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에 옮겨놓은 글(사과나무 이야기)에 대한 어느 과학신봉자의 반응을 보고 항생제에 대한 글을 썼다. 이 과학신봉자의 댓글은 이것(파란 글씨).

사과나무의 병이라면 박테리아나 바이러스에 의해서 생기겠지요. 충이라면 사과를 먹고 사는 벌레일테구요. 사과의 입장에서는 박테리아, 바이러스, 벌레가 모두 비슷할겁니다. 박테리아, 바이러스, 벌레가 모두 자연의 일부로 사과에 의존해서 사는 점에서 말입니다. 농약을 안쓰면 박테리아, 바이러스, 벌레도 함께 튼튼해지지 않을까요? 적어도 사과를 맛있게 먹을 정도로는 튼튼해지지 않을까 싶은데..

여기에 대한 나의 댓글은,

이 글의 논리대로라면,
농약을 안 써야 박테리아, 바이러스, 벌레가 약해지지요.
농약을 쓰면 박테리아, 바이러스, 벌레가 강해지고요.


그리고, 답답한 마음에 항생제에 대한 글을 썼다.

밑의 글은 그 다음 이야기.



1.
펌글의 제목이 '수행없이 깨달음은 자랄 수 없다'입니다. 저 역시 이런 생각으로 30대를 보냈습니다. 제게는 '수행없이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가 보다 더 정확하겠습니다만.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수행자라는 아이덴티티를 굉장히 자랑스러워했고 뿌듯해했습니다. 한마디로 제가 잘났다고 살았지요. 

지금은, '수행의 목적은 수행이 필요없다는 것을 알기 위함에 있다' 라고 생각합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더 이상 수행이 필요없는 단계 내지는 그런 상태인데, 그렇다면 수행의 목적은 수행이 불필요한 상태가 되기 위한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수행의 존재의의가 사라집니다. 수행이 불필요한 상태가 되기 위해서 수행을 해야한다니, 그렇다면 수행할 필요가 없는 상태가 되기 위해서 꼭 수행을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제가 수행자라는 아이덴티티를 벗어던진 이유입니다. 사실, 저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고요, 여러 사람들, 소위, 깨달았다는 사람들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2.
깨달음과 수행이라는 말은 사람들마다 다 다른 관념을 가지고 있을 터이니, 저의 해석은 그냥 저의 해석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일본의 사과나무 얘기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 봤지? 뭐든지 자연스러운게 좋은거야, 쓸데없이 인간이 개입해봤자 좋을 게 없다고
- 환경주의자, 자연보호론자, 게으름뱅이들 

# 봤지? 강해져야 살아남는 거야, 힘든 환경속에서 사과나무가 더 튼튼해지는 걸 보라고
 - 경쟁주의자들. 적자생존론자, 싸움꾼

# 농약없이 키운 사과 봤어? 남들과는 뭐가 달라도 달라야 해. 그래야 돈이 되지.
 -  시장주의자, 욕심꾸러기들

# 태풍을 이겨낸 사과나무 봤어? 고난과 역경, 시련이야말로 사람을 더 키우는 자양분이야.
 - 심각한 사람들, 매조키스트

# 지금이야 괜찮다 해도, 지난 10년간 왜 그 고생을 사서 하나? 그냥 남들하는만큼만 하면 됐지.
 - 대세추종자들, 겁장이들.

 # 저런다고 안 될걸. 병충해가 한번 돌면 순식간에 망할텐데.
- 과학신봉자, 소심한 사람들 

# 무농약이라니 몸에 좋겠네. 이거 먹고 오래살아야겠다.
- 정력추종자, 건강허약자, 단세포, 무뇌아

=========================================================================
그렇다. 씨는 기름진 땅에 떨어져야 한다. 기름진 땅에 떨어져야 씨는 잘 자라날 수가 있다. 얼마 전 TV에서 '농약 한 방울, 비료 한 주먹' 없이 사과를 키우는 일본의 기무라 아키노리라는 농부에 대해 방영을 했다. 그는 농약 알레르기 때문에 고생하는 아내를 위해 농약을 쓰지 않고 사과를 재배해 보자는 결심을 했다. 그의 결심을 듣고 주변 이웃들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그를 '아오모리의 돈키호테'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10년이나 노력했지만 사과는 한 개도 열리지 않았다. 농약과 비료에 길든 사과나무의 야성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수입이 없어서 밑바닥 생활을 했고 생계를 위해 나이트클럽 호객꾼으로 나서기도 했다. 폭력배에게 맞아 치아가 두세 개만 남고 모두 빠졌다. 목숨을 끊을 생각으로 산에 올랐다.

산에서 우연히 탐스러운 열매를 맺는 도토리를 보았고 섬광 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비밀은 흙에 있었다. 그 이후 그는 과수원에 잡초도 뽑지 않고 관리도 하지 않으며 방치해 두었다. 흙이 본래의 생명력을 회복할 때까지 기다렸다. 비료나 농약을 수십 년간 뿌려 왔던 땅은 딱딱해져서 잡초조차 뿌리를 내릴 수 없다.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면 흙도 기름지게 된다. 

