마쳤다. 이후로 티베트 내의 모든 유격부대는 해체되었다.

1998년 한 법문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 달라이 라마란 칭호를 갖고 만난 정치가 학자 수행자 과학자 연예인 스포츠인 등 수많은 유명인사 가운데 당신이 가장 감동받고 최고로 훌륭한 사람으로 인정한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이 나왔다.

“내가 만났던 수많은 분 중에서 성자와 같은 놀라운 분은 토머스 머튼 신부님이었습니다. 한번 만나 보고는 계속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어서 모든 일정을 연기 취소하고 3일 동안 함께 얘기를 나눴습니다.”

머튼 신부는 1960년대 초 베트남전 반전운동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그 후 머튼 신부는 동양사상에 대해 깊은 공부를 하고자 태국으로 갔는데, 도착하던 날 밤 호텔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해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달라이 라마는 가끔 기독교 단체의 초청에도 참석하며, 심지어 영국의 어느 수도원에 초청돼 개인적으로 성경 해석까지도 했다. 그때 참석한 성직자는 물론 일반 청중도 감동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때의 연설내용은 ‘달라이 라마, 예수를 말하다’란 책으로 나왔으며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됐다.

1988년이었던가. 당신과 독대하면서 말씀을 나누던 중, 신라시대 원측 스님이 주석을 한 논서가 티베트장경에 있다는 것을 알고 베이징판의 복사본을 보여 드렸더니 얼른 앞쪽을 읽어 보고 “아, 이것은 중국의 학자 스님인 웬측의 논서로 ‘해심밀경소’라고 하는데, 우리 티베트장경에 몇 개 안 되는 한문본에서 티베트어로 번역된 귀중한 유식 논서입니다”라고 했다. 내가 얼른 “아닌데요, 그분은 한국 스님이고 원측이라고 합니다”고 했더니 크게 놀랐다. “아니, 웬측 스님이 한국 스님입니까?” “그럼요, 우리나라 신라 때 스님이지요. 생존 연대는 서기 613∼696년이고요.” 이 대화 이후로 티베트 불교 강단에서는 발음부터 원측으로 고쳐졌고, 중국인이 아닌 한국인으로 정정해 가르치고 있다.

4일 티베트 평화교육 워크숍에서
4일 다람살라 티베트 어린이 마을학교에서 아일랜드 노벨평화상 수상자 베티 윌리엄스 주관으로 열린 이틀간의 평화교육 워크숍에서 달라이 라마가 개막연설을 했다. 다람살라=AP 연합뉴스
티베트 불교의 교학체계에서는 유식(唯識)과 중관(中觀)철학이 가장 중요한 근본이다. 이곳에서 티베트 큰스님들의 법문은 꽤 길다. 하루 종일 하면서 길게는 열흘도 넘게 이어진다. 법문에는 꼭 교재가 있다. 지난 3년간 달라이 라마는 ‘입보리행론’을 교재로 한국인들을 위한 법문을 했다. 나는 옛날 어느 한 큰스님(올해 79세인 리종 린포체)이 법문을 100일씩 2년에 걸쳐 나눠 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것도 하루 종일 법문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아마 나로서는 며칠만 하면 바닥이 나서 속된 말로 밑천이 달려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이곳 티베트 승가의 체제는 경장에 철저히 의거한 교육이라서 어떤 법회든 교재가 꼭 있다. 필자가 한국에서 큰스님의

