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뇌에 대하여

소선재에서 2010. 10. 17. 22:33

무뇌에 대하여

 

김뭐시기라고, 엠비씨에 아나운서인지 기자인지 하는 분이 있는데요, 그 분이 트위터를 하는데, 누가 '무뇌'라고 했답니다. 이 분은 법적대응을 강구한다고 하던데요. 제가 보기엔 그 분 무뇌맞던데, 아버지를 아버지라 하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하지 못하면....이러다가 전국민이 가출하는 게 아닐까....

 

제가 사는 꼴을 돌아 보면, 밥먹고 응가하고 왔다갔다하고 애들 보고, 별로 금수와 다를 게 없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인간이 금수와 다른 점이 조금이라도 있다 하면, 그건 '성찰'하는게 아니겠습니까?

 

누가 저한테 '무뇌'라고 한다면 기분좋은 소리는 아니지요. 그렇다고 무슨 명예훼손이나 법적대응을 강구할 건 아닌데요. 우선은 그럴 돈도 없고요. 그리고, 뭣보다 저를 '무뇌'로 보는 건 그 사람 자유니까요. 그 사람은 나를 무뇌아로 볼 수도 있는 거지요. 그렇다고 내가 무뇌아냐면 그건 또 아닌거구요. 그 사람 기준이 내 기준이 되란 법은 없으니까요.

 

그 분은그 무뇌아라는 지적에 심히 열받았나 본데, 그건 본인도 무뇌아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 그 있잖습니까? 자신이 약점으로 생각되는 부분을 찔리면 그게 참 비수가 되잖아요. 제일 감추고 싶은데 그걸 들켜버렸으니. 그러니, 본인도 본인이 무뇌라는 사실을 알고 또 그런 자신이 싫었을 겁니다. 그러니 법적대응 운운했겠지요. 그런데, 만약에, 본인이 무뇌아라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다면 반응이 좀 달랐을 것 같습니다.

 

'그러게요, 제가 무뇌아일수도 있겠지요. 한번 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는 앞으로 더 발전하는 계기로 삼겠습니다'

 

이렇게 나온다면 무뇌아로 공격한 사람이 깨깽하는 건데요. 그러고보면 문제는 무뇌냐 아니냐가 아니라, 무뇌임을 받아들이냐 아니냐인 것 같네요.

 

여기까지 쓰고 나서, 제 경우를 또 한참 생각해보았습니다.

 

누가 나를 두고 비방을 했다. 좀 열받기는 하는데, 뭐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네요. 그 사람이 나를 씹고 다녀도 어쩔 수 없고요. 그렇다고 그 사람 입맛대로 내가 살아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 사람이 나때문에 열받았다면 내게 그런 구석이 있어서 그랬을 거고요, 안 그럴 수 있는 일이면 다음부터는 안 그러면 되는 거고, 잘 안 되면 또 잘 안 되는대로 살아야지 워쩌겄습니까? 그러니, 김XX씨 너무 열받지 마소. 무뇌여도 당신 이미 잘 살고 있으니까.

 

저작권고지: 김XX의 무뇌에 대해서는 아내의 지도가 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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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 옮겨놓은 글(사과나무 이야기)에 대한 어느 과학신봉자의 반응을 보고 항생제에 대한 글을 썼다. 이 과학신봉자의 댓글은 이것(파란 글씨).

사과나무의 병이라면 박테리아나 바이러스에 의해서 생기겠지요. 충이라면 사과를 먹고 사는 벌레일테구요. 사과의 입장에서는 박테리아, 바이러스, 벌레가 모두 비슷할겁니다. 박테리아, 바이러스, 벌레가 모두 자연의 일부로 사과에 의존해서 사는 점에서 말입니다. 농약을 안쓰면 박테리아, 바이러스, 벌레도 함께 튼튼해지지 않을까요? 적어도 사과를 맛있게 먹을 정도로는 튼튼해지지 않을까 싶은데..