무농약 자연 농법을 시작한 지 10년만에 결국 탁구공만한 사과 두 개를 얻게 되었고 다시 4년 후에 많은 사과들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의 농법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아오모리현에 상륙한 태풍 때문이었다. 주변 과수원의 90%의 사과가 떨어졌지만 기무라의 사과는 80%가 멀쩡했다. 아무도 모르는 새에 사과나무가 땅속 20m까지 뿌리를 내렸고 가지와 나무가 굵고 단단했기 때문이다. 그의 사과는 병충해에 강해졌고 스스로 치유하는 자연 치유력도 생기게 되었으며 썩지도 않았다. 단지 수분이 증발하며 자연스럽게 자연으로 돌아갔다. 사과의 맛과 질이 화학 농법을 하는 사과들보다 훨씬 좋아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문제는 토양이다. 깨달음의 씨가 자라기 위해서는 토양의 질이 좋고 풍성해야 한다. 그대에게 깨달음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 깨달음이 무럭무럭 자라나기 위해서는 '그대'라는 토양이 깨달음이 자랄 수 있을 만큼 풍성해야 한다. 그대의 내면의 밭은 화약 비료나 농약 같은 유해 성분에 길들어져 있다. 그대 자신을 돌아보라. 그대는 무엇에 의존하여 살아 왔는가? 그대가 의존해서 살아왔던 모든 것들이 바로 그대 자신을 말해 준다. 그대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수많은 것들에 의존하고 집착해서 살아간다.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그대에게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준다는 마약을 팔고 있다. 아니면 화폐 가치를 보장해 줄 수 있는 다른 사회적인 능력이나 명예, 성적인 매력도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

'소선재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네가지 적  (0) 2011.01.25
무뇌에 대하여  (0) 2010.10.17
웨스턴 소사이어티의 대학교육  (0) 2010.08.16
호칭에 대하여  (0) 2010.08.16
컴플렉스  (0) 2010.08.16
Posted by 일호 김태경
,

한국에서는 대학을 4년다니고, 여기서는 대학교를 4년째 다니고 있습니다. 마지막 학기인데, 지난 시간보다 더 힘들게 느껴집니다. 이제 거의 끝났다는 생각이 들다보니, 전부다 꼴도 보기 싫고 지긋지긋하다는 생각만 듭니다. 이러다가 정말 마지막 학기에서 낙제를 하지나 않을까 싶습니다.

 얼마전부터 여기서 경험한 대학교육을 한번 정리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호주의 대학교를 서구사회의 대학교의 전형으로 간주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서구문화에 속하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1. 실용주의적인 학풍
미국의 대학교 학제와 다르다고 들었습니다. 영국의 학제와 같다고 하는데요. 처음 1학년 1학기를 시작할때, Lecture 와 Tutorial로 나뉘어 있는 것이 아주 특이하게 느껴졌습니다. 교과과정은 실습을 중시합니다. 현장 경험을 중시하는 분위기는 실용적인 학풍이 반영된 듯 합니다. 실습을 중시하는 건 확실히 유용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머리속으로 달달 외우고 있어도 직접 손으로 한번 해 보는 것과는 차이가 크니까요.

하지만, 이것도 단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토론이 권장되는 분위기이기는 한데, 학생들이 뭘 알아야 토론을 하지요. 예습 복습을 하던 아니면 기초지식이 있던, 일단 뭘 조금은 알고 나서 말을 해도 해야 하는데, 아는 것도 든게 없는 학생들을 놓고 토론식으로 수업을 하니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2. 자율적인 학풍
좋게 말하면, 창의적이고 자율적인 학풍이지만, 실재로는 알아서 하라는 겁니다. 가르쳐주는 건 별로 없는데, 알아서 해야하는 건 많습니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교수가 알려주는 건 참고도서목록뿐입니다. 학생들이 알아서 에세이도 써야하고 발표도 준비해야하고 시험도 보고 해야합니다. 근데, 뭘 알아야 하지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 들때가 많습니다.

3. 다면적인 평가
시험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작고, 여러가지 과제나 발표등의 평가항목도 큽니다. 나쁘다고는 할 수 없는데, 저같이 시험에 익숙한 사람은 그냥 벼락치기해서 시험보는게 더 편하니 이것도 꽤나 힘들었습니다. 저같이 끄적거리는 거 좋아하는 사람도 짜증나는데, 다른 학생들도 꽤나 스트레스받는 것 같습니다.

4. 과학과 기독교 기반의 교육
제가 공부하는 분야가 Faculty of Science에 속합니다만, 이건 호주로 보자면 외래학문이라, 사실은 과학에 들어가는 학문이 아닙니다. 한국에서도 제가 공부하는 분야를 '미신'으로 보는 사람이 아주 아주 많지요. 그런데, 제가 놀랐던 건, 호주에서 이 분야를 공부하고 연구하고 가르치고 하는 것이 많은 부분 Science화 시켜서 접근을 하더군요.  그러니까, 서구문화에서는 이 분야의 학문을 들여올때 나름대로 자신들의 인식틀에서 재해석하는 과정을 거친다는 겁니다. 서로 다른 두 문화의 접촉과 변화라는 과정에서 이해할 수도 있고요. 꼭 문화적인 접근이 아니더라도, 사람이 한번 인식의 틀이 형성된 다음에는 새로운 대상을 해석할때 기존의 해석틀을 작동시킬 수 밖에 없다 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스스로 저를 생각할때, 매우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런 문화적인 차이를 접할때면 아주 짜증이 많이 났습니다. 지금도 더하면 더하지 결코 덜하지 않고요.

