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저녁. 오랜만에 학교강의를 그것도 하루종일 들었더니 심신이 피곤했다. 도저히 저녁준비할 마음이 나지 않았다. 일곱시가 다 되어서 식구들을 이끌고 나섰다. 목적지는 리X컴. 타겟은 알탕 또는 육개장.

 

십구시이십분 : 목적지 도착. 분위기가 이상하다. 토요일 저녁이라면 이 식당 뒷마당은 차는 서너대가, 테이블은 가득차고, 고기굽는 연기는 자욱해야하는데, 차는 한 대, 손님은 두어명. 고기굽는 연기는 커녕 냄새도 나질 않았다. 실내테이블로 가는 공간은 아주 깔
끔해졌다. 불안했다. 테이블에는 앞치마를 두른 두명의 아주머니가 앉아 계셨다. 예전의 그 분들이 아니다. 아~ 이런..............

 

십구시삼십분 : 목적지는 스X라로 변경되었다. 타겟은 해장국. 아이들 셋을 내리고 태우는데도 한참이 걸린다.

 

십구시사십분 : 해장국집 만원. 젖먹이 아이를 데리고 들어갈 수가 없다.

 

십구시오십분 : 삼차 목적지는 X간X추. 아내 얼굴은 이미 굳어 있다.

 

이십시이십분 :  자리나는데만 해도 한참이 걸렸다. 아이들과 먹을만한 메뉴가 없다. 메뉴고르기를 포기하고 식당을 나섰다. 말이 없던 아내가 나즈막히 중얼거렸다. '두번다시 밖에서 먹나 봐라' 난 못들은 척 했다.

 

이십시삼십분 : 집에서 출발한지 한시간 삼십분만에, 네번째 식당에서 감자탕을 시키는데 성공했다.

 

이십시사십분 : 아내는 젖 먹이느라 말이 없다. 아이들도 먹느라 말이 없다. 내 머리속은 온갖 것들을 저주하며 짜증내느라 말이 없다.

 

이십일시십분 : 식당을 나섰다. 짜기만 한 음식에 속은 쓰리다. '여보, 미안하오. 영 미안하게 되었소, 까탈부려서' 입속에서 맴돈다.

 

이상 지난 토요일에 있었던 실화입니다. 후기를 말씀드리자면, 집에 돌아와서 씻지도 않고 잤습니다. 시드니와 호주의 모든 것을 저주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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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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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제가 어렸을때 얘기입니다.

 

토목공학과를 다니는 사람에게는

"고속도로커브구간에서 안식각은 어떻게 적용이 되나요?"

 

공예과를 다니는 사람에게는

"그럼 항아리를 만들때는 전기요를 쓰나요? 개스요를 쓰나요?"

 

식품회사에 다니는 사람에게는

"안식향산나트륨은 뭐에 쓰나요?"

 

요렇게 물어보면, 대개 반응은

"아니, 그런걸 어떻게 알아요?"

 

소위 그쪽 업계용어를 어떻게 아냐는 놀라운 반응인데, 저로서는 그 반응이 오히려 놀라웠던 것이,

안식각은 고등학교 기술교과서에 나오는 말이고, 전기요나 개스요도 역시 교과서에,

안식향산나트륨은 모든 빙과류 겉포장지에 어김없이 적혀있는 말이니 그걸 모를 수 있다는 것이 제게는 이상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새우깡포장지에는 주요성분 원산지표기 공장이 어디있는지 소비자피해배상의 관련법규나 절차등등이 다 적혀있으니, 안식향산나트륨과 식용색소3호 식용색소5호는 그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제게는 숟가락 젓가락같이 자연스러운 단어였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아니, 그런걸 어떻게 알아요?' 라니요. 새우깡뿐만 아니라 양파링봉지에도, 농심뿐만 아니라 롯데 꼬깔콘봉투에도 다 있는 그런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걸 어떻게 아냐니요?

 

저는 그런 사람인 것이지요. 글자가 있으면 그걸 다 읽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문자는 다 읽습니다. 그건 그렇게 해야 하는게 아니고 그냥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한때 전자제품 사용설명서가 문고판 책보다 두꺼운 시절이 있었는데, 저는 그 매뉴얼을 다 읽어야 잠을 잤습니다. 글자가 있으면 읽고,  졸릴 때 책을 읽으면 잠이 달아납니다.

 

국민학교때 수업은 재미없고 책상서랍속에 책을 넣고 읽다가 선생한테 뺐기고, 그럼 또 다른 책이 나오고, 또 뺐기고 또 다른 책이 있고. 한 시간에 세번까지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씨디 플레이어가 두 개가 있습니다. 다음에 나갈 CD를 미리 넣어두어야합니다. 책을 읽다가 씨디를 넣어놓질 않아서 방송사고를 내기도 했습니다.

 

이런 제게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니 책을 읽자는 둥, 일본사람들은 다들 책 읽으면서 출퇴근한다는 둥, 한국사람들의 독서량은 일년에 몇 권에 불과하다는둥, 우리는 책을 읽어야 어쩐다는 둥 하는 얘기는 이해하기 힘든 캠페인이었습니다. 제 귀에는 밥을 먹어야 배가 안 고프다는 얘기와 다를게 없었으니까요. 돈이 없어서 책을 못 사는게 문제지 어떻게 책읽기가 캠페인의 대상이 되는가 말입니다.

 

그랬다가 서른 즈음에 어떤 계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이젠 책을 끊자. 책에서 얻을 수 있는 답은 다 얻었다고. 결심이야 결심일뿐이고 도서관엘 좀 덜 다녔다뿐이지 '읽으면서 사는 삶'은 여전했지요. 어쩌면 더 했는지도 모릅니다. 인터넷에는 읽을거리가 널려있으니까요.

 

그랬다가 사십이 된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책을 읽는게 바로 병통이구나 하는 것을요. 책을 읽는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지만, 책을 통해서는 결코 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책을 읽는다고 해서 답을 얻는 것도 아니고,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해서 답을 얻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책읽는 사람들은 더 큰 장애물에 가로막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제 아이들이 책읽기를 좋아할런지 싫어할런지 아직은 모릅니다. 싫어하면 싫어하는대로 놔둘 것이고 좋아하면 좋아하는대로 놔둘 것입니다. 책을 안 읽어도 행복한 삶을 사는데는 아무 지장이 없고,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더 바람직하기도 하지요. 책을 좋아한다면 역시 또 내버려둘 겁니다. 고전 몇 개면 평생 두고 읽을만하고, 그리고 책을 읽어봐야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테니까요.

 

그러니 책을 읽자는 캠페인도 또 읽지 말자는 캠페인도 필요없겠네요. 하려도 해도 되는게 아니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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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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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안의 삼성

소선재에서 2011. 2. 25. 16:08

냉장고를 바꿨다. 새 냉장고를 산 것이다. 지난 냉장고는 5년된 삼백사십리터짜리 엘쥐제품. 1년도 전이다. 냉장고가 시키지도 않은 정수기기능까지 갖춘 것은. 냉장고안은 언제나 홍수였고 하루에 두 번씩 냉장고 앞에 놓아둔 걸레를 쥐어짜야했다.