여기에 대한 나의 댓글은,

이 글의 논리대로라면,
농약을 안 써야 박테리아, 바이러스, 벌레가 약해지지요.
농약을 쓰면 박테리아, 바이러스, 벌레가 강해지고요.


그리고, 답답한 마음에 항생제에 대한 글을 썼다.

밑의 글은 그 다음 이야기.



1.
펌글의 제목이 '수행없이 깨달음은 자랄 수 없다'입니다. 저 역시 이런 생각으로 30대를 보냈습니다. 제게는 '수행없이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가 보다 더 정확하겠습니다만.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수행자라는 아이덴티티를 굉장히 자랑스러워했고 뿌듯해했습니다. 한마디로 제가 잘났다고 살았지요. 

지금은, '수행의 목적은 수행이 필요없다는 것을 알기 위함에 있다' 라고 생각합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더 이상 수행이 필요없는 단계 내지는 그런 상태인데, 그렇다면 수행의 목적은 수행이 불필요한 상태가 되기 위한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수행의 존재의의가 사라집니다. 수행이 불필요한 상태가 되기 위해서 수행을 해야한다니, 그렇다면 수행할 필요가 없는 상태가 되기 위해서 꼭 수행을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제가 수행자라는 아이덴티티를 벗어던진 이유입니다. 사실, 저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고요, 여러 사람들, 소위, 깨달았다는 사람들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2.
깨달음과 수행이라는 말은 사람들마다 다 다른 관념을 가지고 있을 터이니, 저의 해석은 그냥 저의 해석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일본의 사과나무 얘기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 봤지? 뭐든지 자연스러운게 좋은거야, 쓸데없이 인간이 개입해봤자 좋을 게 없다고
- 환경주의자, 자연보호론자, 게으름뱅이들 

# 봤지? 강해져야 살아남는 거야, 힘든 환경속에서 사과나무가 더 튼튼해지는 걸 보라고
 - 경쟁주의자들. 적자생존론자, 싸움꾼

# 농약없이 키운 사과 봤어? 남들과는 뭐가 달라도 달라야 해. 그래야 돈이 되지.
 -  시장주의자, 욕심꾸러기들

# 태풍을 이겨낸 사과나무 봤어? 고난과 역경, 시련이야말로 사람을 더 키우는 자양분이야.
 - 심각한 사람들, 매조키스트

# 지금이야 괜찮다 해도, 지난 10년간 왜 그 고생을 사서 하나? 그냥 남들하는만큼만 하면 됐지.
 - 대세추종자들, 겁장이들.

 # 저런다고 안 될걸. 병충해가 한번 돌면 순식간에 망할텐데.
- 과학신봉자, 소심한 사람들 

# 무농약이라니 몸에 좋겠네. 이거 먹고 오래살아야겠다.
- 정력추종자, 건강허약자, 단세포, 무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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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씨는 기름진 땅에 떨어져야 한다. 기름진 땅에 떨어져야 씨는 잘 자라날 수가 있다. 얼마 전 TV에서 '농약 한 방울, 비료 한 주먹' 없이 사과를 키우는 일본의 기무라 아키노리라는 농부에 대해 방영을 했다. 그는 농약 알레르기 때문에 고생하는 아내를 위해 농약을 쓰지 않고 사과를 재배해 보자는 결심을 했다. 그의 결심을 듣고 주변 이웃들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그를 '아오모리의 돈키호테'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10년이나 노력했지만 사과는 한 개도 열리지 않았다. 농약과 비료에 길든 사과나무의 야성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수입이 없어서 밑바닥 생활을 했고 생계를 위해 나이트클럽 호객꾼으로 나서기도 했다. 폭력배에게 맞아 치아가 두세 개만 남고 모두 빠졌다. 목숨을 끊을 생각으로 산에 올랐다.