예를 들어, '건조하다'라는 진술을 놓고 보자면, 동양쪽의 어떤 텍스트를 보아도, 이것에 대한 정의가 없습니다. 건조한 건 건조한 것이니까요. 그런데, 이쪽에서는 이에 대한 오퍼레이셔널 데퍼니션 Operational definition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 개념에 대한 소위 객관적인 합의가  없으면 그 다음얘기를 할 수 없는 것이거든요.

하지만, 동양에서는 이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건조하다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인식하에서 논지의 전개가 이어집니다. 이것이 건조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합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건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건조하다'에 이어서 전개되는 논지는 매우 매우 합리적이고 논리적입니다. 동양에서는 단지 '건조하다'에 대한 소위 객관적인 정의가 부재할 뿐입니다.

'묽다'라는 것도, 실험실의 데이터분석결과를 놓고, 정해진 수치를 넘느냐 안 넘느냐로 결정합니다. 동양에서는 그렇지가 않지요. 흐리고 묽으면 묽은 거고, 두껍고 진하면 진한거고요. 제가 보기에는 하등 쓸데없는 '건조하다'에 대한 operational definition에 목매달고 있는 걸 보면 정말 짜증이 안날래야 안 날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바탕에 깔려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강의에 들어오는 Lecturer들은 나름대로 박사학위도 받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 인간들인데, 그들 말에 깔려있는 일직선의 역사관, 유일신관, 성취지향적인 세계관들을 보면 정말 기독교가 모든 문화의 기저에 자리잡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낍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호주의 대학교에서 학교를 다니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합니다만, 정말 누구말대로 성질뼏쳐서 못 다니겠다는 생각이 한 두번이 아닙니다.

5. 참고- 동양의 재래식 교육
한림대학교 부설 태동고전연구소라는 곳이 있습니다. 별칭으로 지곡서당이라고 불립니다. 청명 임창순선생이 만든 것이지요. 이곳에 들어가면 1학년때 사서를 그냥 외웁니다. 말하기를 논어를 강한다고 합니다. 그냥 무식하게 외우는 것이지요. 무슨 봉건적인 교육방식이냐 하겠지만, 알고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박노자도 말한 바와 같이, 인문학이나 언어는 무작정 외우는 것도 좋은 교육방법입니다.

영어를 잘 하고 싶은 사람들은 소설 책 한권 무작정 외워보세요. 사실은 영어가 어려운게 아니라, 영어소설책 한권 외우는게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외우는 것은 외우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자양분이 되어서 줄기가 되고 꽃을 피우지요. 청출어람청어람이 됩니다. 민족주의자들이 전통을 고수하는 것도 우습기 짝이 없습니다만, 근대주의자들이 전통을 무시하는 것도 결코 덜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학교다니기가 싫어서 더욱 더 안 좋게만 생각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호주의 대학교 짜증 이빠이입니다.

'소선재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뇌에 대하여  (0) 2010.10.17
사과나무 이야기  (0) 2010.08.16
호칭에 대하여  (0) 2010.08.16
컴플렉스  (0) 2010.08.16
불행한 채로 행복하다  (0) 2010.08.16
Posted by 일호 김태경
,

아시다시피 한국의 문화에서는 이름의 직접적인 사용이 매우 꺼려집니다. 대신 사회적관계를 나타내는 호칭이 주로 사용됩니다. 우선 두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이름 그 자체에 대한 터부가 그것이고 둘째는 개인의 정체성이 집단내의 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집단주의 문화의 특성이 그것일 것입니다. '자'나 '호'같이 이름대신 쓰여지는 호칭이 사라진 현대에서는, 더욱이 사회적인 직책이나 또는 가족간에 쓰여지는 호칭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사회적인 타이틀을 호칭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좋게 보지는 않습니다. 그것에 동반된 권위주의나 허영심같은 것들이 탐탁치않기 때문입니다. 박사님, 교수님, 피디님, 기자님, 변호사님, 원장님 등등이 그것입니다. 제 생각엔 이름뒤에 '씨'자나 '님'자를 붙여서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호칭을 하는 것이 평등한 인간관계라는 측면에서는 바람직하다고 생각됩니다만, 저 혼자만의 생각일 뿐입니다. 사회속에서 살고 있는 저로서는 저 혼자 내키는대로 남을 부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름뒤에 '씨'자를 붙여서 호칭하는 것은 지금 이 시점에서는 하대의 의미가 강합니다. 거의 '해라'체와 같이 쓰여지는 느낌입니다. 그러니 싸우자고 하는 때가 아닌 다음에야 함부로 연장자에게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름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이미 '하대'하는 의미가 크니까요. 그렇다면 연장자 우대문화가 강한 한국의 문화에서 연소자는 연장자에게 어떤 호칭을 써야할까요? 김규항은 '선생님'이라는 말을 대답으로 내놓았습니다. 선생님에는 먼저 태어난 이라는 뜻이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항상 나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저 역시 적절한 호칭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소한 사회적 직책이나 신분을 표시하는 호칭보다는 덜 구역질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지낼때 누가 먼저 태어났냐를 두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을 보고 한심한 인간들이라고 비웃었습니다. 통성명하고 바로 나이따져서 형님 동생하는 것 역시 이질적이기만 했습니다. 이곳에 와서보니 저보다 20년이 지난 후에 태어난 한국계 2세들도 생년을 기준으로 나이를 따져서 형,동생,언니,오빠 하고 있더군요. 제가 어디가서 바로 '형님'하고 부르거나, 또 '동생'하면서 하대하지는 못해도 (저는 스무살이 안 된 배준군같은 경우에도 반말이 잘 안나옵니다), 학교에서 만난 한국계 사람이 저보고 형님하면 저는 '네'하고 대답합니다.

