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과 나

소선재에서 2008. 8. 19. 16:13


丹. 붉을 단 . 그러니까 님 향한 일편丹心의 단이기도 하고, 단전호흡의 단이기도 한 그 단이다. 이 글자가 책 제목을 달고 나온 적이 1980년대 후반이다. 김정택이라는 이로 기억하는데 소설형식으로 도가수련을 한 노인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축지법을 하고 경공술을 펼치는 얘기가 사실감있게 그려져 당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책이다. 당시 대한민국은 70년대를 지나 부의 축적의 시대에 접어들던 때였다. 굶주림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점점 더 행동반경을 넓히기 시작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민족주의의 발호였다. 먹고 살만하니 내가 - 아니, 우리가 -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 것이다.

이 책은 이런 흐름의 처음에 있던 책이었다. 백두산 동이족의 우수함. 그 부제가 말하는 한민족의 자긍심은 시대의 흐름이기도 하고, 또한 시대의 흐름에 따르는 결과물이기도 했다. 이 책 이후에 서점에는 한민족의 우수성에 대해 역설하는 책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김일부의 정역도 그렇고, 증산도의 책들도 한 몫했다. 이런 책들의 배경 - 학술적인 가치는 별로 없지만 - 은 동양의 사상인데, 공통점은 동양사상의 원류를 죄다 한민족의 것으로 갖다 붙이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천오백년전에는 한민족이 없었으므로, 그들이 찾은 건 동이족이라는 말이었다. 그때의 동이족이 지금의 한민족이라는 것이다. 결론 또한 천편일률적이어서, 앞으로의 시대는 후천시대가 됐건 용화세상이 됐건 간에, 한민족이 이 세계를 영도하는 민족이 되고 이 세상은 한민족의 지도아래 낙원이 된다는 것이다.

30년가까지 지난 지금까지도 이런 얘기들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역학쪽에서는 지축이 바로 서는 후천이 이미 도래했다고 하고, 단전호흡을 하는 기업에서는 한민족의 우수성을 근거로 그들의 상품을 팔고 있다. 한국에서 열린 월드컵때 우리는 얼마나 많이 치우천황의 얘기를 들어야만 했는가? 이런 얘기들이 사실이라면 그러면 언제 한민족은 세계의 제일민족이 되는 것인가?

나는 생각해본다. 예언들은 이미 성취됐을수도 있다고. 아시아에서 한국의 인기는 독보적이다. 한국은 일본과 같은 침략자의 이미지도 없다. 베이징올림픽에서 한국은 중국빼고 아시아를 제패했다. 그리고, 말끝마다 들이대는 경제규모 세계 10위의 경제대국. 그게 아니라도 사실 한국보다 더 잘 사는 나라는 없다. 다들 힘들게 살아서 그렇지, 먹고 자고 좋은 옷에 차에 한국만큼 잘 사는 나라 찾기가 쉽지 않다.

메이드 인 코리아보다 좋은 물건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 된 것이다. 정말 지축이 바로 서고 후천개벽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그 못살던 한국이 더이상 아시아는 놀 물이 안되고, 이제는 구미와 나란히 서니 말이다. 그런데, 나는 의아하다. 이렇게 한민족이 세계를 영도하는 민족이 되었는데, - 또는 거의 다 되고 있는데, 사람들은 여전히 불만이 가득해 보인다. 한민족이 세계 제일의 민족이 된다는 건, 아마 그 민족의 구성원들에게는 해당이 안 되는 얘기인가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세계에서 제일가는 민족이 사는 건 어느 누구보다도 더 힘들다고 하니 말이다.

그렇다면 말인데, 민족이 잘 나가는 것과 내가 잘 사는 것과는 별개 아닌가? 한민족의 우수성이 실현되는 지금, 우리는 새삼 배워야할지 모른다. 아~ 민족과 나는 별개구나. 금메달과 태극기를 보며, 세계를 놀라게 하는 한민족의 우월함을 보며, 우리는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국가나 민족이 잘났다고 내가 잘난게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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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는 참으로 소탈하다. 도대체 꾸밈이 없다.

인도 남부 어느 사회단체에 연사로 초청되었을 때였다. 행사가 끝나고 만찬이 준비되어 있었다. 인도에서는 상식적으로 누구를 초대하는 식사거나 또 좀 잘사는 사람들의 식사는 거의가 채식이다. 이날도 그 단체에서는 당연히 달라이 라마도 채식주의자일 것으로 알고 전통대로 채식 위주로 먹을거리를 장만했다.

그런데 행사가 끝나고 만찬장에 들어갈 때 달라이 라마는 ‘Non Veg.’, 즉 채식이 아닌 고기도 먹는 식당으로 들어간 것이다(티베트 불교에서는 육식이 금지돼 있지 않다). ‘Non Veg.’ 쪽의 음식을 ‘조촐하게’ 준비한 주최 측은 적이 당황했다.

하지만 달라이 라마는 식당에서 “저는 순수한 채식주의자는 아니고, 티베트식으로 가끔 고기도 먹지요”라면서 그 소박하고 평범한 음식을 웃어 가면서 맛있게 들었다. 이튿날 그 지방 신문에 큰 활자로 ‘달라이 라마는 채식가가 아니다’란 표제와 함께 전날 밤에 있었던 일이 상세히 보도되었다.

이런 단순한 일도 많지만 가끔 외국인들이나 명상가들이 달라이 라마에게 “당신은 깨달았는가” 하는 질문을 많이 한다. 그러면 그는 “내가 깨닫다니요. 내가 부처나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라니요” 하며 얼른 법상 위의 물을 한 잔 들이켜면서, “보세요, 부처나 보살이라면 이렇게 목이 타서 물을 마시겠습니까” 하고 답한다.

또 고개를 숙여 뒷목 부분을 보여 주며 “요즘 여기에 종기가 나서 잘 때도 불편하고요” 하면서 웃음을 자아낸다. 그는 끝까지 부처님의 제자일 뿐이며 출가 스님들과 똑같이 매일 경전 읽고 공부하는 한 승려임을 소탈하게 말한다.

필자도 한국 스님들 중 몇 명이 이와 똑같은 질문을 해 통역했던 일이 기억난다.

한 스님은 법문을 듣고 있다가 “그러면 당신은 깨달았습니까” 하고 좀 거북한 질문을 했다.

달라이 라마는 꽤 실망한 모습으로 한참을 계시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얼마 있다가, “예, 상대방이 깨달았는지 안 깨달았는지는 본인이 지혜의 눈을 갖췄다면 알아볼 수 있는 거지요”라고만 답하셨던 게 기억난다

또 한 스님은 나를 보자마자, “이곳에 많은 스님이 저리 공부도 않고 허송세월을 하는데 빨리 화두 하나씩 가르쳐 주어 공부하도록 하지 뭐 하는가”라는 말까지 했다. 모든 종교와 사상은 자기 문화에 맞게 발전되고 익어 가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 것이 옳다고 해서 어찌 다른 종교인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할 수 있을까. 황새가 뱁새 보고, ‘네 다리는 왜 그리 짧은가, 나처럼 길게 빼 주마’ 하는 식이 아니겠는가.

달라이 라마는 참 바쁘게 지낸다. 세계 곳곳을 방문하며 인종과 종교, 국가를 초월해 이 시대에 맞는 메시지를 전한다. 우선 부처의 제자인 한 스님으로서 꼭 불교만을 얘기하지는 않는다. 당신 표현대로 ‘인간성의 향상과 종교 간의 화합이 나의 보편적인 가르침의 목적’이라고 한다. 이 시대에 과학이 있고, 다 열린 세상에서 꼭 어느 한 종교만이 진리라고 말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특히 유럽의 불교단체에서 법문할 때는 보리심(菩提心·이웃에 헌신하는 마음)과 공성(空性)에 기반을 두고 말하며, 불교인으로서의 삶은 연기(緣起)법에 의거한 비폭력의 삶임을 강조한다.

대승불교의 큰 스승 용수(2∼3세기) 보살이 수행하던 곳으로 일컬어지는 인도 남부 아마라바티에서 올해 1월에 열린 칼라차크라 행사에는 한국에서도 200여 명이 참석했다. 여기서도 달라이 라마는 용수 보살의 ‘중론(中論)’ 강의를 통해 세계 평화를 강조했다. 1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모인 법회 장소에서 12일간 내내 보리심의 사상과 실천을 법문했다.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에서 인도로 망명 나온 지 1년이 지난 1960년의 일이다. 티베트 전역에서 독립을 위해 반(反)중국 민간부대가 설립되어 각처에서 중국군에 피해를 줄 때였다. 그중 용감하고 힘이 있는 단체가 캄파 유격대였다. 그들은 네팔 접경지대인 히말라야 산중에 근거를 두고 중국군을 괴롭혔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중국 정부는 네팔 정부에 티베트 게릴라들이 네팔 지역에 머물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그 높고 넓은 히말라야 지역의 어디를 가서 뭘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결국 네팔 정부는 히말라야 산속에 흩어져 있는 게릴라들을 해산해 달라고 티베트 망명정부로 연락했다.