그러다가 이사를 하고 곧이어 냉장고로부터 좋은 소식과 안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먼저 좋은 소식. 냉장고가 정수기 기능을 스스로 멈췄다. 더 이상 주방에 홍수는 없다.
다음으로 나쁜 소식. 냉장고가 냉장기능을 멈췄다. 오렌지쥬스는 따뜻했다.

수리기사 아저씨는 이백불정도 얘기하더니, '새거 사시는 것도 괜찮아요'라고 말을 끝냈다.

급한 건 구십리터짜리 삼성냉장고에 집어넣었다. 문 하나짜리 냉장고다. 몇년전 누가 이사가면서 버려온 것을 주워온 것이다. 아내에게 아직도 말 안한 것은 이 냉장고를 청소할때 냉장고뒤에서 죽은 쥐가 있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차고에 넣어두었을때 쥐께서 마지막 자리로 냉장고모터옆을 선택하신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저기 저 푸른기와집에 사시는 쥐님은 어느자리를 택하실까나? 빨리 택하실수록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냉거야 아니 냉장고(둘째딸은 냉장고를 냉거야라고 한다. 은근 중독된다. 냉거야)를 사러 갔다. 아내와 나는 말한 것도 아닌데, 엘쥐냉장고는 처다보지도 않았다. 1년만 따져도 하루에 두번씩이면 삼백예순다섯번을 아내와 나는 걸레를 쥐어짰어야했다는 계산이다. 엘쥐냉장고덕분에 말이다. 아내의 두꺼워진 팔뚝에는 아마 그 탓도 컸으리라.

미쯔비시는 자동차만 만드는지 알았더니 냉장고도 있다. 피셔 뭐시기도 있고 웨스팅하우스도 있고 또 뭣도 있고 뭤도 있는데, 한국에서 삼십년넘게 산 나는 엘쥐가 아니면 쌤성. 대안이 없다.

텔레비젼도 삼성이다. 전에 쓰던 텔레비젼은 TEAC. 나름대로 한국에서도 많이 보던 상표였고 가격도 저렴해서 브라운관 텔레비젼을 샀다. 한 3년쯤 지나니 화면이 온통 슈렉색깔이 되어버렸다. 뒤통수를 몇번 쳐주면 빨간색이 제대로 나왔는데, 나중에는 수백번을 두드려도 반응이 없었다. 결국엔 텔레비젼뒤에 구멍을 뚫고 나무막대기를 쑤셔넣어서 전자빔쏘는 부분을 건드려줘야했다. 이게 텔레비젼을 바꾼 이유는 아니다. 아이들이 없었다면 늙어 죽을때까지 나무막대기로 전자총을 쑤셔주면서 텔레비젼을 봤을 것이다. 아이들 프로그램은 에이비씨투에서 하는데 이 채널은 디지털티브이에서만 볼 수 있다. 그래 엘시디티브이를 사자. 여기서 아내의 강력한 의견. "삼성게 예뻐요"

텔레비젼만은 아니다. 5년된 컴팩 노트북은 접히질 않는다. 모니터는 비가 내리다 못해 글자가 보이질 않는다. 첫째 아이가 책상에서 바닥으로 자유낙하시킨 탓이다. 한국에 갔더니 전자제품이 왜 이리 싼겨? 한국에서 홈쇼핑을 보다가 (이것도 삼성엘씨디티브이였다) 전화기를 들었다. 지금 이 컴퓨터도 한국에서 건너온 삼성 노트북.

에스에이엠에스유엔지. 이 일곱개의 알파벳은 우리 집 구석구석에서 눈에 띈다. 얼마전에 산 레이져프린터도 삼성이다. 삼성거를 사려고 한건 아닌데, 딕 스미스에서 제일 싼 것이 삼성거였다. 108키보드도 삼성. 마우스도 삼성. 노트북가방도 삼성. 아이들 방에 가보니 아이들 책도 삼성출판사(아~ 이건 아닌가?)

호주에서 사는 내가 이런데, 한국에서 사는 사람들은 어떨까? 청소기, 믹서기, 전자렌지, 에어컨, 선풍기, 핸드폰, 전화기, 카메라, 세탁기 하다못해 헤어드라이어에 면도기까지도 삼성이 아닐까 싶다.

나는 왜 호주에서도 삼성제품을 사는가? 익숙해서? 그렇기도 하다. 가격이 싸서? 이 이유도 크다. 그러면 왜 하이얼을 안 사고? 글쎄, 아무래도 삼성이 품질이 낫지 않을까싶기도 하고........

이씨집안의 저열한 행태에 한심해하면서도 나는 삼성을 산다. 나같은 사람때문에 삼성은 망하지 않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반대로 불매운동으로 삼성이 망할 수 있을까? 만약 삼성이 망한다면 그건 불매운동탓이 아니라 삼성의 탓일것이다. 세상일 알고보면 모두 내 탓 아닌게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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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윤이는 다음달이면 두돌이 된다. 머리도 많이 길었다. 40도를 넘는 여름에 긴 머리는 땀띠의 일등공신이었다. 허나 아름다움을 위해서라면. 승윤이의 긴 머리는 살아 남았다.

두돌이 안 된 아이. 아직도 기저귀를 하고 있으니 아가라고 할 수 밖에. 아가와의 커뮤니케이션은 쉽지 않다. 아직도 울음은 가장 주요한 의사표시이다. 허나 인간이 되어가는 두 돌 아이. 아빠와 엄마로부터 열심히 말을 배운다.

"쑹유니 쑹유니 쩜쩌"
"건포도 저기 있네. 갖다 먹어"

"쑹유니 쑹유니 쩡거야"
"밖에 비오잖아. 자전거는 내일 타자"

"쑹유니 쑹유니 냉꺼야"
"승윤아~ 냉장고 문 열어두면 안 되지"

"쑹유니 쑹유니 찌리이"
"씨리얼 다 먹었어. 없어"

"쑹유니 오또삐이"
"아니. 따라해봐. 오. 토. 바. 이."
"오또삐이"
-_-;;;;

내가 웃자 두살 위의 오빠가 옆에서 거든다.
"아니. 오! 토! 바! 이! 오토바이라고 해야지. 오빠 따라해봐 오!토!바!이!"
만 네살 오빠는 아직 유아의 발음이 섞여있으나 제법 정확한 발음이다. 기억이나 할까? 저도 동생만할때는 트럭을 '어럭'이라고 했다는 것을.
얼른 얼른 더 커라. 쩜쩌가 건포도가 되고 쩡거야가 자전거가 되는 날을 아빠는 학수고대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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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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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을 바꿨다. 식탁을 새로 산 것이다. 하이 글로스라고 하더니 정말로 반짝거렸다. 식탁의 브랜드는 환타스틱. 환타스틱가구는 품질은 모르겠으나 가격만큼은 환타스틱하다. 어쩌면 환타스틱이라는 이름에는 품질도 가격만큼 환타스틱하고 싶다는 창업자의 소망이 깃들어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환타스틱 가구점에서 산 이 식탁은 정말로 환타스틱했다. 오후에 넘어가는 해가 식탁에 반사되어 정말로 눈이 부셨던 것이다. 거울에 버금가는 그 식탁에 비친 해를 보느라 하마터면 눈이 멀 뻔했다. 환타스틱하다 못해 블라인드가 될 뻔하다니.