'영수엄마라는 호칭이 아닌 나의 이름을 돌려다오' 말이야 맞는 말입니다만, 이름을 꺼리는 한국사회에서 과연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지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전태민님께서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사모님이라는 호칭이, 원장님이라는 호칭이 무거운 갑옷마냥 거북하게 느끼시는 것 같습니다. 최소한 구역질나는 권위주의나 허영심은 아닌 듯하여 반가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상대의 호칭을 무시하는 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호칭이 듣기에 거북하시다고, 그것이 무시로 이어져서는 소통을 거부하는 것 밖에는 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소선재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과나무 이야기  (0) 2010.08.16
웨스턴 소사이어티의 대학교육  (0) 2010.08.16
컴플렉스  (0) 2010.08.16
불행한 채로 행복하다  (0) 2010.08.16
달라이 라마와 밥내천  (0) 2010.08.16
Posted by 일호 김태경
,

컴플렉스

소선재에서 2010. 8. 16. 14:02

노무현이 대통령때 , 기자들이 별별 트집을 다 잡았다. 그 중에 하나가 컴플렉스였다.
'너 말 막하던데, 상놈출신이라 그런거지?'
'너 고졸이라 대졸자들한테 컴플렉스있지?'
'너 막말하는거 그거 컴플렉스때문에 그런거지?'

기자놈들이 대통령하고 인터뷰를 하는데, 컴플렉스가 있냐고 하니, 설명해주기 좋아하는 노무현은, 
'저 컴플렉스 없어요. 제가 대통령까지 되었는데 무슨 컴플렉스가 있겠습니까?'

이러는 것도 한 두번이지, 기자들이란 기자는 죄다 와서는 컴플렉스있냐고 컴플렉스아니냐고 하는데, 이 정도면 아무리 성인군자라도 돌아버리기 십상이다.

멀쩡한 사람 미치게 하는 건 사실 간단하다.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람한테 한 마디씩.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너 오늘 좀 이상해 보인다'

그 사람 미치는 건 시간문제다.

강준만이 '김대중죽이기'라는 책이 뜨고 나서, '서울대의 나라'인가 하는 책을 냈는데, 이 책은 재미를 못 봤다.

강준만은 서울대 출신이 아니다. 서울대를 없애야한다는 주장은 아무나 할 수 있지만, 현실은 서울대를 나온 사람만이 그 말을 해야한다.

내가 50억을 벌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삼류대나온 학벌이야 바꿀 수 없는 것이니, 50억 벌고 나서 사람들에게 말하려고 한다.

'제발 돈벌려고 아둥바둥 살지 마세요'

컴플렉스 들먹이는 사람들, 사실 컴플렉스는 지들한테 있는 거다. 알량한 자존심 상처받기 싫은 그 컴플렉스.




50억을 벌려면 최소한 몇 년(혹은 몇 십년, 혹은 성취를 못하고 삶이 끝날지도)이 걸릴텐데, 사람들에게 한 마디 충고를 하기 위해서 그 기간을 쓰겠다니....
그 이유만은 아니겠지요?
10.08.11. 22:40

제 생각에 이 세상에서 저를 잘 아는 사람은 두명입니다.
한명은 한국에 계신 분인데, 제가 스승님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중은 아니고요, 지난번에 한국에 갔을때 두번을 뵈었지요.
또 한명은 제 아내입니다.
제 아내는 제가 오십억벌어야 한다는 말을 제일 많이 들은 사람입니다. 제 아내는 제가 50억을 벌려고 하는 이유를 잘 압니다.
제가 50억벌면 재단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돈벌려에 아둥바둥 살지 말아라'는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저를 잘아는 제 아내는 제가 50억 벌거라는 생각을 안 합니다.
전에 어떤 사람이 제 얘기를 듣더니 제 아내를 존경스럽게 보더군요. 어찌 이런 남자랑 사는지 말이죠. ㅋㅋㅋ
10.08.12. 11:18

'소선재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웨스턴 소사이어티의 대학교육  (0) 2010.08.16
호칭에 대하여  (0) 2010.08.16
불행한 채로 행복하다  (0) 2010.08.16
달라이 라마와 밥내천  (0) 2010.08.16
Be a message  (0) 2010.08.16
Posted by 일호 김태경
,

지젝은 제도로서의 종교를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도킨스와 마찬가지이지요. 맑스나 마오가 종교의 독성을 언급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불교도 제도의 폐해로 따지자면 기독교못지 않지요. 혹자는 불교는 기독교와 달리 남을 처들어간 적이 없다고 하는데,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본질은 다를바 없습니다. 호국불교, 이 얼마나 웃긴 개념인가요? 부디스트로서 박노자는 이에 대해 명쾌하게 논파했습니다. 한국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역사를 보면, 불교쪽에서는 최근에서야 나왔습니다. 목사님의 말씀대로 임진왜란에서 일본은 배에다가 '나무묘법연화경'이라는 깃발을 달고 처들어왔습니다.