산에서 우연히 탐스러운 열매를 맺는 도토리를 보았고 섬광 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비밀은 흙에 있었다. 그 이후 그는 과수원에 잡초도 뽑지 않고 관리도 하지 않으며 방치해 두었다. 흙이 본래의 생명력을 회복할 때까지 기다렸다. 비료나 농약을 수십 년간 뿌려 왔던 땅은 딱딱해져서 잡초조차 뿌리를 내릴 수 없다.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면 흙도 기름지게 된다. 

무농약 자연 농법을 시작한 지 10년만에 결국 탁구공만한 사과 두 개를 얻게 되었고 다시 4년 후에 많은 사과들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의 농법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아오모리현에 상륙한 태풍 때문이었다. 주변 과수원의 90%의 사과가 떨어졌지만 기무라의 사과는 80%가 멀쩡했다. 아무도 모르는 새에 사과나무가 땅속 20m까지 뿌리를 내렸고 가지와 나무가 굵고 단단했기 때문이다. 그의 사과는 병충해에 강해졌고 스스로 치유하는 자연 치유력도 생기게 되었으며 썩지도 않았다. 단지 수분이 증발하며 자연스럽게 자연으로 돌아갔다. 사과의 맛과 질이 화학 농법을 하는 사과들보다 훨씬 좋아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문제는 토양이다. 깨달음의 씨가 자라기 위해서는 토양의 질이 좋고 풍성해야 한다. 그대에게 깨달음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 깨달음이 무럭무럭 자라나기 위해서는 '그대'라는 토양이 깨달음이 자랄 수 있을 만큼 풍성해야 한다. 그대의 내면의 밭은 화약 비료나 농약 같은 유해 성분에 길들어져 있다. 그대 자신을 돌아보라. 그대는 무엇에 의존하여 살아 왔는가? 그대가 의존해서 살아왔던 모든 것들이 바로 그대 자신을 말해 준다. 그대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수많은 것들에 의존하고 집착해서 살아간다.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그대에게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준다는 마약을 팔고 있다. 아니면 화폐 가치를 보장해 줄 수 있는 다른 사회적인 능력이나 명예, 성적인 매력도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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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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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대학을 4년다니고, 여기서는 대학교를 4년째 다니고 있습니다. 마지막 학기인데, 지난 시간보다 더 힘들게 느껴집니다. 이제 거의 끝났다는 생각이 들다보니, 전부다 꼴도 보기 싫고 지긋지긋하다는 생각만 듭니다. 이러다가 정말 마지막 학기에서 낙제를 하지나 않을까 싶습니다.

 얼마전부터 여기서 경험한 대학교육을 한번 정리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호주의 대학교를 서구사회의 대학교의 전형으로 간주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서구문화에 속하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1. 실용주의적인 학풍
미국의 대학교 학제와 다르다고 들었습니다. 영국의 학제와 같다고 하는데요. 처음 1학년 1학기를 시작할때, Lecture 와 Tutorial로 나뉘어 있는 것이 아주 특이하게 느껴졌습니다. 교과과정은 실습을 중시합니다. 현장 경험을 중시하는 분위기는 실용적인 학풍이 반영된 듯 합니다. 실습을 중시하는 건 확실히 유용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머리속으로 달달 외우고 있어도 직접 손으로 한번 해 보는 것과는 차이가 크니까요.

하지만, 이것도 단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토론이 권장되는 분위기이기는 한데, 학생들이 뭘 알아야 토론을 하지요. 예습 복습을 하던 아니면 기초지식이 있던, 일단 뭘 조금은 알고 나서 말을 해도 해야 하는데, 아는 것도 든게 없는 학생들을 놓고 토론식으로 수업을 하니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2. 자율적인 학풍
좋게 말하면, 창의적이고 자율적인 학풍이지만, 실재로는 알아서 하라는 겁니다. 가르쳐주는 건 별로 없는데, 알아서 해야하는 건 많습니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교수가 알려주는 건 참고도서목록뿐입니다. 학생들이 알아서 에세이도 써야하고 발표도 준비해야하고 시험도 보고 해야합니다. 근데, 뭘 알아야 하지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 들때가 많습니다.