이 식탁이 환타스틱하다고 해서 덩달아 엘레강스할거라 생각하면 그건 큰 오산이다. 물건을 보면 그 주인을 아는 법이다. 심플하고 단아한 나는 엘레강스한 스타일은 아니니까.

한편 이제 우리집의 식탁 자리를 물려주게 된  구 식탁을 보니, 정말 이거야 원. (IKEA라고 쓰고 나는 이거야라고 읽는다) 6년전 시드니에 처음 와서 이거야(IKEA) 가구점에서 산 식탁이다. 가격도 기억이 난다. 이 자리에서 공개하지는 않겠다. 그건 나의 최소한의 자존심이다. 다만 이거야(IKEA) 가구점에서 제일 쌌다는 것만 일러둔다.

이제 식탁이라는 이름을 넘겨주고 하나의 널빤지 신세로 전락하게 된 이거야 식탁에는 지난 6년간 나와 나의 가족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환타스틱 식탁과 같은 흰색이지만 도저히 같은 색깔이라고는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다. 곳곳에 칠은 벗겨지고, 그 중에는 내가 밥상을 차릴때 우당탕 던진 그릇때문에 생긴 생채기가 절반이고, 밥먹으면서 함부로 젓가락과 숟가락을 부린 흔적이 나머지 반이다. 삼분의 일 지점에 커다랗게 배겨진 시꺼먼 자국은 살던 집을 아무개에게 보름간 빌려준 흔적이다. 계약서에 냄비받침을 써야한다고 명시해놓았건만 아무 신문지나 깔았던 듯 하다. 눌어붙은 종이는 아무리 벗겨내도 지워지지 않았다.

모서리에는 아이들 머리가 깨지지 않도록 포장비닐을 대었다. 지금은 너덜너덜해졌다. 아이들은 또한 식탁다리에도 세심하게 크레파스칠을 해 놓았다. 생각해보니 이 식탁은 신혼부부의 밥상으로 시작해서 한 애기가 처음으로 이유식을 먹은 식탁이었고, 나중에는 개구장이들의 다이빙점프대까지 되었다. 뿐이랴 필요에 따라 책상과 작업대도 되었다.

그런 식탁이 이젠 널빤지가 되어 더 이상 식탁으로 불리질 못하고 나의 손에서 떠나가게 되었다. 살다보면 만남이 있고 헤어짐이 있고 오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이 있는 법이다. 그러고 보면 나의 눈을 멀게 할 뻔한 지금 이 거실 한구석의 환타스틱한 식탁도 더 이상 환타스틱하지 않게 되는 때가 올 것이다. 그러면 지금 이거야 식탁이 널빤지가 되었듯 환타스틱 식탁도 또 하나의 널빤지가 되어가겠지. 그때까지 환타스틱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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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지 적

소선재에서 2011. 1. 25. 20:16



카를로스 카스타네다의 '돈 후앙의 가르침중에서'


1962년 4월 8일 토요일


지금까지 둘이서 대화를 해 나오는 가운데 돈 후앙은 “앎의 사람(知人)”이라는 말을 자주 썼고 또 그 말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설명해 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에 대해 설명을 부탁했다.


“앎의 사람(知人)은 모든 고난을 마다 않고 진실되게 배워 나가는 사람을 뜻한다.”

그가 말했다.


“성급히 굴지도 않고 그렇다고 꾸물대지도 않으면서 힘과 지혜의 비밀을 끝까지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사람이 곧 앎의 사람(知人)이다.”

“누구나 앎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아니다. 아무나 가능한 건 아니다.”

“그렇다면 앎의 사람이 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자신에게 있는 네 가지 타고 난 적에 도전해서 이겨야 한다.”

“그 네 가지 적들만 물리치면 앎의 사람이 됩니까?”

“그렇다. 누구든지 그 네 가지 적들을 물리칠 능력만 있으면 자신을 앎의 사람이라 여겨도 좋다.”

“그렇다면 이 세상 누구라 해도 그 적들만 물리치면 앎의 사람이 될 수 있단 말인가요?”

“그렇다. 그 적들을 물리친 사람이면 누구든지 앎의 사람이 된다.”

“하지만 그 적들과 싸우기 전에 꼭 필요한 요구 조건 같은 것은 없습니까?”

“없다. 누구든지 앎의 사람이 되기 위해 시도할 수는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불과 몇 명만이 성공한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앎의 사람이 되기 위해 배워 나가는 도중에 마주치는 그 적들은 절대 만만치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적들에 굴복하고 만다.”

“그것들은 대체 어떤 적들입니까. 돈 후앙?”


그는 적들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길 거부했다. 단지 내가 그 주제에 대해 배우려면 아직 멀었다고만 말했다.

나는 그 화제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나도 앎의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누구도 그것에 대해선 확실히 말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가부간의 어떤 조짐이라도 알고 있으면 말해 달라고 고집을 부렸다.

그는 그것이 순전히 내가 그 네 가지 적들과 싸워 이기느냐 아니면 무릎을 꿇느냐 하는 데에 달려 있으며 싸움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예언한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나는 다시 그가 갖고 있는 마법이나 예언 능력을 이용해 그 싸움의 결말을 미리 알 수는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어떤 수단으로도 그 결과는 알 수 없다고 단호히 말했다. 왜냐하면 앎의 사람이 되는 일은 일시적인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내가 그 점에 대해 좀 더 설명을 부탁하자 그는 말했다.

“앎의 사람이 되는 것은 영원한 일이 아니다. 실제로는 누구도 앎의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그 네 가지 타고난 적들을 물리치고 나서 잠깐 동안만 앎의 사람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 네 가지 적이 무엇인지 꼭 좀 말씀해 주십시오, 돈 후앙.”

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고집을 부렸지만 그는 화제를 바꾸어 다른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1962년 4월 15일 일요일

떠날 준비를 마치자 나는 다시 한번 그 네 가지 적들에 대한 질문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나는 이번에 떠나면 오랫동안 다시 오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그가 말해 주는 것을 받아 적어가서 떠나 있는 동안 나 혼자서 그 얘기들을 생각해 보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고 설득했다.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드디어 얘기를 시작했다.


“처음으로 배움을 시작할 때는 누구나 목적의식이 뚜렷하지 않다. 몇 가지 목적이 있다 해도 결점 투성이고 의지도 굳지 않다. 그는 배움의 고초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실현될 수 없는 보상들만을 꿈꾸고 있기 십상이다.