薰??들을 때 불만을 가진 한 가지는 부처님의 말씀이 아닌 ‘고인이 이르되’ 아니면 ‘전설 따라 삼천리’ 한 편 정도로 시작하고 끝을 내는 법문이 많았다는 점이다.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불교에 대해 늘 이렇게 말한다. “우리 티베트 불교는 날란다(5세기 설립됐다 12세기에 이슬람군에 의해 파괴된 일종의 불교 대학으로 불교 연구의 중심지였음)의 전통을 계승, 발전한 겁니다. 꼭 티베트 불교라 할 것이 없지요. 옛날 인도의 큰 스승들은 거의 날란다 출신이었고, 특히 대승불교의 중관사상에 기반을 둔 사상체계로 봅니다. 거기에서 티베트 옷을 입은 수행체계로 이뤄지지요. 어쨌든 티베트 불교는 소승·대승, 현교와 밀교·금강승까지 두루 포함한 불교체제입니다. 소승을 알지 못하면 어찌 대승을 알겠습니까. 저는 아침마다 불단에 예불을 올릴 때, 거의 날란다 출신의 큰 스승이신 용수, 무착, 세친, 진나, 적천, 법칭, 월칭 등으로 이어지는 열일곱 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예를 올립니다. 이분들의 논소(論疏)로 지금까지 우리의 불법이 고스란히 전해져 내려온 것 아닙니까. 우리는 부처님이 직접 설하신 경(經)과 이후 큰 스승들의 논(論)과 소(疏)를 많이 보아 가면서 자기 수행을 해 나가야 합니다. 법보가 아닙니까. 이렇게 경론소 법에 의지해 공부하며 나아갈 때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에 빠지는 오류를 범하지 않으면서 끝내는 보리심(菩提心)

?기반으로 한 공성(空性·연기법의 근본)의 깨달음에 이르니까요. 그래서 저는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 중에 법보의 소중함을 가장 위에 둔답니다.”

사실 티베트 사찰의 법당에 가 보면 우리 한국의 전통 사찰과 비슷하지만 한 가지 다른 게 있다. 그건 불상 좌우에 꼭 모든 경전을 모셔 둔다는 점이다. 부처님과 법을 상징하는 경전을 함께 예경한다. 티베트에서는 상식적으로 불상은 부처님을 나타내고, 경전은 부처님이 설한 법을 나타내며, 이 법을 이끌고 지키는 승가(僧家·스님들의 공동체)를 탑으로 나타낸다. 불교가 중국, 한국으로 이어오면서 탑은 불사리를 모시거나 큰스님의 유골을 모시는 전통으로 변했지만 티베트에서는 탑이 삼보의 한 면으로 간주돼 부처님의 마음(心)을 상징한다. 그래서 티베트에는 어디에고 간에 큰 탑이 있고 그 주위를 돌면서 염불을 하며 마음을 정화하는 코라(시계방향의 탑돌이)의식을 하는 것이 하루 일과나 다름없는 일상적 행사다.


《달라이 라마는 다른 나라에 가서 연설하거나 불교를 얘기할 때 앞으로 인류가 무엇에 중점을 두고 살아가야 하는가를 말한다. 이 세계가 편리와 행복을 추구하면서 일으키는 자연 파괴를 막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가르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앞으로 인류는 두 가지를 규명해야 진정한 행복을 이룰 수 있다고 당신은 강조한다. 그 두 가지는 인간 의식의 규명과 몸의 내적인 성숙으로서 쿤달리니(丹·단)의 각성이다. 의식의 규명은 명상을 통한 깨달음이고, 쿤달리니의 각성은 명상을 통한 에너지의 전환이다. 즉, 명상만이 인류를 구제하고 서로 평화를 이루면서 살아가게 할 수 있는 기본이요 필수조건이란 설명이다.》


필자가 1987년 8월 1일 개인적으로 달라이 라마를 처음 만난 곳은 여기 다람살라가 아닌 라다크에 있는 초클람사르라는 조그만 절이었다. 그때 당신은 그곳에서 묵으셨다. 인도에 도착해 이 소식을 알고 라다크에 올라가서 절 사무실에 찾아갔는데 “지금은 명상 중이라 불가능하다”고 했다. 알고 보니 7월 한 달 동안 명상 중이었다. 명상이 끝난 후에는 가능하다고 해 끝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숙소로 돌아왔는데 이튿날 숙소로 연락이 왔다. 8월 1일 달라이 라마께서 만나겠다고.