달라이 라마는 곧 육성을 녹음해 네팔 산속에 있는 유격대에 인편으로 전했다. 산속의 전 부대원은 자신들의 희망인 달라이 라마가 드디어 말씀을 준다고 용기백배해 다 모였다. 대장 이하 모든 티베트 게릴라는 녹음기에 삼배의 정례를 올린 뒤 긴장한 채로 녹음기에 집중했다.

그러나 녹음기에서 흘러나온 말씀은 이랬다. “나라를 위하여 고생하고 싸우는 것은 훌륭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것은 법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불살생(不殺生)을 첫째의 덕목으로 가르쳤습니다. 내가 그대들의 뜻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부처님의 법을 펴는 부처의 한 제자로서 명합니다. 여러분이 나를 믿는다면 법을 따라야 합니다. 모두 총을 버리고 나를 따라 인도로 망명해 오든지, 아니면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십시오.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원합니다. 중국 사람도 우리와 똑같아서 불행을 원치 않습니다. 남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바르지 않습니다….”

달라이 라마의 말이 이어지자 이쪽저쪽에서 훌쩍거리기 시작하더니 모든 사람이 대성통곡하는 자리로 변해 버렸다.

말씀이 끝나고 사태가 수습되었을 때 부대의 대장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자, 우리 모두는 부처님과 같은 존자님 달라이 라마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 하지만 군대의 대장으로서 총을 버린다는 것은 적에게 굴복하는 것이니 나는 이곳에서 대표로 자결을 하겠다.” 그러고는 부대를 해산한 뒤 끝내 독배를 마시고 생을 마쳤다. 이후로 티베트 내의 모든 유격부대는 해체되었다.

1998년 한 법문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 달라이 라마란 칭호를 갖고 만난 정치가 학자 수행자 과학자 연예인 스포츠인 등 수많은 유명인사 가운데 당신이 가장 감동받고 최고로 훌륭한 사람으로 인정한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이 나왔다.

“내가 만났던 수많은 분 중에서 성자와 같은 놀라운 분은 토머스 머튼 신부님이었습니다. 한번 만나 보고는 계속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어서 모든 일정을 연기 취소하고 3일 동안 함께 얘기를 나눴습니다.”

머튼 신부는 1960년대 초 베트남전 반전운동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그 후 머튼 신부는 동양사상에 대해 깊은 공부를 하고자 태국으로 갔는데, 도착하던 날 밤 호텔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해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달라이 라마는 가끔 기독교 단체의 초청에도 참석하며, 심지어 영국의 어느 수도원에 초청돼 개인적으로 성경 해석까지도 했다. 그때 참석한 성직자는 물론 일반 청중도 감동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때의 연설내용은 ‘달라이 라마, 예수를 말하다’란 책으로 나왔으며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됐다.

1988년이었던가. 당신과 독대하면서 말씀을 나누던 중, 신라시대 원측 스님이 주석을 한 논서가 티베트장경에 있다는 것을 알고 베이징판의 복사본을 보여 드렸더니 얼른 앞쪽을 읽어 보고 “아, 이것은 중국의 학자 스님인 웬측의 논서로 ‘해심밀경소’라고 하는데, 우리 티베트장경에 몇 개 안 되는 한문본에서 티베트어로 번역된 귀중한 유식 논서입니다”라고 했다. 내가 얼른 “아닌데요, 그분은 한국 스님이고 원측이라고 합니다”고 했더니 크게 놀랐다. “아니, 웬측 스님이 한국 스님입니까?” “그럼요, 우리나라 신라 때 스님이지요. 생존 연대는 서기 613∼696년이고요.” 이 대화 이후로 티베트 불교 강단에서는 발음부터 원측으로 고쳐졌고, 중국인이 아닌 한국인으로 정정해 가르치고 있다.

4일 티베트 평화교육 워크숍에서
4일 다람살라 티베트 어린이 마을학교에서 아일랜드 노벨평화상 수상자 베티 윌리엄스 주관으로 열린 이틀간의 평화교육 워크숍에서 달라이 라마가 개막연설을 했다. 다람살라=AP 연합뉴스
티베트 불교의 교학체계에서는 유식(唯識)과 중관(中觀)철학이 가장 중요한 근본이다. 이곳에서 티베트 큰스님들의 법문은 꽤 길다. 하루 종일 하면서 길게는 열흘도 넘게 이어진다. 법문에는 꼭 교재가 있다. 지난 3년간 달라이 라마는 ‘입보리행론’을 교재로 한국인들을 위한 법문을 했다. 나는 옛날 어느 한 큰스님(올해 79세인 리종 린포체)이 법문을 100일씩 2년에 걸쳐 나눠 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것도 하루 종일 법문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아마 나로서는 며칠만 하면 바닥이 나서 속된 말로 밑천이 달려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이곳 티베트 승가의 체제는 경장에 철저히 의거한 교육이라서 어떤 법회든 교재가 꼭 있다. 필자가 한국에서 큰스님의

薰??들을 때 불만을 가진 한 가지는 부처님의 말씀이 아닌 ‘고인이 이르되’ 아니면 ‘전설 따라 삼천리’ 한 편 정도로 시작하고 끝을 내는 법문이 많았다는 점이다.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불교에 대해 늘 이렇게 말한다. “우리 티베트 불교는 날란다(5세기 설립됐다 12세기에 이슬람군에 의해 파괴된 일종의 불교 대학으로 불교 연구의 중심지였음)의 전통을 계승, 발전한 겁니다. 꼭 티베트 불교라 할 것이 없지요. 옛날 인도의 큰 스승들은 거의 날란다 출신이었고, 특히 대승불교의 중관사상에 기반을 둔 사상체계로 봅니다. 거기에서 티베트 옷을 입은 수행체계로 이뤄지지요. 어쨌든 티베트 불교는 소승·대승, 현교와 밀교·금강승까지 두루 포함한 불교체제입니다. 소승을 알지 못하면 어찌 대승을 알겠습니까. 저는 아침마다 불단에 예불을 올릴 때, 거의 날란다 출신의 큰 스승이신 용수, 무착, 세친, 진나, 적천, 법칭, 월칭 등으로 이어지는 열일곱 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예를 올립니다. 이분들의 논소(論疏)로 지금까지 우리의 불법이 고스란히 전해져 내려온 것 아닙니까. 우리는 부처님이 직접 설하신 경(經)과 이후 큰 스승들의 논(論)과 소(疏)를 많이 보아 가면서 자기 수행을 해 나가야 합니다. 법보가 아닙니까. 이렇게 경론소 법에 의지해 공부하며 나아갈 때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에 빠지는 오류를 범하지 않으면서 끝내는 보리심(菩提心)

?기반으로 한 공성(空性·연기법의 근본)의 깨달음에 이르니까요. 그래서 저는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 중에 법보의 소중함을 가장 위에 둔답니다.”

사실 티베트 사찰의 법당에 가 보면 우리 한국의 전통 사찰과 비슷하지만 한 가지 다른 게 있다. 그건 불상 좌우에 꼭 모든 경전을 모셔 둔다는 점이다. 부처님과 법을 상징하는 경전을 함께 예경한다. 티베트에서는 상식적으로 불상은 부처님을 나타내고, 경전은 부처님이 설한 법을 나타내며, 이 법을 이끌고 지키는 승가(僧家·스님들의 공동체)를 탑으로 나타낸다. 불교가 중국, 한국으로 이어오면서 탑은 불사리를 모시거나 큰스님의 유골을 모시는 전통으로 변했지만 티베트에서는 탑이 삼보의 한 면으로 간주돼 부처님의 마음(心)을 상징한다. 그래서 티베트에는 어디에고 간에 큰 탑이 있고 그 주위를 돌면서 염불을 하며 마음을 정화하는 코라(시계방향의 탑돌이)의식을 하는 것이 하루 일과나 다름없는 일상적 행사다.