그는 천천히 배워 나가기 시작한다. 처음에 조금씩 조금씩, 그러다 큰 덩어리에 부딪힌다. 그때 그의 생각은 쉽게 분열을 일으킨다. 그가 배우는 것은 애초에 그가 머리 속으로 그리고 상상했던 것과는 딴판이다. 따라서 그는 겁을 먹기 시작한다. 배움이란 누구한테나 전혀 상상 밖의 것이다. 배움의 모든 단계들이 다 새롭기만 하다. 그러니 자연히 두려움이 산처럼 쌓여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다. 큰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마음 속에 있는 첫 번째 적과 마주치게 된다. 바로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이야말로 무시무시한 적이다. 뿌리칠래야 뿌리칠 수도 없고 싸워 이기기도 힘이 든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그 놈이 눈을 번뜩이며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두려움에 겁을 집어먹고 달아났다면 그것으로 문이 닫히고 만다.”


“겁을 먹고 도망가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다른 것은 둘째 치고 그런 사람은 절대 배울 수가 없다. 그는 절대 앎의 사람이 될 수 없다. 아마도 그는 약한 자를 못살게 구는 인물이나 아니면 악의는 없지만 겁에 질린 위인으로 전락해 버릴 것이다. 어쨌든 그는 패배자가 된 것이며, 첫 번째 적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바라던 것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두려움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달아나지 말아야 한다. 달아나지 말고 그 두려움에 도전해서 다음 단계, 그 다음 단계로 배움을 계속해야 한다. 두려움이 아무리 크게 밀려와도 멈추어선 안된다. 이것은 규칙이다! 그러다 보면 드디어 첫 번째 적이 물러가는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그때 비로소 자신감이 생기고 의지가 더욱 강해진다. 그때는 배움이 더 이상 두려운 일이 아니다. 이 기쁜 순간이 찾아왔을 때 비로소 자기가 첫 번째 적을 물리쳤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순간이 한꺼번에 찾아옵니까, 아니면 서서히 찾아옵니까?

“서서히 찾아온다. 하지만 두려움은 일단 물러가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사라진다.”

“하지만 또 새로운 상황이 닥치면 다시 두려워지지 않을까요, 돈 후앙?”

“그렇지 않다. 일단 두려움을 정복하고 나면 평생동안 그것으로부터 해방이 된다. 왜냐하면 두려움 대신 명석한 정신이 두려움을 없애 준다. 이 때가 되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이고, 그 원하는 것들을 어떤 방법으로 성취해야 할지를 분명히 알게 된다. 따라서 새로운 단계의 배움을 스스로 기대하게 되고, 매사를 분명하게 이해한다. 그는 어느 것 하나도 비밀에 싸여 있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이렇게 해서 그는 두 번째 적과 만나게 된다. 바로 명석함이다! 명석한 정신은 얻기도 힘들고 일단 얻기만 하면 두려움을 물리쳐주긴 하지만 동시에 마음의 눈을 멀게 한다.

명석함 때문에 그는 자기 자신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분명히 바라볼 수 있기에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자신감을 얻는다. 분명하기 때문에 그는 용기도 생기고 어떤 장애물에도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하나의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 아직 불완전한 상태에 불과하다.

만일 스스로에게 확신을 불어 넣는 이 명석한 정신에 자신을 송두리째 내맡긴다면 결국 두 번째 적에 굴복하는 셈이 되며, 거기서 배움이 중단되고 만다. 그는 인내를 갖고 참고 기다려야 할 때에 가서 마구 돌진해 들어갈 것이며, 돌진해 들어가야만 할 때에 마냥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꾸만 발을 헛디뎌 마침내 더 이상 배움을 지속해 나갈 수 없는 결말에 이를 것이다.”


“거기서 패배한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돈 후앙? 그는 죽게 됩니까?”

“아니다. 죽지는 않는다. 다만 더 이상 앎의 사람이 되려는 시도를 못하게 될 뿐이다. 앎의 사람이 되는 대신 그는 어릿광대나 떠돌아 다니는 싸움꾼으로 전락해 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값비싼 대가를 지불한 정신이 또 다시 어리석음이나 두려움으로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살아있는 한 그는 여전히 명석한 정신을 갖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무엇을 배우거나 갈망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에 패배 당하지 않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두려움에 대해서 했던 것과 똑같이 해야 한다. 자신의 명석한 정신에 도전해서 그 명석한 정신을 오로지 보는 데에만 이용하고 새 배움의 단계로 나아가기 전에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고 깊이 심사숙고해야 한다. 그러면 자신의 명석함이 오히려 눈의 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할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이 상태가 바로 두 번째 적을 물리친 상태다. 이 위치에 서면 어떤 것도 그를 해칠 수가 없다. 하나의 오류나 눈의 티로서가 아니라 그는 진정한 힘을 지니게 된다.


이 단계에 도달하면 그는 자신이 오랫동안 추구해온 힘이 드디어 자기 것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그는 그 힘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그의 협력자는 그의 명령에 따르고, 그가 원하는 것이 곧 법칙이 된다. 그는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본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그는 힘이라는 세 번째 적과 만나게 된다.

힘은 다른 적들 가운데서도 가장 강력하다. 따라서 당연히 거기에 굴복하기도 가장 쉽다. 어쨌든 그는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누구도 그에게 대항할 수 없다. 그는 명령을 내리며 일부러 위험한 상황에 뛰어들어 주위 모두를 자기에게 복종하게 만든다. 그는 이미 대가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 있는 사람은 세 번째 적이 곁에 다가왔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러다 돌연 눈치도 못 챈 사이에 싸움에 지고 만다. 이 세 번째 적은 그를 잔인하고 변덕많은 인간으로 바꿔 버린다.”


“그렇게 되면 그는 자신의 힘을 잃게 됩니까?”

“아니다. 명석함이나 힘은 잃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그를 앎의 사람과 구별할 수 있습니까?”

“힘과의 싸움에서 진 사람은 끝내 힘을 이용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 채 눈을 감는다. 그러니 힘은 오히려 그의 운명에 짐 지워진 무거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는 명령을 내리지 못하며, 언제 어떻게 힘을 이용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어떤 싸움이든지 일단 지고 나면 그것으로 영원한 패배가 됩니까?”

“물론 그것으로 끝장이다. 어떤 적에게든지 일단 패배하고 나면 더 이상 아무 소용이 없다.”

“이를테면 힘과의 싸움에서 진 사람이 자기 실수를 알고 방향을 바꿀 수는 없습니까?”

“불가능하다. 일단 굴복하고 나면 그것으로 끝이다.”

“하지만 일시적인 힘에 눈이 멀었다가 다음 순간 정신을 차릴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아직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그가 여전히 앎의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뜻이다. 더 이상 노력하지 않을 때 자신을 포기할 때 사람은 패배하게 된다.”

“그렇다면 돈 후앙, 몇 년 동안 두려움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다가 마침내 그것을 극복하는 일도 가능합니까?”