어떤 종교가 구원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믿음은 두말할 것도 없이 유아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젝의 불교에 대한 언급은 공감이 갑니다. 하지만, 지젝의 다음과 같은 말은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군요.

" 문제는 무념무상이라는 불교의 내적 평화의 원리에 있다. ‘분별적 사고를 중지하고 무의 상태로 돌입하는 것’이 윤리적 판단 자체를 거부하게 만든다는 것이 지젝의 지적이다. 그런 무차별의 종교에서는 진정한 혁명도 사랑도 불가능하다고 지젝은 판단한다. "

 지젝은 '윤리'를 존재가 아닌 '당위'의 차원에서 보고있습니다. 이런 방식은 스스로를 구속하고 종국에는 남도 속박하게 마련입니다.

달라이 라마는 스스로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달라이 라마에 대한 비판도 많고 비난도 있지만, 저는 스스로가 행복하다고 하는 그의 말이 스스로를 속이는 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불행한채로 행복하다'라는 말을 지젝에게 들려주면 무슨 개소리냐고 하겠지요. 붓다의 제자가 된지 10년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점점 불교와 멀어지고 있습니다. 확실히 '거리'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소선재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호칭에 대하여  (0) 2010.08.16
컴플렉스  (0) 2010.08.16
달라이 라마와 밥내천  (0) 2010.08.16
Be a message  (0) 2010.08.16
종교유감 과학유감 사람유감  (0) 2010.08.16
Posted by 일호 김태경
,


  밑에 종교에 대한 얘기중에 STERN님께서 해독의 ''자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마오도 언급하셨는데요. 말씀을 보니 여러가지가 생각이 납니다.

저는 마오에 대해서도 모릅니다. 서경석목사인가 초창기에 경실련활동했다가 지금은 자기마음대로 사시는 같은데, 분이 젊었을때 마오이스트였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지금도 네팔같은 나라는 마오이스트들과 내전중인 같고요.

제가 마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은, '컴플렉스'. 제게는 절대로 없는 그런 능력. 사람을 휘어잡고 추종자들을 부리고 천자가 되어 대륙을 지배하고 더군다나 수많은 여자들까지 첩으로 재미보는 그런 능력말입니다. 말로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컴플렉스라고 하니 사실은 저도 그런 욕망이 있나 봅니다.

하여튼, 달라이 라마 자서전에 보면 20 시절 달라이 라마가 마오를 만난 얘기가 나옵니다. 베이징에 체류할때 달라이 라마는 공산주의에 대해서 상당히 호감을 느낍니다. 공산주의 사상의 많은 부분들이 불교의 사상과 매치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달라이 라마는 마오의 카리스마, 사람을 다루는 능력에 감탄하기도 하지만, 결국엔 마오의 '불교에 대한 평가-인민의 독이라는' 대해 크게 실망하고 분노합니다.

정치지향을 체크해보는 싸이트에서 설문결과를 보면, 유명인사들의 정치성향이 4분면의 그래프에 나타납니다. 달라이 라마는 자유주의와 전체주의가 위치한 엑스축의 아래쪽(자유주의), 좌파와 우파의 와이축에서는 왼편에 위치합니다. 비록 마오에게는 실망하고 분노했지만, 어쨌거나 젊은 시절의 이런 경험이 지금 달라이 라마의 정치성향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하는 짐작을 봅니다.

시드니에서 만난 사람중에 제가 보고 배우는 점이 많은 사람이 있는데, 저보다 아래입니다. 제가 한번은 얘기하기를,

'인민해방군이 티벳의 라싸로 처들어갈때, 진짜로 티벳의 억압받는 인민들을 해방시켜준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신정일치의 사회에서 귀족계급인 불교승려들에게 착취당하는 인민들을 억압과 착취에서 구해준다고 말이다'

'아마, 모택동은 그런 생각을 했을 겁니다'

공감이 가더군요.

말이 나온 김에 달라이 라마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자서전은 달라이 라마가 직접 같습니다. 구술을 받아 작가가 같지는 않았습니다. 서문에 보면 (티벳어가 아닌) 영어로 썼다고 합니다. (당연히)번역서를 봤습니다.

인상적인 얘기가 가지가 있는데요,

하나는 어렸을때 포탈라궁에서 생활하던 얘기입니다. 제일 기억에 남는 사람들을 언급하면서 중의 한명은 자기에게 밥을 주던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설명을 덧붙이기를 ' 이유는 없는데 아마도 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것과 같은 관계여서 기억에 남는 같다' 했습니다.

역시 주는 사람이 성속을 떠나 장땡입니다. 아무리 아이들이 애완견을 예뻐한다고 해도 개의 입장에서 주인님은 밥주는 사람이지요. 한국의 가정에서는 사람은 대개 가정주부고요. 아이들이 엄마를 찾는 것도 아빠품보다 포근한 것도 있겠지만 무래도 먹을 주는 사람인 것도 이유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도 50억을 벌면 사람들에게 밥을 사주면서 말을 겁니다.