《달라이 라마는 다른 나라에 가서 연설하거나 불교를 얘기할 때 앞으로 인류가 무엇에 중점을 두고 살아가야 하는가를 말한다. 이 세계가 편리와 행복을 추구하면서 일으키는 자연 파괴를 막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가르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앞으로 인류는 두 가지를 규명해야 진정한 행복을 이룰 수 있다고 당신은 강조한다. 그 두 가지는 인간 의식의 규명과 몸의 내적인 성숙으로서 쿤달리니(丹·단)의 각성이다. 의식의 규명은 명상을 통한 깨달음이고, 쿤달리니의 각성은 명상을 통한 에너지의 전환이다. 즉, 명상만이 인류를 구제하고 서로 평화를 이루면서 살아가게 할 수 있는 기본이요 필수조건이란 설명이다.》


필자가 1987년 8월 1일 개인적으로 달라이 라마를 처음 만난 곳은 여기 다람살라가 아닌 라다크에 있는 초클람사르라는 조그만 절이었다. 그때 당신은 그곳에서 묵으셨다. 인도에 도착해 이 소식을 알고 라다크에 올라가서 절 사무실에 찾아갔는데 “지금은 명상 중이라 불가능하다”고 했다. 알고 보니 7월 한 달 동안 명상 중이었다. 명상이 끝난 후에는 가능하다고 해 끝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숙소로 돌아왔는데 이튿날 숙소로 연락이 왔다. 8월 1일 달라이 라마께서 만나겠다고.

어쨌든 한 달간의 강도 높은 명상을 끝낸 직후였는지 달라이 라마는 어떤 대단한 힘을 가졌고, 그러면서도 소탈하고 솔직했으며, 법에 정통해 믿음이 절로 갔다. 나는 긴장과 함께 삭발하고 목욕재계하고 당신의 알현실에 들어갔지만 당신은 맨발에 인도제(製) 싸구려 샌들을 신고 맞아 주었다. 합장과 함께 “프롬 코리아(From Korea)!”라며 긴장을 풀어 주면서 대화가 시작되었다. 사실 그때 나눈 1시간 반 정도의 이야기에서 나는 내 삶의 기반을 찾았다. 훗날 내 개인적인 수행기를 쓴다면 이때 받은 영감과 몸으로 겪은 내적인 체험을 꼭 밝히고 싶다.


당신은 법문 중 가끔 울먹이며 목이 메어 진행을 못 할 때가 있다. 나는 처음에 뭐 법문 중에 저런 일이 있나 하고 의아해 했지만 해를 거듭하면서 그 내용을 알게 되었다. 법과 진리를 설하다가 석가모니 부처님의 6년 고행담을 이야기할 때는 거의 설법이 중단되기 마련이다.

달라이 라마가 1987년 10월 인도 다람살라 남걀 사원 안의 티베트 망명정부 집무실에서 자신을 찾아온 서양 과학자들과 함께 불교 명상의 과학적 원리와 효력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사진 제공 청전 스님

불교의 근본인 보리심(菩提心)과 공성(空性)을 상세히 설명하는데 유독 보리심을 말할 때면 울음을 터뜨린다. 당신 말씀에 따르면 보리심은 깨달음의 씨앗이다. 티베트 불교의 최고 논서로 알려진 ‘람림’을 강의할 땐 여러 차례 법문이 멈춰진다. 필자는 재빨리 그 줄에 언제, 어느 날, 몇 시까지 적어 놓곤 했는데 5년여에 걸쳐 번역(지난해에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다)하고서야 그 숨은 뜻을 알게 되었다. 또 달라이 라마는 스승의 은혜를 말하다가는 말문이 막힌다. 법문을 자주 듣다 보니 당신은 이 네 가지를 설법하다가 끝내 격앙되어 말씀을 못 하는 것으로 헤아려진다.

티베트 승가(僧家)를 방문할 때 달라이 라마는 법문 이외의 말씀 중에 가끔 이런 말을 한다. “내가 걀와린포체라 해서 잔뜩 공양물을 챙겨 오는데 실은 내가 좋아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수행 잘하는 비구의 모습, 청정하고 내적인 실력을 갖춘 그런 수행자가 찾아오는 것을 좋아하고 기뻐한다. 단정한 승복을 차려입은 비구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지 않은가.” 그러면서 끝까지 당신은 우리와 똑같은 부처님의 제자인 한 비구임을 강조한다.

지금 티베트 난민은 세계 곳곳에 퍼져 있다. 유럽인들은 티베트 사람을 동양의 유대인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모인 곳에 먼저 절을 짓고 부처님과 경전을 모시며 스님과 함께한다. 8세기 인도의 고승 파드마삼바바는 티베트에 불교를 전하고 최초로 삼예사원이라는 절을 지은 뒤 승려를 양성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런 의미심장한 유언을 남겼다. “쇠로 된 새가 하늘을 날고, 바퀴 달린 말이 땅을 달릴 때, 너희 티베트족은 세상에 개미 떼처럼 흩어지리라. 하여 법(다르마)은 붉은족에 전해지리라.” 정말 티베트의 미래를 어찌 알고 이런 표현을 했는지 혀를 내두를 정도다. 붉은족은 서양 백인을 말한다. 그들의 얼굴이 희다고는 하지만 원래 빨간 얼굴의 종족이었다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제가 이 지구촌 곳곳에 불법의 씨앗을 뿌려 놓은 것 같습니다. 이 씨앗이 어떻게 싹이 터서 어떤 모습으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지는 제가 죽고 난 뒤의 일이겠지요”라고 말한다. 하긴 한 사상체계가 뿌리를 내리는 데는 300년 정도가 걸린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유럽에서 불교는 승가 위주의 모습이 아닌 재가(在家)자 중심의 공동체로 계승 발전하리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지금 인도에서 공부하고 있는 유럽 사람들의 진지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요사이는 이스라엘에서 온 출가승이 의외로 많다. 부다가야, 룸비니, 사르나트 등 불교 성지의 나무 밑에 앉아 명상하는 이는 거의 유럽에서 온 불자들이다. 우리나라나 동양권 성지순례객은 예경(禮敬)으로 절하고 염불하는 의식을 하면서 부산하지만, 서양 순례객은 끝없이 안으로 참배하고 명상하는 차분한 성지순례를 한다. 미래 서양 불교의 싹을 보는 듯해 희망을 갖는다.


한번은 단체로 왔던 한국 신도 한 분이 어떻게 하면 공부 중에 게으름을 떨쳐 버릴 수 있는지를 달라이 라마에게 물었다. 즉, 잠이 올 때 바늘로 꾹 찔러서 정신 바짝 차릴 듯한 그런 조언 한마디를 부탁한 것이다. 그대로 통역을 했더니 달라이 라마는 “제가 게으른 사람인데요”라고 대답했다. 다들 크게 웃었다. 달라이 라마는 이어 홱 돌아서 필자를 손으로 가리키며 “당신도 게으르죠” 하셨고 다시 좌중에 웃음이 터졌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 출가인이나 재가인 모두 공부할 때 게으름이 큰 장애입니다. 그러나 이 게으름을 쫓기 위한 한마디는 없습니다. 늘 지금 이 삶의 뿌리가 고(苦)인 것을 잊지 말고, 또 무상함을 놓치지 않을 때 점차 큰 보리심이 일어날 것입니다”라고 설명했다.

달라이 라마는 한없이 인자하고 웃음이 넘치는 분이다. 하지만 그런 달라이 라마가 준엄한 비판을 가할 때가 있다. 불심(佛心)의 근본을 잃고 물질과 허영을 좇는 스님들에 대해서다.

지난해 설날 아침 달라이 라마는 덕담이라기보다 좀 서글픈 말씀으로 새해 법문을 시작했다. 티베트 사람들은 설날 아침이면 달라이 라마의 덕담을 듣고 축복을 받으러 새벽부터 긴 줄을 서서 기다린다.

“우리가 망명해 온 지 46년째입니다. 그러나 내가 살고 있는 이 법당이 인도에서 가장 작고 초라한 절이 되어 버렸습니다. 요즘 티베트의 이름 가진 스님들은 수행이나 공부보다는 외국에 다니면서 시주 받아 큰 절 짓고 큰 불상 만드는 게 일인 것 같습니다. 신도들에게 귀감이 될 큰 스님들이 이름이나 타이틀은 토끼 귀처럼 길지만 그들의 덕행이나 공덕은 토끼 꼬랑지처럼 조그만 것 같습니다.” 설날에 침통한 목소리로 이런 뜻밖의 비탄의 말씀을 한 것이다.