“말은 쉽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하다. 일단 두려움에 굴복하고 나면 다시는 그것을 정복하기가 힘들다. 왜냐하면 배우는 것을 겁내고 더 이상 시도하려 들지 않을 것이니까. 하지만 두려움 속에서도 몇 년 동안 굴하지 않고 계속 배우려고 시도한다면 마침내 두려움을 정복하고 말 것이다. 그 상태는 자신을 두려움에 내맡긴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이 세 번째 적을 물리칠 수 있습니까? 돈 후앙?”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진해서 힘에 도전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갖고 있는 힘이 실제로는 절대 자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항상 자기 자신을 단속하고 자기가 터득한 모든 사실을 조심스럽고 신중히 다루어야 한다. 자신을 단속하지 못하는 명석함과 힘이 하나의 오류보다 더 나쁘다는 사실을 깨우치기만 하면 스스로 자기 속의 모든 것을 점검하는 단계에 이를 것이다. 이때 비로소 언제 어떻게 자신의 힘을 이용해야 할지를 알게 된다. 이 상태가 바로 세 번째 적을 물리친 상태다.


이리하여 그는 배움의 마지막 여행에 접어든다. 그리고 전혀 사전 경고도 없이 마지막 네 번째 적과 부딪히게 된다. 바로 늙음이라는 적이다! 이 적은 인정사정이 없다. 누구도 완벽히 이 적을 물리칠 수 없다. 다만 계속해서 싸워 나갈 수만 있을 뿐이다.

이 단계에선 두려움도, 서두는 명석함도 찾아볼 수 없으며, 자신의 모든 힘을 잘 통제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휴식을 취하고 싶은 끝없는 욕망이 일어나는 단계이기도 하다. 만일 이 욕망에 굴복해 쓰러져 눕거나 모든 걸 깨끗이 잊으려 한다면, 만일 피곤하다는 구실로 자신을 잊는다면 그는 결국 마지막 마당에서 패배하고 말 것이며, 그의 적은 그를 연약한 늙은이로 전락시키고 말 것이다. 그만 휴식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그는 모든 명석함과 지혜를 몽땅 공중에 날려 버릴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피곤함을 씻어내고 삶을 끝까지 철저히 산다면 그는 비로소 앎의 사람이라 불리워질 수 있다. 마지막 적, 늙음이라는 그 무적의 적과 싸워 이기는 순간 그는 앎의 사람이 된다. 그 순간 속엔 명석한 정신과 힘과 지혜가 다 녹아들어가 있는 것이다.”


카를로스 카스타네다: 페루 출신의 문화인류학자·작가. 멕시코 야키 인디언 주술사의 신비한 비밀에 관한 시리즈를 출간하여 미국 뉴에이지운동의 기수가 되었다. 1968년 《돈 후앙의 가르침》은  당시 베트남전쟁에 환멸을 느끼는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으면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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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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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edia.daum.net/culture/view.html?cateid=3000&newsid=20101203181040139&p=hani21

[한겨레21] [레드 기획] 높고 추운 곳에만 있는 영혼을 위로하는 풍경…
단단하게 준비한 '모험' 길에 서서 '완벽한 기쁨'을 얻으리라

콧속으로 들어오는 얼어붙은 대기가 가슴속까지 헹궈버릴 듯 청량한 날. 쌓인 눈으로 길이 지워진 능선에 첫 발자국을 찍어 새 길을 내며 걸었다. 귓전을 스치는 바람 소리와 발자국 소리만이 적막한 산길에 메아리를 만들었다.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발디딤에 집중할수록 목탁 소리처럼 청아하게 울려퍼지는 뽀드득 뽀드득 눈 밟는 소리, 나는 고행의 수도자처럼 앞으로 나아갔다. 호젓한 겨울산에는 이런 몰입의 즐거움이 더 크다. 무아의 경지로 걷다 문득 고개를 들면 눈앞에는 고사목과 앙상한 겨울나무 빈 가지에 눈부시게 피어 있는 상고대, 저 멀리 차고 투명한 대기 속으로 파도처럼 넘실대는 산줄기의 물결. 일상의 저잣거리에서 지친 영혼을 위로하고도 남는, 높고 추운 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풍경들. 그래서 산은 겨울산이다. 

목탁 소리 같은 '뽀드득' 소리

장터목산장 따뜻한 침상에서 단잠의 유혹을 뿌리치고 서둘러 어둠 속으로 걸어나간 새벽이었다. 장터목에서 묵은 사람들은 삼대가 적선을 해야 겨우 만날 수 있다는 천왕봉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길을 나서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는 전날 백무동에서 출발해 이미 천왕봉을 다녀왔고, 지리산 정상 일출은 여러 번 보았으니 음덕이라면 분에 넘치도록 받은 터였다. 그보다 요즘 지리산은 겨울에도 사람이 많아 호젓하게 걸으려면 잠을 줄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 멀고 높은 산에서까지 줄지어 걸어가야 한다는 것은 너무 서글프지 않은가. 새벽하늘에서 쏟아져내리는 별빛은 고드름처럼 차가웠다. 별빛에 머리를 두들겨맞으며 걷고 또 걸었다. 연하봉에서 삼신봉을 지나 촛대봉에 다다를 무렵 등 뒤로 천왕봉을 넘어온 해가 산을 붉게 물들였다. 별들이 하나둘 하늘빛에 녹아들 즈음 세석에 도착해 여유 있게 커피를 마셨다.

세석산장에서는 집에 두고 온 딸들에게 엽서를 써 부치기도 했다. 처음 장터목산장에 있던 '하늘 아래 첫 우체통'이라 부르던 빨간 우편함이 이제는 대피소마다 생겨난 것도 반가웠다. 미색 관제엽서에 엄마가 지나온 길을, 산장 처마에 매달린 고드름 녹아내린 물을 손가락 끝에 발라 수묵화처럼 잉크가 번지게 해서 그림으로 그렸다. 겨울 지리산에서 누린 행복을 그렇게라도 산 아래 따뜻한 방구석에 웅크리고 있을 딸들에게 오롯이 전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꿈결 같은 산행을 마치고 백무동으로 내려왔을 때다. 다리에 힘이 풀린 채 터벅터벅 걸어 들어간 하산길 식당에서, 딸애 또래 아이 둘을 데리고 산에 오를 채비를 하는 가족을 만났다. 어른은 등산화라도 갖춰 신었지만 아이들은 운동화 차림이었다. 내 발이 다 꽁꽁 얼어버릴 것처럼 마음이 시렸다.

산악잡지 기자로 일하던 시절, 신발 때문에 고생한 경험이 떠올랐다. 60ℓ 배낭의 헤드가 뒤통수 위로 솟아오를 정도로 등짐을 꾸려 출근하던 날, 며칠 자리를 비우게 될 사무실 책상을 정돈하고 일어서려는데 뭔가 허전했다. 방풍재킷 위에 묵직한 배낭을 덧옷 걸치듯 메고서 허리와 가슴께 버클을 단단히 조이면, 등 뒤에서 누군가 듬직하게 안아주는 듯 편안하다. 나는 겨울산으로 가는 큰 배낭을 멜 때 그 느낌이 좋았다. 그런데 무거운 등짐과 달리 발이 너무 가벼웠다. '비브람' 창을 댄 중등산화를 신고 있어야 마땅한데, 아뿔싸! 구두를 신은 채 출근한 것이었다. 경기도 광주에 있던 집에서 서울까지, 긴 시간 내내 버스와 지하철 안에서 그 큰 배낭을 메고 뭇사람들의 부러운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우스꽝스럽게 부조화한 차림 때문이었다. 대중교통을 타기 전에 갈아 신으려고 운전석 옆에 챙겨둔 중등산화를 깜박 잊고 온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사무실에 있는 후배가 신고 있던 경등산화를 빌려 신고 산으로 가야 했다.