' 벌려고 아둥바둥 살지 마세요'

50억을 벌면 재단을 만들고, 밥주는 사업을 해야겠습니다. 언제나 밥과 반찬이 있는 식당. 하루 24시간 년중무휴로 문을 열어놓고 먹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와서 밥먹고 가는 식당말입니다.

물론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 식당을 이용하는 사람은 양식에 서명을 해야합니다.

' 벌려고 아둥바둥 살지 않겠습니다'

몇년 몇월 며칠 아무개 누구 서명 찌지직.

사업이 되어서 추종자가 몇명 생기면 종교도 하나 만들어야겠습니다. 교시는 '밥내천'으로 하고요. 언제나 밥과 국이 강처럼 흐르는 말입니다. 그러면 종교도 장사, 웁쓰~ 장사가 아니고 교세가 확장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제가 종교의 창시자로서 역사에 남는 사람이 된다면, 후세의 누군가는 이렇게 기록하겠지요.

"밥내천교의 창시자 일호는 이민생활에서 하도 배가 고파서 밥주는 곳이면 어디나 쫓아다녔다. 그가 밥내천교를 창시한 배경에는다른 사람 세배는 먹어야 배가 차는 그의 위대한 밥통과 호주에서제대로 먹고 지낸 처절한 경험이 바탕이 되었다. 밥내천교의 두번째 교시인 '일체의 도시락에 반대한다' 그의 호주생활이 원인이 것이다. "

쓰고 보니 전혀 역사에 남고 싶지가 않군요. 어쨌거나 이번주 토요일에 먹을 떡국 미리 감사드립니다.

 

'소선재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컴플렉스  (0) 2010.08.16
불행한 채로 행복하다  (0) 2010.08.16
Be a message  (0) 2010.08.16
종교유감 과학유감 사람유감  (0) 2010.08.16
소리에 관한 몇가지 이야기  (0) 2010.08.15
Posted by 일호 김태경
,

Be a message

소선재에서 2010. 8. 16. 13:44

왠만하면 다른 사람 얘기는 하고 싶지 않지만, 오쇼 라즈니쉬가 기독교와 불교에 대해 한 얘기가 있습니다. 기독교와 불교의 대조적인 모습은 김용옥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얘기했고, 공감이 가는 부분도 많습니다. 오쇼의 말을 기억나는대로 옮겨보겠습니다. 이해의 서라는 책에 있는 얘기입니다.

 기독교는 가난한 이들에게 시혜를 배품으로서 사람들에게 채무의식을 심어준다. 그것이 기독교가 교세를 확장하는 방식이다. 반면에 불교는 위로부터 들어간다.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그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사람들, 이미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이 불교를 찾는 것이다.
예수와 달리 석가모니는 왕자 출신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가지고 누렸던 사람이었다. 더이상 그 무엇도 그에게 만족을 주지못할때 그는 출가를 했다.

 뭐, 대충 이런 얘기입니다. 제 기억에 의존해서 많이 부족하군요. 원문의 훌륭한 문장과 뜻을 제가 많이 흠을 낸것 같기도 합니다. 궁금하신 분이 계시면 제가 책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타이핑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보수적인 기독교-완제품 구원을 바겐세일하는 - 를 없애긴 어렵다고 봅니다. 없어진다면 좋겠지만요. 그럴수도 없지만 만약 보수적인 기독교를 없앤다면 사람들은 분명 그와 유사한 다른 종교를 또 만들어낼 것 입니다. 문제는 보수적인 기독교가 아니라 그에 놀아나는 사람들이지요.

그럼, 또 '계몽'이라는 문제가 나오는데, 전 계몽은 불가능하다고 보는데요. 달라이 라마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Don't be a messenger, Be a message'

아무리 메세지를 전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설득도 안 되고 계몽도 안 됩니다. 계몽을 할 수 하는 유일한 길은 자기가 메세지가 되는 것 밖에는 없는데, 자기가 메세지가 되버리면 그때는 더 이상 계몽할 이유가 없어지는게 아닐까 그렇게 짐작하고 있습니다. 계몽할 이유가 없어지는 건 계몽할 대상이 없어지기때문이지요. 자기가 메세지가 되버리면요. '같이 떨어'버리는데 누가 누구를 계몽하고 자시고 할게 없지요.

메세지 얘기를 하니 노무현 얘기가 생각이 납니다. 저는 노무현대통령이 퇴임하고 난 후 사람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발가락양말이나 구멍가게에서 담배피는 사진이나 사람들하고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모습에 환호를 보냈는데요.

저는, 아니 원래 그런 양반이었는데 사람들이 왜들 이러지 했었습니다.

제 짐작에, 사람들은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있을때 그가 했던 말은 전혀 듣지 않았습니다. 설사 들었다하더라도 그건 대통령의 말이었기때문에 전혀 와닿치 않았고요. 그런데, 퇴임하고 나서 그 분을 보니 '아, 이 양반이 우리들하고 같은 사람이구나'하는 걸 느꼈던 것 같습니다.