그 후에도 달라이 라마는 공부하지 않고 외국에만 다니는 스님들에 대해 심한 비판의 말을 하고 있다. 올 칼라차크라 행사장에서도 “요 근래 이름 있는 스님들이 대만 등 불교국가에 다니면서 법을 이용하여 재산을 쌓고 호화롭게 살아가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면서 이것은 큰 죄악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달라이 라마의 이 같은 준엄한 비판은 예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정말 필자 생각으로도 큰 문제가 되었다. 옛날 망명 나와 가난할 때의 순수한 모습, 법을 지키고 공부하려는 모습은 보기 어렵다. 좀 이름이 있다 하면 외국에 다 나가 있고 아예 이쪽엔 다시 오지 않는다. 온다 해도 자기 개인 절을 많이 짓는다. 절 옆에 또 절을 짓고 있다.

달라이 라마(오른쪽)가 청전 스님과 한국과 티베트 불교의 상호교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후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 제공 청전 스님
1959년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에서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로 망명 왔을 때부터 이곳 다람살라에 머무른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지금 우타란찰 주의 무소리란 산중턱에 짐을 풀었다. 이듬해 여기로 옮겨와 실질적인 망명정부를 수립했다.

달라이 라마는 미래의 티베트에 무엇이 중요한지를 간파했다. 즉 티베트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경제 발전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내려오던 종교와 문화의 전통을 살리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한 것이다. 비록 나라는 빼앗겼어도 이 티베트의 정신과 문화가 있다면, 역사는 바뀌는 것이니 언제라도 자기 땅에 되돌아갈 희망이 있다는 게 그의 믿음이다.

처음 달라이 라마를 따라 넘어온 티베트 난민 1세대는 이제 거의 세상을 떠났고, 지금은 남은 노인들과 인도에서 태어난 제2세대가 대부분이다. 그동안 절도 많이 생겼고 불교학 학교도 생겼다. 필자가 1987년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다람살라가 지금같이 복잡하고 시끄러운 동네가 아니었다. 정부 호텔 한 개와 몇 개의 초라한 여관, 상가, 식당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달라이 라마의 1989년 노벨 평화상 수상 이후 큰 변화가 왔다. 지금은 많은 호텔, 상가, 식당이며 이상한 이름의 무슨 요가수련소 등등 저 멀리 산까지 파헤쳐 가며 많은 건물이 계속 들어서고 있다. 한국인도 끊이질 않는다. 심지어 한국 식당이 두 개나 생겼다.

망명 나온 세월이 길어지다 보니 티베트 정신이 희석되어 가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처음 여기 왔을 때 달라이 라마의 법문이 있다면 티베트 상점은 100% 문을 닫고 법회장에 나갔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달라이 라마가 법문한다 해도 가게 문을 열고 영업을 한다. 이렇게 물질의 힘은 큰가 보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어느 절 개원식 때 일이 생각난다. 달라이 라마는 법당에 앉자마자 크게 만들어 놓은 불상을 가리키며 “만약 훗날 이 불상이 넘어지거나 한다면 수십 명이 깔려 죽게 될 수도 있는데 그땐 부처가 사람 죽였다는 소문이 나겠지”라면서 법문 이전에 따가운 비판부터 했다. 특히 그날 대만에서 시주했다는 많은 사람이 특별석에 앉아 있었는데 그곳을 향해서 “보시한다는 자체야 좋지만 이 보시가 어떻게 쓰이는지 알고 하십시오”라며 좀 무안한 말씀을 했다. 내가 봐도 정말 큰 건물에 큰 불상이었다.

달라이 라마가 자주 하는 말씀이 가슴을 때린다.

“지금 이 시대에는 절에 이렇게 많은 스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출가하여 청정한 부처님 제자로 수행해 가든지 사회에 봉사하는 출가의 삶은 인정되지만 그냥 승가에 있어 편히 먹고 살기 위한 무위도식의 그런 출가인은 없어야 됩니다. 꼭 청정하고 공부하는 바른 출가인이 승가에 있어야만 합니다.”

■ 연재를 마치며

달라이 라마는 필자에게 몇 번이나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한국에 가면 티베트 불교를 전하려 하지 말라. 내가 전 세계를 다니면서 불교를 말하는 것은 그곳에 불교가 없기 때문이다. 당신 나라는 우리보다 빠른 불교 전래국가로 좋은 전통과 문화가 있으니 그것을 살리는 것이 좋고, 훗날 거기에 티베트 불교의 장점을 덧붙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선 당신은 두 나라 불교의 교량 역할을 하라. 그리고 당신 나라에서 어떤 고급 밀교 수행법을 말하는 것보다 끝까지 삶의 뿌리가 고(苦)와 무상(無常)임을 가르쳐라. 당신 나라는 첨단의 나라, 편리하고 빠른 나라여서 고와 무상을 생각할 틈이 없는 나라니까. 거기에 보리심을 얘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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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칼럼이다. 나는 그동안 궁금했다. 왜 노무현이 이쪽에서나 저쪽에서나 다 욕을 먹는지 말이다. 저쪽에서 욕하는 거야 그러려니 하는데, 이쪽에서도 다들 싫어했다. 고종석은 그걸 두고 '배신'때문이라고 한다. 글쎄, 그가 얘기했듯히 '전면적이지 못한 배신'을 배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들은 노무현에게서 다른 무엇인가를 기대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그건 '실망'이라고 해야한다. 그게 맞다.
어쨌거나 고종석의 칼럼은 어느정도 나의 궁금증을 해결해줬다. 왜 이쪽에서도 노무현을 싫어하는지 말이다.
나는 2002년 12월 19일 저녁 6시 나는 만세를 부르며 단 하나만 바랬다. 노무현이 제발 조선일보에 타협하지 않기만을 말이다. 내가 기대했던 것은 이것 단 하나. 그리고 노무현은 지금까지 날 실망시키지 않았다.

[고종석 칼럼/2월 21일] 노무현 생각

며칠 뒤면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를 떠난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그를 지지한 사람이든 반대한 사람이든, 노무현 시대에 점수를 후히 매기는 것 같진 않다. 무엇보다, 지난해 말 대통령선거에서 구여권 후보가 겪은 참담한 패배에는 노무현에 대한 평가가 얼마쯤 반영돼 있었다.

그가 취임하기 직전, 나는 대통령 노무현의 가장 큰 업적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일 수도 있다고 쓴 적 있다. 새 대통령의 발걸음에 딴죽을 걸겠다는 악의로 한 말이 아니라, 소수파의 호민관으로서 대한민국 제1시민 자리에 다다른 정치역정을 기린 말이었다.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 처지에서 보면 아쉽게도, 노무현은 결국 대통령이 된 것 이상의 업적을 남기지 못한 채 일반 시민으로 돌아올 참이다.

■ 리버럴 진영의 트로이 목마

힘센 사람들을 향한 노 정권의 투항이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다고 판단된 세 해 전, 나는 어느 글에서 노무현이 트로이목마일지도 모른다고 비아냥거린 적 있다. 복고주의자들이 리버럴리즘 진영을 무너뜨리기 위해 보낸 트로이목마라는 뜻이었다. 나는 그 비아냥거림을 뉘우칠 계기나 기회를 그 뒤에도 얻지 못했다.

노 정권 5년간, 서울 강남을 지역적 이데올로기적 고리로 삼은 재벌-관료 동맹은 그 전보다 더욱 튼튼해졌다. 그리고 이 신성동맹은 곧 출범할 이명박 정권에서 만세동락을 구가할 모양이다.

노무현은 힘센 친구를 새로 얻기 위해 힘없는 친구를 버렸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배신이 또렷해진 뒤에도, 그 배신으로 이득을 본 세력은 그의 친구가 돼 주지 않았다.

노 정권 덕분에 재산을 단단히 불린 땅 부자들, 집 부자들, 대자본가들은 5년 내내 노무현을 저주했다. 옛 친구를 버리고서도 새 친구를 얻지 못함으로써, 다시 말해 모두를 적으로 돌림으로써, 노무현은 기이한 방식으로 국민통합에 기여했다.

노무현이 사면초가에 놓인 이유 하나는 그의 배신이 전면적이지 못했다는 데서도 찾을 수 있다. 권력을 시장에 헌납함으로써 노무현은 과감히 경제적 강자 편을 들었으면서도, '민주화세력'이라는 자신의 상징적 기득권은 포기할 뜻이 없었다. 소위 '과거사 정리'라는 것은 역사적 정통성에 대한 이 욕망과 관련 있었을 테다.

그런데 이 '과거사 정리'는 그가 버린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삶과 별 관계없는 '정권의 취미'로 보였던 데 비해, 그가 새로 친구로 사귀고자 했던 힘센 사람들에게는 제 존재의 기반을 건드리는 민감한 문제였다.