그때 눈 덮인 산길을 오르내리면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발등까지 덮는 고어텍스 게이터가 있었지만 천으로 된 등산화를 뚫고 들어오는 냉기와 눈 녹은 물을 다 막아내지는 못했다. 폭설을 뚫고서 어둠에 갇힌 대피소에 도착해 신발을 벗고 마룻바닥에 젖은 양말로 발도장을 찍으면서 내 건망증을 얼마나 자책했던지. 눈비에도 끄떡없는 중등산화 속에서 나온 남들의 보송보송한 양말들이 얼마나 부럽던지. 인생도 그러하지만 등산은 이런 실수의 경험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 하지만 산에서는 작은 실수도 자칫 큰 위험을 부를 수 있다.

답례는 뒤나 옆으로 해도 된다

나는 아이젠을 준비하는 그 가족에게 산에 눈이 많다고 일러주었다. 그런데 그들에겐 바짓가랑이와 신발 사이를 보호해줄 게이터도 없는 모양이었다. 비닐로라도 신발을 감싸겠다며 검정 비닐봉지를 여러 장 배낭에 챙겨넣고 있었다. 나는 눈 녹은 물이 묻은 게이터를 벗어 탈탈 털어서 망설임 없이 아이에게 주었다. 어차피 산을 내려가면 새 게이터를 살 작정이었다. 내가 산에서 곤경에 처했을 때 대가 없이 도와주던 선배들에게 조금이나마 빚을 갚는 기분이었다. "답례는 꼭 앞으로 하지 않고 뒤나 옆으로 해도 된다"고 했던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 말씀처럼 말이다.

겨울산에서 그 가족이 겪게 될 고난과 위험은 분명 아이에게도 큰 공부가 될 것이다. 하지만 공부시키자고 어린아이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어리석다. 신발이 눈에 젖는 것 말고도 무모하다시피 용감한 그들 앞에 닥쳐올 고통이 빤히 내다보였다. 두툼한 우모복을 입은 아이 옷차림도 마음에 걸렸다. 겨울산에서 우모복을 입은 채 땀을 뻘뻘 흘리며 걷는 초보자를 종종 만난다. 대개 '추우면 껴입는다'는 생각만 할 뿐인데, 산에서는 곤란하다. 오버트라우저나 우모복은 배낭 위쪽 꺼내기 쉬운 곳에 넣어두고 걸을 때는 최대한 가벼운 복장으로 움직여야 한다. 등산을 하는 동안 우리 몸은 자가발전기처럼 열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걷다가 쉬는 동안에는 땀이 식으면서 체온을 빼앗기지 않게 보온의류를 꺼내 입고 열량을 보충할 간식을 챙겨먹어야 한다. 또 반드시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목표한 산장이나 하산 지점에 도착해야 하는데, 그들은 이미 해가 중천을 지나갔는데 산에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상자 기사 참조).

그럼에도 모험에 나선 가족은 보기 좋았다. 사춘기 아이들이 선뜻 부모를 따라 힘든 길을 나선 것만으로도 대견했다. 내가 홀리듯 걸어왔던 산길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될까. 산장에서 호호 불며 라면을 먹을 아이의 발그레한 얼굴은 또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하지만 한겨울에도 실내에서 반팔 차림으로 지내면서 비닐하우스에서 석유로 길러내는 철 모르는 채소와 과일을 배불리 먹으며 자랐을 요즘 아이들에게 겨울산은 엄혹할 것이다. 

스스로 날씨를 만들어내는 겨울산

"등산에서는 분명 위험과 곤경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이것 때문에 그 어떤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마음의 평온과 정신적 교감을 얻을 것이다." 등산가들의 바이블이라 부르는 < 마운티니어링 > 제1장, 등산의 첫걸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실 해발 2천m도 안 되는 우리나라 산에서 만나는 '위험과 곤경'이 뭐 그리 치명적일 게 있단 말인가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모험'을 추구하는 등산의 무대로 우리 산들은 아쉬운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겨울산'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높은 산은 '스스로' 날씨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1969년 설악산에서 '하늘의 한구석이 뚫어져 내리는 듯한 폭설'로 산악인 10명의 목숨을 앗아간 죽음의 계곡 눈사태나 1971년 11월 초겨울과 1983년 4월 꽃샘추위 속 북한산 인수봉에서 로프에 매달린 채로 각각 7명씩 얼어 죽은 사고는 우리나라 산에도 얼마나 치명적인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를 깨우쳐준다. 인수봉은 고작 해발 810.5m다. 그런데 이런 사고는 모험을 즐기는 전문 산악인들 세계에서만 일어나는 일일까. 등산이 대중화되면서 오히려 사소한 부주의로 목숨을 잃는 초보적인 조난 사례가 늘고 있다. 나는 평소 자기 집처럼 드나들던 도봉산에서 갑작스레 쏟아진 눈보라에 방향감각을 잃고 링반데룽(환상방황)으로 사경을 헤맨 친구도 보았고, 겨울 한라산에서 만난 윗세오름 휴게소 관리인이 눈보라 치는 밤에 화장실에 갔다가 코앞에 있는 숙소를 찾지 못해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아 밤을 새웠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는 히말라야 8천m 고봉을 오르내린 전문 산악인이었는데도 그랬다.

휴대전화 속까지 들어온 첨단위성항법장치가 '지도의 공백지대'를 하나둘 지우고 있는 세상이다. 하지만 겨울산의 변화무쌍한 날씨는 예사로운 장소도 순식간에 미지의 처녀지로 만들어버린다. 모든 것을 실시간으로 검색하고 정확하게 미래를 예측할 수 있을 것 같은 '스마트'082한 세상, 그러나 우리가 산을 찾아가는 이유는 그런 일상과 다른 무엇을 기대하기 때문 아닐까. 많은 등산가들은 그것을 '불확실성'이라고 말한다. 겨울산으로 가는 배낭이 크고 묵직해지는 것도 바로 '불확실성'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우리 국립공원 대피소들은 지금 과잉된 편의를 제공하는 것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그때 지리산 대피소에서는 온풍기를 틀고 모포를 빌려주고 햇반과 라면과 간식거리까지 팔고 있었다. 이 때문에 침낭도 없이 무턱대고 산을 올라오는 이가 많았다. 그래서일까, 예전과 비교하면 산장에 쌓이는 쓰레기도 너무 많았다. 아무리 대피소에서 화석에너지를 덜 쓰는 친환경에너지로 난방을 한다고 해도, 에너지를 많이 써서 실내온도를 높이는 것은 산을 산답게 지키는 일과 거리가 멀다. 걱정스러운 점은, 이런 과잉 서비스가 사람들로 하여금 산을 얕보게 하고 준비 없이 산에 오르게끔 부추겨 오히려 위험을 가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잉 서비스가 산을 얕보게 하진 않을까

사람들이 묵묵히 산을 향해 올라가는 것은 저마다 이유가 있다. 하지만 높고 골이 깊은 겨울산으로 가는 일은 누구에게나 극적인 모험의 출발일 것이다. 영국 등산가 조지 맬러리는 "모험의 대가는 완벽한 기쁨"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준비가 철저해야 한다. 아무리 강조해도 과하지 않다.