어쨌든 한 달간의 강도 높은 명상을 끝낸 직후였는지 달라이 라마는 어떤 대단한 힘을 가졌고, 그러면서도 소탈하고 솔직했으며, 법에 정통해 믿음이 절로 갔다. 나는 긴장과 함께 삭발하고 목욕재계하고 당신의 알현실에 들어갔지만 당신은 맨발에 인도제(製) 싸구려 샌들을 신고 맞아 주었다. 합장과 함께 “프롬 코리아(From Korea)!”라며 긴장을 풀어 주면서 대화가 시작되었다. 사실 그때 나눈 1시간 반 정도의 이야기에서 나는 내 삶의 기반을 찾았다. 훗날 내 개인적인 수행기를 쓴다면 이때 받은 영감과 몸으로 겪은 내적인 체험을 꼭 밝히고 싶다.


당신은 법문 중 가끔 울먹이며 목이 메어 진행을 못 할 때가 있다. 나는 처음에 뭐 법문 중에 저런 일이 있나 하고 의아해 했지만 해를 거듭하면서 그 내용을 알게 되었다. 법과 진리를 설하다가 석가모니 부처님의 6년 고행담을 이야기할 때는 거의 설법이 중단되기 마련이다.

달라이 라마가 1987년 10월 인도 다람살라 남걀 사원 안의 티베트 망명정부 집무실에서 자신을 찾아온 서양 과학자들과 함께 불교 명상의 과학적 원리와 효력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사진 제공 청전 스님

불교의 근본인 보리심(菩提心)과 공성(空性)을 상세히 설명하는데 유독 보리심을 말할 때면 울음을 터뜨린다. 당신 말씀에 따르면 보리심은 깨달음의 씨앗이다. 티베트 불교의 최고 논서로 알려진 ‘람림’을 강의할 땐 여러 차례 법문이 멈춰진다. 필자는 재빨리 그 줄에 언제, 어느 날, 몇 시까지 적어 놓곤 했는데 5년여에 걸쳐 번역(지난해에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다)하고서야 그 숨은 뜻을 알게 되었다. 또 달라이 라마는 스승의 은혜를 말하다가는 말문이 막힌다. 법문을 자주 듣다 보니 당신은 이 네 가지를 설법하다가 끝내 격앙되어 말씀을 못 하는 것으로 헤아려진다.

티베트 승가(僧家)를 방문할 때 달라이 라마는 법문 이외의 말씀 중에 가끔 이런 말을 한다. “내가 걀와린포체라 해서 잔뜩 공양물을 챙겨 오는데 실은 내가 좋아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수행 잘하는 비구의 모습, 청정하고 내적인 실력을 갖춘 그런 수행자가 찾아오는 것을 좋아하고 기뻐한다. 단정한 승복을 차려입은 비구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지 않은가.” 그러면서 끝까지 당신은 우리와 똑같은 부처님의 제자인 한 비구임을 강조한다.

지금 티베트 난민은 세계 곳곳에 퍼져 있다. 유럽인들은 티베트 사람을 동양의 유대인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모인 곳에 먼저 절을 짓고 부처님과 경전을 모시며 스님과 함께한다. 8세기 인도의 고승 파드마삼바바는 티베트에 불교를 전하고 최초로 삼예사원이라는 절을 지은 뒤 승려를 양성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런 의미심장한 유언을 남겼다. “쇠로 된 새가 하늘을 날고, 바퀴 달린 말이 땅을 달릴 때, 너희 티베트족은 세상에 개미 떼처럼 흩어지리라. 하여 법(다르마)은 붉은족에 전해지리라.” 정말 티베트의 미래를 어찌 알고 이런 표현을 했는지 혀를 내두를 정도다. 붉은족은 서양 백인을 말한다. 그들의 얼굴이 희다고는 하지만 원래 빨간 얼굴의 종족이었다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제가 이 지구촌 곳곳에 불법의 씨앗을 뿌려 놓은 것 같습니다. 이 씨앗이 어떻게 싹이 터서 어떤 모습으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지는 제가 죽고 난 뒤의 일이겠지요”라고 말한다. 하긴 한 사상체계가 뿌리를 내리는 데는 300년 정도가 걸린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유럽에서 불교는 승가 위주의 모습이 아닌 재가(在家)자 중심의 공동체로 계승 발전하리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지금 인도에서 공부하고 있는 유럽 사람들의 진지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요사이는 이스라엘에서 온 출가승이 의외로 많다. 부다가야, 룸비니, 사르나트 등 불교 성지의 나무 밑에 앉아 명상하는 이는 거의 유럽에서 온 불자들이다. 우리나라나 동양권 성지순례객은 예경(禮敬)으로 절하고 염불하는 의식을 하면서 부산하지만, 서양 순례객은 끝없이 안으로 참배하고 명상하는 차분한 성지순례를 한다. 미래 서양 불교의 싹을 보는 듯해 희망을 갖는다.