다섯 해 전 새 대통령을 뽑을 때, 한국 유권자들 마음 속에선 윤리적 욕망이 파닥거렸다. 지난해 말 새 대통령을 뽑을 때, 그들 마음속에 윤리적 욕망이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이렇게 된 이유 가운데 큰 것이 자신의 행태였음을 노무현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탈-윤리 대통령 이명박은 윤리 대통령 노무현이 다섯 해 동안 진화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오래도록, 한국 유권자들은 정치적 결정에 윤리가 끼어드는 걸 꺼릴 것이다.

■ 윤리적 출발, 탈-윤리적 종말

공정함을 위해서, 적대적 언론의 반노 선동이 커뮤니케이션을 왜곡해 정권을 고립시켰다는 대통령과 그 주변의 하소연에도 일리가 있었음을 지적해야겠다. 정파 신문들이 판치는 한국 저널리즘 시장에서 노무현에게 호의적인 매체는 드물었다. 그리고 그것은 정권에 대한 여론 악화를 크게 거들었다.

새 대통령 당선자나 인수위의 최근 천둥벌거숭이 행태를 노 대통령이나 그 주변사람들이 벌였다면, 정권이 뒤흔들릴 정도의 십자포화를 언론으로부터 받았을 것이다.

이것은 노무현 시대를 평가할 뒷날의 역사가가 이 시대 신문들을 사료로 쓰는 데 매우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글까지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노무현과 노무현 시대에 대한 평가는 앞으로 분명히 나아질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조차, 노무현이 실패한 대통령이었음은 엄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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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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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색으로 되어있는 부분. 난 정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검사라는 인간이 스스로 법을 어기고 있다고 얘기한다. 정말 코메디야 코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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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이한승 기자 = 정부는 12일 광복 63주년과 건국 60년을 맞아 경제살리기를 통한 일자리 창출과 `화합과 동반의 시대'를 열기 위한 34만여명 규모의 특별사면ㆍ복권 조치를 단행했다.

김경한 법무부장관은 "이번 사면은 우리가 겪고 있는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을 타개하는데 이바지하기 위해 실시했다"며 "경제인들이 활발하게 투자하고 일자리를 창출하며 해외시장을 개척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다음은 법무부 차동민 검찰국장과의 일문일답

-- 현대자동차 정몽구 회장의 경우 죄질도 좋지 않고 사회봉사도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사면 대상에 포함된 이유는

▲대기업 사면의 경우 비판의 목소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경제 여건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투자 활성화 해외시장 개척, 일자리 창출이 절실하다는 점을 고려했다. 정 회장의 경우 사회봉사 명령 300시간 가운데 200시간 사회봉사를 했는데 집행률이 3분의 2 이상이 되면 사면 대상자에 포함된다.

--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경우 경제인으로 분류했나 폭력사범으로 분류했나

범행으로 볼 때에는 폭력사범이지만 본인의 지위를 감안해 경제인으로 분류했다.

-- 경제인을 대거 사면한 조치는 화이트 칼라 범죄를 엄정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입장과 어긋나는 것 아닌가

경제 살리기를 명분으로 한 사면은 법치주의와 어긋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사면을 통해 경제살리기에 전력할 수 있도록 한다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 사면 기준에 추징금 납부 여부도 포함됐나

▲포함됐다. 또한 벌금 납부 여부도 기준이 됐다.

-- 대부분의 기업 총수들이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자유롭게 경제활동 하고 있는데 사면을 한다고 해서 특별히 경제살리기에 기여한다고 말할 수 있나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활동하는 사람의 경우 집행유예 기간이나 집행유예 기간이 경과된 이후에도 제약이 많다. 제약을 풀어주면서 경제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함이다.

-- 배임이나 횡령의 경우 기업 입장에서 치명적인 범죄인데 해당 총수에게 다시 경영권을 맡긴다는 것이 오히려 기업에 해가 될 수도 있지 않나

▲배임의 경우 계열사 증식이나 활성화를 위해 쓰인 경우가 많았고 또한 개인 착복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 정몽구 회장의 경우 아들에게 회사를 물려주기 위해 배임을 했는데 그것도 기업을 위해서 배임을 한 것이라고 판단하나

▲답변하기 곤란하다.

-- 추징금 납부 여부도 고려했다고 했는데 추징금 납부 안된 사람이 포함된 이유는

▲기본적으로 납부한 사람을 사면 대상으로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추징금을 납부하지 않은 사람도 사면 대상에 포함시킨 전례가 있다.


-- 추징금을 납부하지 않은 경우 어떤 기준을 적용했나

▲경제ㆍ국가 발전에 기여한 정도, 피해회복 여부, 건강ㆍ건강. 나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다.

jesus7864@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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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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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의사 박경철의 ‘아름다운 동행’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저자는 외과의사입니다. 한겨레에 들어가보면, 가끔 이 의사의 얘기를 볼 수 있습니다. 재테크전문가라는 타이틀이 있어 내심 무시했는데, 그의 이야기는 심금을 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죽음을 직접 맞닥뜨리는 현장에 있어서인지,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 실감나게 다가왔습니다. 그의 인상은 둥글둥글하지만 그의 눈은 아주 매서워 보입니다. 죽음과 삶이 맞닿아있다는 것을 그 눈으로 잘 파악하고 있는 듯 합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두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한명은 돌아가신 아버지이고 또 한명은 이제 아장아장 걷고 있는 아들녀석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몸이 마르고 숨이 가쁘게 될 때쯤 칼로 손바닥을 찢기도 했습니다. 생명선의 끝부분이었습니다.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에는 식도에 출혈이 있어서 시술을 받았는데, 그것이 간이 막혀서 피가 식도로 역류된 것이었다는 걸 이 책을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간암이었습니다.

아들은 지금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제일 예쁩니다. 지금까지 봤던 어떤 여자보다도 더 예쁩니다. 지금까지 봤던 어떤 그림, 풍경, 사진 그 무엇보다도 예쁩니다. 아들이 먼저 죽느니, 내가 먼저 죽는게 낫겠다 싶습니다. 이 책에 자식을 먼저 떠나 보낸 사람들의 얘기를 보면서 든 생각입니다. 자식보다 더 한 집착도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부처님이 출가 직전 아들의 출생소식에 ‘라훌라’(장애물)라고 하신 것도 어렴풋이나마 짐작이 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한달 전에 같이 산에서 일주일을 지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집에서 눈에 띄던 책을 가지고 갔었는데, 거기서 옮겨놓은 것입니다. 오늘 오랜만에 다시 찾아봤습니다. 의지할 곳은 붓다의 가르침이라는 생각입니다. 나무 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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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간이야기.22

어느 신도님 부음을 받고 문상을 가니 때마침 늙은 염장이가 염습(殮襲)을 하고 있었는데 그 염습하는 모양이 얼마나 지극한지 마치 어진 의원이 환자를 진맥하듯 시신(屍身) 어느 한 부분도 소홀함이 없었고, 염을 다 마치고는 마지막 포옹이라도 하고 싶다는 눈길을 주고도 모자라 시취(屍臭)까지 맡아보고서야 관뚜껑을 닫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오늘 아침 한솥밥을 먹은 가족이라도 죽으면 시체라 하고 시체라는 말만 들어도 섬찍지근 소름이 끼쳐 곁에 가기를 싫어하는데 생전에 일면식도 없는 생면부지의 타인, 그것도 다 늙고 병들어 죽어 시충(屍蟲)까지 나오는 시신을 그렇게 정성을 다하는 염장이는 처음 보았기에 이제 상제와 복인들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가는 염장이에게 한마디 말을 건네 보았습니다.
 
"처사님은 염을 하신지 몇 해나 되셨는지요?"
"그러시면 많은 사람의 염을 하신 것 같으신테 다른 사람의 염도 오늘처럼 정성을 다 하십니까?"
"별 말씀을 다 하시니... 산사람을 구별이 있지만서도 시신은 남녀노소 쇠붙이같을 것이 없니더. 내 소시에는 돈 땜에 이 짓을 했지만서도 이 짓도 한 해에 몇백 명 하다보니 남모를 정이 들었다 할까유. 정이....... 사람들은 시신을 무섭다고 하지만 나는 외려 산사람이 무섭지 시신을 대하면 내 가족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내 자신의 시신을 보는 듯해서......"
 
 이쯤에서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갈 길을 그만 가야겠다는 표정이더니, "내 기왕 말씀이 나온 길이니 시님에게 한 말씀 물어봅시더. 이 짓도 하다보니 시님들도 많이 만나게 되는데, 어떤 시님은 사람 육신을 피고름에 담은 가죽 푸대니, 가죽 주머니니, 욕망 덩어리라 이것을 버렸으니 물에 잠긴 달그림자처럼 영가(靈駕)는 걸림이 없어 좋겠다고 하시기도 하고, 어떤 시님은 허깨비같은 빈 몸이 곧 법신(法身)이라 했던가유? 그렇게 하고, 또 어떤 시님은 왕생극락을 기원하며 염불만 하시는 시님도 있고.... 아무튼 시님들 법문도 각각인데 그것은 그만 두시고요. 참말로 사람이 죽으면 극락지옥이 있니꺼?"
 