노무현은 의도했던 바가 아니었겠지만, messenger에서  message가 되버린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이 결국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고요. 또 한편 생각하면, 노무현은 메신저가 되는 것을 놓아버림으로써, 비로소 메신저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삶은 참 아이러니입니다.

'소선재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행한 채로 행복하다  (0) 2010.08.16
달라이 라마와 밥내천  (0) 2010.08.16
종교유감 과학유감 사람유감  (0) 2010.08.16
소리에 관한 몇가지 이야기  (0) 2010.08.15
인간답게 살고 싶다  (0) 2010.07.29
Posted by 일호 김태경
,

오늘 교민신문을 보는데, 어느 교민분의 칼럼이 있더군요.

어제 염화미소님이 하셨던 말씀, '음악'과 '소리'가, 제가 답글로 달았던 '공명'과 '초끈이론'이라는 말도 그 칼럼안에 있었습니다. 지난 5년넘게 초끈이론에 대해 듣지도 말하지도 않았는데, 어제 이런 얘기를 하고 오늘은 또 신문에서 이런 얘기를 보게 되네요.

소재야 굉장히 비슷했지만 내용은 아주 달랐습니다. 초끈이론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더니 끝에는 기독교의 세계관을 피력하시더군요.

저는 어떤 세계관을 가질지 어떤 종교를 가질지는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라고 봅니다. 저는 그것이 개인의 자발적인 선택이 아니라, 이런 과정 역시도 프로그래밍이라고 봅니다만, 하여튼 다른 누구가 강제하거나 뭐라 하거나 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오늘 그 초끈이론을 언급한 신앙고백에 대해서 무슨 반대가 있을 수 없지요. 하지만, 유감스러운 점이 없는 건 아닙니다. 저는 과학의 발견 내지는 업적을 가지고 자기 종교를 정당화하는 것을 보면 참 우습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려대학교 물리학과에 양형진교수라는 사람이 있는데 가끔 메이져신문에 기명칼럼을 냅니다. 불자로서 화엄경에 묘사된 세계가 지금 현대물리학이 보는 우주와 얼마나 흡사한지 말입니다.

 오늘 본 칼럼은 마지막에 갑자기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나가서 뜬금없다 싶었지만, 설사 말이 되는 논리적인 글이었다 할지라도 공감이 가기 어려웠을 겁니다.  

왜 불교나 기독교나 그렇게 과학의 성과를 가져다가 인용해야하는 것일까요? 답은 자명합니다. 자기 종교가 맞다는 것을, 자기 종교가 옳다는 것을, 자기종교가 합리적이라는 것을, 자기 종교가 더 뛰어나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의 이면에는 지금 이 시대가 과학이 그 어떤 종교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는 이 시대의 제일 막강한 종교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종교가 힘이 셌던 옛날에는 과학을 억눌렀다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게 아닐 것입니다.

 왜 그렇게 힘센 누군가를 빌어와야 하는 겁니까? 그냥 자기 존재 그대로 존재증명을 하면 안 되는 겁니까? 도대체 이런 폭력을 언제까지 지켜봐야 하는지 짜증이 나다못해 우울해집니다. 꼭 힘센 누군가에 알랑방구를 끼고 살랑거리면서 자기들이 더 힘세다고 자랑하는 것 같아 유치하게만 느껴집니다.

과학이 인류의 어리석음을 타파한데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과학이 구원이 될 수 없음도 주지의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고, 더 자유로운 것도 아닙니다. 물질문명이 발달한 곳일수록 불교는 더욱 더 인기를 끌것입니다.

물론 지금까지 워낙 무지몽매함에 치우쳐왔으니 더 많은 과학이 필요하다는 주장에도 일리는 있습니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치우친 것의 좌표만 달라졌다 뿐이지 본질은 똑같을 뿐입니다.

과학역시도 앞으로 몇백년 후에는 다른 모습으로 바뀌겠지만 하여튼 제가 죽을때까지는 이런 모습을 볼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소선재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달라이 라마와 밥내천  (0) 2010.08.16
Be a message  (0) 2010.08.16
소리에 관한 몇가지 이야기  (0) 2010.08.15
인간답게 살고 싶다  (0) 2010.07.29
명석한 사람들의 어리석음  (0) 2010.07.29
Posted by 일호 김태경
,

소리에 관한 몇가지 이야기

 

1.
한국에서 대학을 다닐때 시각장애인이 같은 학년에 있었습니다. 비오는 날이 제일 싫다고 하더군요. 빗소리에 다른 소리들을 들을 수가 없다면서요. 전 빗소리를 좋아하는데 비가 오면 가끔 그 말이 생각납니다.

 

2.
텔레비젼뉴스나 드라마를 볼때, 두가지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소리만 듣고 화면은 보지 않는 경우.
둘째는, 화면만 보고 소리를 듣지 않는 경우.
소리만 듣는 경우는 80%넘게 이해를 할 수 있지만, 화면만 보는 경우는 무슨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귀를 잃을래? 눈을 잃을래? 저라면 둘 다 안 잃을래하겠습니다만.

 


3.
인간의 가청주파수는 다들 아시다시피 이십헤르쯔에서 이만헤르쯔입니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백헤르쯔아래로 내려가면 듣기가 어렵습니다. 귀가 밝은 사람은 부웅하는 좀 기분나쁜 소리를 들을 수가 있습니다. 만팔천헤르쯔 올라가도 역시 마찬가지고요. 사람의 기준에서야 초음파이지 박쥐에게는 초음파가 아니라 그냥 소리입니다.