글·사진 김선미 < 살림의 밥상 > 저자·전 < 마운틴 > 기자

겨울산에서 기억해야 할 것

발이 시리면 모자를 써라

산에서 고도 100m를 올라갈 때마다 대략 기온이 1℃씩 떨어진다. 하지만 이것은 평균적인 수치일 뿐, 만일 산에서 땀이나 물에 젖은 옷을 입은 채로 강한 바람을 맞으면 평소보다 240배나 빠른 속도로 체온을 빼앗기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때 노련한 등산가들은 "발이 시리면 모자부터 써라"고 충고한다. 머리로 빼앗기는 체열이 전체의 절반이나 된다. 또 지치기 전에 먹어 열량을 보충하라. 겨울 배낭 속에는 산중 노숙을 하고도 살아남을 만큼 철저한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따뜻한 산장에 있는 모포만 믿고 무턱대고 올라갔다가 길을 잃고 날이 어두워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비상시에는 큰 배낭 속에 하반신이라도 집어넣고 웅크린 채 밤을 새울 각오와 대비가 필요하다. 그런데 초보자들은 정작 생명을 지켜줄 안전장비는 허술하고 무거운 먹을거리만 바리바리 싸들고 올라가다 제풀에 지쳐 정작 먹기도 전에 탈진한다. 그러므로 간식과 물은 꺼내기 쉬운 곳에 두고, 반드시 지치기 전에 보충한다.

겨울의 진경3

감질나는 햇살… 나는 참 많이 가졌구나

애끓는 사랑, 상고대 핀 덕유산길

겨울나무를 뒤흔든 세찬 골바람이 서릿발 그대로 얼어붙게 해 나뭇가지에 눈꽃을 피운 것이 상고대다. 삿갓재대피소에서 하룻밤을 묵고 남덕유산으로 가는 길, 해가 높이 떠오르기 전 아침 나절 잠깐 만날 수 있던 풍경. 하늘은 파랗고 얼음과 눈으로 꽃이 피어난 겨울나무는 눈부시다. 눈꽃터널이 이어지는 서쪽 비탈길과 해가 드는 동쪽 길을 넘나들며 걷는 이 길은 봄과 겨울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것 같다.

겨우겨우 겨울나기, 오대산 염불암의 너와집

오대산은 동서남북과 중앙의 오방위 높은 자리에 모두 부처를 모시고 있다. 전나무 숲길로 유명한 오대산 들머리의 월정사는 그 다섯 암자에 끼지 못한다. 홀로 푸르러 더욱 고독한 겨울 전나무 숲 그늘 아래 고요히 걸어 들어가고도 헛헛하면, 우퉁수를 끼고 있는 서대 염불암에 올라볼 일이다. 너와집 암자 뒤꼍 가득 쌓아올린 장작더미로 겨우겨우 겨울을 나는 소박한 절집이다. 툇마루에 앉아 감질나는 겨울 햇살을 쬐고 있으면 '나는 참 많이 가졌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곳이다.

검은 화구벽 덮은 흰 눈, 한라산

한라산 백록담을 둘러싼 화구벽은 검다. 검은 현무암이 흰 눈에 덮여 있고 배경인 하늘은 시리도록 파랗다. 사방이 온통 흰빛뿐인 한라산의 설원을 눈이 어질어질할 정도로 걷다가 산을 내려갈 때면, 발아래 솟아 있는 한라산의 어린 자식 오름들이 올망졸망 펼쳐진다. 요즘 대유행인 올레길 어디에서나 고개만 들면 흰 눈으로 모자를 쓰고 있는 한라산이 보인다. 제주에 여러 번 가봤어도 아직 그 산에 오르지 못했다면 이제는 도전! 한라산과 제주도는 한 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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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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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한국시 왜 이렇게 되었는가

/ 임보(林步)


한국시단의 오늘을 시의 전성기로 보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다. 시인의 수효가 만 명을 헤아리는 데에 이르렀고, 수많은 시집과 시지(詩誌), 그리고 시동인지 들이 매일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으니 그렇게 평가할 만도 할지 모른다. 그러나 시인다운 시인이 얼마나 되고, 시다운 시들이 얼마나 생산되고 있는가를 살펴본다면 긍정적으로만 평가하기는 어렵다.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나는 요즈음 별로 시를 읽지 않는다. 게을러서라기보다는 시를 읽는 것이 즐겁지 않아서이다. 아니 즐겁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시를 읽는 일이 오히려 고통스럽고 짜증이 난다. 시가 설령 재미있다손 치더라도, 거의 매일 우송되어 온 적지 않은 시집이나 잡지들을 섭렵한다는 것은 여간한 인내와 노력이 요구되는 일이 아니다. 하물며 재미없는 경우라면 그 작품들을 위해서 소중한 시간을 할애할 마음이 선뜻 생기겠는가. 나는 처음 몇 줄 읽어서 재미가 없으면 읽지 않고 넘어간다. 난해하거나 답답한 것도 외면한다. 그러니 평소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소수의 시인들 위주로 작품을 골라 읽게 마련이다.
오늘의 시라는 글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난삽하고 골치 아픈 글이 되었는가? 무엇이 시를 이 지경으로 끌어왔는가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첫째, 자유시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 문제인 것 같다.

근대적 이념으로 흔히 내세운 것 중의 하나가 ‘자유’다. 근세에 이르면서 시의 세계에도 자유의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원래 시는 통제된 글이다. 특히 정형시는 형식적인 틀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율격과 압운 등의 규제를 받는다. 주지하다시피 정형시가 지닌 고정적인 틀로부터 벗어나고자 해서 생겨난 것이 자유시다. 얼핏 생각하면 자유시야말로 아무런 형식적 통제도 받지 않은 자유분방한 글처럼 생각될지 모른다. 그러나 자유시가 통제된 글이 아니라는 생각은 크게 잘못된 인식이다. 자유시는 정형시가 지닌 정해진 틀로부터 자유로울 뿐이지 형식의 통제로부터 벗어난 글은 아니다. 자유시는 그 내용에 가장 합당한 새로운 형식을 작품마다 창조해내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자유시가 쓰기 쉬운 시라고 생각하면 이는 큰 오산이다. 작품마다에 가장 이상적인 형식을 창안해 내는 일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만일 어떤 시인이 자유시를 멋대로 써도 좋은 글이라고 착각하고 썼다면 이는 이미 시가 아니라 방종의 글에 불과할 것이다. ‘자유’에 ‘책임’이 따르듯 시인은 자신이 생산한 시에 대하여 준엄한 책임을 져야 한다.
시가 통제된 글이라는 것은 자유시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시어의 선택, 행과 연의 배치 그리고 운율의 설정에 이르기까지 자유시도 최선의 형식에 담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작품 속에 쏟아 붓는 시인의 정성이 곧 독자들의 가슴속에 감동으로 되살아난다. 쉽게 쓰여진 시가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는 황소가 바늘귀를 뚫고 들어가는 일보다 흔치 않을 것이다.