흔히 듣는 질문이요 신도들 앞에서도 곧잘 해왔던 질문을 받았지만 이 무구한 염장이 물음 앞에는 그만 은산철벽을 만난듯 동서불명(東西不明)이 되고 말았는데, 염장이는 오히려 공연한 말을 했다는 듯
 
"염을 하다보면 말씀인데유. 이 시신의 혼백은 극락을 갔겠다 저 혼백은 지옥에 갔겠다 이런 느낌이 들 때도 더러 있어 그냥 해본 소리니더. 이것도 넋빠진 소리입니더만 분명한 것은 처음 보는 시신이지만 그 시신을 대하면 이 사람은 청검하게 살다가 마 살았겠다 이 노인은 후덕하게 또는 남 못할 짓만 골라서 하다가 이 시신은 고생만 하다가 또는 누명같은 것을 못 벗고.... 그 뭐라하지유? 느낌이랄까유? 그, 그 사람이 살아온 흔적같은 것이 시신에 남아 있거든요?"
 
하고는 더 말을 하지 않을 듯 딸막딸막하더니, 당신의 그 노기(老氣)로 상대가 더 듣고 싶어하는 마음을 읽었음인지.
 
"극락을 갔겠다는 느낌이 드는 시신은 대강대강해도 맘에 걸리지 않지만 그렇지 않은 죄가 많아 보이는 시신을 대하면 자신이 죄를 지은 것처럼 눈시울이 뜨뜻해지니더. 정이니더, 옛사람 말씀에 사람은 죽을때에는 그 말이 선해지고 새도 죽을 때는 그 울음이 애처롭다 했다니더. 죽을 때는 누구나 다 선해지니더.  ...........  이렇게 갈 것을 그렇게 살았나? 하고 한번 물어보면 영감님 억천년이나 살 것 같아서, 가족들 기쁘게 해주고 싶어서 한번 잘살아 보고 싶어서 그랬니더. 너무 사람울리시면 내 화를 내고 울화통 터져 눈 못 감고 갑니더. 이런 대답을 들으니 아무리 인정머리없는 염쟁이지만 정이 안 들겠니까? 그 돌쟁이도 먹 놓고 징 먹일때는 자기의 혼을 넣고... 땜장이도 그렇다 하는데 오늘 아침 숨을 같이 쉬고 했던 사람이 마지막 가는데유........... 아무런들 이 짓도 정이 없으면 못해 먹을 것인데 그렇듯 시신과 정을 나누다가 보면 어느 사이 그 시신 언저리에 남아 있던 삶의 때라 할까유? 뭐 그런 것이 걷히고 비로소 내 마음도 편안해지거든요. 결국은 내 마음 편안할려고 하는 짓이면서도 남 눈에는 시신을 위하는 것이 풍기니 나도 아직........"
 
하고는, 잠시 나를 이윽히 바라보더니
"시님도 다 아시는 일을 말했니더. 나도 어릴 때 뒷절 노시님이 중될 팔자라했는데 시님들 말씀과 같이 업(業)이라는 것이 남아 있어서...... 이제 나도 갈 일만 남은 시신입니더."
 
이렇게 말끝을 흐리는 것이었습니다.
 
조오현 스님의 연작시 [절간이야기.22]
 출처 : 화두와 실천. 1996 봄 제2호 P 172~173



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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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281965.html

내가 전에 어머니한테 말한 적 있었는데, 자기 집값 오르길 바란다.

그런데, 그게 진짜 오른게 되려면, 다른 곳의 집값이 오르지말고, 자기 집값만 올라야한다.

그리고, 그 이익이 실현되려면, 집을 팔아야 한다. 그 집에 계속 살고 있는 한 집값이 오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결국, 집값이 오르는 걸 좋아하는 인간들은 다 투기꾼이라고 보면 되겠다.

왜 아니냐?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282212.html
[김형태칼럼] 북한산에 입장료를
김형태칼럼
한겨레
» 김형태 변호사
전세계 국립공원 중에서 단위면적당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북한산국립공원이다. 연 500여만명, 제대로 집계하기도 쉽지 않단다. 공원쪽에 따르면 2007년 4월29일 오전 10시에서 11시까지 한 시간동안 도봉주능선에만 8231명이 매달렸다. 정비석은 ‘산정무한’이란 수필에서 금강산 비로봉의 아낙네 살결보다 흰 자작나무 바다며 마애태자 무덤의 쓸쓸함을 노래했지만 한가했던 옛 시절의 사치일 뿐. 이제 도봉주능선에서 보이는 건 끝없는 사람들의 행렬이다.

몇 해전 삼지연을 거쳐 백두산에 올랐다. 천지를 노랗게 물들이며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낙엽송, 침엽수들. 끝없이 이어지는 원시림과 맑은 계곡물 … 사람은 그림자도 없었다. 돌아오면서 걱정이 들었다. 통일이 되면 이런 장엄한 풍광도 끝이겠지. 그런데 요즈음 인터넷 사이트에 가보니 벌써 ‘산악인을 위한 백두산 완전종주’를 내건 관광상품들이 수두룩하다. 지난 겨울 북한산 눈속을 내려오는데 덩치 큰 청년들이 쇠이빨 많이 달린 아이젠으로 바위를 콱콱 찍으며 지나쳤다. 좀 살살 다닐 수 없을까. 도봉산 포대능선의 바위들을 자세히 보면 겨우내 아이젠에 시달려 상처투성이다. 그들은 백두대간 종주가 얼마나 멋진지를 열심히 이야기했다. 백두대간도 이제 앞날이 뻔해 보인다.

작년초 국립공원 입장료를 폐지한 뒤 산들이 몸살을 앓고 있다. 길들이 수없이 새로 생기고 오솔길은 4차선 신작로가 되었다. 2001년에서 2005년 사이 대략 연간 1800만명 안팎이던 전국 25개 국립공원 입장객 수가 최근들어 2400만명 가까이로 늘었다. 북한산은 50%가량 늘었다는 말도 있다. 국회공청회 기록등을 보면 입장료 폐지는 다분히 정치논리에 의해 결정된 것 같다. 환경부등 폐지론자들은 이런 근거를 댔다. ‘국가는 국민들의 환경권과 여가권을 보장할 의무가 있다. 인공시설이 아닌 자연환경에는 수익자 부담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폐지의 근거로 든 ‘국민을 위하여’는 말 자체로는 멋지다. 그런데 말만 멋지다. 전라도 해남 뻘속 낙지가 어디 사람에게 먹히려고 이 세상에 났다던가. 온갖 길짐승이며 날짐승, 물고기를 칼로 자르고 삶고 튀겨먹으면서 ‘최고예요’, 엄지손가락을 세우는 텔레비전 화면을 보고 있노라면 무섭다. 그리고 어디 저 포대능선 바위가 내 아이젠에 찍히고 부서져 내리려고 저 하늘 중턱에 걸려 있단겐가. 백운대며 만장봉 그리고 그 계곡을 빨갛게 물들이는 진달래 무더기는 ‘국립’, 국가나 국민이 만든 게 아니다. 우리는 그저 바위며 진달래 눈치보면서, 미안해하면서 흔적없이 다녀올 일이다.

환경에는 수익자부담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잘못되었다. 산에 오르는 ‘국민’들의 여가권을 보장해주기 위해 관리, 보전에 드는 비용을 받지 않으면 그 돈은 세금에서 나간다. 결국 산에 가지 않는 국민들도 산의 관리비용을 부담하라는 것이니 형평에 어긋난다. 산을 있는 모습 그대로 지키려면 적정수준의 입장료를 받아 입산객 숫자를 통제하는 길 밖에 없어 보인다. 요즈음은 평일에도 등산복차림의 중년남자들이 길거리에서 많이 보인다. 간간히 젊은이도 있다. 자본주의 경쟁과 효율에 밀려난 이들에게 산은 고마운 안식처요 소일거리다. 그들에게 입장료를 내라는 게 가혹하긴 하다.

그래도 그 아들·딸들도 도봉산 소롯한 오솔길에 피어오른 노랑제비꽃을 보게 하려면 입장료는 어쩔수 없다. 만경대 바위와 계곡물, 진달래와 산벚을 향해 ‘국민’의 권리를 주장하지 말라. 그런데 ‘완전종주’가 시작된 저 백두산은 또 어찌하나.