3. 다면적인 평가
시험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작고, 여러가지 과제나 발표등의 평가항목도 큽니다. 나쁘다고는 할 수 없는데, 저같이 시험에 익숙한 사람은 그냥 벼락치기해서 시험보는게 더 편하니 이것도 꽤나 힘들었습니다. 저같이 끄적거리는 거 좋아하는 사람도 짜증나는데, 다른 학생들도 꽤나 스트레스받는 것 같습니다.

4. 과학과 기독교 기반의 교육
제가 공부하는 분야가 Faculty of Science에 속합니다만, 이건 호주로 보자면 외래학문이라, 사실은 과학에 들어가는 학문이 아닙니다. 한국에서도 제가 공부하는 분야를 '미신'으로 보는 사람이 아주 아주 많지요. 그런데, 제가 놀랐던 건, 호주에서 이 분야를 공부하고 연구하고 가르치고 하는 것이 많은 부분 Science화 시켜서 접근을 하더군요.  그러니까, 서구문화에서는 이 분야의 학문을 들여올때 나름대로 자신들의 인식틀에서 재해석하는 과정을 거친다는 겁니다. 서로 다른 두 문화의 접촉과 변화라는 과정에서 이해할 수도 있고요. 꼭 문화적인 접근이 아니더라도, 사람이 한번 인식의 틀이 형성된 다음에는 새로운 대상을 해석할때 기존의 해석틀을 작동시킬 수 밖에 없다 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스스로 저를 생각할때, 매우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런 문화적인 차이를 접할때면 아주 짜증이 많이 났습니다. 지금도 더하면 더하지 결코 덜하지 않고요.

예를 들어, '건조하다'라는 진술을 놓고 보자면, 동양쪽의 어떤 텍스트를 보아도, 이것에 대한 정의가 없습니다. 건조한 건 건조한 것이니까요. 그런데, 이쪽에서는 이에 대한 오퍼레이셔널 데퍼니션 Operational definition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 개념에 대한 소위 객관적인 합의가  없으면 그 다음얘기를 할 수 없는 것이거든요.

하지만, 동양에서는 이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건조하다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인식하에서 논지의 전개가 이어집니다. 이것이 건조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합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건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건조하다'에 이어서 전개되는 논지는 매우 매우 합리적이고 논리적입니다. 동양에서는 단지 '건조하다'에 대한 소위 객관적인 정의가 부재할 뿐입니다.

'묽다'라는 것도, 실험실의 데이터분석결과를 놓고, 정해진 수치를 넘느냐 안 넘느냐로 결정합니다. 동양에서는 그렇지가 않지요. 흐리고 묽으면 묽은 거고, 두껍고 진하면 진한거고요. 제가 보기에는 하등 쓸데없는 '건조하다'에 대한 operational definition에 목매달고 있는 걸 보면 정말 짜증이 안날래야 안 날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바탕에 깔려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강의에 들어오는 Lecturer들은 나름대로 박사학위도 받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 인간들인데, 그들 말에 깔려있는 일직선의 역사관, 유일신관, 성취지향적인 세계관들을 보면 정말 기독교가 모든 문화의 기저에 자리잡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낍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호주의 대학교에서 학교를 다니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합니다만, 정말 누구말대로 성질뼏쳐서 못 다니겠다는 생각이 한 두번이 아닙니다.

5. 참고- 동양의 재래식 교육
한림대학교 부설 태동고전연구소라는 곳이 있습니다. 별칭으로 지곡서당이라고 불립니다. 청명 임창순선생이 만든 것이지요. 이곳에 들어가면 1학년때 사서를 그냥 외웁니다. 말하기를 논어를 강한다고 합니다. 그냥 무식하게 외우는 것이지요. 무슨 봉건적인 교육방식이냐 하겠지만, 알고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박노자도 말한 바와 같이, 인문학이나 언어는 무작정 외우는 것도 좋은 교육방법입니다.