한번은 단체로 왔던 한국 신도 한 분이 어떻게 하면 공부 중에 게으름을 떨쳐 버릴 수 있는지를 달라이 라마에게 물었다. 즉, 잠이 올 때 바늘로 꾹 찔러서 정신 바짝 차릴 듯한 그런 조언 한마디를 부탁한 것이다. 그대로 통역을 했더니 달라이 라마는 “제가 게으른 사람인데요”라고 대답했다. 다들 크게 웃었다. 달라이 라마는 이어 홱 돌아서 필자를 손으로 가리키며 “당신도 게으르죠” 하셨고 다시 좌중에 웃음이 터졌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 출가인이나 재가인 모두 공부할 때 게으름이 큰 장애입니다. 그러나 이 게으름을 쫓기 위한 한마디는 없습니다. 늘 지금 이 삶의 뿌리가 고(苦)인 것을 잊지 말고, 또 무상함을 놓치지 않을 때 점차 큰 보리심이 일어날 것입니다”라고 설명했다.

달라이 라마는 한없이 인자하고 웃음이 넘치는 분이다. 하지만 그런 달라이 라마가 준엄한 비판을 가할 때가 있다. 불심(佛心)의 근본을 잃고 물질과 허영을 좇는 스님들에 대해서다.

지난해 설날 아침 달라이 라마는 덕담이라기보다 좀 서글픈 말씀으로 새해 법문을 시작했다. 티베트 사람들은 설날 아침이면 달라이 라마의 덕담을 듣고 축복을 받으러 새벽부터 긴 줄을 서서 기다린다.

“우리가 망명해 온 지 46년째입니다. 그러나 내가 살고 있는 이 법당이 인도에서 가장 작고 초라한 절이 되어 버렸습니다. 요즘 티베트의 이름 가진 스님들은 수행이나 공부보다는 외국에 다니면서 시주 받아 큰 절 짓고 큰 불상 만드는 게 일인 것 같습니다. 신도들에게 귀감이 될 큰 스님들이 이름이나 타이틀은 토끼 귀처럼 길지만 그들의 덕행이나 공덕은 토끼 꼬랑지처럼 조그만 것 같습니다.” 설날에 침통한 목소리로 이런 뜻밖의 비탄의 말씀을 한 것이다.

그 후에도 달라이 라마는 공부하지 않고 외국에만 다니는 스님들에 대해 심한 비판의 말을 하고 있다. 올 칼라차크라 행사장에서도 “요 근래 이름 있는 스님들이 대만 등 불교국가에 다니면서 법을 이용하여 재산을 쌓고 호화롭게 살아가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면서 이것은 큰 죄악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달라이 라마의 이 같은 준엄한 비판은 예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정말 필자 생각으로도 큰 문제가 되었다. 옛날 망명 나와 가난할 때의 순수한 모습, 법을 지키고 공부하려는 모습은 보기 어렵다. 좀 이름이 있다 하면 외국에 다 나가 있고 아예 이쪽엔 다시 오지 않는다. 온다 해도 자기 개인 절을 많이 짓는다. 절 옆에 또 절을 짓고 있다.