김형태 변호사

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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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society/life/281978.html

뜸 명상 등 곁들여 스스로 고치게 ‘마음 수술’
[향기 나는 사람들] 대체의술 펴는 전홍준 원장

외과의로 독일병원 갔다가 침 명상 치료에 ‘새 눈’
환자에 도움 되면 뭐든 ‘통합’…‘신념요법’ 처방도
하니Only 권복기 기자
» 통합의학 펼치는 전홍준 의사.
전홍준(61) 하나통합의원 원장은 환자의 마음까지 고치고 싶어 합니다. 병의 발생과 치료에 마음이 크게 영향을 미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마음까지 고친다는 게 어떤 것일까요. 광주시 진월동에 자리한 하나통합의원을 찾았습니다. 주변에 대규모 아파트단지나 오피스 빌딩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이 병원에는 전국 각지에서 환자들이 찾아오고 있었습니다.

국회의원 선거가 있던 9일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비가 내리는 궂은 날이지만 낮 12시가 넘은 시각에도 병원 안에는 진료를 기다리는 환자들이 10여 명이 넘었습니다. 전 원장은 “다른 지방에 사는 분들이 휴일이 아니면 올 수가 없다고 해서 하는 수 없이 오전에 병원문을 열었다”고 말했습니다.

온갖 검사에도 아무 이상 없다지만 그래도 아프다면?

전 원장은 대구에서 온 50대 여성을 배웅하면서 “오늘 배운 것 집에 돌아가서 잊지 말고 꼭 하세요”라고 당부했습니다. 그가 그 여성에게 권한 내용은 뜸과 목욕이었습니다. 두통, 불면증, 소화불량, 사지통증 등 온갖 증세에 시달리고 있지만 병원에서 온갖 검사를 해도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한다는 환자였습니다.

그는 아침 저녁으로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는 온열요법과 흉선, 간, 위 등 면역 관련 기능을 하는 7곳에 뜸을 뜨는 방법을 알려줬습니다.




1시간 가량 상담을 하면서 특별한 ‘처방’도 했습니다. ‘신념요법’이라 이름 지은 방법입니다. 일종의 마인드컨트롤이라고 볼 수 있지요. 전 원장은 이를 위해 환자가 찾아올 때마다 보여주는 글이 있습니다. 한 목사의 위장병 탈출기입니다. 죽만 먹어도 배가 아플 정도로 위장이 약했던 한 목사는 어느 날 성경을 보다가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시니 너희들은 이미 구한 것을 다 얻었음을 알고 감사하라’는 구절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위장병이 다 나았음을 믿기로 했습니다. 그날 아침 다른 가족과 똑같이 밥과 반찬을 놓고 식사를 합니다. 결과는? 배가 아파 데굴데굴 굴렀고 먹은 음식은 모두 설사로 나왔습니다. 점심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그 목사는 성경 구절을 의심하지 않고 저녁 약속이 있던 뷔페에서 5접시의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위장병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고 합니다.

전 원장은 병원을 찾아온 환자, 특히 암환자에게 그 목사가 쓴 글을 보여주며 “건강하다고 믿고, 쉰다고 누워서 지낼 것이 아니라 평소 하고 싶었던 일을 즐겁게 하면서 살라”고 강조합니다. 그 여성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시장 상인인 그 여성은 얼마 전 화재로 재산을 잃고부터 그런 증세가 시작됐다고 합니다.

“그 분에게 병원에 가서 검사해 봐도 병이 없다고 하니 그렇게 믿으시라고 했습니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이 있냐고 물었더니 남을 돕는 일이라고 해서 돌아가거든 곧바로 봉사활동을 시작하라고 거듭 당부했습니다.”

서양의학, 장점도 많지만 썩은 물에 모기 생기면 살충제 뿌리는 식

전 원장은 이처럼 주사, 약, 수술 등과는 거리가 먼 방법으로 환자의 질병 치료를 돕습니다. 그는 환자에 따라 뜸, 생식, 겨자찜질, 운동, 단식 등 다양한 요법을 권합니다. 빛명상, ‘화해와 감사의 산책’ 등으로 환자 스스로 마음을 바꾸도록 합니다.

이처럼 전 원장이 하고 있는 특별해 보이는 의료행위는 보완대체의학 또는 통합의학이라고 불립니다. 그는 이를 “병원 중심의 질병치료의학인 서양의학과 다른, 생활 중심의 전인치유의학”이라고 정의합니다.

생활습관을 고치고 마음을 바꿔 ‘완전한 몸, 마음, 생명’을 되찾으면 건강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는 것이 생활 중심의 전인치유의학이 병을 고치는 방법입니다. 그러기 위한 방법으로 그는 에이비시디이(ABCDE)를 고안했습니다. 운동(Activity), 호흡(Breathing), 의식 활동 (Consciousness), 음식(Diet), 자연 및 사회적 환경(Environment) 등 이지요.

“제가 해주는 것은 없습니다. 저는 이런 방법이 있으니 한번 해보시라고 권할 뿐이고 환자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전 원장은 서양의학이 장점이 많지만 주로 병증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병이 생기는 원인을 없애지는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비유하자면 썩은 물에서 파리와 모기가 생기면 썩은 물을 정화하는 대신 살충제만 뿌리는 격이라는 것입니다.

자신도 한 때는 한약 먹거나 쑥뜸 뜬 환자는 미신 따른다고 여겨

외과의사로서 그도 한 때 서양의학이 병을 고치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한약을 먹거나 쑥뜸을 뜬 환자는 미신을 따른다며 혼을 내곤 했습니다. 하지만 의사로 환자를 치료하면서 그가 철썩 같이 믿었던 서양의학의 한계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수술 뒤 암이 재발해 다시 입원한 환자의 임종을 지켜보는 일은 무척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1984년 독일 하이델베르크의대 방문은 의사로서 새로운 길에 눈을 뜨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농촌 의료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하이델베르크의대 방문은 그 분야에 앞선 독일의 제도를 배우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700년의 서양의학 역사를 지닌 그곳에서 암 수술 환자나 만성 질환자에게 숯치료, 물치료, 침, 단식, 명상, 사혈요법 등을 쓰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때부터 대체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지요. 86년 봄에는 일본에 침구의학을 부활시킨 이름난 외과의사 마나카 요시오 도쿄 기타사토대 교수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마나카 교수는 침구의 치료효과를 서양의학적 분석법으로 입증하고 이를 환자 치료에 적용해 유명해진 사람입니다.

“마나카 교수는 저를 앞에 놓고 오랜 시간 강의를 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말이 있습니다. 전깃불이 병증이라면 서양의학은 그 빛을 천으로 가리거나 아예 전구를 깨뜨려 버린다. 하지만 대체의학은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스위치를 찾아내 살짝 건드리는 것만으로 전깃불을 끈다는 비유였습니다. 서양의학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지요.”

전 원장은 이듬해인 1987년 마나카 교수의 소개로 “홋카이도에서 기타큐슈까지” 일본 전역을 다니며 대체의학자로 거듭난 의사들을 찾아가 대체의학을 배웠습니다.

농촌 의료를 위해 전남 나주군에 개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에 그가 1년 동안 병원 문을 닫고 일본으로 간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86년 마나카 교수를 만나고 돌아온 뒤 그가 일하던 병원에 말기 간암환자가 찾아왔습니다. 서울의 이름난 병원에서도 포기한 환자였습니다. 자신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읽고 있던 대체의학 책을 보여주며 “나도 해본 적은 없지만 한 번 해보겠냐”고 대체의학 방법 몇 가지를 해볼 것을 권했습니다. 3달 뒤 그 환자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암세포 크기가 절반으로 줄었다는 것이었습니다. 6개월 뒤 그 환자는 완치됐습니다. 비슷한 사례는 또 있었습니다.

상담과 교육이 ‘특효약’…억압된 감정 풀도록 도와

일본에서 돌아온 뒤 그는 대체의학으로 환자를 치료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한동안 ‘외도’가 불가피했습니다. 비리재단이 쫓겨난 뒤 조선대 총장이 된 이돈명 변호사의 제안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세상을 고치는 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고교 때 월남파병반대운동으로 구속됐고, 대학 때는 한일회담반대 시위로 제적됐습니다. 의대생이 된 뒤에도 민청학련 참여, 교련 반대시위 조직 등 늘 민주화 운동의 전선에 서있었습니다. 그러던 그였기에 ‘사회를 치료하자’는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가 다시 환자를 돌보게 된 것은 그로부터 2년이 훨씬 지난 뒤였습니다. 조선대가 정상화된 뒤 그는 외진 곳이라 의사들이 가기를 꺼리는 조선대 부속 광양병원 근무를 자청해 대체의학으로 환자를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환자의 마음 상태가 질병 치료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알게 됐습니다. 그를 찾아온 환자 가운데 마음에 담아둔 여러 가지 억압된 감정을 없앤 뒤 병이 쉽게 나은 이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관련 분야를 연구하고 명상 프로그램도 배워 ‘신념요법’, 빛명상, ‘화해와 감사의 산책’ 등을 환자 치료에 적용했습니다.