 

4.
소리는 전달하는 매개체가 없으면 전파가 안 됩니다. 진공상태에서는 소리가 전달이 안 됩니다. 소리 즉, 음파는 파동현상입니다. 떨리는 것이죠.

 

5.
그런데, 사실은 물질자체가 떨리는 것입니다. 현대과학에서 원자는 중성자 양성자 전자 어쩌고 저쩌고 합니다. 원자의 핵과 핵을 둘러싸고 있는 전자의 거리를 축구장에 비교하면서 원자라는 것이 사실은 거의 빈공간이라고 설명하기도 하고요.
그럼 이 중성자 양성자는 또 뭘로 이루어져있나 하는게 또 과학의 중요한 문제입니다. 제 생각엔 참 쓸데없다 싶은데, 어쨌거나 쿼크나 초끈이론같은 걸로 설명하는 이론이 있나 봅니다.
문외한인 제가 대충 이해하기로는 물질의 근원입자를 특히나 초끈이론은 '떨리는 것'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6.
이런 과학의 설명을 갖다가 '색즉시공'이나 (원자는 비어있는 공간이다), '율려'의 (물질은 떨리는 것이다) 정합성에 대한 증거로 갖다 쓰는데, 그거야 뭐 갖다 쓰는 사람 마음이고요.


7.
하여튼 '소리'를 사랑하는 저로서는 이 세상은 '떨림'이다라는 설명이 맘에 듭니다. 떨림은 필연적으로 '공명'이라는 현상을 수반하는데, 이 공명이야말로 이 세상의 본질이랄까요? 사실 세상의 본질이라는 말 자체가 우스운 말이지만, 하여튼 '같이 떠는 것'에 이 세상의 구원이 있다, 저는 이렇게 봅니다.
'같이 떠는 것'을 나타내는 여러가지 말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사랑이지요. 바람이 불면 나무가 흔들리는 것, 무당이 접신할때 부르르 떠는 것, 저는 이것들도 '사랑'이라고 봅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이 개명천지에 아직도 그런 미신을 믿는 것이냐?'고 하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비가오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장님의 말과는 달리, 이런 말은 제게 아무런 울림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소선재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Be a message  (0) 2010.08.16
종교유감 과학유감 사람유감  (0) 2010.08.16
인간답게 살고 싶다  (0) 2010.07.29
명석한 사람들의 어리석음  (0) 2010.07.29
행복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  (0) 2010.07.29
Posted by 일호 김태경
,

 임시총회갔다온후 밤을 꼬박 새워서 2800자 에세이를 마쳤습니다. 이로써 실질적인 방학에 돌입했습니다. 졸업할때까지는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에 클리닉에 나가야 하지만,  그래도 시험과 숙제의 압박이 없는 홀가분한 마음은 실로 하늘을 나는 것 같습니다.

 방학을 하고보니 무엇보다 '인간답게 살고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학기중에는 내내 머리 한 구석에 박혀있는 숙제, 시험때문에 아이들이 놀아달라고 해도 전적으로 놀아주지 못하고, 또 집안일이며 밥 해먹는 거하며 이런 저런 일들 모두 항상 뒷전이었습니다.

 오늘은 인간답게 사는 첫 날.

제가 한 일은 집안 청소. 장도 보고, 둘째 아이 응가한 것도 씻겨줬습니다. 책꽂이와 책상정리도 마쳤습니다. 깨끗해진 책상을 보니 정말 인간답게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녁밥도 인간답게 먹으려고 사시미용 연어를 사서 초밥을 만들어 봤습니다. 주먹밥크기로 초밥을 만들어서 그 위에 와사비와 쌔먼 조각을 올려놓았더니, 맛이 완전 맹탕입니다. 대식가는 미식가가 될 수가 없습니다. 인간답게 먹었다는 것에 만족해야했습니다.

 밥먹고 나서는 인간답게 살려고 제가 저한테 침을 놓았습니다. 마우스클릭질 때문에 오른팔이 아팠는데, 학기중이라 방치해놓았던 참입니다. 침을 놓고서 맘편히 월드컵 경기를 보고 있자니, 이게 바로 인간답게 사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하루 종일 '오늘부터 인간답게 살아야겠다'고 떠들었더니, 큰 아이가 한다는 말이, '아빠가 인간을 사러 간다'고 합니다.

인간답게 산다는 말이 어디에서 나왔더라? 아~ 노래가사였습니다. 앞의 가사는 전혀 기억이 나질 않고, 중간부터 기억납니다.

 ~~~~   인간답게 살고 싶다.  아아~ 민주노조 우리의 희망'

 이 노래가 아닐까..........인간답게 사는 첫날 생각난 노래였습니다.

 
2010. 6. 22

'소선재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종교유감 과학유감 사람유감  (0) 2010.08.16
소리에 관한 몇가지 이야기  (0) 2010.08.15
명석한 사람들의 어리석음  (0) 2010.07.29
행복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  (0) 2010.07.29
결혼이라는 제도  (0) 2010.07.29
Posted by 일호 김태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