달라이 라마(오른쪽)가 청전 스님과 한국과 티베트 불교의 상호교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후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 제공 청전 스님
1959년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에서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로 망명 왔을 때부터 이곳 다람살라에 머무른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지금 우타란찰 주의 무소리란 산중턱에 짐을 풀었다. 이듬해 여기로 옮겨와 실질적인 망명정부를 수립했다.

달라이 라마는 미래의 티베트에 무엇이 중요한지를 간파했다. 즉 티베트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경제 발전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내려오던 종교와 문화의 전통을 살리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한 것이다. 비록 나라는 빼앗겼어도 이 티베트의 정신과 문화가 있다면, 역사는 바뀌는 것이니 언제라도 자기 땅에 되돌아갈 희망이 있다는 게 그의 믿음이다.

처음 달라이 라마를 따라 넘어온 티베트 난민 1세대는 이제 거의 세상을 떠났고, 지금은 남은 노인들과 인도에서 태어난 제2세대가 대부분이다. 그동안 절도 많이 생겼고 불교학 학교도 생겼다. 필자가 1987년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다람살라가 지금같이 복잡하고 시끄러운 동네가 아니었다. 정부 호텔 한 개와 몇 개의 초라한 여관, 상가, 식당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달라이 라마의 1989년 노벨 평화상 수상 이후 큰 변화가 왔다. 지금은 많은 호텔, 상가, 식당이며 이상한 이름의 무슨 요가수련소 등등 저 멀리 산까지 파헤쳐 가며 많은 건물이 계속 들어서고 있다. 한국인도 끊이질 않는다. 심지어 한국 식당이 두 개나 생겼다.

망명 나온 세월이 길어지다 보니 티베트 정신이 희석되어 가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처음 여기 왔을 때 달라이 라마의 법문이 있다면 티베트 상점은 100% 문을 닫고 법회장에 나갔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달라이 라마가 법문한다 해도 가게 문을 열고 영업을 한다. 이렇게 물질의 힘은 큰가 보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어느 절 개원식 때 일이 생각난다. 달라이 라마는 법당에 앉자마자 크게 만들어 놓은 불상을 가리키며 “만약 훗날 이 불상이 넘어지거나 한다면 수십 명이 깔려 죽게 될 수도 있는데 그땐 부처가 사람 죽였다는 소문이 나겠지”라면서 법문 이전에 따가운 비판부터 했다. 특히 그날 대만에서 시주했다는 많은 사람이 특별석에 앉아 있었는데 그곳을 향해서 “보시한다는 자체야 좋지만 이 보시가 어떻게 쓰이는지 알고 하십시오”라며 좀 무안한 말씀을 했다. 내가 봐도 정말 큰 건물에 큰 불상이었다.

달라이 라마가 자주 하는 말씀이 가슴을 때린다.

“지금 이 시대에는 절에 이렇게 많은 스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출가하여 청정한 부처님 제자로 수행해 가든지 사회에 봉사하는 출가의 삶은 인정되지만 그냥 승가에 있어 편히 먹고 살기 위한 무위도식의 그런 출가인은 없어야 됩니다. 꼭 청정하고 공부하는 바른 출가인이 승가에 있어야만 합니다.”

■ 연재를 마치며

달라이 라마는 필자에게 몇 번이나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한국에 가면 티베트 불교를 전하려 하지 말라. 내가 전 세계를 다니면서 불교를 말하는 것은 그곳에 불교가 없기 때문이다. 당신 나라는 우리보다 빠른 불교 전래국가로 좋은 전통과 문화가 있으니 그것을 살리는 것이 좋고, 훗날 거기에 티베트 불교의 장점을 덧붙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선 당신은 두 나라 불교의 교량 역할을 하라. 그리고 당신 나라에서 어떤 고급 밀교 수행법을 말하는 것보다 끝까지 삶의 뿌리가 고(苦)와 무상(無常)임을 가르쳐라. 당신 나라는 첨단의 나라, 편리하고 빠른 나라여서 고와 무상을 생각할 틈이 없는 나라니까. 거기에 보리심을 얘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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