그는 1년 전 다른 의사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대체의학을 연구하고 환자 치료에 적용하고자 하나통합의원을 열었습니다. 처음 “보완대체의학 동아리 모임 장소”정도로 생각했지만 소문을 듣고 찾아온 환자들이 늘면서 바빠졌습니다. 그럼에도 병원 운영은 여유롭지가 않습니다. 그의 의술은 주로 상담과 교육이어서 수익성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전 원장은 병원 운영에 대해서는 “하늘에 다 맡기고 산다”고 했습니다.

“부족한 사람인데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분들이 많아 걱정입니다.” 환자 앞에서 늘 겸손하고 “환자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어떤 것도 거부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가진 그를 믿고 전국 각지에서 많은 환자들이 오늘도 그를 찾고 있습니다. (062)225-9626.

광주/글·사진 권복기 기자 bokkie@hani.co.kr

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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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도서관에 갔다. 혹시 못본 한국영화가 들어왔나 싶어 봤더니, ‘토요상설국악공연이라는 동영상CD가 있었다. 그렇다. 국립국악원의 그 공연이었다.


1994
년에 나는 말년병장이었다. 감옥과 같은 군대생활이니, 읽을 거리도 없었다. 샘터지, 국방일보, 육군지 아니면 전투교범같은 것들. 그것들이라도 아쉬운 마음에 꼼꼼히 봤는데, 육군지에 장병들의 교양을 증진시킬 목적으로 국악에 대한 기사가 났다. 국립국악원의 학예사가 기고한 글이었다. 그 기사로 최소한 한 사병의 교양과 상식은 증진이 되었다. 나는 그 연재가 끝나기 전에 제대를 했고, 민간인이 된 나는 국립국악원으로 편지를 보냈다. 마저 교양과 상식이 증대되고 싶다고.

 

친절한 학예사는 답장과 함께, ‘토요상설공연에 대한 안내까지 보내줬다. 제대후 어디 갈데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던 나는 사당역에서 버스를 내려서 국립국악원까지 걸어갔다. 남부순환도로는 차들의 도로였다. 늦가을 토요일 저녁. 인적없는, 차만이 가득한 길을 걸어가 나는 공연을 봤다. 청중은 대부분, 중고생들. 숙제인지 그들은 학교에 낼 티켓이 필요했다. 나는 티켓을 제출해야할 의무가 없었으므로 그들에게 선선히 내어주었다.

 

공연은 때로 지루했지만, -국악이 대개, 정악은 더 그렇지만- 아주 만족스러웠다. 특히나 대금과 해금의 소리는 가슴깊이 저며왔다. 가난하고 쓸쓸한 청춘에게 훌륭한 친구가 되어주었다. 어느새 10년도 훨씬 전의 일이나, 지금도 선명한 기억은 사물놀이 앉은반의 공연이었다. 서서하는 건 선반이고 앉아서 하는 건 앉은 반이다. 학교운동장에서 학생들이 어설프게 두들기던 꽹과리 장구 북이 아니었다. 10여분 남짓한 시간은 폭풍과도 같았다. 원시적인 타악기로 사람을 몰아가더니, 나중에는 온 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듯 하고, 심장이 쿵쾅쿵쾅 밖으로 튀어 나올 것만 같았다. 끝나고 나오는데 관중석에는 배낭여행객으로 보이는 금발머리의 푸른 눈들이 많았다.

 

한동안 다닌 기억은 나는데, 어쩌다 멀어지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입장료가 올라서였는지, 아니면 학교다니느라, 아니면 그 차들 가득한 남부순환도로를 걷기 싫었는지, 아니면 혼자 가서 혼자 앉아서 혼자 구경하고 혼자 돌아오는 것이 싫었는지. 만나면 헤어지는 법이니까.

 

그러다가, ‘토요상설국악공연을 오늘 도서관에서 만난 것이다. 씨디롬은 모두 4종류였다. 민요와 사물놀이, 그리고 해금 연주가 들어있는 것을 골랐다.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않다. 국악은 어떤 녹음과 재생장치로도 현장을 되살려주지 않는다. 그것은 국악자체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국악은 그 곳에 모인 사람들끼리 연주자와 청중이 같이 연주하고 같이 듣는 음악이다. 악기가 그러하며 노래 또한 그러하다. 그러니, 아무리 기술이 발전한다고 해도 그 녹음과 재생이 완벽할 수는 없다. 아쉽게도 사물놀이는 더욱 실망스러웠다. 반가움 컸기에 더 실망스러웠던 것일까? 하지만, 오랜만에 동창을 만난 것처럼, ‘토요상설공연은 나를 그때의 그곳으로 보내주었다. 공연이 끝나고 보니, 이곳은 그때의 거기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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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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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없는 이 곳, 사방이 지평선이다. 도심을 빼면, 5층건물도 드물다. 이곳 12층에 서면 비행기의 이착륙이 손에 잡힌다. 공항은 도심과 가깝다. 소음. 때문에 비행기는 그 길을 자주 바꾼다. 나누면 줄어드는 법이다.

 

오늘은 비행기가 북쪽에서 온다. 새벽에 내린 비가 개고, 구름은 하늘 뒤로 물러간다. 푸른 하늘, 부시다 못해 시린 하늘이 도시로 다가오고, 비행기는 그 하늘을 난다.

 

오른쪽 하늘 멀리 작은 점이 점점 커진다. 날개가 보이고, 동체와 꼬리날개가 드러난다. 그 덩치가 커지는가 싶더니, 바퀴도 내려와 있다. 햇빛을 받은 색깔은 은빛회색이다. 고요히 비행기는 고도를 낮춘다. 지난 밤의 고단한 비행을 마치고 이제 대지의 품으로 내려간다. 밤하늘과 별빛은 푸른 하늘과 구름이 되었다.

 

비행기는 교회첨탐과 공장의 굴뚝을 지나, 점점 더 커져간다. 커져가는 만큼 느려진다. 그리고는 마친내 가만히 땅에 안긴다. 살포시 내려앉은 비행기는 이제 시야에서 멀어져간다. 공항의 건물들 사이로 멀이 작아지는 수직꼬리날개만이 이제 비행기가 내렸음을, 간 밤의 비행의 끝났음을 말해준다.

 

나는 생각한다. 저 비행기에는 누가 타고 있을까? 비행기에서 내려 이 낯선나라에 들어오는 그들에게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외로움을 두고 내릴 수 있다면 그들의 비행은 좀 더 수월했을텐데. 하지만 우리의 숙명은 그럴 수 없나니, 언젠가 다시 돌아간다 해도 외로움을 두고 떠날 수는 없다. 비행기는 외로움을 내려주지 않기에. 오직 외로운 자만이 비행기를 탈 수 있기에.

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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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라면을 많이 먹는다. 하루 걸러 하나씩. 배가 고파서다. 도시락으로 충분치 않을 때면 가방속의 라면을 먹는다. 물론, 사먹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돈이 든다. 꽤나 비싸다. 이 곳의 음식은 결코 충분하지 않다. 나같은 대식가는 3인분이 필요할 것이다. 게다가 음식이라야 빵 맥도널드 또는 샌드위치같은-,  파스타. 가격도 비싸고 자주 먹을 만한 음식이 아니다. 물론 밥도 있다. 볶음밥, 스시롤로 불리는 김밥도 있다. 하지만 역시 비싸다. 양은 말할 수 없이 적다.

 

희한한 건, 내가 먹고 싶은 것이 비싸게 느껴질 때, 나는 돈이 더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안 든다는 것이다. 내가 돈이 많아서 이것 저것 다 사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음식값이 싸서 내가 사먹을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자기중심적인가? 내가 이 세상의 기준이라는? 아니다. 나는 안다. 여건과 환경을 내게 맞출 수는 없다. 그래서 나의 선택은 라면이 된다. 고량진미를 위한 돈보다다는 차리리 라면을 택하는 것이다. 가방속의 봉지라면. 스프를 뿌려 우드득 씹어먹는 생라면.

 

배가 고파 라면을 먹는 이들에게 축복이 있을지니. 굶주린 위장과 텅 빈 지갑은 가난한 마음의 표상이므로.

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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