둘째, 분별력 없는 아류들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우리 시단을 이렇게 만든 데 기여한 두 사람의 선배 시인을 지적하라면 김수영과 김춘수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공히 전통적인 시법에 반기를 든 분들이다.
김수영의 작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자면 우리시의 폭을 넓혔다고 할 수 있다. 시어와 시의 소재들을 개방하여 시의 영토를 확장했다. 속어와 비어(卑語), 외래어 할 것 없이 끌어다 썼고, 일상 속에서 그가 만난 사소한 체험들도 싯거리로 삼았다. 그는 대상과 표현에 구애받지 않고 제멋대로 썼다. 좋게 말하면 무애(無礙)한 자유인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건방진 안하무인(眼下無人)이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시의 위의(威儀)를 떨어뜨렸다고 할 수 있다. 원래 시는 귀족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시의 위상을 서민문학으로 끌어내린 것이다.
김춘수 시의 의의는 소위 ‘무의미의 시’라는 데에 있다. 무의미 시의 특징은 한마디로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비현실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구상(具象)의 세계를 거부한 비구상화가들의 발상과 궤를 같이 한 것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그는 의도적으로 현실적 정황을 파괴하여 낯설게 만든다. 거기에는 어떠한 지상적 논리와 질서도 배제된다. 말하자면 절대무비의 세계를 창조해내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은 세계를 만들어냈다는 데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김춘수 역시 ‘무의미의 시’로 한국시의 영역을 넓히는데 기여했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김수영과 김춘수의 작품들이 전통적인 시와는 달리 낯설었기 때문에 몇 비평가들과 잡지들의 주목의 대상이 되었던 것인데, 분별력이 흐린 시인들이 이들의 작품을 마치 시의 전범으로 받아들여 그들의 아류가 된 것이다. 그래서 시를 제멋대로 쓰는 것이 마치 멋인 줄 착각하고, 논리를 무시한 괴기스런 표현이 수준 높은 작품인 것처럼 잘못 인식하는 풍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이상한 악기를 하나 만들어냈다고 가정하자. 새로운 그 악기는 물론 음악을 다채롭게 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악기가 모든 음악을 연주하는데 최상의 악기라고 잘못 판단하고 이를 고집하는 무리들이 횡행한다면 이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시의 경우도 이와 같아서 하나의 새로운 유형의 출현은 그 가치가 인정되지만 그것을 마치 시의 전범인 것처럼 여기고 이를 모방하는 것은 개인이나 문단의 불행이 아닐 수 없다. 효빈(效顰)이라는 말이 있다. 월(越)나라의 미인 서시(西施)가 얼굴 찡그리는 것을 보고 한 추녀(醜女)가 이를 부러워한 나머지 흉내내다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고사인데 이와 다를 바 없다.

누가 뭐라고 해도 시는 정련된 언어예술이어야 하며, 정결한 시정신을 담고 있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 시를 하찮은 말장난쯤으로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색다른 시를 만들어 주목의 대상이 될 것인가 보다는, 어떻게 감동적인 시를 낳아 긴 생명을 갖게 할 것인가 하는 데로 시단의 관심이 되돌아왔으면 싶다.
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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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뇌에 대하여

소선재에서 2010. 10. 17. 22:33

무뇌에 대하여

 

김뭐시기라고, 엠비씨에 아나운서인지 기자인지 하는 분이 있는데요, 그 분이 트위터를 하는데, 누가 '무뇌'라고 했답니다. 이 분은 법적대응을 강구한다고 하던데요. 제가 보기엔 그 분 무뇌맞던데, 아버지를 아버지라 하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하지 못하면....이러다가 전국민이 가출하는 게 아닐까....

 

제가 사는 꼴을 돌아 보면, 밥먹고 응가하고 왔다갔다하고 애들 보고, 별로 금수와 다를 게 없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인간이 금수와 다른 점이 조금이라도 있다 하면, 그건 '성찰'하는게 아니겠습니까?

 

누가 저한테 '무뇌'라고 한다면 기분좋은 소리는 아니지요. 그렇다고 무슨 명예훼손이나 법적대응을 강구할 건 아닌데요. 우선은 그럴 돈도 없고요. 그리고, 뭣보다 저를 '무뇌'로 보는 건 그 사람 자유니까요. 그 사람은 나를 무뇌아로 볼 수도 있는 거지요. 그렇다고 내가 무뇌아냐면 그건 또 아닌거구요. 그 사람 기준이 내 기준이 되란 법은 없으니까요.

 

그 분은그 무뇌아라는 지적에 심히 열받았나 본데, 그건 본인도 무뇌아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 그 있잖습니까? 자신이 약점으로 생각되는 부분을 찔리면 그게 참 비수가 되잖아요. 제일 감추고 싶은데 그걸 들켜버렸으니. 그러니, 본인도 본인이 무뇌라는 사실을 알고 또 그런 자신이 싫었을 겁니다. 그러니 법적대응 운운했겠지요. 그런데, 만약에, 본인이 무뇌아라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다면 반응이 좀 달랐을 것 같습니다.

 

'그러게요, 제가 무뇌아일수도 있겠지요. 한번 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는 앞으로 더 발전하는 계기로 삼겠습니다'

 

이렇게 나온다면 무뇌아로 공격한 사람이 깨깽하는 건데요. 그러고보면 문제는 무뇌냐 아니냐가 아니라, 무뇌임을 받아들이냐 아니냐인 것 같네요.

 

여기까지 쓰고 나서, 제 경우를 또 한참 생각해보았습니다.

 

누가 나를 두고 비방을 했다. 좀 열받기는 하는데, 뭐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네요. 그 사람이 나를 씹고 다녀도 어쩔 수 없고요. 그렇다고 그 사람 입맛대로 내가 살아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 사람이 나때문에 열받았다면 내게 그런 구석이 있어서 그랬을 거고요, 안 그럴 수 있는 일이면 다음부터는 안 그러면 되는 거고, 잘 안 되면 또 잘 안 되는대로 살아야지 워쩌겄습니까? 그러니, 김XX씨 너무 열받지 마소. 무뇌여도 당신 이미 잘 살고 있으니까.

 

저작권고지: 김XX의 무뇌에 대해서는 아내의 지도가 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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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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