영어를 잘 하고 싶은 사람들은 소설 책 한권 무작정 외워보세요. 사실은 영어가 어려운게 아니라, 영어소설책 한권 외우는게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외우는 것은 외우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자양분이 되어서 줄기가 되고 꽃을 피우지요. 청출어람청어람이 됩니다. 민족주의자들이 전통을 고수하는 것도 우습기 짝이 없습니다만, 근대주의자들이 전통을 무시하는 것도 결코 덜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학교다니기가 싫어서 더욱 더 안 좋게만 생각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호주의 대학교 짜증 이빠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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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호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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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다시피 한국의 문화에서는 이름의 직접적인 사용이 매우 꺼려집니다. 대신 사회적관계를 나타내는 호칭이 주로 사용됩니다. 우선 두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이름 그 자체에 대한 터부가 그것이고 둘째는 개인의 정체성이 집단내의 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집단주의 문화의 특성이 그것일 것입니다. '자'나 '호'같이 이름대신 쓰여지는 호칭이 사라진 현대에서는, 더욱이 사회적인 직책이나 또는 가족간에 쓰여지는 호칭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사회적인 타이틀을 호칭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좋게 보지는 않습니다. 그것에 동반된 권위주의나 허영심같은 것들이 탐탁치않기 때문입니다. 박사님, 교수님, 피디님, 기자님, 변호사님, 원장님 등등이 그것입니다. 제 생각엔 이름뒤에 '씨'자나 '님'자를 붙여서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호칭을 하는 것이 평등한 인간관계라는 측면에서는 바람직하다고 생각됩니다만, 저 혼자만의 생각일 뿐입니다. 사회속에서 살고 있는 저로서는 저 혼자 내키는대로 남을 부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름뒤에 '씨'자를 붙여서 호칭하는 것은 지금 이 시점에서는 하대의 의미가 강합니다. 거의 '해라'체와 같이 쓰여지는 느낌입니다. 그러니 싸우자고 하는 때가 아닌 다음에야 함부로 연장자에게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름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이미 '하대'하는 의미가 크니까요. 그렇다면 연장자 우대문화가 강한 한국의 문화에서 연소자는 연장자에게 어떤 호칭을 써야할까요? 김규항은 '선생님'이라는 말을 대답으로 내놓았습니다. 선생님에는 먼저 태어난 이라는 뜻이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항상 나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저 역시 적절한 호칭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소한 사회적 직책이나 신분을 표시하는 호칭보다는 덜 구역질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지낼때 누가 먼저 태어났냐를 두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을 보고 한심한 인간들이라고 비웃었습니다. 통성명하고 바로 나이따져서 형님 동생하는 것 역시 이질적이기만 했습니다. 이곳에 와서보니 저보다 20년이 지난 후에 태어난 한국계 2세들도 생년을 기준으로 나이를 따져서 형,동생,언니,오빠 하고 있더군요. 제가 어디가서 바로 '형님'하고 부르거나, 또 '동생'하면서 하대하지는 못해도 (저는 스무살이 안 된 배준군같은 경우에도 반말이 잘 안나옵니다), 학교에서 만난 한국계 사람이 저보고 형님하면 저는 '네'하고 대답합니다.

'영수엄마라는 호칭이 아닌 나의 이름을 돌려다오' 말이야 맞는 말입니다만, 이름을 꺼리는 한국사회에서 과연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지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전태민님께서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사모님이라는 호칭이, 원장님이라는 호칭이 무거운 갑옷마냥 거북하게 느끼시는 것 같습니다. 최소한 구역질나는 권위주의나 허영심은 아닌 듯하여 반가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상대의 호칭을 무시하는 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호칭이 듣기에 거북하시다고, 그것이 무시로 이어져서는 소통을 거부하는 것 밖에는 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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